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전투,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 되다
후백제의 견훤은 927년 어느 날, 왕건에게 대야성을 함락당하고 분노했다. 그 모든 것이 신라가 고려와 편을 같이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 그는 직접 군사를 몰아 근품성(문경 산양현)을 불바다로 만들고 고율부(영천)를 공격했다. 신라의 경애왕은 즉시 고려에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는 사이 견훤은 신라의 도성인 서라벌로 군사를 몰고 들어와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급기야 포석정에 이른 견훤은 고려의 파병 소식을 듣고 잔치를 벌이던 신라의 왕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고는 발 빠르게 팔공산 방면으로 빠져나갔다. 견훤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소식을 들은 왕건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겨울로 향하는 팔공산 골짜기에 냉기가 흘렀다. 마른 억새도 다가올 폭풍을 감지했는지 숨죽여 울었다. 매복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견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그래야지. 조금만 더 가까이 오너라.'
성미가 급한 견훤은 왕건의 군사가 사정권에 채 들어오기도 전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고려 왕을 잡아라."
"백마를 찾아라. 후미에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왕건을 잡아 오면 큰 상을 내릴 것이다."
후백제의 군사들은 공을 세우려고 앞다투어 왕건이 탄 백마를 쫓았다. 왕건과 맞서 싸운 수많은 전투에서 매번 당하기만 했기에 이번에는 꼭 끝내야 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적을 추적 중인 군사에게서 좀처럼 소식이 없자 견훤은 좌불안석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소식이 왔다. 왕건의 수급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걸어오는 군사를 보고 있던 견훤은 가슴이 뛰었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한반도를 통일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니던가.
"그래 왕건이 확실한가?"
그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네 폐하, 분명히 백마를 타고 있었습니다."
"발바닥에 북두칠성도 확인했사옵니다."
"장하도다. 장하도다."
수급을 싼 보자기에 대고 견훤은 승자의 여유를 부렸다.
"그대의 인물은 아깝지만 밟고 밟혀야 할 우리의 운명을 어찌할꼬."
"나를 너무 원망은 마시게나."
"그래도 가시는 길 고이 가시라 인사는 해야겠지."
견훤은 군사에게 꽁꽁 묶은 보자기를 풀라고 명했다.
수급을 들여다보던 견훤이 휘청거렸다. 그것은 왕건의 것이 아니었다. 속았다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왕을 대신하여 목을 내놓았던 자는 적국의 왕 앞에서 주검조차도 당당했다. 왕건을 잡지 못했다는 애석함보다, 충직한 부하를 둔 왕건에 대한 질투와 부러움으로 몸을 떨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자기편으로 흡수하고야 마는 왕건의 인물됨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을 잠시 가진 적이 있었으나, 일을 당하고 보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자신도 모를 엄숙함으로 발전했다. 피투성이의 수급을 내려다보는 견훤의 눈빛이 깊어졌다. 적국의 장수이지만 그 충성스러운 이름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었다.
"여봐라, 여기 이 자를 혹 아는 자가 있느냐?"
"이는 필시 신숭겸 아니면 김락일 것이야."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다 들었사온데 이 자는 몸집이 그리 크지는 않사옵니다. 폐하."
"그럼 누구란 말이더냐?"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름도 중요하지만, 도망친 왕건을 추적하는 게 먼저이옵니다. 폐하."
부하의 말에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자의 충절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네."
"이 수급은 모든 군사가 다 볼 수 있도록 잘 보이는 곳에 걸라."
견훤은 그 사건을 통하여 군사들의 사기 앙양보다는 충절의 본보기로 삼고 싶었다.
"이 자의 몸통은 고려의 왕에게 돌려주어라."
자신을 위해 목숨 바친 자가 누군지 정도는 왕건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견훤은 그것이 실수였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무엇에 홀린 듯 알지 못할 감정에 빠져들었던 견훤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짧아진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리라. 비록 왕건은 놓쳤지만, 살기 위해서 마치 도마뱀처럼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그의 꼴을 상상만 해도 통쾌했다. 견훤은 내심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주변의 호족들과 장군들이 자신의 편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오히려 역효과였다. 신라를 끝까지 정통 왕조로 존중했던 왕건에게로 민심을 빼앗겨야 했다. 견훤의 신라 침략과 팔공산 전투는 이기고도 이긴 전쟁이 아니었다. 왕건에게 꼭 승리해야 할 빌미를 준 셈이었다.
◆목 없는 시신을 앞에 두고
새벽을 여는 일선(선산)의 하늘은 산고의 흔적으로 선혈이 낭자했다. 날을 세운 핏빛이 절정에 이르면 태양은 처연하게 일어날 것이다. 고통의 시간 없이 아침을 맞을 수는 없는 걸까. 목 없는 시신을 앞에 두고 처절한 새벽을 맞은 왕건은 그 애통함에 몸을 떨었다. 목이 없어도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음은 가마니 사이로 드러난 장군의 발바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까맣게 변해 버린 발바닥에는 급하게 찍은 일곱 개의 점 중 두 개가 남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숭겸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고려의 왕으로 세운 개국공신이었다. 궁예의 부하였을 때 왕건을 형처럼 따랐던 인물로 서로가 흉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적군의 끝자락인 백제의 금성(나주)을 치기 위해 바닷길로 향할 때였다. 전쟁터로 향하는 그 무거운 길에 숭겸의 풀피리 소리는 고향처럼 안온함을 가져다주었다. 긴장이 풀린 왕건이 잠시 눈을 붙이고 있을 때 신숭겸의 시선은 그의 발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일곱 개의 점이 북두칠성처럼 박혀 있었다. 숭겸은 하도 신기하여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았다.
"무엇을 그리 열심히 보고 있는가. 아우."
인기척에 잠이 깬 왕건은 신숭겸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하느님께 발고해야겠습니다. 북두칠성을 훔친 도적이 여기 있다고."
"길잡이별을 이렇게 홀로 독차지하시면 밤길을 걷는 이들이 길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빨리 제자리에 올려놓으시지요."
"허허, 이 사람 농담도 잘하는구먼."
"어때, 자네에게 별 하나를 선물하고 싶은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게나."
왕건은 자신의 발을 숭겸의 턱 앞에 불쑥 내밀며 그의 장난을 맞받아쳤다. 신숭겸은 왕건의 발바닥을 요리조리 살피더니 국자의 손잡이 부분에서 일곱 번째 별을 지목했다.
◆우주의 시곗바늘이 되겠다던 굳은 약속
신숭겸이 지목한 별은 파군성으로 여섯 번째의 무곡성과 함께 두병(斗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천문학자들은 우주의 시곗바늘이라는 뜻으로 시침(時針)이라고 했다.
"형님, 지금부터 저는 형님의 시곗바늘이 되겠습니다."
"형님은 이제 우주의 시간을 지배하셔야 합니다."
숭겸은 의미 있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 사람,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찌하는가."
왕건은 자신을 생각하는 숭겸의 마음은 한없이 고마웠지만, 한 임금의 신하 된 자로서 편히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형님은 이 아우의 영원한 태양입니다."
"해가 존재하지 않는 시곗바늘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형님의 시간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곗바늘로 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우렁찬데 장군은 차가운 주검이 되어 말없이 누워 있다. 일곱 개의 별을 모두 자신의 발바닥에 찍어 넣고 적을 유인하여 왕의 도망 길을 열어 주었다. 적을 속여 시간을 벌기 위해 찍었던 점이 다시 돌아와 반짝이고 있다. 그것은 죽어서도 약속을 지키겠다는 굳은 그의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울지 못하는 새가 되어
아침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양지바른 곳에 그를 고이 묻었다. 목이 없어 더욱 안타까운 시신 앞에 왕건은 나지막한 소리로 굳은 맹세의 말을 함께 묻었다.
"승리의 깃발이 하늘 높이 펄럭일 제, 애통한 너의 얼굴을 황금으로 만들어 꼭 개경으로 데리고 가리다."
"나의 이름을 그대 이름의 '겸' 자와 나란히 이마에 새겨 바치겠노라."
왕건은 자신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을 차가운 땅속에 묻어 놓고 심란한 마음에 냉산을 올랐다. 산새들은 저마다 즐거운 듯 지저귀는데, 울지 못하는 새가 된 그는 가슴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는데 길섶에서 매 한 마리가 파닥이며 울부짖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잡아서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날개가 축 처졌다.
"날개를 다쳤구나. 어쩌다가 그랬느냐."
"그래도 너는 마음껏 울 수도 있으니 나보다 낫지 않으냐."
"나는 날개를 모두 잃었어도 울 수조차 없구나."
"내가 있어 너는 곧 상처가 나을 테지만, 나에게는 누가 있어 이 깊은 상처를 치유해 줄까."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매는 조용히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건은 자신의 옷섶을 찢어 가여운 어린 생명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글 수필가 김옥매 call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