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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서 시를 읽다(27)
- 베네치아 비엔날레, 구겐하임 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페사로 현대미술관
김철교(시인, 배재대 명예 교수)
2015년 7월 8일 (수)
예술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속성이다. 새로움이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삶과 예술을 보는 시각, 즉 미학적 측면에서 새로워야 하고, 다음으로 이를 구현하는 기법이 새로워야 한다.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을지도 모르나 세상만사를 보고 해석하는 것은 예술가다. 그 예술가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다. 수십억의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얼굴이나 모습이 동일한 사람은 없듯이 말이다. 그 예술가의 심안으로 보는 세상은 같을 리가 없다.
예술가가 나름의 삶과 예술을 보는 확고한 시각을 가져야 좋은 그림을 그리고 생명력이 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볼 수는 없으나 보려고 애쓰는 눈. 신의 세계, 실재(the real)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를 훔쳐 볼 수만 있어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 길은 찾아 피 흘리며 헤매는 나날이지만 짙은 안개 속이다.
어제 저녁 암스텔담에서 베네치아 마르코폴로 공항까지 비행기(HV-5497)로 왔다.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이다. 공항에서 메스트레역(Mestre)까지는 ATVO 버스를 이용하였다. 아침 일찍 호텔 앞에 있는 메스트레 역에서 10여분 기차를 타고 산타루치아 역에서 내렸다. 역 앞에 있는 페로비아 선착장(Ferrovia)에서 8시 23분에 수상버스(Vaporetto) 5-1번을 타고 자르디니(Giardini Biennale) 선착장에 도착하니 아침 9시가 조금 넘었다. 아침 10:00시에 비엔날레 전시장 입장이 가능하다 하여 입구 카페에서 커피한잔 마시면서 망중한을 즐겼다. 10시에 개장하자마자 입장하여 12시 반까지 두 개 지역(Giardini/Arsenale)에 전시되고 있는 미술(Biennale Arte) 부문만 구경하였다. 자르디니에 있는 한국관을 비롯한 몇몇 국가관과 아르세날레(Arsenele)에 있는 김아영, 임흥순 한국화가 전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전반적인 느낌은 아직 우리나라 미술 수준은 상위에 이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미술전문가는 아니지만.
비엔날레 구경을 마치고 수상버스 1번을 타고 아카데미아(Accademia) 정류장에 내려 아카데미아 미술관(The Accademia Galleries in Venice)과 구겐하임 미술관(Peggy Guggenheim)을 관람하였다. 근처에 걸어갈 만 한 거리에 있었다. 다시 수상버스 1번을 타고 시태(San Stae) 정류장에 내려, 페사로 미술관(Ca’Pesare Gallery of Modern Art)을 거쳐 오는 동안 하루가 갔다. 모든 미술관들이 수상버스 정류장에서 걸어가면 될 만한 거리에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가야하기 때문에 좀 서둘렀다.
1. 베네치아 비엔날레(Venice biennale)
<비엔날레 아르세날레 전시장 출입구>
<베네치아의 물길 도로>
2년에 한번 열리는 국제미술전시회를 지칭하는 ‘비엔날레’는 여러 나라에서 개최되고 있지만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미국의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ale), 브라질의 상파울루 비엔날레(Bienal de São Paulo)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로 손꼽힌다. 한국에서 열리는 광주 비엔날레도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1895년 세계 최초로 시작된 이래, 현재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큰 권위와 영향력 있는 비엔날레가 됐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특징은 총감독의 기획전 외에도 각 나라들이 각기 전시를 기획하는 국가관 제도가 있다. 따라서 주요 전시 장소는 크게 총감독이 기획한 대형 전시가 열리는 옛 조선소 건물 ‘아르세날레(Arsenale)’와 각 국가관이 따로 건물을 지어 모여 있는 공원 ‘자르디니(Giardini)’로 나뉜다. 물론 이외에도 베네치아 시내 곳곳에서 다양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1895년에 시작되어 2015년에 제56회를 맞이한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홀수 해에 6월에서 11월까지 열린다.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Umberto I) 부부의 결혼 25주년 은혼식을 기념할 목적으로 기획했으나 실제 은혼식 연도이던 1894년에 개최되지 못하고 1895년 제1회 전시가 ‘베네치아 시 국제 미술 전시회’라는 명칭으로 열렸다. 이후 2년마다 국제 미술 전시회가 개최되면서 비엔날레로 불리게 됐다.
한국관은 비엔날레가 100주년을 맞은 해인 1995년에 개관했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1993년 한스 하케(Hans Haacke)와 함께 독일관의 초청을 받아 작품을 전시했는데 독일관이 최우수 국가관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백남준의 세계적 명성을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고 이를 기회 삼아 비엔날레 운영위원회와 베네치아 시를 상대로 한국관 건립을 요청한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영구 국가관을 갖게 되어 세계에 한국 미술을 알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국제 미술 전시는 비엔날레 주최 측이 임명한 큐레이터가 총감독이 되어 전시를 기획하고, 총감독은 전시의 주제를 선정한 후, 이에 따라 세계 각국 미술가를 초청한다. 초청된 미술가만이 작품을 출품할 수 있으며 출품된 작품은 자르디니 중앙 전시관과 아르세날레 전시관에 전시된다. 국제 미술 전시와는 별도로 자르디니에 국가 단위의 국가관 전시도 마련된다. 국가관 전시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중요한 특징이며, 각 국가관은 국가별로 다른 운영 방식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1895년 창립 당시부터 시상 제도가 있었으나 1968년에 폐지되었었다. 1986년 부활시키면서 최고의 영예인 황금사자상(Leone d’Oro)이 최우수 국가관과 최우수 작가에게 수여되고, 젊은 예술가에게 은사자상(Leone d'Argento)이 수여된다. 그밖에 특별상 등 상의 명칭이나 대상에 조금씩 변동이 있어왔지만 큰 틀은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금년 주제는 ‘모든 세계의 미래(All the World‘s Futures)’였다. 올해 은사자상을 수상한 임흥순의 <위로 공단>은 한국 구로공단과 캄보디아 봉제노동자를 통해 아시아 여성노동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관객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무더운 전시장 내부에서, 상영시간이 1시간을 훌쩍 넘겨 전체를 본다는 것은 고역이어서 중도에 나왔다.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을 영국관이었다. 입구에 거대하게 서 있는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입체물이 버티고 있고, 전시장 내부에 여성의 성기를 강조한 하반신만 보여주고 있는데 여성 성기마다 담배가 물려있다. 무엇을 의미할까?
한국관의 문경원 전준호의 <축지법과 비행술(The ways of Folding Space & Flying)>은 ‘미래의 미술’이라는 흔한 주제를 마치 우리나라 TV에서 미래의 IT 기술을 광고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 다른 나라들의 전시에 비해 좀 실망스러웠다.
<한국관의 문경원-전준호 작품 소개 팜프렛>
<자르디니 공원에 있는 한국관 외부>
2.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주로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한 베네치아 화파 화가들의 작품을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시기별로 전시하고 있다. 베네치아 화파는 회화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빛과 색채 기법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베네치아 화파는 15세기 창시자인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를 비롯하여, 조르조네(Giorgione),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틴토레토(Tintoretto), 베로네세(Paolo Veronese) 등의 활약으로 16세기 후반까지 이탈리아 회화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미술관에 소장된 주요 작품으로는 티치아노의 <피에타>와 <세례자 요한>, 틴토레토의 <성 마르코의 기적>과 <성모승천>, 조르조네의 <폭풍>과 <노파>, 베로네세의 <레비가의 향연> 등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비트루비안 맨>도 꼭 보아야 할 작품이다.
(1)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안 맨(Vitruvian Man)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안 맨, 1487, 종이에 펜과 잉크, 34.3 Ⅹ 24.5 cm,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비트루비안 맨>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년)가 1487년경에 종이에 잉크로 그린 펜화다. B.C. 8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의 유명한 건축가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의 저서를 접하고 그린 것이다. “인체는 비례의 모범이다. 사람이 팔과 다리를 뻗으면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인 정사각형과 원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라는 비트루비우스의 글을 따라 다 빈치는 두 팔과 다리를 벌리고 선 남성의 인체를 원과 정사각형의 선으로 둘러 그 안에 인체가 완벽히 합치되는 모습을 나타냈다. 비트루비우스 글대로 따른 것이 아니라 다 빈치가 인체를 직접 관찰하고 보완하였다는 것이다.
다 빈치는 인체 속에 완벽한 우주의 질서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소우주인 인간의 몸은 우주 만상을 재는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기본적인 측정단위로 손가락, 손바닥, 발, 팔꿈치의 길이 등을 측정 단위로 설정하였다. 그림 위아래에 적혀 있는 글에는 그가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설정한 여러 측정 단위들이 표기되어있다고 한다.
(2) 조르조네: 폭풍
<조르조네, 폭풍, 1505, 캔버스에 유채, 79.4 x 73cm, 베네치아 아카데미 미술관>
조르조네의 본명은 조르조 바르바렐리 다 카스텔프랑코(Giorgio Barbarelli da Castelfranco)이며, 1477년경 이탈리아 카스텔프랑코에서 태어났다. 흑사병으로 32세에 베네치아에서 사망했다. 조르조네는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공방에서 도제수업을 받았으며 당시 베네치아에서 으뜸가는 화가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풍경은 중심인물을 위한 배경으로 그려졌을 뿐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으나 조르조네는 풍경을 독자적인 그림의 주체로 중요시하여, 17세기에 들어 풍경화가 당당하게 회화의 중심이 되는데 기초가 되었다.
조르조네의 대표작 《폭풍》에 관한 1530년의 기록에는 이 그림을 '조르조 바르바렐리 다 카스텔프랑코가 그린 폭풍우가 치고, 집시 여인과 군인이 있는 풍경'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번개가 치는 언덕을 따라 있는 도시의 풍경은 전경의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흰색 천을 두른 반라(半裸)의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고, 왼쪽에는 저만치 떨어져 뒤로 그녀를 돌아보고 있는 군인이 있다. 금방이라도 밀려올 것 같은 폭풍이 그림에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2. 구겐하임 미술관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 출입구) (구겐하임 미술관에 전시중인 칼더의 조각작품)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술품 수집가인 미국 출신의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이 죽기 전 30년간 머물렀던 저택으로 18세기 중엽에 지어졌다. 페기 구겐하임이 수집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피카소, 브라크, 클레, 칼더, 몬드리안, 칸딘스키 등 현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페기 구겐하임은 뉴욕에서 화랑(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경영하며 미술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본명은 마거리트 페기 구겐하임(Marguerite Peggy Guggenheim)으로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스물한 살에 거액의 재산을 상속받아 미술품을 수집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1920년 프랑스 파리에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을 알게 되면서 많은 미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브르통(Andre Breton), 에른스트(Max Ernst) 등과도 친분을 쌓으면서 다다이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8년 런던에 화랑(Guggenheim Jeune)을 열면서 본격적인 작품 수집에 나섰으며, 1942년에는 뉴욕에 화랑을 열고 유럽에서 수집한 미술품들을 미국에 소개하면서, 당시 무명의 폴록(Jackson Pollock), 칼더(Alexander Calder), 쿠닝(Willem de Kooning), 로스코(Mark Rothko) 등에게 작품 발표의 기회를 주었다. 1947년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자신이 수집한 작품들을 전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79년 사망할 때까지 30여 년간을 지금의 미술관 건물에서 살았다.
3. 카 페사로 미술관(Inter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in Ca’ Pesaro)
원래 베네치아의 부호 페사로 가문의 저택이었으나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래층에는 클림트, 샤갈, 간딘스키, 클레, 무어 등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회화와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3층은 동양미술관(Museum of Oriental Art)으로 일본 미술품 위주로 전시하고 있으나 중국 및 인도네시아에서 수집된 작품들도 많다.
내가 이 미술관을 찾은 이유는 클림트가 그린 <유디트 II, Judith II (salome), 1909>를 보기 위해서 였다. 처음 그린 <유디트, Judith, 1901>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미술관(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에 전시되어 있다. 중소형 미술관은 그 미술관을 대표하는 유명한 그림이 최소한 한두 점은 있어야 찾는 발길이 잦아 진다.
<클림트, 유디트 II(살로메), 1909, 캔버스에 유채, <클림트, 유디트, 1901, 캔버스에 유채,
178X46Cm, 카 페사로 미술관> 84 x 42 cm, 오스트리아 미술관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유디트는 성경의 외경(Apocrypha) 중 유딧서(Book of Judith)에 등장하는 과부 이야기로, 전쟁에서 패배할 위기에 놓인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아름답게 치장한 뒤 하녀와 함께 거짓 투항하여 아시리아 군의 총사령관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고 그의 목을 베었다. 유디트를 위해 베푼 연회에서 홀로페르네스를 취하게 한 뒤, 침대로 다가와 머리털을 움켜 잡고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오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하고 말하였고 있는 힘을 다하여 목덜미를 두 번 내리쳐서 그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다음날 아침 목이 잘린 홀로페르네스를 보고 아시리아의 군대가 혼비백산으로 도망가 버리자 전쟁은 끝이 났다.
유디트는 유럽 화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던 주제로 나름대로 해석한 유디트를 화폭에 올렸다. 바티칸 박물관 시스틴성당의 <천지창조>에도 미켈란젤로의 유디트가 그려져 있고, 로마 국립미술관(바베르니 궁전)에서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1-1610)의 유디트를 만나볼 수 있다. 또한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아르테미시아(Artemisia Gentileschi, 1593-1653)의 유디트와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유디트,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벨베데르 궁전에서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유디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의 유디트,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있는 조르조네(Giorgione, 1477-1510)의 유디트 등, 많은 화가들이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를 화폭에 담았다.
(1)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II (살로메)
유디트 또는 살로메는 남성을 유혹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여성들이다. 성서(외경)에서는 유디트가 훌륭하고 지혜로운 과부였지만, 클림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유디트는 공포의 대상이다. 죽은 남성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여인의 손은 갈퀴처럼 구부러져 있고, 얼굴 표정은 찬바람이 분다. 상반신을 벗어 젖가슴이 드러나 있지만 유혹적이라기보다 두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클림트가 보여주려는 것은 유디트와 살로메를 뒤섞어 지혜로운 승리자인 유디트의 의미보다는 잔인한 살로메의 의미도 담겨져 있다. 살로메는 유대 왕비 헤로디아의 딸로,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의붓아버지 헤롯왕 앞에서 춤을 추어 그 상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달라고 하여 그 목을 얻었다고 한다.
(2)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I
클림트가 처음으로 그린 그림은 유디트의 초상화에 가깝다. 홀로페르네스에 대한 유디트의 복수심이나 살해하고 나서의 두려움보다는, 가슴과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채로 유디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혹은 성적인 오르가즘의 파도가 흔들고 간 후의 황홀경에 빠져 있는 여인으로 표현하였다. 홀로페르네스 목은 절반만 그려져 유디트의 뒤에 있는 여러 가지 장식품보다 그 비중이 낮은 소품 기능을 하고 있다. 금빛 배경들과 몸에 치장하고 있는 장식품들은, 클림트의 그림에는 의례 등장하는, 화려한 비잔틴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옷은 19세기 유럽에 유행했던 일본풍(Japonism)의 의상을 연상시킨다.
(3) 조르조네: 유디트
<조르조네, 유디트, 1495-1500, 캔버스에 유채, 144 x 66.5 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유디트의 당당하고 미소를 머금은 아름다운 모습은, 평온하게 잠자는 혹은 체념하고 있는 듯한 적장의 표정과 매우 대조적이다. 부드러운 표정의 유디트는 고전 비너스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유디트가 입고 있는 붉은 옷과 배경의 녹색 초원의 대비는 적장의 목을 밟고 있는 유디트의 모습을 전혀 잔인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친 뒤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잠시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머리를 밟고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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