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설교 정리본 - 김용의 선교사님
'다음 주에도 빠짐 없이 나올 테니 오늘은 이 만큼만 하시죠?!'
오늘날에는 주님이 교인들의 눈치를 봅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인들은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시간이 조금만 길어질라치면 곧 예배당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집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예배 마치고 갈 기쁨이 충만한 그 곳(?)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짧고 굵게 설교하시는 분들이 능력있고 유능한 분으로 각광받고
저처럼 두서없이 성령님 인도하시는데로 설교하는 사람은 설 곳이 점점 없어집니다.
저는 지난 수십년 간 순회선교단이라는 단체를 이끌면서부터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에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모태 신앙인'이라 불리는
특이한 집단 층이 존재함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예배 시작부터 '자~ 나를 한번 감동시켜보라구'라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복음을 곧이곧대로 믿는 저로써는 복음에 냉랭하게 대할 수 있는 그들이
신기해서 그들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죄의 대속과 상관없는 부담스러운 십자가'
'모태 신앙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머니에 실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합니다.
욕과 폭력이 당연시 되는 분위기에서 자란 저와는 다르게 그들은 극성스러운 어머니에 의해
털 끝만큼의 죄악조차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멋모르고 동네 아이들이 내뱉는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았다가는 어머니에게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입술을 지지는 형벌을 받는다거나 간혹 군것질의 유혹에 못이겨 십일조의 일부를 오용하면
잘 구축된 교회 정보망을 통해 어머니에게 알려져서 무시무시한 형벌로 이어집니다.
게다가 설교와 수련회 등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회개의 시간에는 이미 '스스로 대속한 죄악들'을
마치 주님이 대속하신 것처럼 강요 당합니다.
결국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면 그들의 마음 속에 '부담스러운 십자가'만 남게 됩니다.
찝찝함에 못이겨 주일예배만을 간신히 참석하는 이상한 신자(?)들이 됩니다.
"약속어음 말고 현찰을 주세요!"
왜 진리의 복음이 이토록 능력이 없는 것으로 치부당하게 되었을까요?
불교에서는 단지 "깨달음"만으로 출가하여 산으로 들어가는데
우리는 "진리"를 듣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현찰을 주시지 않고 약속어음을 발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기도한 것 중에 얼마만큼이나 응답되었습니까?
아마 모두 응답되었다면 유년기 때 교회 다니면서 S대 못 들어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 형님을 봅시다.
그는 향년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으로 부터 약속어음을 발행받습니다.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장 2절)
이 형님은 이 약속어음이 현찰로 바뀔 날만을 기다렸으나 생물학적인 한계(100세)에 이르자
엘리에셀을 입양하여 이 약속어음을 바꾸기로 결정합니다.
(이 형님 의리가 대단합니다. 우리 같으면 사기 어음이라고 내 팽개쳤을 겁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신실하지 않으신 분이였다면 이렇게 대답하셨을 겁니다.
"야~ 미안하다. 내가 약속해놓고 보니까 네가 나이가 넘 많더라~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아내 사라를 통해 이 약속어음이 현찰화 될 것임을 다시한번 약속하시고
그제서야 이삭이라는 현찰로 바꿔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 형님도 확실한 약속어음이 현찰 될 때까지 못기다려서 이렇게 고생했는데
별 볼일 없는 후손인 저희들은 확실치도 않아 보이는 약속어음을 들고 오죽하겠습니까?
"속 썩이는 남편 둔 아내에게 복 있을진저..."
제 아버지는 최고급 요정을 운영하셨습니다.
그곳에는 60~70년대 내노라하는 정치인, 경제인, 고급 공무원 등이 출입하며 술과 여자를 탐닉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들과 어울리며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밤이 되어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와 저를 끊임없이 학대하는 분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지나친 음주와 약물 남용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속 썩이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웬수(?)는 통계적으로 당신보다 빨리 죽습니다. 참고 기다리다 보면 그 날이 곧 옵니다."
반면 속 썩이는 아내 둔 남편들은 조금 심각합니다. 보통 여자의 수명이 남자보다 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상심치 마십시오. 통계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벌어놓은 수 많은 재물들은 마치 환상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그전에는 친밀하게 지내던 친척들마저도 어머니와 저를 외면했습니다.
저는 폭력과 마약 그리고 빈곤이 가득한 죽음의 뒷골목으로 버려졌습니다.
때문에 제 학력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인 중학교 2학년이 전부입니다.
이후 전 길거리를 방황하며 굶주림과 소외감 그리고 끊없는 원망에 자학증세에 시달리며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고민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요한 복음 3장 16절 말씀이 제 황량한 마음에 다가와 무의미한 제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천국은 마치..."
신비한 체험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복음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게 되었습니다.
천구과 지옥이 이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체로 인식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 모든 것을 팔아 천국을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 13:45-46)
저는 가방 끈도 짧아 아는 것이 없는 터라 전 세계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의 '따깔이' 역할이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이 순회 선교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단체의 역할은 각지의 선교사님들이 잘 사역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과
혹시나 변심하여 귀국하려는 선교사들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홀연 단신으로 이 사역에 모든 것을 바치려던 찰나에 하나님께서 아내를 강요하셔서(?)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두게 되었습니다.
"땅 끝에서 죽어 하늘 한 복판에서 만나자"
전 이 자녀들을 모두 선교사로 키웠습니다.
현재 막내 아들인 '선교'는 한국 최연소 선교사로 훈련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섯 모두가 세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관계로 가족이 자주 모이지 못하나
작년 제 생일을 기념하여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적이 있습니다..
치사하게(?) 제 얼굴 반쪽만한 케이크를 사 들고 모여 제게 한 명 씩 축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 때에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기니비사우에서 사역하던 첫째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 전에 제가 사역하던 곳에 방문하셔서 제게 남겨주고 가신 글을 기억하세요?"
그곳은 수도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인데다 제 아들은 그 나라 수도도 아닌 한 외진 마을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터라
제가 그곳을 방문하고 귀국하려니 딱한 마음이 들어 쪽지 한 장을 남겼는데 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을 벽 한 편에 붙여놓고 잠자리에 들때마다 읽으며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기억을 거슬러 보니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땅 끝에서 죽어 하늘 한 복판에서 만나자"
이 아들은 이제 이곳을 떠나 NGO 단체마저 들어가기를 꺼려한다는 러시아의 체첸으로 떠났습니다.
저와 제 가족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진실로 주님이 다시오실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동무, 됐습니다. 이제 죽을 수 있어요."
최근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모아 비밀리에 복음 학교를 열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십여일동안 합숙하며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여기에 참여한 탈북자들은 다시 북한으로 파송됩니다.
마지막 날 마지막 집회에 제가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중국 땅에서 공안에게 붙들려 쓸모없이 죽는 바에야 차라리 복음을 들고 돌아가 당당히 순교하십시오!"
이 메세지를 전한 후 한 명씩 격려의 포옹하며 다음 번에는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습니다..
안타까운 분위기가 감돌 때 이 때 제 품에 안긴 한 분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무, 됐습니다. 이제 죽을 수 있어요."
"당신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 입니다."
혹시 이 세상에서 행복한 시간들을 영유하다가 안락하게 자연사하길 꿈꾸십니까?
꿈도 꾸시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상 당신의 삶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주고 사신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이제 당신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Re-Turn"입니다.
첫댓글 출처-http://cafe.daum.net/heavenissoreal/mfA/5646
저의 안일한 삶의 자세를 회개합니다. ㅠ,ㅠ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