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고사진의 대부 김한용 사진작가의 스튜디오에 가다...
엄청난 성장속도에 외국인들이 놀랍니다. 서양 특히 유럽 쪽은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현재나 큰 변화가 없지만 한국은 10년 단위로 크게 성장합니다. 근대화와 산업화와 민주화를 고속증식로에서 배양한 듯 단 40년 만에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 등의 모든 것을 해결 했습니다. 서양에서는 최소 100년 이상이 걸린 것을 한국은 4~50년 만에 대 해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속성장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94년 성수대교 붕괴 95년 삼품 백화점 붕괴. 외국언론들은 한국의 고속성장의 후유증이라고 했고 우리 스스로도 그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각성과 반성을 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붕괴를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 정권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시킬 것입니다. 이미 4대강의 악취가 진동하지만 누구하나 책임질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5년 동안 서서히 붕괴되는 민주주의를 우리는 목도할 것입니다. 부디, 붕괴가 아닌 민주주의의 진화를 원하지만 박 당선인에게 큰 기대는 하지 못할 듯 하네요.
이런 고속성장 속에서는 그 성장을 사진으로 많이 기록해야 합니다만 우리는 기록의 소중함을 잘 몰랐습니다. 기록이 뭡니까? 소중한 문화재를 당장 성장이 급하고 배를 가득 채워야 한다면서 조선시대의 유물을 다 허물었습니다. 먹고사니즘이 모든 가치를 앞도했던 지난 50~80년대 고속성장기를 우리는 많은 기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신선회나 국제 사진연맹 소속 한국기자나 언론사 기자 출신의 몇몇 사진작가들이 한국의 성장을 자비 혹은 의뢰를 받고 기록 했습니다. 그 중 한분이 바로 김한용 사진작가입니다.
▲ 청계천, 종로 일대, 1966
▲ 서울 대흥동, 1958
▲ 부산 국제시장 부근, 1953
▲ 부산 동래, 1953
사진들 참 감성적이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50~70년대 사진들을 찍은 사진작가 대부분이 사진 콘테스트 수상자들이고 사진 콘테스트에서 수상할려면 형식미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때도 그냥 가감없이 담는 것이 아닌 풍경화 처럼 구도를 계산하고 좀 더 감성적이고 완벽에 가까운 사진을 찍을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이 시절의 사진들은 사람 애간장을 울리는 감성 철철 넘치는 사진들이 많습니다.
또한, 전형적인 사진들이 많죠. 가난한 사람들은 어둡고 누추하게 담거나 반대로 제목을 희망 등등의 너무나 자의적이고 사진가의 주관적이고 전형적인 제목을 달아서 현실을 호도하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24간 내내 힘들어하고 희망만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정작 가난한 사람들은 담배 생각이나 술 생각이나 신세 한탄이나 노동의 힘듬을 생각하지 희망을 24시간 내내 생각하지 않습니다. 희망이야 가끔 머리속에 꿈꾸듯 떠올리죠. 하지만, 이 시절의 사진들은 현실을 직시하기 보다는 현실을 꾸민다고 할까요?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보인다거나 관찰자의 주관이 너무 가미된 사진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진들이 있기에 우리는 이 고속으로 자라는 한국 그리고 서울의 과거를 볼 수 있습니다.
사진작가 김한용은 1924년 평남 성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그림을 잘 그리는 김한용을 일본인 교장 선생님이 보고 만주에 있는 봉천제일공업학교 인쇄과로 보냅니다. 그곳에서 인쇄와 사진을 배웁니다. 이후 일제 징집으로 군대에 갔다온 후 국제 보도연맹에서 1947년 부터 59년 까지 사진기자로 활동을 합니다. 동시에 광고사진도 찍는데요
김한용 사진작가는 항상 국내 1호 광고사진작가라는 호칭 아닌 호칭이 붙습니다.
보도사진도 찍었지만 광고사진을 많이 찍었고 광고사진의 대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이야 광고사진 보다는 광고 동영상이 더 인기가 있지만 사진이라는 간편성 때문에 여전히 광고는 동영상 보다는 사진으로 더 쉽게 만나고 있습니다. 특히 잡지는 광고사진의 향연이죠
김한용 사진작가는 60. 70년대 인기가 있었던 여성잡지 여원의 컬러 표지를 촬영하면서 국내에 컬러 사진으로 된 잡지가 나왔고 많은 광고사진을 자신이 직접 만든 '김한용 사진연구소'에서 촬영을 했습니다.
그 김한용 사진연구소에 작년 10월에 갔다 왔습니다. 해를 넘겨서 이제서야 소개를 하게 되네요
김한용 사진연구소는 충무로에 있습니다. 극동빌딩 바로 옆에 있는데요. 충무로가 인쇄골목이 많아서 광고사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작년 충무로 사진축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이곳입니다. 축제기간에 전면 개방 했는데요. 저는 그냥 갤러리 인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고 김한용 사진작가의 작업 스튜디오입니다. 김한용 사진작가는 나이가 한국나이로 치면 올해로 90살이 되시는데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스튜디오에는 작가님의 캐리커쳐가 있고 벽면 가득히 김한용 작가님이 찍은 사진이 가득 했습니다.
한참을 봤습니다. 지금은 은퇴했거나 중년 혹은 노인으로 나오는 여배우들의 사진이 가득 했습니다. 장미희, 김창숙, 윤정희 등등 왕년에 잘 나갔던 여배우들의 광고사진과 프로필 사진들이 가득 합니다. 70,80년대 광고 사진 대부분이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사진이 많은데요. 이 공간에서 촬영한 듯 하네요. 배경지만 바꾸면 바로 그 공간이 골프장이 되고 안방이 되고 호프집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달력의 사진들은 역동성과 화사함을 위함인지 계곡이나 초원을 배경으로 하는 달력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여배우들이 얇고 혹은 헐벗은 옷을 입고 찍은 달력을 걸어 놓는 사람들이 없지만 80년대 까지만 해도 많이들 걸어 놓았습니다. 특히, 이발소에 많았죠. 이 달력 사진은 사진작가 이용정이 가장 유명했었습니다. 달력 사진은 이용정, 광고사진은 김한용 이렇게 알려졌을 정도로 광고사진에서는 김한용 사진작가가 가장 유명 했습니다.
책도 많이 냈는데 김한용 사진작가를 알게 된 것이 작년인가 출간한 '꿈의 공장'이라는 책입니다. 보도사진을 엮은 '희망의 연대기'가 있고 광고사진을 엮은 꿈의 공장이라는 사진집이 있는데 도서실에 있으면 한번 들쳐 보십시요. 촌스러운 듯한 표정과 배경 속에서도 지난 세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촌스러울지는 몰라도 그게 최선이었고 그게 트랜드였습니다.
지하 암실로 내려가 봤습니다
맥켄토시와 액자 밑에 도란스라고 하는 간이 승압기도 보입니다. 지금이야 220v가 기본이지만 80년대는 110v가 기본이었고 220v만 가능한 가전제품은 저 승압기로 승압을 해서 썼습니다.
때묻은 호돌이가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암실 풍경이네요. 대학시절 암실에서 현상 인화하고 수세하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동아리라서 학교에서 지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좁아터진 동아리 한쪽을 막고서 암실을 만들었습니다. 현상 인화가 끝나면 수돗가에 가서 수세를 하곤 했는데 정말 열악했죠
인화기네요. 이 인화기도 중고 인화기를 사서 썼었는데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열정은 싱싱 했습니다. 추운 가을에 전시회 때문에 새벽에 인화하다가 손이 시려우면 인화기에 손을 녹이던 기억도 나네요
저 인화기에 필름을 놓고 노광을 해주면 바닥에 사진이 맺히고 그 사진의 맺힘을 인화지위에 채집하면 되었습니다. 청사진 놀이하는 방식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것도 너무 반갑습니다. 백라이트가 있는 아크릴판 위에 흑백 필름을 놓고 불을 켜면 필름에 난 스크레치들을 미리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같이 디지털 시대에는 현상 인화 개념이 사라졌지만 필름은 현상 인화 개념이 확실했고 현상은 가격이 싸지만 인화는 1장 뽑을 때 마다 다 돈이였습니다. 따라서 아무 사진이나 인화하지 않고 환등기에서 합격을 받은 사진만 인화를 했습니다. 위 사진은 슬라이드 필름이네요. 그나저나 저 필름 확인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지 까먹었네요.
슬라이드 필름을 넣고 환등기로 감상하던 시절도 생각납니다. 지금은 빔 프로젝트로 보는 시대가 되었죠.
지금은 사진을 모니터에서 크롭하지만 필름 시절은 저렇게 인화지를 크롭해서 사용했습니다. 인화지를 잘라서 사용하기도 했고요.
필름은 보통 36컷 혹은 그 이상으로 감겨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파는 것은 24컷 36컷이지만 롤로 된 필름을 사서 직접 잘라서 쓰기도 했습니다. 필름을 현상통에서 현상을 한 후 깨끗하게 세척 후에 저렇게 암실에 건조를 시킵니다. 그냥 걸면 필름이 돌돌 말리기 때문에 하단에 빨래 집게 등의 무게 있는 것으로 필름이 돌돌 말리지 않게 했습니다.
다 건조된 필름은 5컷인가 6컷씩 가위로 잘라서 필름 케이스에 넣어서 보관 했습니다.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 할때는 화학약품을 써야 했고 냄새가 좀 역했습니다. 특히 현상액은 옷에 뭍으면 노랗게 변했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코닥의 D-72를 현상액으로 사용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돈이 없어서 액체에 희석해서 사용하는 편리한 것보다는 가루로 된 것을 사서 물에 풀어서 사용했습니다. 그냥 물에 푸는 것이 아닌 물을 은근한 물로 온도를 올리면서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현상액은 필름을 현상 할 때 쓰고 인화액은 코닥의 D-76를 사용해서 하얀 인화지 위에 사진이 스물스물 나오게 했습니다.
제가 사진에 푹 빠진 것은 촬영도 현상도 아닙니다. 바로 인화지 위에 사진이 피어나는 그 카타르시스 때문입니다. 마시 신이 된듯한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그 짜릿함 그 느낌, 그거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현상액과 인화액은 온도에 따라서 약품에 담그는 시간이 다른데요. 특히 현상액은 온도와 시간이 다릅니다. 낮은 온도에서는 긴 시간을 높은 온도에서는 짧은 시간이 필요한데 그래봐야 10분 이내로 기억합니다.
기껏 잘 찍어서 현상 망치면 화딱지가 너무 났죠. 후배들이 인화 용액이 담긴 파레트에 인화지를 던져놓고 수세도 안하는 모습에 화가나서 회의시간에 걸리면 가만 안두겠다고 협박하던 기억도 나네요. 지금은 하라고 해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불편하기도 하고 냄새도 나고 제가 디지털의 편리함에 물들었나 봅니다.
그래도 아나로그 필름만의 감성이 있는데요. 그 감성은 디지털의 선명성이 따라갈수도 복제할 수도 없습니다. 덜 선명해서 푸근했던 필름 사진들입니다.
사진잡지도 참 가득합니다. 그나저나 김한용 사진작가님의 사진은 어디서 열람해서 볼 수 있을까요? 분명 엄청난 자료들을 가지고 계신데 무슨 사진들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고 그걸 교육용이나 상업용으로 사용할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네요.
온라인에 공개한 후에 연락이 오면 상업용은 돈을 받고 교육용은 무료로 공개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아니면 서울역사 사료관에 기증해서 온라인에서 쉽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제 욕심이겠죠.
노 작가의 열정과 옛 추억을 동시에 들이키고 왔습니다.
김한용 사진작가님이 아직도 활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멋진 사진들을 보다 쉽게 만나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