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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해전 공원 개관... 원균 제조명
칠천량 해전 공원 개관... 원균 제조명
-공원명 : 칠천량 해전 공원
-위치 :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85-4번지
-시설규모 : 부지면적 7,615㎡, (건축면적 913㎡)
-주요시설 : 전시물/영상물 (아이라이너 형식, 20분 상영), 야외조형물
-총사업비 : 85억1천백만원
-찾아가기 : 하청-칠천도연육교-좌회전 1km- 옥계마을-칠천량해전공원
임란은 1592년4월 발발하여 1598년 11월19일 종전을 맞았다. 거제도는 일본과 인접한지라 500여 차례 침략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거제도는 가장 많은 성(城)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임란 전후로 하여 많이 축성되었다. 임란 시 육군은 연전연패하여 1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었으나 해상은 달랐다.
첫 해상 전투는 옥포해전이다.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해상 연합함대다. 그럼 경상좌수사는 왜 참여하지 않았는가. 1593년 4월13일 전쟁이 발발하여 수많은 군사가 몰려오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군함73척을 자침(自沈)시키고 병력 1만여명을 해산시키고 언양으로 도주했다. 수영성은 왜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점령했다. 그래서 경상좌수사는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수군은 91척의 군함으로 옥포만에 포진하고 있던 왜선 31척 중 26척을 격침시키고 수 많은 왜군을 참살시켰다. 그 후 5월7일 합포 5월8일 적진포에서 승리하니 이를 옥포해전이라 한다. 이를 계기로 조선수군 뿐 만 아니라 육군에게도 영향을 미쳐 수많은 의병들이 일어나고 병사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임란 시 가장 중요한 전투가 옥포해전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후하여 조정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순신이 하옥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 당시 왜군은 일본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남해안 곳곳에 진을 치고 제2차 전쟁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조선수군은 새로운 전쟁에 대비를 소홀히 하였다. 왜군은 안골포 가덕도 거제도 등지에 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했다. 조정에서는 부산에 진입한 왜군을 무찌르라고 이순신과 원균에게 다구치지만 주변 여건은 불리했다. 그런대도 조정과 권율은 전투에 참여 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전쟁에서 도저히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히 알면서도 조정에 반대 할 수 없어 죽음을 각오하고 부산으로 진격한다. 누가 지휘를 해도 이기지 못하는 전쟁이었다. 물론 이순신이 지휘를 하였다면 피해가 줄었을지 언정 전쟁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고 있는 지식은 원균이 무능하고 장수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며 전쟁 중 술만 먹고 잣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지식이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원균은 이순신만큼 전략가는 아닐지라도 용감한 장군임을 사료에 나와 있다.
우리들은 칠천량 해전기념관을 관람하면서 정확한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순신은 고도의 전략전술가로 임금이 독촉해도 불리한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23전 23승을 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비해 전형적인 무인 원균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전쟁에 임하는 삼국지의 장비와 같은 인물이다. 지략은 이순신에게 떨어질지 몰라도 용기는 이순신보다 높았을 것이다.
칠천량 전투는 어떻게 일어났으며, 전투상황은 어떠했고 결과는 어떠했는지???
단순히 전쟁에 패한 원균만 탓할 것이 아니라 ‘너를 알고 나를 알면 모두 승리 할 수 있다’ 는 교훈을 되 싶어 보아야 할 것이다. 전시된 내용이 원균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는 내용 보다는 이순신에 대한 내용이 많아 그 본질이 빗나간 느낌을 주었다. 아래 내용을 보면 원균이 그렇게 무지한 장군이 아니라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결론을 갖게 된다. 그리고 칠천량 전투 중 한산도로 전선12척을 이끌고 도망간 배설이 영웅인지 역적인지 한번 다시 생각해 봄직도 하다. 그리고 권율장군과 조정의 선택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자
조선시대 내내 노론소론 동인서인 남인북인 하면서 정쟁이 휘말려 국토는 만신장이가 되었다. 지금도 여야가 불필요한 정쟁을 계속하면서 진작 백성(시민, 대중)의 민생에는 별관심이 없어보인다. 제발 중용(中庸)의 도(道)ㄹ르 발휘하여 찬란한 조국건설과 삶의 질을 높이는데 힘써주실 것을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명장인가 패장인가?
임진왜란 연혁
1592.4.13 |
임진왜란 발발 |
전선1,000여척과 167,700여명 |
1592.5.7 |
옥포해전 |
아군91척 왜선31척 중 26척 격침 |
1593~1957 |
휴전 |
왜와 명나라 화의 |
1597. 1.15 |
정유재란 |
전선 600여척과 장병 14만여명 |
칠천량해전 (1597.6.18.~7.16) | ||
1597.6.18.~19 |
제1차 해전 |
아군100여척 왜군 600여척 |
1597.7.~8 |
제2차해전 |
다데포 절영도해전, 아군26척격침당함. 원균 곤양에서 권율에게 곤장당함 |
1597.7.11 |
제3차해전 |
가덕도 절영도 해전. 가덕도에서 물구하다 400여명 장병 손실 |
1597.715~16 |
제4차해전 |
7월15일 칠천도 정박중이던 조선수군 기습하여 병선4척 격침시키자 혼비백산, 아군 100여척과 왜군600여척. 원균,이억기,우치적,최호,배홍립 전사 |
1597.9.16 |
명량해전 |
아군13척, 왜군330척 중. 31척 격침 |
1598.11.19 |
노량해전 |
아군500여척,왜군500여척, 왜군 200여척 격침. 이순신 전사 |
< 임진왜란 패전의 전말>
이순신 투옥 |
1597.1.27 |
이순신은 여러 가지 죄명으로 투옥됨. 4월1일 풀려나 권율휘하에서 백의종군함. |
정유재란 |
1597.1.15 |
전선 600여척과 장병 14만여명 동원하여 2차 침공 |
원균부임 |
1597.2 |
이순신이 파직되자 충청부사로 있던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다. |
원균장계 |
1597.6.3 |
웅천 차원 지역에 왜군이 있으므로 수륙양면 작전을 펴야함. |
장계묵살 |
1597.3.29 |
작전계획 상신. 가덕포 안골포 부산 주변에 왜 육군이 수만명 있으므로 우리 군 30만명 동원하여 궤멸해야함. 도원수 권율은 반대하고 수군 단독 해전 독촉 |
원균장계 |
1597.6.11 |
적을 배후에 남겨두고 진격하는 것은 승산이 없다. 수륙병진주장 |
유성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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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에 우리배가 나아가는 것을 왜영에서 보고 서로 상황보고를 하고 있다고 기술 |
배설 |
선조실록 |
경상우수사 배설은 “ 비록 군율에 의해서 내가 홀로 죽음을 당할지 언정 어찌 군졸들을 사지로 끌고 갈것인가.” 배설은 육도삼략[六韜三略] 병법을 알고 있었다. |
조선실록 |
1601.1.17 |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모여서 조정에서 진군을 재촉한다는 말을 듣고 “ 명령을 어기면 우리 세사람이 죽으나, 명령을 따라 진군하면 나라 일에 크게 욕될 것이다.” |
진격독려 |
1592.7.7 |
도제찰사ㅍ이원익이 파견된 남이공의 독촉으로 100여척의 배가 부산으로 진격한다. |
선조실록 |
1597.6.28 |
원균이 제2차 출전 (7.7~8)에 참여하지 않자 남이공이 한산도로 찾아 독촉한다. 결국 제3차 해전부터 원균이 참여한다. |
원균 작전회의 |
칠천량해전 |
원균“ 하늘이 순리를 돕지 아니하니 이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오직 한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싸우다가 나라를 위하여 순국할 뿐이다. 배설“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느니 일시 피하는 것이 옳다.” 원균 “ 오직 나라를 위하여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 |
권율탄핵 |
상소 |
도원수 권율은 군을 통제하라는 명려을 받았으나 마땅한 계책도 세우지 않고 수군을 몰아세워 전멸하도록 하였으며, 그 많은 산성을 하나도 지키지 못해 호남으로 들어오게 되어 백골이 기득하여 임란 시보다 더욱 심하였다....(중략) 청하 옵건데 조경에게 명하시어 잡아와서 국문하시고 법에 의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이 상소는 치열한 전쟁중이였으므로 그 시행이 보류되었다. |
이순신의 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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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죄명 첫째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둘째 적을 쫓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 셋째 남의 공을 가로 채고 남을 모함한 죄 넷째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 |
원균의 공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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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을 통해본 원균의 공적 1592년 4월14일부터 5월7일까지 23일 동안 경상우수영 만으로 방어함. 그 당시 경상우수영은 가배에 있었으며 경상우수영은 원균이 지키고 있었다. 1592년년 5월7일 옥포해전부터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도, 안골포(7월10일)까지의 9번 해전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세장수가 합동하여 전쟁에 임했다. 물론 그 중 총지휘자는 많은 배를 가지고 있던 이순신이 지휘했을 것이다. (원균 7척, 이억기 16척, 이순신68척 총91척 |
원균의 평가 |
선조 실록 (16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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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이 패전한 뒤에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지만 나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 원균의 참으로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원균은 내가 그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으나 임진년 초에 왜란을 당했을 때 이순신과 더불어 협력하여 왜적을 쳤으며 싸움에는 반드시 앞장을 섰으니 용감하게 싸운 것은 알 수 있다.
그가 칠천량 패전한 후에 모두들 다투어 원균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지마는 그 패전은 원균의 책임이 아니며 사실은 조정에서 너무 재촉해서 일어난 탓이다. 그가 올린 장계를 보니 안골포의 왜적이 뱃길을 막고 있어서 마음 놓고 나아갈 수 없으니 육군으로 하여금 먼저 그곳의 적을 몰아낸 다음에야 가아갈수 있다고 하였는데 도원수 권율이 잡아다가 곤장을 치면서 출전을 재촉하였으니 반드시 패전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출전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 어찌 원균이 스스로 패한 것이라 할수 있겠는가?
뒤에 들으니 부산출전을 앞두고 원균 이억기 최호 세 장수가 말하기를 “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안하면 우리 세사람이 죽을 뿐이겠으나 명령에 따라 출전하면 나라를 욕되게 함이 적지 않으리라.” 하였다 하니 그와 같은 말을 한 그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씌운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이 문제는 내가 평소에 매우 마음이 편지 않아서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외부의 공론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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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원균은 역적인가? 명장인가?
원균하면 이순신, 이순신하면 원균이 떠오른다. 원균(1540~1597)은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을과에 급제하여 오랑케를 무질려 승승장구한다. 여기에 비해 이순신은(1545~1598)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늦게 과거(병과)에 급제하여 미관말직에 전전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영의정 유성룡을 등에 업고 원균보다 빨리 승진을 한다. 즉 1591년2월에 전라좌수사로 발령을 받는다. (6단계 승진) 그에 비해 나이도 많고 서열이 높은 원균은 1592년2월에 경상우수사로 승진한다. (3단계 승진) 아마 이때부터 시기가 있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원균이 이순신에 대해 불편한 신경은?
첫째 옥포해전에서부터 안골포 해전까지 이순신 원균 이억기 세장수가 연합함대를 구성했으나 실제 주력함대는 이순신이었으므로 작전권도 이순신이 쥐고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 45척, 이억기는 16척, 원균은 7척 정도였다. 둘째는 옥포해전 시 장계를 이순신 단독으로 올리면서 둘의 사이는 극도로 서원한 관계를 형성되어 갔다. 조정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원균을 1595년12월 충청병마절도사로 그리고 전라좌병사로 전출하였다.
이러던 중 이순신의 비행을 장계를 올려 파직하게 된다. 물론 원균이 직접 관여를 하지 않았으나 원균을 옹호하던 윤두수(좌의정)등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어떠하던 우유곡절 끝에 원균은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다( 1597.2) 그러나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왜군은 600여척의 전함과 14만명의 군인들이 부산포로 진격한다. 물론 그 당시 조선은 왜와 휴전 상태였다. 그러나 왜는 이 기회를 군비확장의 기회를 삼고 남해안 곳곳에 상주하며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선조는 해상전을 잘 모르므로 앞에 여러 번 이순신이 남해안의 적을 무찌렸음으로 이번에도 총공격하라고 닥달을 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여 선조가 두 세차례 독려에도 출전을 하지 않는다. 이를 괘심이 여긴 선조는 이순신을 압송하게 된다. 이순신은 현재 상태의 해군만으로 진군하면 패할 것이니 수육양면작전을 펼 것을 장계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반해 원균은 해군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막상 통제사가 되어 전황을 살펴보니 도저히 조선수군만으로는 승산이 없어 보여 두 세차례 장계를 올린다. 그 당시 경상전라도 작전사령관은 도원수 권율이었다. 권율은 이순신과도 교분이 있었다. 이런 저런 연유로 부산공격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원균은 참여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 당시 말만 원균이 통제사였지, 실제 군사작전권은 권율에게 있었다는 주장도 하는 이가 있다. 어떠하던 그 이유로 원균은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게 된다. 해군사령관인 원균이 합창의장격인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다는 것은 창피스러운 일이다. 정2품인 도원수가 정3품인 통제사를 곤장으로 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칠천량 해전에서 100여척의 전선과 1만여명 (5천~1만여명)전쟁 피해를 입은 것은 안타가운 일이다. 그러나 원균이 죽고 제3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이 배설이 탈주시킨 12척의 배로 300여척의 왜군과 싸워 이긴 명량해전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패장으로 낙인찍힌 원균의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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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都元帥 : 군무총괄장군/한 지역의 병권장악..도원수 권율( 경상,전라 충정지역)
제찰사(提察使) 비상시 군사업무 총괄/ 도제찰사 이종무장군 대마도 침공, 四道제찰사 유성룡
비변사備邊司]: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
장계 狀啓: 예전에,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자기관하의 중요한 일을 임금에게 글로써 보고하는 일이나 그런 문서를 이르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