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의 역사와 시민대종
문화유산해설사 이 종 훈
향토사연구위원
1. 포천의 역사와 유형문화재
우리고장 포천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이미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인접한 연천 전곡리 구석기 문화유적이 발견되었으니 이미 1만년 전 이전에 이곳에서 구석기인들이 생활한 지역이다. 이때는 영농이나 목축이 없이 수렵생활만으로 생활하였으니 한탄강과 영평천 주변이 좋은 생활근거지를 제공했으며 이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는 씨족의 단계를 넘어 부족국가로 발전되며 영농과 목축도 병행되었을 것이다. 마한 변한 진한 등의 부족국가시대인 원삼국시대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지나는 한반도의 중심인 이 지역의 역사였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지역내에 산재한 고인돌들이 이 지역에 규모 있는 부족집단이 생활했으리란 고증을 가능케 하고 있다. 금현리 고인돌은 덮개(蓋石)의 무게가 200여 톤으로 장정 남자 300-400여명이 동시에 힘을 합쳐야 운반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고인돌을 세운 부족은 노약자까지 합치면 근 1.000여명의 집단이 생활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대의 삶의 유적은 고인돌과 동거울. 토기들의 파편이 고작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대의 이 지역은 마한의 변방으로. 한사군인 낙랑지역의 변방에 위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삼국시대가 들어서며 한성백제지역으로 하북위례성이 지금의 미아리로 상정하고 있으니 한성백제의 권역 내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사실은 자작동을 경기도박물관에서 2001년도에 지표조사를 했을 때 한성백제시대의 거점부락이었을 것으로 확인되는 여러 유적이 발견됐으며 현존하는 유적으로도 고인돌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 후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이전하고 5세기 중엽부터 대대적인 남진정책을 감행함에 따라 이 지역이 한강일대를 확보하려는 백제와 고구려간의 치열한 전쟁터가 됐으며 결국은 고구려의 권역에 들게 됨으로 포천의 반월산성이 최초엔 백제세력이 수축하였으나 고구려지역으로 편입됨에 따라 고구려에서 남방경영의 기지로서 활용하기 위하여 이성을 증. 개축한 사실이 반월산성 지표조사 결과 밝혀졌고 이때에 최초의 지역 이름으로 고구려식 지명인 “마홀(馬忽)”이란 지명이 들어있는 기와가 발견되므로 이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뒷받침하였다. 그 후 신라가 서서히 국력을 신장시킴으로써 6세기 중엽엔 한강지역으로 진출하여 신라의 권역에 들어가면서 고구려와의 힘의 교차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하였으나 당나라가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역을 통치하려 하자 나.당 전쟁이 벌어졌을 때 신라가 당나라의 마지막 세력을 구축하는 곳이 이른바 이 지역으로 매초성 전투에서 당나라의 설인귀부대를 궤멸(潰滅)시킨 곳이 이 곳 포천이다. 우리지역엔 반월산성을 위시하여 고모루성. 태봉산성. 화성(운악산). 명성산성. 바모루성. 보개산성. 매초성 등의 크고 작은 성의 이름들이 이지역이 고려왕조가 들어오기 전까지 치열한 전쟁터였음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증거물이다. 이같이 우리 지역엔 고구려의 벽화나 고분군들이. 경주지역의 고분군을 위시한 화려한 신라문화재들이. 공주. 부여지역의 섬세한 백제문화재같은 문화재들이 없음을 생각해 볼 때 전쟁터이고 변방(邊防)의 역사지역이다 보니 이렇다 할 유형문화재 하나 없음은 문화와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 더구나 근세사에 들어오면서 한반도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38선이 시 중앙을 횡단하므로서 6.25한국전쟁의 피해를 극심하게 겪다보니 전통적으로 인물과 절승지(絶勝地)의 고장이라고 하나 옛날 건축물하나 없고 이 지역 역사와 문화를 나타내는 고서적이나 문집류와 예술품하나 찾기 힘든 전쟁의 폐허지역으로 남게 되는 비운의 땅이 되었다.
2. 천혜(天惠)의 자연환경과 미래
우리고장 포천은 경기북부지역에 위치하면서 면적은 827㎢로 서울전역 605㎢보다 약1.4배나 넓으며 인구밀도도 약1900명/㎢으로 쾌적한 자연환경을 갖춘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지역이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장차 통일 한국의 수도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조선조시대 관북대로가 지금의 43번 국도이고 금강산을 지나 함경도와 북방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이다. 이곳은 500~1.000m의 아름다운 산들이 산재해 있으며 한내천. 영평천. 한탄강등의 맑은 물이 도처에 흐르고 있다. 기(畿)내에서는 드문 영평팔경(永平八景)을 갖고 있는 자연과 인간이 쾌적(快適)하게 살 수 있는 고장이다. 수도권에서 1일 관광레저코스로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는 우리고장은 앞으로 고속도로. 전철등 대규모 교통시설이 갖추어진다면 더욱 각광받는 자연과 문화의 고장으로 급격히 성장할 것임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레져와 관광의 기본여건은 편리한 교통과 볼거리. 먹을거리 . 즐길거리이다. 이 중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이 문화재이다. 문화재는 그 지역의 역사이면서 고대와 현대를 이어주는 정신적 매체이고 지역의 정신과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주체적 구실을 한다. 우리지역은 오성과 한음의 캐릭터가 표현하듯이 인물의 고장으로 조선조에 들어와서 훌륭한 학자로부터 충신. 열사 효자. 예술가가 많이 배출되었으며 근세사에 들어와서도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이런 연유로 서원(書院). 사(祠). 단(壇)등 인물을 제향하는 사우(祠宇)와 묘소들이 80여개 문화재중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관광객과 같이 어울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관광레저 인구가 같이 호흡할 수 있는 박물관. 향토 사료관. 예술공원과 같은 문화 인프라와 주민과 관광객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지역축제들이 개발되어 자연과 사람이 같이 즐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문화재가 없다하여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어려운 환경이라 하더라도 문화재 창출은 계속되어야 한다. 포천시에서 추진하고있는 국제조각 심포지엄. 폐석산을 활용한 아트벨리의 조성. 시 승격기념물과 광복 60주년기념물로 제작되고 있는 포천시민대종제작. 산정호수를 이용한 명성산 억새꽃축제. 영평팔경가의 제작과 보급.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최 등은 우리고장이 문화와 예술의 고장임을 알리고 문화와 관광의 도시로 비약을 위한 아주 값진 준비작업이다.
지금도 산정호수. 백운계곡. 베어스타운에서 자연을 즐기고 레저활동을 하는 인구는 연간 수백만명으로 주 5일제 근무의 정착화와 비례하여 더 많이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고장은 농지가 30%에도 미치지 못하며 농업을 통하여 세입을 향상시키고 지역발전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실정이다. 미래 포천의 활로는 자연자원과 문화행사를 활용한 축제를 통한 수입원의 개발이 가장 중요하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 말한다. 어느 지방자치단체가 먼저 자연공간과 더불어 특색 있는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인프라를 갖추느냐에 따라 지역발전을 선도하고 문화의 고장으로 각광받느냐에 따라 삶의 질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가 좀 어렵다고 이를 기획하지 않거나 자금이 든다고 계속 미루어 나간다면 그만큼 타 지역보다 낙후된 지역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본다.
3.포천시민대종에 대하여
포천이 고구려시대에 마홀이란 지명을 얻은이래 명지라 불리기도 했으며 신라시대에 와서 견성군(堅城郡)이란 지명을 얻게 됨은 지명의 의미로 보아 반월산성이 북방을 경영하는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청성군이라 불렸으니 반월산성이 위치한 산 이름이 청성산(靑城山)으로 성(城) 이름이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궁예에 의하여 이 지역이 한때 태봉국의 영향 하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태조 왕건과의 수많은 전쟁 일화들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 들어와서 이 지방이 비로서 포주(抱州)라는 지명을 얻고 조선조 태종시대에 포천이란 지명으로 변하여 내려오며 영평군과 합하기도 하고 분리도 되었다가 1912년에 포천 영평이 합군되니 포천이란 같은 지명을 갖게 된 이래 2003년 10월 19일 도농복합시로 승격되니 고구려 장수왕 시절에 마홀군이란 지명을 얻은 이래 실로 1.500여년만의 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기념비적인 경사라 하여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포천시민대종의 제작이 논란에 오른 것은 2003년 시 승격이 되던 해에 고철 모으기 운동의 과정에서 수집된 동(銅)의 활용방안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울러 시 승격기념물로, 광복 60주년의 기념물로서의 제작이 제기되므로 포천시민대종제작추진위원회가 지역의 기관장. 사회단체장들과 지역 행정조직의 대표성을 갖는 이. 통장협의회에서 적극 참여하므로 자연스럽게 결성되었고 정관과 조직을 갖추고 제작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근래 종 제작의 당위성 문제와 종명의 선정문제 등이 수면위로 부상하여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음은 포천의 시민의식이 많이 성숙되었음을 나타내는 일이라 하겠다. 종 제작이 문화유산으로서. 시 승격 기념물적 의미가 있다면 많은 시민이 스스로 참가하여 제작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제작이 진행되고 있는 전국의 네 개의 종 중 두 곳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추진위원장이 되어 지방비로 제작을 추진하고 있다. 포천과 다른 한곳은 추진단체를 설립하여 종의 의미를 부여하고 시민참여를 통하여 제작하고 있다. 어느 것이 바람직하겠는가? 예로 독지가 한명이 전액을 부담하여 시민대종을 설립했다면 그 종이 시민대종이라는 의미는 별로 없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종명(鐘名)에도 다른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사찰의 범종을 제외하고 지자체에서 제작한 종은 조사한 바로 약 30여개이다. 이 중 지역이름을 넣지 않고 의미를 부여한 종이 경기도에서 파주 임진각에 설치한 “평화의 종”과 충청북도에서 청주에 설치한 “천년대종”이다. 이는 광역자치단체에서 제작했다는 점에서 포천과는 좀 다르다. 종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지역 내 시민들의 안녕과 평안함을 기원하며 나아가 지역의 발전과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가 제일 크다고 보며 이런 의미에서 지역명을 사용한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그 지역과 연관 있는 상징성의 의미나 미래지향적으로 부가가치가 있는 브랜드 화를 기대하여 종명으로 사용할 것인가는 깊이 검토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지역 문화인물이자 선각자인 이해조선생의 “자유종”이란 작품명을 들어 종명을 선정함이 좋겠다는 제언적 논단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신소설의 효시인 “자유종”은 암울했던 시절의 계몽주의적인 작품이다. 과연 이 이름이 오늘에 적절하고, 시공간을 초월해 포천시 승격의 기념물적의미가 있는지는 더 생각해야 할 일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작되고 있는 시민대종이 포천시민들의 많은 참여와 축하를 받으며 시민들이 불어 넣은 생명력을 받고 태어나야 한다. 이 종은 무게가 15톤으로 포천시 승격시 인구 15만과 1.500년만의 포천시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종각(鐘閣)은 21세기를 지향하는 포천시의 이미지와 21문화의 세기를 나타내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민대종이야 말로 포천시에 잘 어울리는 상징물로 태어날 것으로 기대를 한다. 종각의 위치는 포천의 역사를 말없이 담고 내려오는 반월산성지에 세워진다. 이 종에 생명력이 없다면 커다란 쇳조각에 불과하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시민대종의 제작을 축하하고 경사로 맞이할 때 포천시민대종은 생명력있는 종으로 태아나 고장의 얼과 선인들의 정신을 담은 웅혼(雄渾)한 종성을 100년 후 1.000년 후까지 울리며 포천의 역사와 함께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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