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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남의 유익을 구하므로 덕을 세움
<고린도전서 7장>
“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11 (만일 갈릴찌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34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36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37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고린도전서 8장>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린도전서 9장>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전서 10장>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오늘 성경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부터 10장까지인데, 중요한 말씀 10장 23절 24절만 읽겠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는 지금 교회 건축 안에 와있다. 모든 목표는 교회 건축을 위한 것이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로 교회 건축을 위한 말씀이다.
1. 육신은 성육신의 기반이 됨
고린도전서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는 '육신'이 있는데, 그 육신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문제가 많지만 성육신의 기반이 되는 것이 육신이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무작정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될 때 육신이 있어야 육신이 된다. 육신이 없으면 말씀은 말씀대로 허공에 있게 되고,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은 또 감춰져 버린다. 하나님이 나타나려면 말씀이 있어야 하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확증이 된다. 육신이 없으면 말씀이 나타날 수가 없다.
지난번에 몸의 원래 뜻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했다. 몸에 따라 좋은 소식이 오기도 하고 나쁜 소식이 오기도 한다. 원래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이 몸인데 잘못되어서 나쁜 소식도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 몸은 어찌하든지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몸이 되어야 축복된 몸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몸으로 사람을 때릴 수도 있고 몸으로 요구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나쁜 소식이 되는 것이다. 몸으로 내가 누구를 사랑할 수도 있고, 몸으로 내가 누구를 살릴 수도 있고, 몸으로 내가 누구를 도울 수도 있는데, 그럴 때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몸이다.
우리 일생은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고 하나밖에 없는 몸인데 그 몸을 가지고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몸이 되어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 육체 없이는 하나님도 당신의 말씀을 가져올 수가 없다. 하나님 말씀도 결국 육체를 통해서 가져온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책을 보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선지자들이 가져온 말씀이다. 그러면 선지자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가져 왔는가? 선지자들이 몸이 있으니까 우리에게 가지고 왔다. 선지자들이 만일 몸이 없고 영이었다면 우리는 이런 성경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이 몸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몸으로써 우리에게 하늘나라 소식을 가져온 것이다.
육체 없이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수 없다. 그래서 몸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이 거할 처소가 바로 우리 몸(육신)이다. 이 전이라는 말과 형상이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형상이 없으신 분이시니까 그 형상 안에 거해야 된다. 형상이 바로 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영으로 지어놓은 것이 아니라 몸-사람으로 지어놓았다.
성령의 전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뜻은 하나님이 거할 몸으로 지어졌다는 뜻이다. 사람은 영이 아니다는 것을 철저하게 알아야 된다. 마치 사람이 영인 것처럼 생각한다. 또 무슨 영을 받았다고 해서 잘못된 경우도 있다. 사람은 영을 받으나 안받으나 역시 사람은 몸이다. 영을 받을 수도 있고 안받을 수도 있는데 받아도 사람이고 안받아도 사람이다. 영을 받았다고 해서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몸은 악한 영을 받을 수도 있고, 선한 영을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을 받을 수도 있다. 심지어는 성경에 거짓말하는 영이 들어갔다는 말도 있다. 사람의 몸은 껍데기는 껍데기인데 그렇지만 그 속에 무엇이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 사람의 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껍데기인 것 같지만 사람을 만들어놓았다. 사람은 영(영물)이 아니고 몸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필요하다. 영물은 하나님께 필요할 것 같지만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영이시기 때문에 또 영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영이 아닌 몸을 가진 존재를 필요로 한다. 옛날에 나는 영(영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되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하나님이 영이신데 내가 또 영이면 무엇 하겠는가? 하나님이 영이시니까 나는 몸이어야 되는데 몸의 소중함을 몰랐었다.
2. 그런데 육신-사람에게는 많은 형편과 사정이 있음
이렇게 몸은 소중하지만 이렇게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 육신-사람에게는 많은 형편과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만일 영이라면 형편도 없고 사정도 없다. 내가 영이라면 집 걱정 할 필요도 없고 밥걱정 할 필요도 없다. 영이라면 아무것도 문제가 없다. 우리가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아파트 청약도 해야 되고 교회에서 자리다툼도 해야 된다. 영이라면 자리다툼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몸이다 보니까 앞자리가 더 좋다고 하여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 자리를 상장시켜 주식으로 만들어서 A석은 얼마, B석은 얼마라고 할 날이 올지 모르겠다. 그래서 경쟁하는 것을 보고 있고, 경쟁이 심해져야 주가가 올라간다. 몸을 가졌기 때문에 좋은 문제도 있고 나쁜 문제도 있고 많은 문제가 있다.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 모두 몸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9장을 제외하고 7장부터 8장, 10장은 전부다 사람 몸을 가졌기 때문에 있는 문제들이다. 결혼을 했는데 마음이 맞지 않으니까 이혼을 할 것인가, 같이 살 것인가 등의 문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렇게 저렇게 대답을 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혼은 하지 말라. 그러나 상대방이 싫다고 꼭 갈라지자고 하면 갈라져라. 이방 사람인데 싫다고 하면 갈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교리가 될 수도 없고 지침이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형편과 사정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말할 수가 도저히 없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이혼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둘은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이혼하는 것이 나겠다고 한다면 이혼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쉽게 말하면 이런 문제들이므로 객관적인 문제가 아니고 주관적인 문제다.
그리고 독신에 관한 문제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죽었거나 이혼하여 과부가 되었거나 아니면 처녀로 그냥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이 또 나왔다. 바울은 할 수만 있다면 자기와 같이 그냥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또 결혼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처녀 딸들에게 하는 말이 자기 생각이지만 환란이 임박했는데 굳이 시집을 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시집을 가면 그만큼 육신의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교리가 될 수는 없다. 어떤 객관적인 지침이 될 수는 없다. 각자의 사정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보다 더 못하거든 결혼을 하라고 했다. 기도를 하는데 둘이 떨어져서 하고 그렇지만 오랫동안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내가 아는 사람이 기도를 한다고 결혼하자마자 기도에 들어간 모양이다. 신부가 황당하게 되었다. 너무나 믿음이 좋아서인지 그렇게 되어 말썽이 좀 있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하고 끝났으면 될 텐데 너무 오래하는 바람에 신부가 당황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일도 세상에 많고 우리 교회에 없는 일도 다른 교회들에게는 많이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대답을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어떤 정해진 지침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종으로 있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자유자가 되어야 하느냐 종으로 있어야 되느냐는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종이 스스로 풀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 이조시대는 종의 족보에 올라가면 자기 마음대로 족보를 버릴 수가 없는데 후대에 오면서 자기 스스로 종이 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었다. 이런 문제들이 나왔다. 그래서 바울은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종으로 있고, 자유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일부러 종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고 네가 사람의 종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말도 했다. 이것도 역시 교리는 아니다. 교리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나중에 이방신전에 돼지고기를 드리는데 매일 드리니까 고기가 남아 시장에 판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먹으면 우상제물인데 먹어도 되는가하는 양심의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모르면 마음에 거리끼면 먹지 말고 어떤 사람은 시장에 파는 것은 시장에서 파는 것이고 신전에 있는 것은 신전에 있는 것이니 고기가 무슨 문제가 있냐고 생각하는 지식 있는 먹어도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만일 자기는 자기의 지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게 된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는 고기라고 생각하고 먹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볼 때 바울이 우상제물을 먹는다고 생각한다면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먹은 것을 보고 나도 우상제물을 먹어도 되겠네 하고 생각한다면 자기는 먹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자기 마음이지 무슨 교리가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이 7장부터 10장까지 나열되어 있다. 일일이 다 읽을 수 없어 간단하게 말씀드린 것이다. 사람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문제가 있다.
3. 하나님은 육신 사람을 부르실 때 형편과 사정안에서 부르심
하나님은 육신 사람을 부르실 때 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을 부르시지 왜 이렇게 복잡한 사람을 불러놓았나? 이런 문제가 생길 것이다.
3.1. 형편과 사정이 없는 사람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형편과 사정에 상관없이 부르신다는 것이다. 어떤 형편에서 부름 받았든지 그냥 지내면 된다. 종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 못될 것도 없고 내가 자유자로 부름 받았다고 더 될 것도 없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교회 안에서 여러분도 경험해 보면 알겠지만 육신적인 사정이나 형편이 좋아지면 문제가 없는데 어떤 문제가 생기면 깜깜하고 아무것도 모르겠고 지금까지 말씀 듣고 좋다고 했던 사람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말씀을 듣긴 들었어도 표면만 들은 것이고 이면을 듣지 못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세계다. 우리가 육신을 가진 사람인 것은 틀림없어도 육신의 사정과 하나님 나라가 연계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구약과 신약도 구약이 없이는 신약이 나올 수 없었다. 그렇지만 구약은 물질적인 세계다. 모두 물질적인 축복이고 물질적인 약속이다. 그러나 신약은 물질적인 약속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은 되었지만 알고 보면 내용은 아주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금 말씀 하여 한다. 지금도 교회에 가면 계시를 받았다거나 말씀을 들었다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원칙이다.
그러나 신약은 그런 원칙이 아니고, 성육신의 원칙이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와서 하는 말이 아니고 내가 여러분에게 30년 동안 말했지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와서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물론 내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만약 그런 소리를 들어 내가 이야기를 했다면 이 집은 어떤 집이 될 것인가? 이상한 귀신들의 집이 될 것이다. 어디서 소리가 들려와서 이야기한다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러려면 차라리 큰 스피커를 우주에 대놓고 하나님이 말씀 하신다고 하면 될 일이지 복잡하게 사람을 세워서 할 일이 있겠는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구약에서는 그런 원칙이지만 신약은 성육신의 원칙이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전파된 것이다. 신약을 쓴 사도들은 모두 내가 무엇을 들었다는 말은 거의 없다. 어디를 봐도 내가 무엇을 들었다는 말은 없다. 전부 자기 말이다. 자기 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육신의 원칙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다미선교회 문제도 그렇고 중학생 아이가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92년 10월인가에 난리가 한번 났었다. 어린애가 그것을 받았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린애가 아무것도 모르는데 성경을 줄줄 안다는 식으로 되어 문제가 되었다. 이런 것은 장막성전도 마찬가지다. 유재열이라는 사람이 어렸을 때 뭔가를 받았다고 하여 생긴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세상을 대단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육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고 사람들이 또 속은 것이다. 신약은 성육신의 세계다. 누구도 어디서 듣고 왔다거나 음성이 들렸다는 소리를 하면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 지나간 시대는 우매한 시대니까 그것을 묵과했지만 지금은 묵과할 수 없다.만일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일은 헛일이 된다. 예수님을 헛되이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는 사람을 불러 그 사람 안에 하나님 말씀을 넣어서, 어떤 신비로운 방법으로 넣는다는 말이 아니고, 성육신하도록 그 사람의 살과 피가 되도록 넣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완전한 것이다. 내가 듣고 말하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니니까 다른 소리를 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내 자신의 말은 여기 가서 말해도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고 저기 가서 말해도 그렇게 밖에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것이 가장 완전한 길이다. 하나님은 형편과 사정에 관계없이 불렀다. 성육신은 형편 때문에 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육신은 형편 때문에 안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이러한 형편이기 때문에 어둡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세계가 다르다. 물고기 세계의 사정과 공중에 나는 새들의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 뱀을 보면 눈이 반짝반짝 하길래 눈이 밝은가보다 생각했더니 눈이 어둡다고 한다. 자꾸 왜 혓바닥을 내미는가 했더니 옛날에는 욕한다고 했는데 욕하느라 그러는 것이 아니고 혓바닥으로 모든 것을 감지한다고 한다. 사람을 물 때도 혓바닥으로 열(온도)을 감지하여 문다고 한다. 그래서 몸은 찬데 혓바닥은 대단히 뜨겁다고 한다. 혀에서 모든 것이 감지되고 발산되기 때문이다. 눈이 없어도 혓바닥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뭘 보려면 눈이 있어야 되는데 뱀은 혓바닥을 내밀어야 안다. 이 사정과 공중에 나는 새의 사정은 아주 다르다. 몇 백미터 위에서도 새들은 땅바닥에 좁쌀이 있는 것을 알 정도로 눈이 밝다. 그 둘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와 육신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나는 이런 형편이기 때문에 좋고 저런 형편이기 때문에 안되는다는 말은 절대로 안된다.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가 거듭나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면 내 형편과 사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구나.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면 형편이 좋지 않은데도 밝은 사람이 있고, 객관적으로 봐서 형편이 별로 나쁘지 않는데도 어두운 사람이 있다. 그런 것이 모두 이런 것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형편과 사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형편과 사정을 없는 사람을 부른 것이 아니고 형편과 사정 안에 있는 사람을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형편이나 사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정이라는 말의 '사'가 私(사사로울 사)라고 한다. 내 개인의 일이라는 말이다.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사람을 빼놓고 부르려면 하나님이 부를 사람이 아무도 없다.
3.2. 형편과 사정을 이용하실 수 있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형편과 사정이 하나님에게 이용될 수 있다. 우리가 늘 어떤 신앙고백을 할 때 보면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형편에서 이러이러한 길을 갔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형편과 사정을 이용하셨기 때문이다. 형편과 사정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자신을 목적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형편과 사정이 있다고 부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형편과 사정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오기만 하면 아주 유익한 것으로 바꾸어진다. 거름을 보면 부패하고 썩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 몸에 있다거나 집안에 있으면 안된다. 냄새나고 다른 것을 부패하게 만든다. 산 나무에 거름을 주면 산 나무를 살려주는 영양소가 된다. 거름이라는 사정과 나무라는 사정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나무가 살아있기만 하다면 거름은 썩은 것이지만 아주 유익한 것이 되는 것이고, 나무가 죽어있을 때는 나무를 더 썩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사정이 예를 들어 썩어있는 거름 같을지라도 생명의 세계 안에만 온다면 하나님이 내 세계의 중심만 된다면 그리스도가 내 목표가 되기만 하다면 밑거름이 된다. 나도 내 형편과 사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그 형편과 사정이 나를 이러이러한 길로 오게 했구나가 스스로 느껴지고 알아진다. 이 형편과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꼭 같은 형편과 사정이 있으면 다 그렇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같은 형편과 사정에서 영 다른 길로 갈 수 있다. 거기서 반항하는 길로 갈 수도 있고 원망하는 길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로 간다. 내가 좋은 형편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형편 자체가 아주 부정적인 것도 많다. 잘된 일은 별로 없었는데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이 이용하시니까 좋은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형편이 나쁘니까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형편이 나쁘면 그것이 그리스도가 내 중심이 될 때는 오히려 더 좋은 거름이 될 수 있다. 거름은 잘 썩을수록 좋은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사망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환란이나 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 때문에 안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속임수로 준 것이다. 이러이러니까 너는 안된다거나 이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된다거나 이 문제가 있는 한 너는 안된다거나 이 문제를 놓고 네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사탄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전혀 다른 세계다. 바람이 많이 불면 공중에 나는 새들은 힘이 들 것이나 물속에 있는 고기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물론 파도가 치면 문제가 있겠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 이번에 제주에는 엄청난 물난리가 났다. 시간당 800미리가 쏟아져서 산골짜기마다 물이 쏟아졌는데 골짜기로 물이 모이면 2미터 3미터가 되었을 것이다. 그 물이 제주시 전체로 쏟아져내려왔다. 자동차가 1300대가 물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제주대학은 우리 교회보다 훨씬 높은 지역에 있는데 교수 한 사람이 차에 타고 있다가 물에 쏠려 내려가서 그대로 죽었다. 우리는 여기에 있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사정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형편과 사정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에 우리 교회 형제도 물이 있는 줄을 모르고 왔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길이 막혀 물이 1cm만 불어도 차가 뜨기 때문에 차가 밀려 나가는 것이다. 이러다 죽는가하는 순간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런 형편은 다른 데는 전혀 모른다.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과 방주를 타고 있는 노아와 형편이 전혀 다르다. 방주 안의 형편과 사정이 다르고, 물 위의 형편과 사정이 다르니까 형편과 사정을 가지고 이야기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용하시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형편과 사정이 꼭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형편과 사정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다. 물론 좋지 않은 형편과 사정은 세상에서는 좋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을 보면 형편과 사정이 좋아서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그 악조건이었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도 있으므로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무엇이 성공의 기반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사람에 달린 문제다. 옛날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까 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요즘 아이들은 잘먹고 잘사니까 왜 굳이 어렵게 살 필요가 있나하는 것이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생각이다. 물론 북조선 가면 다를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아이들 생각이 그렇고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공부도 어렵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공주라는 자체가 재미있는 학생만 공부한다. 옛날에는 공부가 재미있든지 없든지 공부를 했으니까 살려면 공부를 해야 했다. 형편이 사정이 이렇게 달라졌다. 그때는 어려웠기 때문에 공부를 했다. 지금은 좋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는다. 여러분 집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우리 환경이 너무 좋아서라고 생각하면 거의 맞다. 누구라도 공부보다는 게임이 재미있다. 공부보다는 노는 것이 재미있다. 그때는 쪼들리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형편과 사정을 탓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다. 공부할 사람은 이런 형편에서도 공부하고 저런 형편에서도 공부한다. 재미있으니까 한다. 형편이 좋아서 하고 형편이 나빠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좋으니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에 달린 것이다. 영관이가 크면 어찌될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하나의 과제가 생기면 외울 때까지 한다. 계속 반복한다. 다 외우고 나면 어떻게 하는가? 정리를 해서 남에게 발표를 한다. 여름집회 때 노영경 형제가 아이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칠판에 요점 정리를 하여 강의를 잘한 모양이다. 그것을 매일 비디오를 틀어서 보는데 다 외워져서 노트에 요점을 적어 스크랩처럼 만들어놓았다. 이것을 가지고 자기가 노영경 삼촌처럼 하는 것이다. 옆 사람에게 들으라는 것이다. 아멘 적게 하면 크게 하라고 한다. 영경 형제가 하는 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을 누가 가르쳐서 하겠는가, 하라고 해서 하겠는가? 자기 노트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냥 하라고 하면 노트 없이는 안된다고 한다. 한 페이지마다 요점만 써놓았는데 그 요점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다음 페이지 넘어가면 그 요점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어른처럼 한다. 노영경 형제가 하는 것대로 한다. 말하는 방법까지 다 외워 크게 하세요라고 한다. 이것은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어린애에게 가르쳐서 누가 하겠는가. 영관이가 좋으니까 재미있으니까 한다.
형편과 사정이 문제가 아니고 사람에게 달려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분이고 구원하신 분이다.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분이다.
4. 사람은 끊임없이 형편과 사정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음
세상은 사람을 창조할 수도 없고 구원할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형편과 사정만 계속 개선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문명이라는 것은 형편과 사정을 개선시켜 놓은 것이다. 맨발로 다니는 것이 불편하여 신발을 만든 것이 문명이다. 사람은 형편과 사정을 계속 개선시키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은 형편과 사정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사정이 있다고 하나님께 아뢴다고 해서 그것이 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니까 사람만 되면 종이가 없어도 땅바닥에 글씨를 써서라도 배울 수가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 분이고, 세상은 말하기를 종이가 없으면 글씨를 배울 수 없다고 말하는 차이다. 물론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모순이 좀 있지만 좌우간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우리도 어차피 하나님 백성이면 그분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된다. 우리의 형편과 사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최소한 이것은 알아야 된다. 어린에 머릿속에 무엇이 기억되었는가? 당신 생각대로 하면 연합이고, 내 생각대로 하면 분열이라고 칠판에 그렇게 써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다. 분열이 무엇인가? 김밥을 다 쪼개서 흩어놓더니 이것이 분열이라고 하고, 그것을 뭉쳐서는 연합이라고 한다. 아이들에게도 제대로 가르쳐주면 그대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형편과 사정을 탓할 것이 아니고, 우리는 사람됨을 생각해야 된다. 사람이 되면 형편과 사정은 내가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동산을 주시고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창세기 1장에도 보면 만물을 주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러면 형편과 사정은 내가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릴 것에 속한 것이지 내가 형편과 사정을 숭배할 것이 아니다. 숭배의 대상이 아니고 짐으로 생각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릴 대상이다. 세상에서도 자기 환경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고, 자기 환경에 눌려버린 사람이 실패한 사람이다. 간단히 말하면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은 이기는 사람이고, 환경에 눌려버린 사람은 진 사람이다. 환경과 싸우고 있다.
우리는 원래 지어질 때 환경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지어진 존재다. 여러분에게 어떤 환경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려야 할 대상이지 결코 숭배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숭배하는 것이다. 너무 크게 생각하면 숭배하게 된다. 숭배할 대상이 아니라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릴 대상으로 생각해야 세상을 살아도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잘살 수 있다. 교회생활도 그래야 잘할 수 있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했다.(7:17) 이렇게 부름 받으나 저기서 부름 받았거나 문제가 안된다. 종으로 부름 받았는지 자유자로 부름 받았는지가 문제가 아니다. 결혼을 했는지 이혼을 했는지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 사람은 결혼을 했으니까 저렇게 하는 것이고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문제가 아니가.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했다. 나는 35세에 결혼했다. 형편이 안되어 그렇게 되었는데 35세인데 큰일났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장가들 나이가 넘어갔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걱정을 했지 나는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걱정했다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인데 걱정하지 않으니까 되었다. 내가 걱정을 했다고 더 잘되겠는가. 내가 걱정을 했다면 괜히 주책이나 부리고 다녔을 것이다. 가만히 있으니까 옆에서 하라고 해서 했다. 결혼도 집사람이 와서 하자하자고 하니까 한 것이다. 그러니까 힘든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하라고 해서 했고, 하자고 해서 했다. 돈도 그렇게 벌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돈을 잘 버는 사람은 막 돈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한다. 이렇게 해도 돈이 들어오고 저렇게 해도 들어온다고 한다. 안되는 사람은 아무리 쫓아다녀도 안잡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잡힐 것 같은데 안잡히는 것이 돈이라고 한다.
우리는 부르신 그대로 행하면 된다. 별 것이 없다. 어느 회사에 취직한 사람, 직장에 취직한 사람, 다른 사람은 5급인데 나는 6급이네 하고 있을 아니고 6급으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부르신 그대로 행하면 된다. 저 사람은 6급인데 나는 7급이네, 저 사람은 7급인데 나는 9급이네 하고 있으면 안된다. 9급으로 합격을 했으면 9급으로서 최선을 다하면 되고, 6급으로 합격을 했으면 6급으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렇게 해도 하나님 나라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물론 자기 출세에는 지장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그런 사람이 출세를 빨리하는 것 같고 진급을 빨리하는 것 같다.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세상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형편에 있었는가, 저 사람은 저런 형편인데 나는 이런 형편이라는 것을 비교할 필요가 없다. 자기 형편에서 잘 살면 거기서 개선이 온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더 나아져보려고 애를 쓴 적은 없다. 혼자 자라서 그런지 생전 시기를 해본 적이 없다. 나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 시기해본 적이 없다. 나보다 나은 사람은 배우면 된다. 배우기 좋으니까 나보다 나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니 시기할 필요가 없다. 배울 일이 많은데 왜 시기하겠는가? 그런데 결국은 따라 잡는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니까 따라 잡는다. 일부러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다. 잭슨빌의 문형제가 내 칭찬을 너무 많이 한 말씀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종으로 들어가서 주인이 될 사람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다.내가 종으로 들어가도 주인이 될 것 같다. 억지로 주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할 일을 잘하면 주인이 된다. 그런데 내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은 하나님이 그 길을 막아서 안되었다. 그래서 꺾이고 꺾였다. 우리가 부르신 그대로 하면 그대로 살면 다 잘된다. 세상에서도 잘되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잘된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7:24)고 했다. 하나님 문제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문제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문제이지 내 형편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 하던 교회를 지난번 고향에 갔을 때 가보았다. 그때는 꾀 크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오두막집이고 그 집이 없어지지 않고 보존되어있었다. 이렇게 좁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주일학교 학생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초라한 집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초라하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으니까 학생들이 가득 메워진 그것만 좋고 재미있어서 최선을 다했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했더니 내가 어디 가서 배운 바도 없고 큰 교회를 다닌 적도 없고 도시교회에 가본 일일도 없고 주일학교 강습에 가본 일도 한번도 없었는데 모처럼 소식이 하나 왔다. 어느 시찰에서 주일학교 여름 강사대회를 한다는 것이다. 시찰은 여러 교회가 모여서 시찰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크다. 한 도가 합해진다고 봐야 된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거기서 교사들의 설교대회와 동화대회를 하는데 설교대회는 내가 1등을 하고 동화대회는 2등을 했다. 어디서 내가 배워서도 아니고 원체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자기들은 도시의 큰 교회에서 온 사람들인데 갑자기 저 시골골짜기에서 온 사람이 1등이 되니까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못하더라도 자기가 좋아서 한 것이고 내가 상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언제 그런 것이 있을 줄 알고 준비한 사람도 아니고 평소에 하던 그대로 부르신 그대로 했는데 그렇게 되었다. 시험을 볼 때도 평소에 하던 그대로 해서 되는 것이 진짜 실력이다. 밤새우고 해도 잊어버리고 시험 보는 날 무엇을 봤는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운전면허 시험을 보기위해 필기시험을 봐야 되는데 책이 두꺼운 것이다. 한 페이지를 보고 나니까 머리가 아파서 보지를 못하겠다. 아닌 것은 무엇이고 그런 것은 무엇이냐고 하니까 머리가 아프다. 이것 볼 시간이 없으니 그냥 있는 대로 하자 하여 그냥 갔다. 그래서 1종은 못하고 2종을 했다. 1종은 70점을 맞아야 합격이고 2종은 60점을 맞으면 합격이다. 그동안 20년 동안 차를 타고 다니면서 계속 봤다. 그냥 잠만 자고 다닌 것이 아니고 다 봤기 때문에 아는 대로 썼는데 64점이 나왔다. 괜히 책 가지고 밤새 공부를 했더라면 머리만 아프고 헛일일 뻔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20년 공부를 한 것이다. 그것은 언제 시험을 봐도 또 64점이 나올 것이다.2종 커트라인이 70점이라면 나는 떨어지는 것이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공부하는 사람은 노력을 해야지 나처럼 했다가는 다 떨어진다. 나처럼 하려면 시험 볼 때만 해서는 안되고 평소에 자나깨나 어디를 가든지 항상 공부를 해야 된다. 부르신 그대로 살아도 전혀 하나님 나라를 얻는 데는 지장이 없다. 전혀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 바울이 하는 말이 과부가 됐다면 그냥 지내나 안되겠으면 결혼하라는 것이다. 처녀로 안되겠으면 결혼하라는 것이다. 안되겠는데 기어코 참으라는 것은 아니다. 열녀 표창을 주려고 하나님이 계시겠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열녀도 필요없다. 어찌하든지 그 부르심 안에 행하는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표창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자기 형편에 자족하도록 하면 된다. 어렵게 인생을 살 필요가 전혀 없다. 고민하거나 어려워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다. 고민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살면 되는데 그냥 산다고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살다가 죽을 것인데 저렇게 싸우고 살 필요가 있을까 한다. 중요하지 않는 일에 목숨을 건다는 말이다. 진짜로 목숨을 걸 일에 걸면 좋고, 진짜로 고민할 일에 고민하고, 진짜로 애통할 일에 애통하면 되지만 시시한 것을 가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런다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
중요한 것에 신경을 쓰기 바란다.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쓸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에 신경을 쓰자.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고 하나밖에 없는 몸인데 중요한 것에 신경을 쓰자. 꼭 내 몸이 없으면 안될 것에 신경을 쓰자. 물론 각자 정도가 다르겠지만 그런 마음만 가진다면 사람 살기가 편해진다.절대적인 것이 있으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그래야 세상이 쉬워진다. 그런데 절대적인 것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왼발 먼저 낼 것인가, 오른발을 먼저 낼 것인가도 절대적인 문제가 된다. 제식훈련을 하면 왼발 먼저 내라고 한다. 왼발 먼저 내지 않는다고 때린다. 그것은 훈련이니까 어쩔 수 없다. 왼발 먼저 가나 오른발 먼저 가나 매 한가지지 열을 맞추어 가려니까 맞추는 것이지 나 혼자 가는데 오른발부터 가면 어떻고 왼발부터 가면 어떻겠는가? 거기에 목숨 걸 일이 없다.
우리가 작은 일에 매여 살게 되면 작아지게 되고, 큰일에 매여서, 우리가 큰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크신 분이고 하나님이 크신 경륜 안에서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저절로 큰일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버리고 다른 것에 신경 쓰게 되면 자기 인생이 망하는 것이다.
5. 바울의 권고
바울은 여러 가지 권고를 했다.
5.1. 받은 은사대로 하라(7:1~7)
받은 은혜대로 하라.
5.2. 화평 중에서 하라(7:8~16)
화평 중에서 하라. 이혼을 하더라도 싸우지 말고 편안함 중에 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화평 중에 거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치고 박고 싸우고 물어뜯고 이혼하지 말고 이혼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 되면 평화롭게 하라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이런 것이 잘 되어있다. 서양 사람들은 이혼을 해도 싸우지 않는다. 둘이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이혼하지만 친구로 산다. 우리는 이혼했다고 하면 완전히 원수 된다.
화평 중에서 하라. 서양 사람들은 그렇게 타협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우리는 타협을 해서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평안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5.3.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하라(7:17~24)
각 사람은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할례자로 부름 받았으면 할례자로 있으면 되고, 무할례자로 부름 받았으면 무할례자로 있으면 된다. 할례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 이것은 율법이라 하여 다시 바꾸어야 되겠다고 재수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할례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 할례를 꼭 받아야겠다고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중요하지 않다. 종된 자로 부름 받았으면 그대로 있으라. 자유자로 부름 받았으면 그대로 있으면 된다. 하나님과 함께만 거하면 된다.
5.4.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라(7:25~40)
그리고 처녀들에 대해 과부들에 대해 왜 그냥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는가?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시집가고 장가가면 상대방에게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그러다보면 분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려면 그냥 지내라는 뜻이다. 아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라. 그런데 결혼을 하고도 분요함이 있는 사람은 매 한가지다. 그러니 결혼을 한다고 분요한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분요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중심이 그리스도 앞에 잡히지 않으면 이래도 분요하고 저래도 분요하다.
5.5.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8:1~13)
그리고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고 했다. 우상제물 때문에 그랬다. 종교적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이것은 고기라고 하고 먹어도 되지만 그러나 그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실족할 수 있으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결국 남을 생각하는 마음, 형제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5.6. 우상숭배하지 말고 아는 사람에 유익을 구하라
그리고 우상숭배하지 말고 아는 사람에 유익을 구하라고 했다. 마지막에 와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는데 우상숭배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이 모든 인생 문제의 근원이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형상숭배, 모양숭배라는 뜻이다. 우상이라는 말은 형상, 모양에서 나왔다. pselem은 히브리어인데, 우리가 잘 아는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할 때는 이 단어를 썼고 또 다른 곳(왕상11:18,대하23:17,겔7:20,겔16:17)의 우상에 대해 쓸 때도 역시 이 단어를 썼다. 즉 우상은 형상이라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두고 섬기면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상숭배하면 특별한 물건을 만들어놓고 섬기는 것을 우상이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 다음의 에이돌론(eidolon)은 희랍어인데, 여기서 영어(idol)가 나왔다. 우상, 형상이다. 신약성경은 전부 이 단어만 쓰게 되었다. 구약에는 우상이라는 말도 단어가 수없이 많다. 대표적인 것만 골랐으니 여러분이 성경을 참고하기 바란다. 에이도스는 보여지는 것, 외모, 형체다. 우리가 보여지는 것 외의 형체 때문에 모든 사정이 생겨난다. 물론 사람이니까 자기가 형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없을 수 없지만 이 문제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다가 문제가 생긴다. 사람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창조물이다. 그 말은 최고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말이다. 식물도 어떤 하나님 형상을 따라 동물도 그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 그런데 사람은 최종적인 형상이다. 완성된 형상이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지었다고 해서 사람만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고 만물을 다 그렇게 지었지만 사람은 최종적인 형상이다.
최종적인 형상이 최종적인 형상이 아닌 저 하급에 속한 형상을 섬기면 되겠는가? 우리가 피조물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다른 형상들을 섬길 수가 없다. 사람이 최종적인 형상인데 자기보다 못한 것을 섬기는 것이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섬긴다는 말은 자기보다 못한 것을 섬긴다는 뜻이다. 내가 나보다 나은 것을 섬겨야지 나보다 못한 것을 섬기는 것은 망하는 것이다. 선생님도 나보다 나은 선생님을 따라 가야지 나보다 못한 선생님을 따라 가면 실력이 없어진다. 내가 알고 있던 것까지 없어진다. 나보다 나은 것을 따라 가야지 나보다 못한 것을 왜 따라 가겠는가? 다른 모든 피조물들, 형상을 가진 모든 것들은 나보다 못한 것들이고 인생보다 못한 것들이다.
이 형상은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 실체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 실체를 표현하려면 형상의 실체를 깨달아야 되지 실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형상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실체를 깨달으라고 형상을 주었는데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게 되면 형상밖에 없다. 그래서 외모를 섬기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 말씀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면 외우는 것만 남는다. 성경책, 교리만 남게 된다. 이 성경 안에서 성경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무엇인가 그 속에 있는 실체를 깨달아야 되는데 그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달달 외워놓으면 교리만 배워놓으면 껍데기만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리주의자들의 문제점이 내용은 깨닫지 못하고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꼭 지켜야 된다는 사람도 있고 일요일도 안식일이라는 사람도 있다. 성경대로 하면 일요일이 안식일이 아니고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이다.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아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 말씀의 실체를 깨달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보니까 이것을 가지고 죽느니 사느니 한다. 절대로 이것은 양보를 못한다고 하여 이것을 변호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써놓았는지 모른다. 실체를 깨달으라고 준 것인데 실체를 깨닫지는 못하고 허물(껍데기)만 갖고 있는 것이다. 그 허물은 매미 허물처럼 언젠가는 날아가 버리고 껍데기만 고스란히 남게 된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모든 세계는 피조물은 전부다 그분의 어떠함을 표현하려고 만들어놓은 것이니까 우리가 거기서 그분의 어떠함을 깨달아야 되지 그것 자체를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면 그것을 숭배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결혼을 하느냐 안하느냐, 이혼을 하느냐 안하느냐, 할례를 받느냐 안받느냐, 이런 모든 문제가 전부다 형상(껍데기)과 관련된 문제이다. 만약 실체를 알았다면 우상 제물을 먹느냐 안먹느냐는 문제가 없어진다. 우상 제물을 먹지 말라고 했으면 그 속에 무슨 뜻이 있어서 그 말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았으면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먹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먹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다 보니까 신전에 있는 것도 먹지 않아야 되고 시장에 파는 것도 먹지 않아야 된다. 시장에 파는 것과 신전에 있는 것은 다른데 우상 제물이니까 둘 다 먹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교리주의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우리가 교리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교리가 틀려서 경계하는 것이 아니고 실체를 빼놓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교리를 반대하는 것이다.
피조물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속의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숭배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꼭 나무를 깎아 세워야 우상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많다. 그것이 다 그 속에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있는 것인데 내가 그것을 섬겨버리면 나는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이 된다.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바로 고린도전서에 있는 바로 이런 문제들에 다 걸리게 된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사람을 숭배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것은 알고 보면 형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하다 보니까 조금만 어떻게 해도 절만 해도 사람을 숭배한다고 난리다. 캐톨릭에 가면 신부다. 영적인 아버지라는 뜻인데 그 사람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금만 어떻게 해도 사람을 숭배한다고 한다. 숭배하는 것이 아닌데 숭배를 무엇인지를 모르니 그렇게 한다. 형상으로서의 껍데기를 숭배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을 없애버린 것이다. 교리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하나님은 그 형상을 통해 표현될 것인데 형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해버리니까 껍데기까지 버리는 것이다. 골뱅이 잡아다가 속만 빼먹으면 될 것인데 껍데기 때문에 다 버린다. 다 버리고 나면 민달팽이처럼 껍데기 없는 골뱅이가 없으니까 먹을 것이 없다.
하나님은 성육신의 원칙으로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분이시니까 형상으로서의 사람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 형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형상 숭배냐 아니냐에 따라서 서교회와 동교회로 갈라졌다. 서교회는 로마교이고, 동교회하면 희랍정교회다. 희랍정교회는 지금 소련 계통에 퍼져있는 기독교가 되었고, 서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로 바로 이것이 기독교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형상 숭배를 하느냐 안하느냐로 갈라졌다. 이것도 교리적인 것이다. 무슨 상을 만들어놓고 숭배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어떤 실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교리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에 싸움만 하여 교회만 갈라졌다.
사람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은 형상을 말한 것으로 알아야 되고 하나님은 이 형상이 꼭 있어야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예수님에게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본체의 형상을 만났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그 영을 만났겠는가? 본체의 형상을 만났다. 그런데 본체의 형상을 본 그 사람들이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이 사람이 나타내었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타낸 형체였다. 그러니까 만일 예수님이라는 몸을 숭배한다면 그것 역시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그 몸은 오로지 그분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 그분을 표현하기 위해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또 우상숭배자가 되게 된다.
본체의 형상이시고 영광의 광채이시다. 신약성경 가운데서 다른 모든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형상을 본 사람들이다. 그런데 바울만은 형상을 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체를 만났다는 말이다. 형상을 보지 않았는데도 만났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러면 바울처럼 형상을 없어도 만날 수 있지 않느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형상을 보지 않았는데 실체를 만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바울이 그분을 만날 때 그냥 자기 생각 속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다멕섹에 가는 도중에 만났다. 다멕섹에는 무엇을 하러 갔는가? 다멕섹 교회를 핍박하려고 갔다. 다멕섹 교회에 가서 무엇을 했는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에 비닐이 벗겨졌다고 했다. 옛날 눈은 없어지고 다멕섹 교회에 들어가서 안수 받은 후에 뜬 눈으로 맨 처음 본 것이 교회다. 새로운 눈으로 본 첫 번째가 교회였다. 예수의 형상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의 형상을 보았다. 다멕섹 교회는 예수의 형상이었다. 다멕섹에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했다. 나는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가는 길인데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나라고 말했던 그분과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33년 동안 육신으로 계셨을 때 그 형상은 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분의 형상으로서의 교회를 보았다.
오늘 교회는 그분의 형상이다. 결코 형상이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와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알았던 최초의 사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피조물을 숭배하는 것은 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피조물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함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는 또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사람의 모든 문제, 교회의 모든 문제는 모두 이 피조물인 형상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한데서 생긴 문제다. 그러면 결혼도 형상이다. 이혼도 형상이다. 우상 제물만 형상이 아니고 결혼도 형상이고 이혼도 형상이고 처녀도 형상이고 과부도 형상이다. 할례자도 형상이고 무할례자도 형상이고 다 형상을 이야기한다. 할례는 형상으로 표시해놓은 것이다. 무할례자는 그 표시가 없다는 말이다. 결혼을 했느냐 안했느냐는 전부 표시다. 이것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까 너무 중요시 생각해도 이혼한다. 너무 소홀히 생각해도 이혼한다. 너무 중요시하게 생각해도 맞지 않는다.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도 실상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만족이 안될 것이고 이혼하는 것이다. 요즘은 또 너무 허술하게 생각하다 보니까 이혼한다. 우리나라도 젊은 사람 4사람 중 한 사람이 이혼한다고 한다. 이제는 너무 중요하지 않아 이혼한다. 좌우지간 눈으로 보이는 것, 우상(idol), 형상을 너무 중요시 생각하면 안된다. 그렇다고 또 완전히 배제하면 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성육신은 이 형상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이 형상 안에서 실체를 깨닫고 있다. 결혼한 사람은 결혼한 대로 우리의 실체를 알아야 되고, 이혼한 사람은 이혼한 사람대로 그 실체를 알아야 된다. 하나님과 우리가 이혼하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야 되고, 우리가 하나님과 결혼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야 되지 나와 김아무개나 박아무개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껍데기만 보는 것이지 실체는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배우려면 깨달으려면 굴러가는 돌만 보고도 깨달을 수가 있다. 번개치고 천둥쳤는데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객관적으로 그것은 번개치고 천둥치는 소리였다. 모세는 어떤 사람인가?산에 올라갔을 때 빽빽한 구름과 나팔소리와 번개소리가 났다고 했는데, 바울이 다멕섹에 갈 때와 비슷하다. 그런데 거기서 십계명을 받아왔다.
그러니까 깨달으려면 꼭 무슨 큰 것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두운 것을 가지고도 빛을 깨달을 수 있고 빽빽한 구름이 있었다는 것은 흑암이 있었다는 것이다. 백성들 중에서는 너무나 무서워서 아무도 산에 접근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속에서 십계명을 받아왔다.
피조물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보여주기 위해서 있었으니까 있으면 중요한 것이고 보여준 것이 없으면 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지 못한다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만지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이 되고 전부 다 우상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다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것도 선물 아닌 것이 없다.
형편과 사정이라는 것도 형상이다. 나는 돈이 없다는 것도 형상이고, 나는 돈이 많다는 것도 형상이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맞았다는 것도 형상이고, 내가 누구를 때렸다는 것도 형상이다.모든 것이 다 형상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데 필요하면 형상이라고 번역될 수 있고, 이것이 만일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된다면 우상이 되는 것이다. 같은 단어이지만 그렇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환경이 우리 자신으로 인해서 형상이 될 수도 있고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우상숭배를 버리고 덕을 세워라. 덕을 세운다는 말은 건축한다는 뜻이다. 교회를 건축하려면 우상숭배를 버려야 건축된다. 그것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버려야 된다는 말인데 이 사람의 형편과 저 사람의 형편을 가지고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 형편이 우상이 되면 교회는 건축될 수가 없다. 다 형편과 사정이 중요하게 되면 오늘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집에서 중요한 일이 다 있을 것이다. 집에 중요한 일이 없어서 온 것이 아니다. 집에 다 중요한 일이 있고 점심 먹을 시간도 다 되어 가고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다. 다 중요하다.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형상이 되었다. 그런데 점심 먹는 것이 더 중요해지면 우상이 되는 것이다. 교회를 건축하게 위해서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상숭배를 버려야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게 된다. 내가 보이는 모든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면 나는 남을 위할 수가 없다. 내 일이 너무 바쁘고 내 일이 너무 급하다. 왜? 내게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도저히 남을 위해 살 수가 없다. 내 일로 바쁜데 내가 누구를 위해 살겠는가? 내 사정도 급한데 누구 사정을 봐주겠는가? 내 일도 답답한데 주구 사정을 보겠는가? 이것이 안된다.
내가 이것을 버리게 되면 껍데기를 껍데기로 알고 알맹이를 취하게 되면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게 된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게 되어야 건축이 된다.
10장 마지막에서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다. 내가 누구를 구원하려면 우상숭배를 버려야 된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숭배하면 나는 남을 구원할 수가 없다. 내 사정이 더 중요한데 누구 사정을 보겠는가? 모든 사람들의 대인관계를 보면 다 자기 사정이다. 싸우는 것을 보면 서로가 자기 사정 때문에 싸운다. 서로가 자기 사정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정이 너무 중요하다 보니까 서로 싸우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만일 그 사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더라면 사정은 버리게 될 것이고 뜻은 지키게 될 것이다. 알맹이는 취하게 될 것이다. 골뱅이를 누가 껍데기 채 먹으라고 했는가?알맹이를 까서 먹으면 되는데 껍데기까지 씹어 먹으니까 이빨이 아프고 상하는 것이다. 싸우는 것을 보면 다 자기 사정이 중요하다. 내 사정이 중요한데 다른 사람 사정은 중요하지 않겠는가?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은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그러면 다른 사람도 그런 줄을 알아야 된다. 우리가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한 남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안된다. 남 생각을 하려고 하면 나의 중요한 것이 먼저 생각나는데 내가 누구를 구원 하겠는가? 누구를 위해 살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10장에 우상숭배라는 말이 나왔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이렇게 하려면 내가 우상숭배를 버려야만 가능하다.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게 한 근본 원인은 우상숭배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왜 우상숭배로 망했을까? 이해가 안된다. 그것은 다 우리를 위한 거울이었다. 오늘 우리도 그 사람들처럼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 그 사람들과 같은 우상은 아니지만 다른 우상을 숭배한다. 눈에 보이는 다른 것을 숭배한다. 그것이 자기에게 중요해지면 숭배하는 것이다. 제일 중요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내가 절하고 제물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버리고 교회를 건축해야 된다. 우리가 한 몸으로 건축되려면 자기 사정을 버려야 되는데 자기 사정이 왜 생기는가? 우상 때문에 생긴다. 내 사정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 우상이 없으면 내 사정이라는 것이 없다. 내 사정이라는 것이 왜 생겼는가? 사정이라는 것 때문에 생겼다. 내가 집이 있으니까 집에 대한 사정이 생겼다. 차가 있으니까 차에 대한 사정이 생겼다. 아무것도 없으면 무슨 사정이 생기겠는가? 뭔가가 있으니까 사정이 생긴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갖고는 내가 평생을 해도 누구를 위할 수도 도저히 없고 누구에게 양보할 수도 도저히 없다. 왜냐하면 내 사정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교회 건축이 불가능하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라고 했다. 이것은 축복이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 축복을 준다는 말이다.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는데, 구원을 얻는 자리가 어디인가?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교회로 건축되는 것이 최종적인 구원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형편과 사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 형편과 사정을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사용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뜻을 깨닫게 하신 것을 또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주의 마음을 주시고 우리 안에 지혜의 영을 주셔서 당신이 우리에게 만들어준 것이나 사람들이 만든 것이나 그 모든 피조물들 속에서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해주시고 거기서 당신이 우리에게 좋은 소식으로 오시는 것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그 봉투들을 우리가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바라고 그것들에 매여서 우리가 우리 일생을 버리는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님! 우상숭배를 버리고 우리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해서 그 사람들을 축복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