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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면 금산리
금산리(金山里)는 원래 옥천군 군서면 월서화리(越西化里)에 속해있던 마을로서 후에 동평리와 금산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 기록에는 군서면 월서화리라 하여 88호가 살았으며, 1891년 기록에는 100호가 살았는데, 이때는 동평리와 금산리를 관할하였다. 1908년 군,면 조정 때 군서면을 군서일소면(郡西一所面)과 군서이소면(郡西二所面)으로 나누었으며, 월서화리는 이소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의 전면조정 때 일소면과 이소면을 합하여 다시 군서면으로 고치면서 이때 월서화리를 동평리와 금산리로 나누었다. 금산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마을을 합쳐 새로운 리동을 만들면서 금이 많이 나는 광산이 있었고 조선시대 중기까지 금천사라는 큰절과 서대산에서 내려오는 맑고 깨끗한 큰 하천이 있기 때문에 붙은 금천(金川)과 신라 때 고시산군의 소재지였다는 ‘시림이’(식율평(食栗坪), 시름뜰)를 시루로 해석하여 시루증(甑) 자와 뒤에 산이 있다 하여 메산(山) 자를 써서 증산(甑山)이라 부른 증산에서 각각 한 자씩을 딴 것이다.
금산리의 자연마을은 금천, 시림이(시루미, 증산동), 음지서화, 잿말 등이 있다. 2007년말 현재 증산리에 58호 153명, 금천리에 58호 131명이 살고 있다.
증산리에는 아버지의 신주가 불에 타자 불에 뛰어들어 죽은 김영복 효자와 김영복 효자의 현손으로 효성이 지극해 조정에서 불러도 나오지 않았던 김건 효자에게 조정이 내려준 효자문이 있다.
이 효자문 옆에는 병든 어머니가 있는 여막이 불에 타자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함께 타죽은 김건 효자의 몸종 옥금 효녀문은 우리고장 유일한 노비 효녀문이다.
고시산군의 소재지였던 시림이 마을은 고려 때까지 관아터가 있었던 곳이고, 금천천 건너편에 있는 음지서화에는 관리들의 집터가 주로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관제 성격의 마조제를 옥천읍과 군서면 사이에 있는 마성산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매년 섣달 그믐날 시림이 마을에서 마성산을 바라보며 제를 올리고 있다.
장령산과 마성산 사이에는 예부터 군서 사람들과 금산 사람들이 옥천읍 장을 보던 큰 길이었던 사목(士目)재가 있다. 군서와 옥천읍을 연결하는 큰 길이었던 것이다.
금천리 양짓말에는 큰 절이 있던 흔적이 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고암 정립 선생이 금천사(金川寺)에서 공부를 했다는 일기를 쓴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절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을에는 물을 받았던 큰 석조와 부도가 있어 부도날이라고 불렀던 지형이 있고, 영동 영국사에서 텃세를 받다가, 20여년 전에 주민들에게 터를 매각했다고 전한다.
서대산과 장령산을 휘돌아 수려한 자연을 빚어낸 금천계곡은 옥천군내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손꼽히며 여름철 대표적인 행락지다. 조헌 선생이 우리 고장 아홉 곳의 절경을 시로 풀어 ‘율원구곡가(栗園九曲歌)’를 지었는데, 그 곳 중 하나가 금천계곡과 장현봉(장령산)이었다.
현재 장령산휴양림이 조성돼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을 숲속으로, 계곡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군서면 상지리
상지리(上地里)는 원래 옥천군 군서면 사음동리(舍音洞里)에 속해있던 마을로, 후에 사양리(舍楊里)와 상지리(上地里)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 기록에는 군서면 사음동리라 하여 68호가 살았고, 1891년의 기록에 보면 74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08년 군, 면의 행정구역 조정 때 군서면을 군서일소면(郡西一所面)과 군서이소면(郡西二所面)으로 나누면서 사음동리는 이소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의 전면 재조정 때 일소, 이소면을 합하여 다시 군서면이라 하면서 사음동리를 사양리와 상지리로 나누었다.
상지리라 부르게 된 것은 상보(上洑) 마을의 상자와 지경(地境) 마을의 지자를 한자씩 취하여 상지리라 하였다.
상보마을은 옛이름으로 “상보거리”라고 하는 바 이는 조선 선조때 농사를 적극 권장하면서 물을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칠 때 군서 뜰의 토지는 비옥하나 물 관리를 제대로 못하여 농사를 못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당시 유명한 지리학자 이도선이 이곳에 보를 막아 농사를 지으라 일러 주어 해마다 풍년이 들게 되었고, 이 보가 맨 위에 있다 하여 “상보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지경마을은 옛말로 “지경소(地境所)”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마을앞에 있는 하천만 건너면 충청남도로,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가르는 도 경계마을이다. 서화천(西華川)만 건너면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 지경리 마을이다. 때문에 “땅의 경계되는 곳”이라 하여 “지경소”라 부르다가 한자로 지경이라 쓰게 되었다.
상지리의 자연마을은 상보거리, 지경소이며, 2007년말 현재 59호 133명이 거주하고 있다.
상보거리에서는 매년 설날이 되면 마을의 나이가 많은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올리는 공동세배를 해왔다. 이제는 공동세배가 어렵게 됐지만 마을 모친계로 전통을 잇고 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마을 주민 대부분이 계원인 이 계에서는 함께 일을 봐주고, 해마다 새해 첫날 유사를 정해 모임을 갖고 있다.
지경소는 서화천을 가로지른 다리 하나만 건너면 금산군 추부면 지경리 마을이니, 예부터 하천을 사이에 둔 도계마을로, 충청북도와 충청남도에서 환경개선이나 마을정비에 신경을 쓰는 등 도계마을 가꾸기사업을 시행했던 곳이기도 했다.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옥천과 금산 경계 다리 위에서 ‘다리고사’를 함께 지내며 주민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상지리에는 ‘도둑얼갱이’와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금산 쪽에서 경계를 넘어 국도를 타고 옥천군으로 진입하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서화천변 깎아지른 절벽이다. 험준한 산세와 깊은 계곡인데, 지경소 마을 뒷산을 이루고 있는 깎아지른 절벽은 ‘얼갱이’라 하여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이점을 이용해 옛날에는 도둑 무리가 많았다고 전한다. ‘얼갱이’란 산의 이름도 그 당시 도둑무리들을 이끈 두목을 부르던 이름이었다고 한다. ‘얼갱이’ 중간에는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막혀 있지만 이 굴에 도둑들이 빼앗은 물건을 보관했을 뿐만 아니라 베를 짜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외에 ‘용소말’은 마을에서 용이 승천한 곳으로 전해오는 곳이다.
군서면 사양리
사양리(舍楊里)는 원래 군서면 사음동리(舍音洞里)에 속해있던 마을로, 후에 사양리(舍楊里)와 상지리(上地里)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서면 사음동리라 하여 68호가 살았으며, 1891년 기록에는 74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08년 군서면을 군서일소면(郡西一所面)과 군서이소면(郡西二所面)으로 나눌 때 사음동리는 이소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전면 조정 때 일소, 이소면을 합하여 다시 군서면이라 고치면서 이때 사음동리를 상지리와 사양리로 나누었다. 사양리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이 골짜기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마을은 분지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마치 마당에 울타리를 한 것 같다 하여 “마랑골” 이라 불렸는데 한자로 쓰면서 “마음”이라 하였으며 그 후 집사, 사시나무양 자를 써서 사양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서성골, 마실미, 마랑골, 뱀골(백양), 논골 등이 있으며, 2007년말 현재 99호 221명이 살고 있다.
군서면 사양리 마랑골과 대전시 낭월동을 연결하는 곤룡터널이 완공되기까지 군서면민들은 군서에서 대전시로 곧바로 갈 수 있는 통로를 원했다. 이는 사양리 곤룡재(골내미재)가 나뭇짐을 지고 대전으로 넘어가던 주요 길이었던 때문이다. 터널 길이는 536m, 폭 8m에, 1,266m의 진입도로가 완공돼 2000년 5월15일 준공식을 가지면서 여름철 장령산휴양림을 찾는 대전시민들의 중요 교통로가 되었다.
서성골에는 선인독서(仙人讀書)의 명당이 있다고 전하니, 선비들의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선비들이 많이 배출됐다고 전한다. 사양리는 특히 삼국시대 백제의 최전방 기지로서 마을의 북쪽 끝에서부터 남쪽 끝까지 무려 네개의 성터가 있어 전방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했던 마을이다.
북쪽으로부터 사양리산성, 망덕봉망루, 계현산성, 국사봉망루에 이르기까지 백제가 신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중 대전을 거쳐 부여로 향하는 중요한 통로인 닭재를 지키려는 중요 기지가 계현산성이다.
사양리의 대부분은 대전시 녹지공간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수십 년간 주민들은 생활상의 불편은 겪고 있으며, 함박골소류지와 마음소류지가 있다.
군북면 자모리
자모리(自慕里)는 원래 군북면 증약리(增若里)에 속해있던 마을이었으나, 후에 증약리가 이백리와 자모리로 나뉘어 지금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북면 증약리라 하여 287호가 살았는데, 이때는 증약리에 이백리와 자모리까지 관할하였다. 1891년의 기록에는 군북면 자모리라 하여 20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08년 군,면 조정 때에 군북면을 군북일소면(郡北一所面)과 군북이소면(郡北二所面)으로 나누었는데 자모리는 일소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에는 일소면과 이소면을 합쳐 다시 군북면이라 고쳐 부르고 자모리도 이에 속하였다.
자모리라 부르게 된 것은 옛말로 “자무실(자모실, 자모곡)”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쓰면서 발음대로 자모리라 하였으나 “자무실”의 원뜻은 마을의 지형이 산으로 에워싸였기 때문이며 “자무”는 잠긴다는 잠길 침(沈)에 마을 (洞)동으로 하여 침동이 맞겠다. 마을 지명과 관련해서는 옛날 이 마을에 살았던 충신이 매일 국사봉에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나랏님을 사모한 데서 자모실, 자모곡이라고 하였다가 자모리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일부에서 전해진다.
아래, 윗자모실과는 달리 셋집메라는 자연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다녀온 주민들이 현재의 셋집메가 있는 산기슭에 세채의 집을 지으면서 자연마을로 굳어졌다. 세 집이 집을 짓고 살았다고 셋집메가 되었다는 유래를 가진 마을이다.
은진송씨(恩津宋氏), 경주김씨(慶州金氏), 경주이씨(慶州李氏) 등이 누대에 걸쳐 살고 있다.
자모리는 윗자모, 아랫자모실, 셋집메 등 자연마을이 있고 1954년 자모소류지가 축조되었으며, 2007년말 현재 121호 306명이 살고 있다. 자모리는 대전-옥천간 국도에서 볼 때는 잘 보이지 않는 마을이지만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들이 펼쳐진다.
이 마을 역시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대전으로 통하는 주요통로였다. 특히 삼국시대 그많은 신라 군사들이 숯고개(탄현)를 어떻게 넘어갔을 것인가가 의문으로 남는데, 자모리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고개 중 자무실고개, 또는 장고개가 숯고개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고개만 올라서면 대전 판암동으로 가는 길이 넓고 완만하게 형성되어 많은 군사들이 움직이기에도 알맞다는 것이다.
또 마을 뒤, 식장산 줄기에서 발견된 쇠정골산성은 자모리에서 대전으로 넘는 고개를 감시하는 성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숯고개(탄현)의 위치를 단정할 수 없으나 지형으로 보아 자모리에서 대전으로 넘어가는 자무실고개가 그 한 후보지가 될 수 있다.
자모리에는 사기장골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경상도 어느 마을에 살던 한 농부가 자신의 아들과 부인을 죽인 후 어디론가 떠났는데, 아들이 죽은 후 유복자로 태어난 손자가 전국을 헤맨 끝에 자모리 사기장골에서 그릇을 굽고 있던 할아버지를 찾아와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잘살았다는 얘기다. 사기장골이 어디였는지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자모리는 대전시를 겨냥한 근교농업을 통해 소득을 올리는 등 비교적 일찍부터 부추를 비롯한 소득작물 재배가 이루어졌다.
군북면 증약리
증약리(增若里)는 원래 군북면 증약리로 불리워 오던 마을이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북면 증약리라 하여 군내에서 가장 많은 287호가 살았으며. 이때는 이백리와 자모리까지 관할하였다. 1891년의 기록에는 증약리에는 증약리를 자모리, 비하동리 등 3개리로 나누어 증약리에 172호가 살았는데 이때도 이백리를 관할하였다.
1908년 군,면 조정 때 군북면을 군북일소면(郡北一所面)과 군북이소면(郡北二所面)으로 나누어 증약리는 군북일소면의 소재지였다. 1914년 다시 군북면으로 고치면서 증약리를 이백리와 증약리로 나누었다.
증약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곳에 증약찰방역(增若察訪驛)이 있었기 때문이다. 증약찰방역은 전국 40개 주요 역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까지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달령(馬達領)이라는 협곡을 지나야 했으므로 양산(양산) 순양역을 비롯, 이원 토파역, 옥천읍 가화역, 화인역, 회덕 전민역(대전) 등을 모두 관할하는 중요한 역이었다.
이곳에는 종6품인 찰방 외에 역리 3백55명이 근무를 했으며, 찰방비 및 선정비 8기가 마을 뒷편 산기슭에 보존되어 있다. 당시 마을이 컸었기 때문에 마을입구에는 '장터거리'라 하여 장이 섰던 자리가 남아 있고, '쇠마재비'라 하여 조정으로 진상하던 말을 쉬게 했다는 장소도 현재의 증약초교앞 철로변쯤으로 파악된다. 또한 찰방이 거주하던 관사는 현재 증약성결교회가 있는 자리로, 교회안에 주춧돌과 말매기돌, 중수상량문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옥천-대전간 국도변에는 '증약찰방역유지비'가 세워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증약, 감로골, 비야골 등이 있고 문필봉, 딴뫼, 비석거리, 사막곶이(새매곶, 조막-새가 막 튀어나온 곳)라는 지명이 전한다. 1968년 축조한 증약소류지가 있으며, 2007년말 현재 증약리에 167호 394명, 감로리에 53호 99명, 비야리에 45호 106명이 살고 있다.
마을에는 660년 신라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하는 유일한 다리 문화재인 청석교가 있었다. 청석교에는 이곳을 지나던 고려 강감찬 장군이 모기가 극성이라는 소리를 듣고 호통을 쳐서 모기를 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청석교는 2001년 다리를 안내면 장계국민관광단지 향토전시관 앞으로 이전했다. 경부선 철로 증약터널과 관련해서는 터널옆으로 문같이 생겼다 하여 '문바위'라고 불린 바위가 있는데 터널이 개통되면서 문이 비로소 열렸다는 얘기와 함께 마을에 '대사동(大寺洞)이라는 큰 절터에서 가져간 부도가 현재 옥천경찰서 앞마당에 보관되어 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기에는 증약일대에 1만3천명의 북접동학군이 일본군 및 관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여 공주 우금치로의 진군을 며칠동안 막았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 24사단과 인민군 3사단이 마달령 산악지에서 옥천읍 서정리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단이슬'이라는 이름을 가진 감로리는 고리산 중턱의 절터 감로사에서 유래됐다. 어떤 가뭄에도 수량이 풍부해 감로사터 아래에서는 평평한 바위 위에서 물을 이용해 방아를 찧었다는 ‘물방아골’까지 있다.
비야리는 오랜 옛날,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전국을 떠돌던 옥천육씨 문중 사람이 마을샘을 발견하고 물을 마셔서 병을 치유한 끝에 사람들이 모여들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옹달샘 주위에는 200년 이상 된 향나무가 있다. 비야리에는 현재 대단위 전원주택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비야리에서 태어난 청암 송건호(宋建浩) 선생은 한국언론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다. 1926년 비야리에서 태어난 송건호 선생은 19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던 후배기자들을 해임하자, 이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이후 언론민주화운동의 대표 인물로 활동했으며, 1985년에는 월간 `말'지를,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을 창간해 발행인 겸 대표이사로 활약했다.
1939년 개교한 증약초등학교가 있으며, 상추 등 채소를 많이 재배해 대전권 채소값을 좌우할 정도로 근교농업이 활발하다.
군북면 항곡리
항곡리(恒谷里)는 원래 군북면 방하곡리(方下谷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대정리(大亭里)와 항곡리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북면 방하곡리라 하여 104호가 살았고, 1891년 기록에 보면 128호가 살았다고 되었는데, 이때의 방하곡리는 지금의 대정리와 항곡리 일원을 관할하였다. 1908년 군,면 일부조정 때 군북면을 군북일소면(郡北一所面)과 군북이소면(郡北二所面)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방하곡리는 일소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의 전면조정 때에 일소면과 이소면을 합하여 다시 군북면이라 하면서, 방하곡리를 대정리와 항곡리로 나누었다.
항곡리는 “황골”이란 옛이름을 한자로 쓰면서 발음대로 썼기 때문인데 사실 “황골”이란 “골이 크다” 는 뜻으로 이곳의 지형으로 보아 골이 깊고 커서 황골이라 불려지게 된 것이며 단일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2007년말 현재 44호 87명이 살고 있다.
항곡리는 증약리에서 넘어가는 방아재 길이 포장되기 전까지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마달령을 넘어 대전 세천을 거쳐 돌아가야 했던 마을이었다. 지형이 방아처럼 생겼다고 방아재라고 부른다는 항곡리-증약리간 고개를 포장하면서 직접 교통로가 확보됐다.
대정리와 마찬가지로 시내버스가 대전권에서 다니기 때문에 대전 생활권을 영위하고 있으며, 중학교의 학구도 대전 동신중학교이다.
항곡리와 대전시 동구 신촌동 사이의 꾀꼬리봉 정상에는 항곡리산성이 있다. 성의 크기나 위치로 보아 이웃한 대전쪽 백골산성의 주성 구실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보은 회남에서 대전과 증약을 통하는 항곡리 골짜기와 성의 남쪽 골짜기(백골산성과 항곡리 사이의 골짜기)를 경계하기 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항곡리에서 고리산으로 들어서면 이평리 공곡재로 향하는 군도가 개설되어 있고, 공곡재를 오르는 중턱쯤에 옛날에 기와를 구워냈던 가마터가 일부 남아 있는 가운데 지금도 옛기와파편이 수없이 발견되고 있다.
군북면 대정리
대정리(大亭里)는 원래 군북면 방하곡리(方下谷里)에 속해있던 마을로, 후에 항곡리(恒谷里)와 대정리로 나누어 지금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북면 방하곡리라 하여 104호가 살았으며, 1891년 기록에 보면 128호가 살았는데 이때 항곡과 대정을 관할하였다. 1908년 군,면의 조정 때 군북면을 군북일소면(郡北一所面)과 군북이소면(郡北二所面)으로 방하곡리는 일소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전면조정 때 일소면과 이소면을 합하여 다시 군북면이라 고치면서, 이때 방하곡리를 항곡리와 대정리로 나누었다.
대정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마을들을 합쳐 새로운 마을을 만들면서 대촌(大村)의 대 자와 와정(瓦亭) 의 정 자를 합하여 대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대촌의 “방아실” 마을은 생긴 모양이 디딜방아 같이 세갈래로 되었다 하여 “방아실”이라 이름 지었는데, 한자로 쓰면서 방하곡리라 하였다가 제일 큰 마을이라 하여 큰대(大) 마을촌(村)자를 써서 대촌(大村)이라 하였다.
대정리의 자연마을은 방아실, 와정, 자구티(자가터), 거먹골, 세거리 등이 있고, 마늘이 많이 생산된다. 와정소류지는 1971년 축조되었다. 1935년 개교한 대정초등학교는 1993년 3월1일 증약초등학교 분교로 격하되었으며, 2007년말 현재 대촌에 50호 123명, 와정에 97호 233명이 살고 있다.
보통 방아실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대정리는 대전쪽에서는 ‘횟집’, ‘낚시터’ 등으로 유명하지만 옥천에서는 섬 같은 곳이었다. 증약리에서 항곡리로 넘는 고갯길이 포장되고 교통여건이 개선되면서 왕래가 편해졌으며 이전까지는 마달령을 넘어 세천으로 돌아오는 불편을 겪어야 했던 곳이다.
방아실이라고 알려졌으나 주민들은 방화실(方花)이라고 말한다. 방화실은 대전시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뒷산의 이름이 화산(花山, 꽃산)이기 때문에 꽃화(花) 자를 써서 마을이름이 정해졌다가 방아실로 변천되었다.
1506년 문화류씨(文化柳氏)인 창봉 류근 공이 화산 아래 터를 잡고 마을을 세웠고 화산에 연유해서 방화(方花)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다. 문화류씨 집성촌으로, 마을 역사가 500년을 넘었다.
주민들은 대청댐에 잠긴 마을을 볼 수 고개에 1986년 ‘방화정(芳花亭)’이란 정자를 세웠다. 대정리 마을과 대전시 동구 주촌동 사이의 경계선상에 있는 꽃봉의 작은 두 봉우리중 서쪽의 봉우리에는 대정리산성이 있다. 이웃한 항곡리산성지의 보조역할을 하며 대정리 방아실나루터와 보은군 회남면의 어부동쪽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 와정소류지 위쪽에는 사기전골이 있는데 조선시대 때 사기를 굽던 가마터 흔적이 있는 곳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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