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 여자탁구 중국에 분패, 준우승 -
남북대결의 주변
한국이 북한을 3대 1로 격파하자 2백 킬로미터 떨어진 런던으로부터 온 2백여 교포 응원단은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교포들은 이에리사.정현숙 선수를 둘러싸고 “잘했다. 참으로 이런 감격은 처음이다.”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 날의 남북대결이 밤 8시에 끝남으로써 한국 선수를 응원한 교민 1백여 명은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버밍엄에 머무르며 밤새 감격을 되새기고 다음날 있을 대 중국전의 응원을 대비하기도 했다.
남북대결의 관건이 걸린 이에리사.정현숙 조와 박영순.김창애 조의 복식경기는 참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였다. 처 세트에서 한국의 세 번의 듀스 끝에 25대 23으로 이기자 북한 벤치는 실망과 당황의 표정이 역력했다. 3명의 북한 코칭스태프는 잇따라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의자에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한국의 승리를 마무리한 정현숙 대 박영순의 단식 경기 때는 더 한 층 안절부절 했다. 선수를 부를 때는 심판에게 허가를 얻어야함에도 정신없이 마구 불러들이는가 하면, 박영순은 수건으로 연상 얼굴과 손의 땀을 닦으며 초조한 눈초리로 벤치를 쳐다보기에 바빴다.
그곳 탁구전문가들과 매스컴에서는 이에리사. 정현숙을 한국의 ‘팬텀편대’라고 부르고 있었다. 팬텀편대라고 불린 것은 한국이 결승전에 진출하기까지 둘이서 만이 콤비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특히 매스컴들은 이 팬텀편대가 콤비가 좋고 폭격력이 대단한 편대라고 극찬하고 있었다.
한국이 북한을 격파하는데 이에리사와 함께 수훈을 세운 정현숙은 빨간 리본의 여왕으로 각국 선수단은 물론 관중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정현숙은 셰이크핸드의 수비 위주로 침착하게 경기를 풀어 나갔는데 머리에 단 빨간 리본이 돋보여 관중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남북대결에서 한국은 기량에서 뿐만 아니라 예의와 아량에서도 북한을 이겼다는 것이 그곳 각국 선수단의 한결같은 이야기였다. 한국의 이에리사.정현숙은 승리하는 순간 북한 선수들에게 달려가 악수를 청하고 잘 싸웠다고 격려하는 등 여유만만한 반면 북한 선수들은 표정없이 굳게 서있었다.
붉은 셔츠에 붉은 기를 가슴에 단 북한 선수단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선수들은 하늘색 셔츠에 선명한 태극기를 달아 유니폼에서부터 양자의 입장은 뚜렷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제대회에 나서는 북한 선수들은 의례 가슴에 김일성의 뱃지를 꼭 달고 다녔는데 당시 북한 선수들의 가슴에 김일성 뱃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 다소 달라진 모습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우리 교포들이 북한 임원선수들 더러 “당신들도 잘 싸웠다.”고 치하하자 한 북한 임원은 “같은 조선 사람인데 우리도 좀 응원해야지...”하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날 밤 남북대결이 진행되는 바로 옆 코트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준결승전이 벌어져 마치 극동의 4개팀이 대회를 주름잡는 듯 했는데, 일본이 중국에 0대 3으로 패퇴했기 때문에 자유세계의 체면은 우리 한국의 세워준 셈이었다. 게임이 끝났을 때 자연 발생적으로 울려 퍼진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는 남북한 대결이 끝난 장내를 한 때 엄숙하게 했다.
선전 보람 없이 정상복귀 좌절
당시 8억의 인구를 가진 거대한 중국 탁구의 벽은 역시 두터웠다. 2년 전 인도 캘커타 대회에서의 패배 이래 2년 동안 정상탈환을 벼르며 뼈를 깎는 훈련을 거듭해온 한국이었지만 중국의 다양한 기술 앞에 어쩔 수 없었다. 한국은 이날 첫 단식에 이에리사를 내세운 반면 중국은 세계랭킹 2위의 백전노장 장립을 기용했다.
이에리사는 1세트에서 장립의 첫 서브를 미스 하더니 이후 장립의 스핀을 가미한 커트와 전진속공에 눌려 구질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줄곧 밀리다 10대 21로 크게 졌다.
2세트에서 장립의 구질을 어느 정도 파악한 이에리사는 장기인 루프 드라이브를 구사, 장립의 전진속공과 맞서 남자선수를 방불케 하는 격전을 벌였다.
이에리사는 스카이서브까지 간간히 구사하는 장립의 다채로운 공격에 눌려 한때는 7대 13으로 크게 뒤졌으나, 다시 맹렬히 추격 12대 13까지 뒤쫓은 뒤 16대 16, 18대 18, 20대 20으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장립의 스매싱에 눌려 22대 20으로 아깝게 패했다.
과거 이에리사는 장립과 세 번 대결한 적이 있었는데 꼭 한번 이겨봤을 뿐이었다. 72년 제15회 스칸디나비아 오픈선수권대회 개인전 준결승전에서 3대 1로 이겼으나 74년 아시아경기대회, 75년 세계대회 단체전에서는 각각 0대 2로 완패한 바 있었다.
두 번째 단식에 나선 정현숙은 펜 홀더형으로 볼을 3,4m 위로 올렸다가 내려오는 볼을 때려 넣는 일명 ‘스카이서브’의 신예 장덕영과 맞서 열전 끝에 역시 분패했다. 1세트에서 정현숙은 7대 12로 뒤지다 14대 14 타이를 만들었다. 이후 정현숙은 19대 19, 20대 20 등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 장덕영의 위력 있는 커트에 눌려 21대 23으로 석패했다.
2세트에서 정현숙은 1세트의 분패가 영향을 미친 듯 줄곧 끌려 다니다가 스카이 서브와 날카로운 스매싱을 막지 못해 다시 분루를 삼켜야 했다.
마지막 복식에서 팬텀편대로 애칭되었던 이에리사.정현숙은 안간힘을 다했으나 단식전의 어이없는 패배에 의기소침해졌는지 결국 17대 21, 16대 21로 주저앉고 말았다. 중국은 장덕영이 스카이 서브를 넣고 돌아오는 볼은 장립이 전진속공으로 처리하는 콤비플레이가 단식전 때보다 더욱 쉽게 처리되었다.
그야말로 그날은 불운의 날이었다. 캘커타의 장립은 끝내 버밍엄까지 쫓아와 정상탈환을 염원하던 한국 여자 탁구팀의 꿈을 무산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우리 선수단은 여자 단체전 결승에서 선전의 보람도 없이 거인 중국에 0대 3으로 분패,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남자 단체전 및 개인전 성적
남자부 단체전에서는 B조 예선에서 루마니아, 폴란드를 각각 5대 1, 5대 3으로 이겼을 뿐 유고에 1대 5, 덴마크에 4대 5, 일본에 2대 5, 소련에 3대 5, 스웨덴에 1대 5로 져 2승 5패로 B조 6위를 차지했으며, 11~12위 순위결정전에서 폴란드를 5대 4로 격파, 11위를 차지했다.
남녀 단.복식과 혼합복식 5개 종목의 타이틀을 다투는 개인전은 5일간 진행되었다. 개인전에서 이에리사는 2회전에서 일본의 에다노를 3대 0으로 가볍게 이기고 올라가 3회전에서 중국의 장립과 또다시 대결하게 되었다.
이에리사는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던 중국의 최강 장립과의 경기에 1,2세트(18, 17)를 먼저 빼앗는 호조를 보였으나 장립의 과감한 역습에 말려 3,4세트(-11, -16)를 내주고 세트 스코어 2대 2를 허용했다. 마지막 5세트에서 12차례의 타이를 거듭하는 대 혈전 끝에 21대 23으로 분패, 2대 3으로 역전패함으로써 탈락했다.
김순옥 선수 역시 3회전에서 소련의 루드노바를 3대 0으로 이기고 올라갔지만 중국의 장덕영에게 0대 3으로 패해 탈락했고, 정현숙은 2회전에서 소련의 안토니안 선수를 3대 1로 이긴 뒤 3회전에서 헝가리의 스자보 선수를 3대 1로 누르고 준준결승인 4회전에 진출했으나 중국의 갈신애를 만나 0대 3으로 패했다.
결국 여자단식에서는 북한의 박영순이 갈신애를 3대 1로 이겼고, 장립이 장덕영을 3대 1로 이겨 결승에서 박영순 대 장립이 맞섰다. 이 경기에서 박영순이 장립을 가볍게 3대 1로 이겨 제33회 대회에 이어 2연패의 영광을 안았다.
남자단식에서는 윤길중, 김인수, 고수배 선수가 예선경기에서 모두 탈락했고, 예선없이 본선에 진출한 이상국, 최승국마저 별 성과없이 1회전에서 모두 탈락했다.
한편 여자복식에서 김순옥.이기원 조가 선전, 일본의 요코다.가와가시 조를 3대 1로 물리치고 준준결승전(8강)에 진출했다. 8강전에서는 중국의 리밍.웨이리 조를 3대 2로 이기고 준결승전(4강)까지 진출했다. 이어 벌어진 준결승전에서는 그러나 역시 중국의 주상용.웨이리치예 조와 대결했으나 0대 3(-12, -11, -10)으로 패해 아깝게 3위에 그치고 말았다.
혼합복식에서도 이상국.이기원 조가 예상 외로 선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하는 좋은 성과를 이룩했다. 이상국.이기원 조는 본선 1회전에서 미국의 나인숙.시밀리 조를 3대 0으로 가볍게 이기고, 2회전에서 영국의 더글라스.하워드 조를 역시 3대 0으로 이겼다. 3회전에서도 홍콩의 중추리.키트만시우 조를 3대 1로 이기구 4회전(준준결승)에서는 일본의 고노.에다노 조를 강한 공격으로 몰아붙여 3대 1로 가볍게 꺾었다.
그러나 최후의 행운이 우리에게 부여되지는 않았다. 준결승전에서 프랑스의 세크래탱.베르제레 조에게 풀세트의 접전 끝에 2대 3(-17, -15, 18, 14, -19)으로 분패, 동메달 획득에 그친 것이다. 이로써 우리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여자단체전 준우승, 여자복식과 혼합복식에서 각각 동메달을 획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