청기면 청기리靑杞里 유래
동쪽으로는 영양읍으로 들어 가는 큰골이 있으며 동북쪽은 함박산(咸朴山)이 우뚝 솟아있다. 서북쪽은 장갈령재가 예안과 경계하고 있으며 남쪽은 일월산에서 흘러 내리는 냇물의 원줄기가 흘러 청기 앞으로 흐르며 화봉(火峰)이 횃불처럼 솟아 있으며 북쪽은 사인대산(士人臺山)이 솟아 있다. 사방으로 산에 둘러 싸여 있으므로 천옥(天獄)이라고도 부른다.마을 앞에는 천일봉(天一峰)이 촛대같이 솟아 있으며 일자봉(日字峰)에는 신라때의 절타가 남아있다. 본래 청기현의 소재지였는데 조선조 숙종 원년(1675)에 이르러 영양현에 들면서 서초면이 된다. 뒤에 청초면(靑初面)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때에 장평동의 일부를 합하여서 청기라 하여 청기면에 들게 했다. 청기면의 중심지로서 면사무소와 지서, 그리고 청일초등학교가 있고 농협과 우체국ㆍ보건지소가 있다.
[마을의 특징]
예로부터 영양에서는 일청기(日靑杞)라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곧 영양에서 청기가 제일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청계정(靑溪亭)과 돈간재(敦艮齋)그리고 대명동바위와 화봉(火峰)ㆍ취수정(醉睡亭)과 사인대(士人臺)를 들 수 있으며 전설로는 그 금성산의 내력과 정랑국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계정은 우재(愚齋) 오익(吳瀷) 선생이 세운 정자각이다 정자 앞 연못에는 향나무가 다소곳이 서 있다. 지방문화재 제170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는데 자연석 위에다 정자각을 지었으며 정면 세 칸의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돈간재는 조선 선조때 청계공 김진 선생을 추모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표은(瓢隱)김시온(金是온)선생의 서재이기도 하다 한편 청기파출소 정문앞에 있는 바위를 대명동(大明洞)바위라고 하는데 인조 무렵의 학자 오연(吳演)선생이 명나라가 청나라에 항복함을 분하게 여겨서 바위에다 대명동 석자를 새겨 놓았다고 한다. 화봉(火峰)은 필봉 위에 있는 산으로서 산의 모양이 불꽃의 형상이라고 하여 해마다 정월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항아리에 소금을 넣어서 묻는다고 한다. 취수정이라 함은 조핏골 북쪽에 있는 정자각인데 인조떄 학자인 오연 선생이 세운 것이다 그는 우재(愚齋)선생과는 형제간이다 김시온 선생이 난을 피하여 처음으로 청기에 들어 왔을 때 오익선생ㆍ정석문(鄭石門)선생ㆍ이석계(李石溪)선생과 교유하면서 교육과 학문을 힘썼다.금성산(金城山)의 금성이라 함은 그 곳의 돌을 깨면 모두가 황금빛이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해 오기로는 신라말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함을 분하게 여겨서 삼베바지 차림으로 금강산에 들어갔는데 이 떄 태자를 따르던 어린 동남동녀(童男童女) 70여명이 청기리 금성산에 들어와서 금성을 쌓고 산을 일구어 살았다고 한다.아울러 정랑국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낙랑 시대로 추정되는 바 청기리 남산아래 정랑국(正郞國)이란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마을에서는 정랑궉이라고 부르는데 정랑국이 바른 적기라고본다(향토사연구회 자료 참조) 그러나 아직까지 역사적인 고증이 뒷받침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인대(士人臺)는 조핏골 북쪽에 있는 대(臺)이다. 조선조 선조때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선생이 사인(舍人) 벼슬을 그만두고 부모를 보러 청기리에 와 여기서 부모를 위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서슬 퍼런 일제 치하에서 군내 서당의 학동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던 중 기미년에 독립만세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시련을 겪은 인암(忍菴)오윤승(吳胤承) 선생의 활동 근거지가 바로 청기리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건너마ㆍ월촌(越村)
마을 앞에 강이 흐르고 강건너에 마을이 있다. 동북간으로는 갓등산(冠嶝山)이 솟아 있으며 동쪽에 큰골이 있다. 함박산과 왕재등이 영양과의 경계를 이룬다. 앞내를 건너야 마을이 있다하여 건너마라고 마을 이름을 지어서 불렀다. 땅은 메마른 편이고 산비탈에 밭이 많다. 기후와 지역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고추가 잘 되는 편이다.(이교일(56) 제보) 건너마를 한자로 뒤쳐서 월촌이라고 하였으니 한자의 뜻을 빌려다가 적은 것이다.
*군막구(軍幕丘)
취수당 앞 개울 건너에 있는 언덕을 이르는데 지금은 밭으로 쓰이고 있다.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요동반도에 대한 북벌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 마을에는 국력 배양을 위한군사조직을 기르고 있었다. 비밀군사를 일으킬 때 취수당(醉睡堂) 오연(吳演)선생이 표은 김시온 선생과 함께 창석 이준ㆍ석계 이시명ㆍ석문 정영방ㆍ우재 오익 선생의 도움으로 취수당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육도삼략』과 같은 병서를 강론하였다. 아울러 말타고 활쏘며 칼을 쓰는 법을 익히게 하였다.이 때 이 언덕에다 훈련병 막사를 짓고 말을 먹일 마구간을 지었으므로 지어진 이름이라고한다(오원술(62) 제보)
*정자마을ㆍ정자촌(亭子村)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정자가 있었고 정자 앞에는 서당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강 건너 두들 마을에 줄을 연결하여 손님이 오면 줄을 당겨 요령을 울려 알리기도 하였고 편지를 그 줄에 매달아 전달하기도 하였다.(김두칠(79)제보)
*조핏골ㆍ초동(椒洞)
마을이 있는 뒷산에 옛날부터 조피나무가 우거져 있다 특히 서쪽에 찬물나는 골이 있는데 한여름에도 얼음같이 찬 샘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조피나무를 베어 집을 지어 살아왔다. 이 마을의 명칭은 조피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조핏골이라 불러져 오며 고추와 담배가 유명하다(구성회(48) 제보)
*진들ㆍ장평(長坪)
영양쪽으로 가는 길목에 마늘골이 있으며 앞쪽으로는 줏박재산이 솟아 있다. 이 마을의 앞들이 내를 중심으로 좁으면서도 길게 뻗어 있다하여 긴들 혹은 진들이라 불리어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청기2동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임후규(46) 제보) 장평은 진들을 한자의 뜻을 빌려 적은 것으로서 굳어진 이름이다. 길다의 길-진으로 걸림을 둘 수 있는 바 구개음화에 따라서 바뀐 것이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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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말캉 역사 알고 가시더/창태95, 204) 청기면(靑杞面)이 궁금니껴?
※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쌔밴는, 근바, 게락, 또갈래(따개), 바까, 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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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때의 청기면(靑杞面)은
당리가 중심지 마실이었꼬.
청둥오리가 쌔밴는 지역이라꼬 케서
청부(靑鳧)라꼬 켔니더.
고려시대 초(初)에 와 가꼬는
영해신씨(寧海辛氏)의 한 선비가
지금의 소재지(청기1리)에 정착한 뒤에
근바에, 푸른 구기자인 청기(靑杞)가
게락나 지명을 청기(靑杞)라꼬 카기도 했꼬
석문(石門)선생 문집에 보면
대청부곡캉 소청부곡의 "청(靑)"짜캉
버드나무가 쌔배따꼬
버드나무 "기(杞)"짜를 쓰가
청기(靑杞)라꼬 켔다 카기도 하니더.
그후, 청기면(靑杞面)는
대청부곡(大靑部曲 / 지금의 당리 중심)캉
소청부곡(小靑部曲 / 지금의 상청리 중심)으로
또갈래(따개) 지게 됬니더
이때, 대청부곡(大靑部曲)의
중심지(소재지)는 당동(당리)였꼬
당리, 행화, 기포, 사리, 토구,
정족, 청기1리 등을 관할 했니더.
글코, 소청부곡(小靑部曲)의
중심지(소재지)는 상청이었꼬
관할 지역은 상청, 구매, 저리, 토곡,
장평(청기2리)등 이었니더.
그뒤, 고려시대 충렬왕때 와가꼬는
상청(상청은 영양현에 속함) 근바를
뺀 청기면(靑杞面) 전첼보고
청기현(靑杞縣) 혹은 청계(靑溪)라 카게 된니더.
조선시대(숙종 1675년) 와가꼬는
대청부곡(大靑部曲)이
지금의 당리 중심인 서초면(西初面)캉
지금의 정족2리 중심인 서이면(西二面)으로
또갈래 지게 된니더.
이때 솥발이(지금의 정족2리)가
서이면(西二面) 중심지가 된니더.
그 뒤 고종 1895년에
서초는 청초(靑初), 서이는 청이(靑二)로
이름을 바까 부르게 됬따가
1914년에 와가꼬 청초와 청이,
그리고 상청 근바(저리, 상청, 구매 등)를
엄체가 오늘날의 청기면(靑杞面)이
맹글어 지게 된니더.
이 때(1914년) 청기면(靑杞面) 중심지가
청기1리 현재 소재지로 옮가지게 됬니더.
글코, 상청은 신라때 부터 고려때까지
영양현(英陽縣)에 속한
소청부곡(小靑部曲) 중심지였니더.
소청(小靑)은 신라때부터
소청현(小靑縣)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고
고려 충열왕 이후부턴 청초면(靑初面)
관할에 들어가게 된니더.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는
소청, 소상, 장평(청기2리) 일부를 엄치고
소상(지금의 상청2리 신당)캉
소청(지금의 상청1리)의 이름을 따가꼬,
상청이라 카면서 청기면에 속하게 됬니더.
그리고 소청(小靑)은
지금의 상청(上靑)캉 그 아랫마실(저리)을
엄체서 부르는 지역 이름이시더.
그케가 현재의 청기면(靑杞面)은
법정리 13개, 행정리 18개로
맹글어져 있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