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치슨 이빨
사건 발생일로부터 4일째인 목요일 아침이 밝아 왔다.
새벽 두 시가 거의 다 되어 잠이 들었던 문호는 다섯 시간 동안의 깊은 수면에서 깨어났다.
평소 같으면 다섯시 반이면 깨어날 문호가 7시가 되도록 몸이 무거운지 이불 속에서만 꼼지락
거릴뿐 도무지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은 성에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냉랭한 추위가 방안에 가득했지만 초겨울 특유의 맑고투명한 햇살이 성에꽃을 녹이며 방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일어난 문호는 간단한 운동을 마친 후 어머니가 만들어 준 간단한
식사로 아침을 마치고 곧바로 진남포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진남포는 가슴에 붕대를 감고 깊은 수면에 빠져 있었다.
담당 의사도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도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병실을 빠져나온 문호는 병원의 경내를 거닐며 아침 공기를 즐기고 있었다.
'DAE RUK HOSPITAL'이라는 영자 간판이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HOSPITAL'글자를 읽던 문호는 HOTEL의 원어가 거기서 유래되어 왔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픽' 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호텔과 병원. 사람을 눕혀놓고 돈 벌기는 마찬가지이니
그게 그거 아니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얼마 후 각 병동에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각 전문 의사와 간호원, 환자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 응급실로 찾아오는 중환자들, 병원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처럼 변해 버렸다.
조금 전의 조용하고 차분하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뀐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 들것에 누워 링겔을 꽂고 들려 가는 사람, 절뚝이는 사람...
문호는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외과 과장을 찾아갔다.
김형식이라는 젊은 의사였다. 얼굴이 아주 깨끗하게 보였다.
"경찰에서 왔습니다. 진남포를 처음부터 보살펴 주신 분이라기에 찾아왔습니다."
"아, 네 앉으시죠. 그런데 무슨..."
"몇 가지 조사 좀 해보려구요."
의사는 문호에게 담배를 권하며 진남포의 병력 카드를 찾아 꺼냈다.
그는 여기저기 서랍을 뒤져 몇 장의 종이를 꺼넸다.
"상처가 아주 심합니다. 아주 결정적인 상처는 없었지만 여기저기를 다쳐 출혈이 많았지요.
그러나 회복은 시간문젭니다. 이제 얼마 후면 퇴원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에...칼에 맞은 자국에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사실 저희들도 수사 결과로는 문제점이 좀 있었습니다.
사실 저회들 의견으로는 이번 피습 사건이 단순한 피습이 아니라 피해자의 '자해' 사건으로
보고 있는 거죠. 자, 이 그림을 보십시오.
이것은 제가 이 병원에서 제공한 상처 부위를 옮겨 그린 것인데."
문호는 수첩을 꺼내 진남포 칼자국 형태의 그림을 보여 주었다.
"자, 보십시오. 선생님, 이 칼자국의 방향은 일정하게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그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상대방이 앞에서 칼질을 했다면 상처는 X자 형식으로
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한 거죠."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의사가 고개를 흔들며 문호를 바라보았다.
의사의 의견으로는 칼로 한 번 긋고 뒤로 물러서거나 아니면 피해자가 피해서 다시 대들었다면
칼자국의 방향은 일정한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점입니다. 저희들이 현장 조사를 한 결과 진남포가 최초의 습격을 받고 아파트로
돌아온 시간은 아무리 길게 봐도 6분 이상을 넘지 않았습니다.
6분 동안에 다섯 군데의 칼침을 맞았다면 순식간에 당한 것으로밖에 추측할수 없는데 이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며 머리를 끄덕이는 의사에게 문호는 어젯밤 생각했던 현장과 상황을 보충 설명했다.
즉 자해일 경우 상처가 처음에는 굉장히 깊고 끝은 약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칼로 자기 몸을 찢는데는 상당한 결단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최초에는
힘껏 찌르지만 그어 내려가면서 의욕이 떨어져 끝이 약하게 되며,
또 만일 상대방이 칼로 베었다면 처음 부분과 끝부분은 상처가 약하고 중간 부분이 깊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의사가 손으로 허공을 몇 번이나 그어 보더니 그 말을 쉽게 이해했다.
한참을 서서 생각에 잠기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호를 바라보았다.
"네, 타당한 말씀입니다 오늘 오후 5시까지 상처 부위를 다시 조사해 보겠습니다.
만일 자해라면 뚜렷한 상황을 상처가 보여질것입니다. "
"꼭 좀 부탁 드립니다. 그가 피습을 당한 것이냐 자해를 한것이냐 하는 문제는 수사에 아주
큰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꼭 좀 협조해 주십시오."
문호는 의사에게 명함과 함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본부로 돌아온 문호를 가장 반갑게 맞아 준 것은 최찬일 형사였다.
"아니 어딜 다녀오셨어요. 집으로 전화도 걸고 난리가 났었는데."
"병원에 좀 다녀오느라구... 왜 무슨 일 있었어?"
"어제 저녁에 성기준 씨 연행했잖아요... 자길 연행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내가 서울 바닥에서 도망갈 놈이냐' '박문호를 만나야 출두하겠다'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것도 같아 그냥 집으로 돌려 보냈죠. 오늘 두 번이나 전화가 왔어요."
"어디 가지 않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대요. 아주 굉장히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떡할까요?"
"진 형사가 갔으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좋아, 성기준 씨한테 전화 좀 걸어 줘, 그리고 S-TV 지대로 실장도 좀 오라고 하고...
오늘 좀 바쁠 거야. 최 형사도 오늘은 꼼짝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난 문호는 눈을 감고 잠시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이번 사건이 터진 이래 정말 숨 쉴틈 없이 쫓아 다녔다.
서울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다시 서울로 부산으로...
별달리 뾰족한 단서도 못 잡은 채 지금까지 숨가쁘게 뛰기만 했으니 몸이 강철이라도
어지간히 지칠 만한 때였다. 이 때 최찬일로부터 신호가 왔다.
성기준과 전화 연락이 된 것 같았다.
"저 박문호입니다. 성기준 씨..."
"나, 성기준이오."
그의 특유한 음성이 들려 왔다,
점잖고 길게 빼는 그래서 자기의 품위를 돋보이게 하는 그런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런 음성도 조금만 흥분하면 금세 억양이 바뀐다는 것을 일찍 알고 있는 문호였다.
"어젯밤 부산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렇습니까? 나 당신 부하들 때문에 망신당한 거 아시오?
도대체 아 성기준을 어떻게 보고 그러는 거요. 아무리 경찰이라고 그래 이렇게 터무니없이
사람을 망신 주고 말이오. 물론 경찰에 잘 협조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오.
그래서 처음부터 나섰던거 아니오. 어디 내가 돛떼기 시장에 날깡패요? ..
.내가 어제 보다는 화가 좀 가라앉았으니 내 지금 그 곳으로 가리다. 만나서 얘기합시다."
문호는 아침부터 기분 나쁜 전화를 받고 투덜거리며 앉았다.
"노 순경- 노 순경-"
노 순경이 교환실로 전화를 걸고 얼마 되지 않아 연결이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문호가 수화기를 집어들며 얼굴에 밝은 웃음을 짓는다.
"곽 과장님 저 서울 박문홉니다. 어제는 신세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 서울엔 잘 올라가셨나요?"
"덕분에요. 저 다름아니라 스타 호텔과 코스모스 호텔 관계 알아 보셨나 하구요?"
"아, 그거 우리 애들 양쪽으로 보내서 다 알아보았습니다.
말씀대로 고강진을 사이에 놓고 양쪽에서 줄다리기 한것도 사실이고 또 스타 호텔측에서
세 곱의 개런티를 제시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 때문에 고강진을 죽일 이유는 없다는 거죠. 스타에서는 이미 고강진을
포기하고 그대신 홍콩 배우 있잖아요, 그 쿵후 영화로 유명한... 네,
그 배우를 초청하기로 계약을 한 모양입니다. 뭐 이쪽은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곽 과장의 대답은 이미 예측한 대로였다. 김진구가 어떻게 입수한 정보인지는
몰라도 꽤나 정확하긴 했다. 그러나 사건 자체와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수화기를 놓고 서류를 뒤적이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성기준이 보였다.
"박문호 씨 얘기 좀 합시다. 어디 조용한 데 좀 없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요.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해고 삼해고 간에 이렇게 사람을 대접하시면 됩니까?"
문호는 그에게 담배를 권하며 비어 있는 회의실로 안내했다.
의자에 앉은 그는 시큰둥하니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의외로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문호가 당황했다.
"저희들이 무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 박사님도 지금 아주 난처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특히 사건 당일... 아, 그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요.
그보다 먼저, 성 박사님은 고강진과 김만호 회장님과의 관계를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김 회장님이 사생아 문제로 골치 아파하고 있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습니다만 그 대상이
고강진인 것은 이번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난 절대 이번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요. 재수없이 사건이
난 차에 함께 탔던 것 외에는... 오해 마시고 일을 차분하게 풀어 나가십시오.
내가 뭐 아쉬워서 사람 죽이는 일에 끼어들겠습니까."
"어제 부산에서 제가 김 회장 찾아간 것 아십니까?"
"예."
"그럼, 왜 피하셨습니까?"
"박문호 씨가 찾아온 것을 알고 제가 나서려는데 김 회장이 말렸습니다.
뒷문으로 절 빼돌린 거죠. 김 회장도 절 이상하게 본 모양입니다."
"좋습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좀 자세히 들어 주세요.
범인은 지난 11월 29일 밤 9시 45분 경부선 특급 열차 침대 차편 03-03호를 이용하여
시체만 남겨놓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때마침 맞은편 침대차에는 박사님이 타고 있었고요.
그뿐 아니라 당일 범인 목격자는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두 분만이 범인이 애꾸가
아니라고 진술했습니다. 또 한분은 까만 신사복을 입었던 분 말입니다."
"아 예, 생각이 납니다."
문호는 성기준의 눈을 마주 들여다보며 그를 연행하게 된 사유와 범인의 화장실 트릭,
그리고 곧 신부도 연행되리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러나 어리둥절한 것은 오히려 성기준이었다.
자기가 그렇게 완벽한 논리 속에 빠져나갈 틈도 없이 범인을 도와 준 공범으로 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보았을 때 범인은 분명히 애꾸가 아니었는데
다른 목격자들이 애꾸라고 하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박문호 씨, 내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죠. 목격자들의 진술은 두 가지로 갈라져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범인이 애꾸였다. 또 한편에서는 애꾸가 아니었다.
그런데 제가 보기로는 절대 범인은 애꾸가 아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뭔가 생각나는 게 없을까요?"
"?"
"생각해 보십시오, 난 그 신부라는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일하고 있는 분인지 이름도 얼굴도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목격담은 거의 일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즉 범인이 애꾸라고 진술한 사람들 말을 의심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문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김 순경이 다가와 S-TV 지대로 실장과
연락이 닿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문호는 전화에 대고 한참이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저녁 9시에는 지 실장과, 잠시 후 11시에는
원주 교구로 수사차 내려갔던 진 형사를 만나야 했고 오후 1시에는 어느 치과 의사와
점심 약속이 있었다.
또 오후 5시에는 대륙 병원 진남포 상처 부위를 부탁한 의사와 만나 진남포의 자해
여부를 조사해야 했다. 업무의 중요성으로 보아 부하에게 맡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흘깃 쳐다보니 성기준은 신문을 들썩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호는 그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지난 여름, 토곡리 밀실 살인 사건 때
양중달이라는 사람을 잘못 잡아 법정에까지 서게 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조한 것은 성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문호 자신이었다.
성기준에게 어떤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상황, 상황만으로는 입건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문호였다.
이때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진 형사가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틀렸습니다, 틀렸어요."
"틀리다니, 자, 앉아서 차근차근 보고해."
진 형사는 메모지를 꺼내 문호 앞으로 내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러댔다.
무엇인가 아주 낭패한 표정이었다. 문호는 메모를 들여다보았다.
신부의 신원과 최근 생활이 적혀 있었다.
성명: 김요한 (본명 김기환)
생년월일: 1932년 7월 28일
본적: 강원도 춘천시 소양로 1가-257
주소: 서울 동대문구 석관동 1-47
현근무처: 원주 교구
학력: 한국 천주교 신학 대학 졸업, 필리핀 신학 대학 졸업
최근 경력: 필리핀 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1983년 11월 27일 귀국,
1983년 11윌 30일 대구 초청 미사 집권
저서: 천로역정, 한국 천주교 100년사, 미사 의식과 유교 의식의 공통점
대략 위와 같았다.
사건 당일 대구에 내려간 것은 그쪽 교회의 초청 미사로 내려간 것이고 이것은 귀국 3일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열차 내의 살인 사건을 그냥 지나칠수가 없어 대구에서 올라오는
길에 신문사와 수사계를 들러 자기가 대전 도착 직전에 화장실을 사용한 점과 경찰과
신문의 추리에 미스가 있음을 밝힌 것이라고 했다.
어느 구석에도 성기준이나 김만호와 연결되는 부분이 없었다,
특히 사건 당일의 목격에 의하면 아무래도 범인을 애꾸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첨부했다고 했다.
"그럼 외국 유학 가서 귀국한지 3일밖에 되지 않는다 이거지."
"네, 그것은 교회측에서 증명해 주었구요. 여러 가지 자료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렇다면?...수고했어... 나가 있어."
문호는 어깨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까지 버티어 온 것도 성기준의 '화장실 트릭'에 한가닥 회망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마지막 기대까지 무너진 것이다.
신부의 진술에 따르면 '열차가 달리고 있고 시체가 발견된 이후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어디로 빠져 달아났단 말인가. 일반 열차 같으면 뛰어내린다는 가정이라도
할 텐데 부산-서울 간은 5시간 30분 동안에 돌파하는 초특급 열차가 아닌가?
만일 범인이 열차에서 뛰어 내렸다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대전의 이민우 형사의 보고에 의하면 천안에서 대전까지의 철로 주변에 피의 흔적은
전혀 없다고 했다. 문호는 일단 성기준에게 깊이 사과하고 돌려보냈다.
이제까지의 태도와 달리 별소리 없이 곱게 물러갔다. 혐의를 벗은 것만도 홀가분하게
느낀 것 같았다.
문제는 최초의 원점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버렸다,
성기준이나 신부의 혐의가 벗겨지면서부터 새로 시작된 문제 즉 '범인은 과연 애꾸였느냐?'
하는 의문과, 그렇다면 베이지색 바바리 여인과 서울역 검표원과 열차 내 승무원의 거짓
진술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들이 사전에 결탁한 것인가,
그리고 범인은 승무원 대기실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자' 문호는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일어났으나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아득함을 거둬내지 못하고 있었다
'화장실 은닉'의 추리가 깨어진 이상 사건은 원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야 한단 말인가.
광화문을 빠져나와 종로 1가에서부터 4가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약속 시간보다도 40분이나 일찍 치과 병원에 도착했다.
진행중인 것은 어떻든 마무리짓기로 했다.
"아이구, 박 형사님.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왜 이리 풀이 죽어 있습니까?"
"이거, 사건 하나가 터졌는데 영 풀리지가 않는군요.
자 오늘 내가 점심 살 테니 어디 조용한 데 안내나 좀 하십시오."
"아니, 단골 손님한테 점심을 얻어먹어요? 천만에 이빨 장사는 해도 돈은 내가 더 잘 벌텐데...
자 나갑시다. 내가 살게."
닥터 정은 문호를 가까운 일식집으로 안내했다.
식사 시간이라 식당이 몹시 소란스러웠지만 특별히 부탁해서 독실로 옮겼다.
"뭐, 물어볼 게 있으시다구요?"
밥상이 물러가자 닥터 정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아시죠, 탤런트 살인 사건 말입니다."
"아, 그 사건 맡으셨군요."
"네, 그런데 이게 지금 오리무중입니다.
실마리가 잡힐 듯하다가는 사라지고 또 잡힐 듯하다가는 사라지고...
정말 속된 말로 미치고 펄쩍 뛰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뵙자고 한 건 다름아니고 그 죽은
탤런트 목에서 이상한 상처가 발견되었어요. 어떻게 보면 사람 이빨 자국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짐승 이빨 자국도 같은데 이게 도무지..."
"아, 그 사건 참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우리 애들도 왜 범인 못 잡느냐고 난리예요.
그건 그렇고 그 이상한 이빨 자국이라는 거 어떤 겁니까7"
문호는 상처 부위의 확대 사진과 손수 그린 그림을 꺼내 보여 주었다."
"자세히 좀 보십시오. 왼쪽 송곳니부터 오른쪽 송곳니까지의 간격은 보통 성인의 경우 6cm 정도
되거든요. 이 이빨 자국도 약 6cm 정도의 간격이 됩니다. 그런데 이 상처를 보세요.
마치 이빨 전체가 송곳니로만 되어 있는 것같이 끝이 날카롭습니다.
넓적한 이빨 자국이 하나도 없어요. 거기다가 이빨 끝이 불규칙적으로 파여져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이게..."
그림과 사진을 번갈아 보던 닥터 정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사람 이빨입니다."
"사람 이빨요?"
"네, 그러나 아주 특수한 사람의 이빨입니다. 이런 이빨을 허치슨 이빨이라고 합니다."
"허치슨 이빨요? 그게 뭡니까?"
"허치슨 이빨이라고 하는 것은 에, 선진국에서는 보기 어렵고 중진국이나 후진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특수 형태의 이빨인데 이건 선천성 매독 환자나 음성 매독 환자만이 가지고
있는 이빨입니다. 부모가 매독균을 가지고 아이를 임신했을 경우 생기는데,
매독 환자가 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스피로헤타 혈증 파동'이라는 상태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동의 주파수가 줄어들게 되는데 이때 임신을 하면 태아에
감염이 되지요.
선진국에서는 임신부에 대한 혈청 검사를 사전에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안 생기지만
후진국에서는 사전 혈청 검사 같은 위생 처리를 하지 않으니까 태아가 감염된 채 태어납니다.
이런 경우 매독에 감염된 아이는 처음부터 이런 기묘한 허치슨 이빨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특히 앞니에서 생기는 게 특징인데 나사 돌리개 같은 모양으로 이빨 가장자리에 홈이 패이고
끝으로 갈수록 예리해져서 마치 송곳이 듬성듬성 나 있는 것처럼 됩니다.
육안으로 얼핏 보면 모르는데 이렇게 이빨 자국으로 보면 금세 알게 되죠.
이 매독이라는 게 아주 무서워요. 심한 사람은 피부 조직이 망가지기도하고 얼굴이
흉칙하게 늘어지기도 하죠. 어떤 사람은 골격 구조까지 변합니다."
"그럼 이 이빨 자국의 주인공은 매독 음성 반응이 나타날 확률이 많겠군요?"
"그야 100% 확률이죠."
"..."
나흘 동안의 수사 끝에 알아낸 것이라곤 범인이 허치슨 이빨을 가진 나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 같은 위생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시대에 태어난,
그러니까 적어도 40대 이상은 되었다는 결론으로 얻은 것이었다.
닥터 정과 헤어져 나온 문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세시반. 대륙 병원 진남포 담당 의사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90 분 이상이 남아 있었다.
문호는 택시를 잡아타고 삼청공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짧은 시간 이나마 머리나 식히며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건의 실마리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얽혀 있는지 그 실마리가 어느 틈 속에 묻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너무 바쁘고 긴장되었던 나흘, '화장실 은닉 트릭'의 발상까지는 좋았는데 엉뚱하게 빗나가
버린 결과. 애매한 신부의 의심, 그리고 오늘 알아낸 허치슨 이빨, 진남포의 자해 가능성 추리,
박영숙의 자살 사유, 진남포의 끈질긴 함구, 고강진과 진남포 두 사건의 연관성...
하나도 풀어지는 것이 없는 사건들이 그를 얼떨떨하게 만들어 버렸다.
삼청공원의 겨울 바람은 을씨년스럽게 불고 있었다. 산책하는 사람조차 얼어 더욱 쓸쓸해 보였다.
아직 지지 않은 낙엽들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버린 여린 가지에 애처롭게 붙어 있었고
벤치 위에는 이미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벤치에 쌓여 있는 낙엽들을 치우지 않고 그냥 깔고 앉았다.
오늘 따라 무척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넷. 집에서는 빨리 장가들라고 성화였지만 집에 있는 날보다 수사 때문에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은 판국에 결혼한다고 해서 더 편할 것도 없는 처지라 미루어 왔던 것이다.
또 그렇게 애타도록 따라다니는 여자도 없고 누군가 죽자하고 사랑해 본 일도 없었다.
어쩌다 어딘가 초대받아 달콤하게 살아가는 가정을 볼 때나 불현듯 가정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 시간이 지나면 그도 그뿐이었다.
문호는 갑자기 진남포는 왜 여태 결흔하지 않고 있나 하는 생각에 미쳤다.
나이도 사십이 훨씬 넘었다. 생활이 어렵고 얼굴이 좀 뭣하기는 해도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의 생활은 보장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떻든 짝은 맞추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독신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이 없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쌍한 동생 때문에?
그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동생은 이미 자기 생활을 꾸려갈 경제력이 있다.
많지는 않지만 안마사의 수입으로 생활은 된다. 그렇다면 얼굴이? 얼굴이?...
문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공원 입구까지 마구 달려 영업용
승용차를 잡아 대륙 병원 진남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마구 달려갔다.
한편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근한 형규는 몇 가지 기사를 정리하고 다시 마포 신아 아파트로
달려갔다. 형규는 교대하는 어젯밤의 경비원을 불러 인근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젯밤 귀찮게 해드리고 또 쫓아왔습니다 갑자기 뭣인가 떠오른생각이 있어서요."
"에,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다면야..."
"다름아니라 사고가 나던 날 밤 말입니다.
그날 진남포 씨가 경비실로 들어온 게 밤 12시 30분 경이 틀림없지요."
"예, 틀림없어요. 그날따라 날도 스산하고 또 안개가 많이 끼어서 순찰을 돌고 들어와 막
업무일지를 쓰고 난 뒤였거든요. 제가 일지 쓰는 시간이 대개 12시경인데 그날 당일은
조금 늦었습니다. 시계로 확인은 안 했어도 틀림없을 겁니다."
"미안하지만 그 전날 밤 순찰하던 상황을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날 밤 순찰이요?...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개가 너무 끼어서
순찰을 돌았죠. 요샌 좀도둑에 강력범까지 너무 설쳐대서요.
9시 30분경 층층이 오르내리며 점검했죠."
"진남포가 그때 있었다고 했죠, 그것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순찰을 돌 때 어떤 집은 TV를 켜놓은 집도 있었고 어떤 집은 불을 끄고 일찍
주무시는 집도 있었습니다. 407호가 진남포 씨 집인데 그때 베란다에서 보니까 방에
불도 켜져 있었고 또 대사 연습하는 소리가 한참 나고 있었죠.
별일 없으려니 하고 5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상황이죠?"
"순찰을 도실 때 진남포가 대사 외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죠?"
"예, 들었습니다."
"그때 대사 외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글쎄요, 확실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그때... 소리가... 아무튼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이북 사투리가 들려 왔었어요. '간나이 자식 너는 부르조아 간나 새끼야,
핵명 전선에 나가 공을 세우라우야' 뭐 이런 소리였습니다.
아무튼 참 열심히 연습했죠, 보통 때도 대본 연습 때문에 이웃집 항의를 받은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 더 자세히 들은 것은 없었습니까?"
"글쎄요... 그나마도 텔레비전 대사 외우는 소리니까 호기심을 가지고 잠깐 들었지 남의
집을 엿보거나 엿들을 수는 없죠.
순찰 돌때는 한바퀴 획 돌고 별일 없으면 그냥 내려오는 게 보통이죠."
"진남포 씨 얼굴도 보았나요?"
"얼굴은 못 보죠. 베란다 방향으로 나 있는 창의 위치가 높아요.
일부러 무엇을 놓고 들여다보기 전에는..."
형규는 그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커피를 마시고 나가려는 그에게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찔러 주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붙들고 늘어졌다가 아침 일찍 찾아와서 귀찮게 했고 또 대답도 순순히
응해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는 한동안 사양했지만 형규는 그냥 돌아서서 S-TV로 달려갔다.
형규는 도착하자마자 제작 담당 이성구 이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자리에는 없다고 했다.
Q신문 기자라고 밝힌 게 잘못이었다.
이성구 이사는 이미 겹겹이 진을 치고 기자와 경찰의 접근을 봉쇄하고 있었다.
형규는 기다리다 못해 문호에게서 들어 알고 있는 지대로 탤런트 실장을 찾아갔다.
그도 몹시 피곤한 듯 무거워 보이는 몸으로 형규를 맞았다.
커피가 날라져오고 담배를 권하고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낸 뒤 질문을 시작했다.
"진남포라는 배우의 역할이 '흥남 철수 작전'에서 어느 정도의비중이 있습니까?"
"비중이오? 비중이랄 것까지 있나요?
공산당 내무 서원으로 나오는데 전반부에는 조금 나오지만 후반부에는 거의 안 나옵니다.
원래 진남포, 고강진 그리고 여주인공 홍청자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진남포가 소작인의
아들이고 고강진과 홍청자가 지주의 아들로 나오는데, 공산 혁명이 일어나자 고강진과
홍청자가 부르조아의 자식이라고 진남포에게서 괴롭힘을 당하죠.
진남포가 홍청자를 짝사랑했거든요.
진남포 등쌀에 둘이 일단 남하했다가 9.25-6.28수복으로 다시 흥남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1.25-6.4후퇴를 맞아 둘이 흥남에서 이별을 하게 되고... 뭐 그런 얘기라 후반에
잠깐 고강진의 추억 장면에 한 번 더 출연하고 끝이죠."
"그럼 진남포가 부르조아 아들이라고 고강진을 괴롭히는 장면은 도입 부분이 되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 대본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지대로 실장은 캐비닛에서 대본을 꺼내 형규에게 넘겨 주었다.
팔절지 갱지를 옆으로묶어 타자로 찍은게 '흥남 철수 작전'의 대본이었다.
지대로 실장은 국군 장교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지금 촬영은 얼마나..."
"아, 저기 마침 이 작품 프로듀서가 오는군요. 잠깐 기다리세요."
말을 나누던 지대로 실장이 밖으로 뛰어 나가더니 늘씬하고 예리해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자를 동행해서 다시 돌아왔다.
"인사하시죠. 이분이 이번 대작을 맡고 계신 박봉민 PD구요.
이쪽은 Q신문에 있는 기자입니다. 이번 고강진 사건 때문에 나오셨나봐요."
"아, 그렇습니까? 지금 바쁜데...나중에..."
"잠깐이면 됩니다. 저 나름대로 사건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협조해 주십시오."
"..."
마지못해 의자에 앉은 박 PD는 형규를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히 보였다.
자고로 신문 기자는 멀리도 가까이도 못할 존재라는 것을 그는 일찍 터득해 온 터였다.
"다시 말씀 드려야겠군요. '흥남 철수 작전'은 지금 어느 정도 촬영이 되어 있습니까?"
박 PD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대본을 한장 한장 넘겨가며 진행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강진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갈팡질팡했습니다.
65%이상을 끝내고 이제 눈이 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라마라는게 대본 순서대로 촬영하는 게 아니고 영화같이 촬영하기 좋을 때 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아무튼 여름 가을 장면은 전부 끝냈습니다."
"그럼, 진남포가 고강진과 흥청자를 괴롭히는 장면은 어느 계절이 되죠?
이상하다는 듯 대본을 뒤적이며 PD에게 물었다.
"그건 6^256^25 직전이니까 여름 장면이죠..."
앉아 있던 형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눈이 휘둥그래지며 한참을 멍하니서 있었다.
"지 실장님 이 대본 하나 얻을 수 있습니까?"
"그야 뭐, 어렵겠습니까? 필요하시면..."
형규는 두 사람에게 인사도 변변히 못하고 허둥거리며 방송국을 나왔다.
광장에 세워 놓은 자기 차에 오르기가 무섭게 액셀레이터를 밟으며 진남포가
입원해 있는 대륙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한 형규는 진남포를 면회할 수가 없었다.
그의 병실은 임시로 독실로 옮겨졌고 의사와 간호원이 상처 부위를 특별 검진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떼거지를 써도 거절만 당하고 말았다.
일층 대기실로 내려와 문호에게 전화 걸었지만 문호도 자리에 없었다.
그 시간 의사와 간호원은 진남포를 치료할 시간은 아니었다.
문호가 부탁한 상처 부위의 상태를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도 문호의 의견에 매우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만일 상대방이 칼을 가지고 덤볐다면 결투는 한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결투가 벌어지면 칼이 몸을 그어간 방향이 일정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의 결투라면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박 형사의 말에 따르면 결투 시간은 길어야 5, 6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상처는 당연히 X자로 나 있어야 했다. 또 박 형사의 추리대로 진남포가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 자해 사건이라면 상처의 처음의 부분은 깊을 것이고 끝부분은 약할 것이다.
그 상처가 또 가해에 의해 발생된 것이라면 첫부분과 끝부분은 약하고 중간 부분이 깊을 것이다.
진남포의 가슴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어 상처를 들여다보던 의사는 계속 기록도 하고
그림도 그려가며 검토하고 있었다. 작업은 약 30분간에 걸쳐 끝이 났다. 의사가 밖으로
나오고 진남포도 최초의 병실로 옮겨졌다.
형규가 진남포를 면회한 것은 검사가 끝나고도 10분이나 지난 뒤였다.
"저, 진남포 씨 Q신문 민형규 기잡니다."
"수... 수고하십...니다. 그런데...무슨..."
"뭣좀 여쭤 볼 일이 있어서요,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병원에서 치료를 잘 해주어 많이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남포 씨... 그날, 피습을 당하던 날 상황을 설명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 말을 꼭 해야 합니까?"
"뭐, 의무같은 건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는 봐야죠"
"..."
"본인이 피습을 당했는데 침묵만 지키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혹 피습자를 잘 알고 있는 사이는 아닙니까?"
"아...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럼 말못할 이유가 없지 않아요?"
진남포는 입을 다물고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갈색 나뭇잎들이 앙상하게 매달려 하늘거리고 있었다,
형규도 입을 다물고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 그날... 오늘이 참 무슨 요일이죠?"
"오늘이 목요일입니다. 12월 3일."
"네...그날이...일요일이었죠...제가 방송국에서 집에 올때 모르고...
대본을 놓고 와서 다시 방송국에 갔습니다.
거기서 '쇼는 즐거워' 녹화 잠깐 구경하고 어딜 좀...들렀다가 집으로 왔죠."
"잠깐, 그 어딜 들렀다는 데가 어디죠?"
"..."
"좋습니다,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집에 돌아와 대사 연습도 하고 연기 연습도 하고 그랬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또 일을 했죠... 12시가 훨씬 넘으니까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해서 밖으로 바람을 쏘이러 나갔습니다... 경비실에 가서 잠깐...
놀다가 거리로 나갔는데...안개 속에서 갑자기...바바리를 입은 뚱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칼을...
휘두르고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였죠.
저는 피투성이가 되어 아파트로 돌아왔는데...그후로는 기억...이... 잘..."
"손이나 팔목에는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까?"
"네, 보시다시피 위험한 부분만 당했습니다, 가슴과 옆구리..."
상대방이 쳐들어오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손이나 팔뚝으로 온몸을 감싼다.
마치 권투 선수가 반사적으로 커버하듯이.
그러나 진남포의 상처는 오직 가슴과 옆구리뿐이었다.
그리고 형규가 '자해'를 했다는 증거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더 물어 볼까 어쩔까 하고 있는데 병실 문이 후다닥 열리며 문호가 뛰어들어왔다.
들어오던 문호가 형규를 보고는 멈칫서더니 팔뚝을 끌고 밖으로 불러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음, 나 신아 아파트 경비원하고 방송국 PD와 지대로 실장을 만나고 왔어...
그리고 곧바로 이리로 온 거야. 그런데 자넨 어디가 있었어. 아주 중요한 단서가 생겼는데..."
"그래? 음 나도 사실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잡았어. 자 담당 외과 의사한테 가보자구.
뭣 좀 부탁한 게 있어."
문호는 형규를 이끌고 담당 의사에게로 갔다.
진남포를 검사하고 돌아온 외과 과장이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다가 일어나 맞아 주었다.
"아 박 형사님, 지금 막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이거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낙 사건이 미묘해서요..."
"별 말씀 다하십니다. 저희들이야 이런 게 직업인 걸요."
외과 과장은 노트와 기록 카드를 꺼내 문호에게 보여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 잘 보십시오. 우리 몸에는 각 부분에 근(abdominnis)이라는 게 있습니다.
왜 학교 다닐 때 아령을 많이 하면 이두박근이 발달한다 어쩐다 하는 말 있잖아요.
이런 근이 있는데 몸통 부분에도 외복사근(obliqus externus abdominis)과
내복사근(obliqus internus abdominis) 이라는 것이 있죠.
외복사근은 복부의 전부를 감싸고 있고 그 근육 밑을 형성하고 있는 또 한 곁의 근육이
내복사근입니다.
그리고 복직근이라는게 있는데 이것은 복벽(배 속의 내부벽)의 깊숙이 있는 것이죠.
진남포의 상처는 갈빗대 부분부터 하복부 방향으로 상처가 나 있는데 이 갈빗대 부분은
사실 칼이 깊숙이 파고들지 못합니다.
결국 복부 근육을 조사했는데 역시 위에서 아래로 강에서 약으로 상처가나 있었습니다.
상단 부분은 내복사근까지 상처가 나 있고 하단 부분은 외복사근만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힘을 주고 찔렀다가 내려오면서 손을 뗀 것으로 볼 수 있는 거죠. 상처의 넓이로 봐도
상단은 넓고 하단은 좁습니다.
또 한 가지 가해자는 의학적인 지식은 없겠지만 몸통의 어느 부분이 위험 부위이고 어느
부분이 안전한 부위인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아주 극히 위험한 곳은 교묘히 피해 갔거든요."
"네, 상황을 대강 알겠습니다. 만일 혈청 검사를 하면 결과는 언제쯤 알 수 있겠습니까?"
"혈청 검사로 무엇을 알아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글쎄요, 웬만한 건 2, 3일이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뭣 때문에 혈청 검사를 하려고 하죠?"
"진남포가 혹시 매독 음성 반응이 있지 않나 해서 그럽니다.
사실은 죽은 고강진의 목에서 이상한 이빨 자국이 나왔거든요.
이상하게도 이빨 자국이 마치 짐승 이빨 같았어요.
어떤 분에게 여쭤 봤더니 허치슨 이빨 같다고 해서 알아보려구요."
"아, 허치슨 이빨. 그거 뭐 바쁜데 혈청 검사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내가 직접 허치슨 이빨 여부를 조사하고 오죠. 시작한 길에 X-RAY도 찍어 보죠.
허치슨 이빨 소유자는 두개골 형태도 특이하니까요.
물론 외형만 봐도 알지만 정확한 기록도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