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생시장, 그 먼 추억
김영애(시인. 수필가. 영주시민신문논설위원)
육십여 년 전의 후생시장을 그려내는 일은 우리사회가 빈곤을 탈피하는 격동의 시기를 그리는 일로 희미한 흑백사진 한 장으로 사료를 정리하는 일처럼 어렵다. 시간이 섞여 전후를 가릴 수 없이 가물거리는 장면이 더 많아 단편적인 장면을 시기적으로 연결하려고 애쓰는 시간에 예처럼 매캐한 고추냄새가 먼저 되살아난다.
-기억, 이 전의 사실
고추시장으로 대변되는 후생(厚生)시장은 6.25전쟁이후 구성마을에서 시작된 시장인데 건립당시 ‘중앙시장’이라고 하다가 주민의 생활이 윤택해 질 때까지 돕는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후생(厚生)시장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942년 중앙선의 개통은 1953년 역세권에 생긴 후생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기가 되었으며 경제적 전성기를 가져다주다가 1973년도에 역사를 휴천동으로 이전하면서 쇠락의 운명도 주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주민들이 영주역이 있던 자리에 ‘중앙시장’을 세우고 다시 부흥을 시도했으나 남쪽으로 향하는 번창기운을 이기지 못한 가운데 2008년에는 고추시장마저 도시의 외곽으로 이전하여 자력으로는 재생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기억 속의 후생시장
아련한 기억 속의 영주역세권이 먼저 떠오른다. 내가 어릴 적 살던 관사골에서 길게 경사진 길을 내려오면 영주역사 대합실이 보였다. 산골 간이역 같은 크기라 광장이랄 것도 없지만 역 광장 끝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길 왼편으로는 지성약국, 영광라사, 고향사진관, 후생약국, 협립 양산, 남창상회 등이 있었고 오른 쪽으로는 학생사, 삼화 상회, 판자로 집을 지은 가판대형식의 개풍상회 등이 떠오른다. 지금의 분수대 자리에는 삼각지로서 시계포 금은방 같은 작은 점포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역에서 여기 까지가 ‘역전통’이라 불리던 번화가로서 틈새로는 오두막집 수준의 점포도 끼어있었고 중국 상인도 더러 있었다. 이곳이 당시 돈의 흐름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국민은행 자리쯤 있던 백설표 아이스케이크 공장은 변두리로 여겼고 아카데미 극장은 아주 먼 지역으로 여겼으니 후생시장주변의 역세권은 참 작은 공간이었다. 남창 상회에서 좌회전 하면 현재 주차장자리에 영주극장이 있었다. 극장은 저녁이 되면 확성기로 ‘안녕하세요. 여기는 영주극장입니다’로 호객행위를 했고 밤이 늦을 때까지 트럼펫 연주곡을 밤하늘로 띄웠었다. 곡목도 모르는 선율이 때로는 호젓하게 때로는 가슴을 파고드는 것처럼 감미로워 기다렸던 기억도 있는데 아마 서양음악을 들어보는 첫 경험인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번화가인 역전통 안쪽으로 후생시장이 있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후생시장을 국제철물과 영일제분소가 마주보는 외통길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은 다인산부인과. 여왕의상실, 가일제분소를 잇는 선 안쪽 지역을 말한다. 양팔을 벌리면 닿을 것만 같은 그 좁은 골목이 어떻게 시장의 구실을 했는지 의아스럽겠지만, 고추전뿐만 아니라 식당도 있었고 여인숙, 술집도 있었다. 동편의 큰 도로에서 보면 시장으로 진입하는 길이 있었고 따라서 시장 안에는 작은 장방형의 골목길이 몇 있었는데 나오는 길이 헷갈리는 미로 같은 길이어서 혼이 났던 어릴 적 기억이 있다.
당시는 판잣집이 흔한 시대였는데 후생시장 상가건물도 판자로 벽면을 처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목조집이라기엔 빈약하고 ‘하꼬방’이라기엔 너무 미안한 건물로서 방한 칸에 점포 한 칸이 딸린 집을 옆으로 연결한 연립 건물이었다. 그 당시의 잣대로도 매우 영세적인 모습이었고 살림집과 매장을 겸해서 그런지 좁은 길에 생활쓰레기가 뒹굴었고 악취의 공동화장실 등 별로 청결하지 못했던 환경으로 기억된다.
후생시장이라 하면 고추전만을 생각하는데 초기에는 잡곡도 취급했다. 골목은 비좁았어도 도매상이 모인 길이라 점포마다 곡물, 고추 도산매 간판을 나직이 걸어두고 멍석 위에 곡물을 수북이 쌓아놓은 광경과 큰 고추부대가 처마에 닿았던 광경이 선하다. 점차 곡물은 채소시장쪽으로 이동했고 후생시장은 고추거래가 많아져서 시장 밖의 도로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후생시장은 상설시장이었으므로 평소에도 북적거렸다. 학용품을 사기위해 길 건너편 학생사에 가야 하는 날은 이 복잡한 길을 피해 먼 길로 돌아가기도 했다. 어쩌다 시장통로를 지날 때면 손으로 코를 막고 지나갔는데 구 경찰서 앞에서도 매운 냄새가 났으니 거래되는 고추의 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될 것이다. 이는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전국각지에서 고추가 몰렸기 때문이었다. 그 때는 고추가 곧 ‘돈’인 시절이었다. 매점매석을 위해 상황을 살피는 내지인 및 외지의 장사꾼에다가 주부들까지 고추사재기를 했다니 늘 붐빌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철암부근의 ‘암면 상인’ 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들은 거리가 멀다보니 숙박시설이 필요했고 그들의 활동영역인 역전통에 여관이나 여인숙이 많이 생겨나는 요인이 되었다. 조흥은행에 석탄가루가 묻은 검은 돈이 날마다 예치된다는 당시의 소문은 철암근처 탄광촌의 돈이 영주로 유입된다는 사실로서 당시 후생시장의 경제적 활황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흥정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고추부대를 높이 실은 트럭이 거리를 메우고 점포마다 덩치 큰 고추자루의 근대를 다는 저울이 서있는 모습, 도로 양쪽의 방앗간에서 쉼 없이 고추 빻는 소리로 시끄러웠던 것이 전성기시대의 생동적인 후생시장 풍경이었다.
-재생하는 후생시장
이곳은 경제개발의 붐을 타고 상권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시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며 가장 낙후된 지역 중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근대 우리사회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현장이 되었다. 자력으로는 재기불능이라 판단되던 후생시장이 경제 성장과 변화의 바람 속에서도 궁핍과 불편을 오늘까지 감수해 준 원주민들 덕분에 소멸의 위기 앞에서 마침, 도시재생지원 정책으로 옛 모습을 살리게 되었다고 한다. 노후 된 건물을 복원하여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시장 특성을 살린 ‘고추 끝 따는 가게’, ‘옛날 가게’등을 재현 할 모양이다. 주민의 주거 환경은 개선하되, 시장의 본래 모습은 잃지 않는 정겨운 추억의 공간으로 재생되어서 우리 곁으로 오기를 기대한다.
영주시 대학로 22번 길 33호 김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