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병원(病院)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윤동주>
병원(病院)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이 시는 현실에서 받는 지나친 시련과 피로로 병이든 화자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가슴을 앓는 여자가 절망에 빠지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건강을 회복하려는 희망을 갖는다는 내용이다.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광복의 희망을 나타낸 시이다.
‘병원(病院)’은 제목이면서 일제 강점으로 인한 시련과 고통으로 병든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나라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에서 ‘젊은 여자’는 화자와 같이 ‘젊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화가 앓고 있는 병이 이 여자의 병과 같음을 의미한다. 이 땅의 젊은이는 한결같이 같은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흰 옷’은 입원한 환자복을 의미하면서도 백의민족인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 ‘일광욕’은 ‘치료나 건강을 위하여 온몸을 드러내고 햇빛을 쬠. 또는 그런 일’을 말한다. ‘일광욕을 한다.’는 치료 행위로 절망에서 벗어나 광복에 대한 희망을 회복하는 행위이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에서는 ‘젊은 여자’가 앓는 병의 증상이 제시되어 있다. 화자와 ‘젊은 여자’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는 이 땅의 젊은이를 대유한다. ‘가슴을 앓’고 있다. ‘가슴을 앓’고 있는 병은 일반적으로 폐병을 ‘폐결핵’을 말한다. 여기서는 중의적으로 쓰여 빼앗긴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마음’이 병들 정도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여자는 ‘찾아오는 이,’가 없는 혼자이다. 여자가 누워 있는 ‘살구나무’는 ‘나비 한 마리도’ 찾아오지 않고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어도 슬퍼하지 않는다. 이 ‘살구나무’는 젊은 여자의 객관적인 상관물로 젊은 여자의 감정을 대신 나타내 준다. 여자는 혼자서 ‘가슴을 앓’고 있으면서 ‘찾아오는 이’도 없고 심지어는 ‘나비 한 마리도’ 오지 않고 ‘바람조차 없’어도 자신의 병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광욕을’하는 화자가 본 받아야할 젊은이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에서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는 화자의 병이 통증이 있는 오래된 병이고 그 병의 원인을 모르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화자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은 자명하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에서 온 것이다. 화자가 겪는 것은 주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일제가 ‘시련’과 ‘피로’이다. ‘나도 모를 아픔’은 알고도 시침이 떼는 것이면서 일면 반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화자는 자신의 병을 ‘젊은이의 병’이라 명명한다. 이 병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앓는 마음의 병이다. 그래서 ‘젊은 여자’가 앓는 ‘가슴을 앓’는 병도 화자와 같은 병인 것이다. 일제 강점과 조국을 빼앗긴 상태가 ‘지나’치게 오래 되어 생긴 마음의 병인 것이다. ‘나의 늙은 의사는’ 화자와 같이 ‘젊은이’들이 앓는 병을 모른다. 그렇다고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늙은 의사’에게 화를 내면 화자는 병원에 있을 수 없다. 병이 있으면서 병원에서 나가게 되면 화자는 ‘젊은 여자’를 볼 수가 없다. 스스로 ‘일광욕을’ 통해서 치료를 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화자는 ‘나의 늙은 의사’에게 ‘성내서는 안 된다.’. ‘늙은 의사’는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일제에 협력하여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나 조국의 광복을 꿈꾸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에서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는 병들어 있는 상태에서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외롭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여자’가 절망에 빠지지 않고 ‘가슴’인 마음에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로 나타난 아름다운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는 화자도 ‘그 여자’가 병을 앓고 있음에도 절망을 하지 않고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로 나타난 아름다운 희망을 ‘가슴에 꽂’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자신의 병을 회복시키려는 희망을 가졌고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 여자’가 한 행위를 따라하므로 자신의 병, 이 땅의 젊은이들이 앓고 있는 ‘젊은이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화자가 앓고 있는 ‘지나친 시련’과 ‘지나친 피로’에서 생긴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그래서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화자는 ‘성내서는 안 된다’. ‘성내’면 병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화자는 ‘병원 뒤뜰에 누워,’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환자복인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하는 ‘젊은 여자’를 ‘한나절이 기울도록’ 본다. ‘젊은 여자’는 ‘가슴을 앓는다’. 이는 화자도 앓고 있는 병이다.‘젊은 여자’는 ‘한나절이 기울도록’ ‘찾아오는 이’도 없다. 찾아오는 ‘나비 한 마리도 없’고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는 ‘살구나무’와 같은 처지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는 슬퍼하지 않고 ‘일광욕을’ 하면서 병을 치료하려고 한다. 이윽고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는 것은 아름다운 광복의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나도 ‘그 여자’처럼 ‘젊은이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광복의 희망 갖고 이 땅의 젊은이가 모두 ‘젊은이의 병’을 치료하는 광복의 희망을 가지고 광복을 이루기를 바라면서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다. 20070113토후0921 어둠 전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