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기한 역사적 사실 몇가지에 대해서 발표하였습니다.
비거
세계최초의 비행기는 라이트형제가 만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서양의 라이트형제보다 300년 앞서 조선에서 비행물체가 발명되었다는 사실?
임진왜란당시 영남의 진주성(晉州城)이 왜군에 포위되었을 때 성주와 평소부터 친하던 정평구가 이를 만들어 타고 성으로 들어가 성주를 태우고 약 10m 높이로 날아가 30리 밖에 이르러 내렸다는 설도 있고, 포위된 진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것을 타고 가서 구원병을 요청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와 구조는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와 중국 진나라 장화의 박물지등 옛 중국기록에도 남아있지만 설계도와 실제제조된 것이 없어 증명되진 못하지만 전의 기록들로 보아 거짓은 아니고,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조선이 만든 세계최초의 방탄복
현대군인의 필수품 방탄복
그런데 방탄복이 세계최초로 만들어진 것이 조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서양 열강들이 무역을 하기위해 이양선을 타고 우리바다를 기웃거리던 흥선대원군 때 프랑스신부를 죽였다는 핑계로 프랑스정부는 강화도에 상륙해 공격합니다. 그러나 대기 중인 양헌수가 이끈 500명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사망 6, 부상 30여 명의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입니다.
서양을 최초로 경험한 병인양요에서 흥선대원군과 대신들은 서양의 신무기의 힘에 겁을 먹고 막을 방도를 생각하다 방어력을 높여 서양의 총을 막으면 될 것이라 생각에 이르러 방탄복을 만들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렇게 연구를 거쳐 앞뒤로 13장 즉 26장의 목면을 겹쳐 만든 면제배갑을 완성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방탄복 면제배갑을 전국에 보급하게 되는데 이는 총알은 막을 수 있으나 무거운 무게, 여름에도 뛰어난 보온성 때문에 면이라는 특성으로 물을 흡수해 무게를 더해주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면제배갑을 보급한 뒤 얼마 안돼서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납니다.
6월의 더위를 극대화시키는 면제배갑의 열기를 참으면서 조선군은 돌격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면제배갑이 미국이 날린 총알을 모두 막아내었습니다.
자신감이 생긴 조선군은 더 돌격하게되죠. 하지만 면제배갑에 가장 큰 문제점은 면으로 되어 불에 너무 약했던 것이었습니다.
미군은 총알세례에도 용맹하게 달려드는 조선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적고 있으며, 대포 공격으로 파편에 맞아 불에 붙은 조선군을 보기도 했다고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신미양요는 조선의 승리로 끝을 맺었고 미국은 당시 유일하게 한 벌 남은 면제배갑을 가져갔고, 지금까지 미국의 가장 유명한 박물관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세계최초의 방탄복으로 전시되어 있다가 발견되어 반환운동을 펼쳤고, 현재는 우리나라가 10년간 대여하는 조건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속 '무명'이 이 방탄조끼 면제배갑을 최초로 시험하는 장면으로도 만나볼 수 있답니다.
모차르트가 똥을?
모차르트하면 음악의 천재 살리에르의 질투 피가로의 결혼 등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천재들은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일까, 모차르트 또한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변음욕증 즉 똥을 싸는 모습이나 똥냄새, 똥을 보고 흥분하는 이상한 사디즘 같은 것입니다. 그가 평생 보낸 편지 300여개 중 10%가 똥에 관한 거였으며 내똥꼬를핥아라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한글, 과연 백성을 위한 글인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로 우리는 지금까지도 과학적이고 새롭고 독자적 글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성계를 시작으로 쭉 건국의 틀을 다지던 조선은 세종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예술 과학 등 여러 가지를 개발을 합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훈민정음.
그런데 한글이 그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불쌍하고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만들어진 것일까요?
인정하기 또 다른 진실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받는 의견이 있습니다.
나랏말싸미 듕국에 달아 어린 백성을 가엽게 여겨 만들어졌다고 언해본에 씌어져있죠
그런데 또 다른 해석들과 증거들이 등장하여 유명학자들이 다른 의견과 증거를 제시합니다.
당시 조선은 최전성기였고 유교 사대주의가 강하였던 조선은 더더욱 양반과 농민 상민 천민 사이의 경계를 뚜렷하게 해야 했기 때문에 한글을 만들어서 일반 백성이 쉽게 배울 수 있게 하고 실제 공문서는 한자로 써 일반 평민들이 알 수 없게 하고 양반들만 알게 하려던 것이라는 겁니다.
나폴레옹은 숏다리가 아니다
1821년 5월 5일,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후 6년간 유배되어있던 아프리카의 고도 세인트헬레나에서 사망한 나폴레옹의 사후 측정키는 약 167.6 cm 로 당시 프랑스 성인남성의 평균키 164.1 cm 를 3.5 cm 나 상회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가 사망한지 186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 사람들은 그를 단신의 마스코트로 여기고 있을까 ?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로 전유럽 최고권력자로 집권하고 있던 당시 그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은 바로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던 황실근위병들이었다.
황제의 신변을 책임지고 있던만큼 이들은 프랑스제국의 최정예부대였으며, 당연하게도 특별히 눈에 띌만큼 체격이 거대하고 체력이 특출난 사람들만 선발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물론 전유럽 성인남성들의 평균체격을 크게 웃돌던 황실근위병들, 바로 이들을 이끌고 전유럽의 전장터를 휩쓸고 다닌 것이 황제 나폴레옹이었다.
언제나 체격이 매우 좋은 황실근위병들 사이에 파묻혀 사람들 앞에 등장하였던만큼 실제 나폴레옹의 체구가 평균을 웃돌았음에도 타인들의 눈에는 상대적으로 무척 왜소해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나폴레옹의 키를 더욱 작아보이게 한데는 그가 즐겨쓴 모자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수 있다.
황실근위병들이 착용하던 삼각모는 세로로 쓰게되어있어 그렇지않아도 거구인 그들의 체격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던반면 나폴레옹은 검은 삼각모를 가로로 즐겨썼고 이것이 그를 더욱 작아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앞서 언급한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나폴레옹이 52세를 일기로 사망한 후 그를 검사한 의사의 소견서에는 키가 5.2 피에드 (Pied) 로 기록되었다.
이는 프랑스의 도량형으로 1피에드는 약 32.48 cm 이고 이를 환산하면 약 167.6 cm 의 신장이 나온다.
이것이 나폴레옹의 최대숙적이자 끝내 그의 야망을 좌절시킨 영국인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곡되었다.
프랑스의 도량형 피에드로 기록된 키를 영국의 도량형 피트와 비슷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프랑스의 1피에드는 약 32.48 cm 인 반면 영국의 1피트는 30.48 cm 이다.
나폴레옹의 키 5.2 피에드를 5.2 피트로 계산하면 약 167.6 cm 가 아닌 약 157.5 cm 가 나온다.
무려 10.1 cm 의 오차가 생겨버린 것이다.
바로 이 착각과 잘못된 전달로 인해 한때 전유럽을 호령하며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프랑스황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키는 졸지에 10cm 이상 깍여버리게 되었고, 어느 사이 단신남성들의 영웅으로 새로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금씨가 김씨가 된 사연
대한민국에서 가장많은 성씨 김씨. 분명 쇠금 자를 쓰는데 왜 김씨라고 부를까
금시를 김씨로 바꾸게 된 사연.
고려를 뒤집어 엎어버리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
그는 자신이 무력을 이용해 정권을 잡았기에 무신을 두려워해 사병을 혁파하고 최무선이 만든 화포도 반란에 이용될까 봉인시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튀어나온 금씨 이야기
민심을 잡아야 나라를 세울수 있는 명분 이 되기 때문에 목자득국(이씨가 나라를 얻는다)장차 이씨 성을 가진 이가 임금이 된다는 뜻으로, 고려중엽에 불린 가요이다.
이를 이용해 이성계일파는 민십을 잡았는데 이후 금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한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이씨는 나무이기 때문에 나무는 흙을 이기고 흙은 물 물은 불 불은 쇠 쇠는 나무를 이기는 법칙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씨가 나무라면 금씨는 이씨를 이긴다는 것이 아닌가. 그에 놀란 이성계는 금시를 다 잡아 죽이려고 했지만 조선때에도 가장많은 성씨는 금씨였기 때문에 하는수 없이 금씨가 이씨를 이길수없게 금씨의 힘을 꺾는다는 생각으로
금씨의 쇠금자를 쇠금으로 쓰되 김으로 발음 하게 만들고 그후 지금까지 금씨를 금씨라 하지 않고 김씨라 발음하게 된것이다.
서재필의 굴욕
미국에서 의사생활을 하다가 나라를 위해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간 그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고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건국을 위해 귀국했을 때 많은 지지를 받은 박사이다. 그런데 그가 간호사였다는 증거들과 일화들이 나왔다.
미국 의대에서 그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고 어느 대학의 간호학과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의사라는 이유로 많은 지지를 받은 그였기에 만약 그가 간호사라는 것이 알려지면 무시당하고 건국당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까봐 밝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승만과 서재필을 권력다툼으로 여러번 만남을 갖게되었고, 만남 뒤 5분 정도 단둘이 있게 되는데 그때 한 대화내용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때의 대화가 아마도 서재필이 간호학과였다는 약점을 건드려서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