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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Spinoza, 1970): [II] 철학
들뢰즈, Sup “Philosophes”: PUF, 1970, pp. 21-38(P.128)
-[이 내용은 수정 및 첨가를 하여 스피노자: 실천 철학(Spinoza: philosophie pratique, 1981)(P.177)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민음사, 1999) 속에 들어 있음. <2. 윤리학(Ethique)과 도덕론의 차이에 관하여 (pp. 44-43)>]
# 목차 Table des Matières - 스피노자(Spinoza, 1970)(PUF)
[I] 생애 5
[II] 철학 21-38
[III] 윤리학(Ethique)의 주요 개념들의 목록 39
[IV] 작품 100
[V] 발췌 101
A) La Critique (1-6) 101
B) Conquête de l’adéquat (7-14) 111
C) Les états du mode (15-20) 119
[VI] 참고문헌(Bibliographie) 127 [목차 128]
# 목차(Table des Matières) -스피노자: 실천 철학(Spinoza: philosophie pratique, 1981)
1. 스피노자의 생애 9
2. 윤리학(Ethique)과 도덕론의 차이에 관하여 27
3. 악에 대한 편지들(블레이은베르흐와 서신교환) 44-43
4. 윤리학(Ethique)의 주요 개념 색인
5. 스피노자의 전진 165
6. 스피노자와 우리 181
옮긴이 해제 195
들뢰즈 연보 213
참고문헌 217.
* 스피노자 윤리학(Ethique)은 일반적으로 도덕론과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도덕론은 사회나 국가라는 공동체 위에서, 사회와 인격, 그리고 인격들 사이의 연관들에 관한 것인데 비해, 윤리학(Ethique)은 존재론적 근거로서 자연 즉 신을 다루고, 그 토대 위에 인성(인간의 자연성 또는 본성)의 속성들과 양태들, 신체를 지닌 또는 생명체로서 인성의 발산(개체성)과 수렴(인격성)을 표현하면서, 인간 본성의 실현이 자유임을 말하고자 한다. 이 실현의 과정과 완성의 길은 어렵고, 또한 그 실행을 하는 자가 드물다고 한다.
인간은 왜 예속을 당연히 여기는가? 그리스 비극과 같은 슬픈 정념이 왜 인간에게 실재적인 양상인 것으로 여기는가? 들뢰즈는 인간의 세 유형을 구분하며, 슬픈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념들을 이용하여 인간들[스폰서 검사들], 정념에 벗어나지 못하는 인민들에게 연민의 정으로 대하며 척 가식하는 인간들, 즉 노예, 전제군주, 성직자라는 도덕적 삼위일체를 이룬다고 한다. (52VLE)
** 우선 니체는 왜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지는가에 대해 문제 삼으면서, 그리스 아테네 시대에, 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둔 유리피데스 작품에서 허무주의가 배태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런 허무주의와 마찬가지로 프러시아 독일이 비참에 빠진 것을 비판하는 것이 니체의 “도덕학의 계보”이다. 니체는 당시 국가주의, 과학주의, 군국주의 예술을 비판하면서, 성직자(바울의 크리스트교), 주지주의자(신칸트주의), 음악가(바그너)라는 상층 옹호자들을 우월한자라고 하고 그들이 인민에게 강요하는 기만과 환타지(환상)를 경구로 비판하였다. 진솔한 허무주의 극복은 인민이 권능의 의지를 모순관계 없이 자발적으로 실행하며, 스스로의 능동성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것이라 한다. 허무주의의 극복은 생명의 환희이다. 이점에서 니체는 스피노자의 제자이다. / 박홍규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철학이 두 가지라 한다. 하나 종교에서 이다. 종교는 세상의 어려운 현실을 억지로 무시하고 없는 것으로 무화하여, 그 허무(虛無)위에서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은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하는 것이나, 실재에서는 그러한 것이 없다. 다른 하나는 플라톤에서 이다. 즉 아페이론을 다루는 데미우르고스 방법이다. 이런 관점이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와 더불어 펠로포네소스 전쟁에서 오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플라톤 철학이라고 보았다. 이데아의 세계를 현실에 심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관점도 종교 관점만큼이나 구체적이지 못하다. 나로는 이 두 극복의 관점은 상층의 관점이지 심층의 관점이 아니다. 자연 또는 인민이 스스로 자기 생성과 활동으로 만들어가는 관점이 도래하기 까지는 생산력이 발달해야 하며, 인간이 스스로 자연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또는 권능이 있다는, 종교의 허상과 이데아의 착각에서 벗어나는 시기에 와서야, 인간의 자치와 자유가 확보되어야, 극복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그 첫 세대이다. 그러다가 도덕적인 가치를 스스로 생산할 수 있다고 하는 니체가 상층 이론을 전복하고(들뢰즈 표현으로 망치로 부수고) 심층의 권능(내재성)을 제기한다.
니체는 우선 백성들에게 유대 성직자들이 원한을 심었고, 그리스트교 성직자들이 양심가책을, 그리고 주지주의적 성직자들이 금욕주의를 심어 놓았다고 한다. 첫째는 식민지에서 상층이 피지배자들을 수탈하는 데 협력하는 과정에서, 둘째는 전제군주들에 협력하여 종교의 권위로 인민의 재화를 착취하려는 과정에서, 셋째는 근대국가에서 상부가 하부의 잉여를 수탈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농노제가 그대로 남은 프러시아에서 새로운 과학의 힘을 입어 전제군주를 닮은 국가주의자가 등장하고 게다라 거기에 맞게 예술이 영광을 찬양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참담한 세상, 야만의 세상을 보았다. 이 극복은 누구나(인민) 권능을 행사하다가, 영겁회귀로 돌아가고 또 새로운 인간형(아제인간)의 도래에 힘써야 한다고 한다. (52VLE)
** 세 부분이다. 들뢰즈는 이 세 부분에서 니체를 서두에서 한 번, 1절에 두 번, 2절에 한 번, 3절에 한 번 언급한다. 즉 이 글은 들뢰즈에게 마치 니체의 울림이 스피노자에게로 이어진 것처럼 되어 있다.
하나는, 의식이 신체이다(생명체). 의식은 인식이 아니다. 의식은 오성 의식과 무의식으로 되어 있다. 의식이 착각하는 경우는 오성의 인식(주지주의에) 의존하는 정도에서 이다. 목적인의 착각, 자유 명령(자유의지)의 착각, 신에 설정(신학적) 착각을 넘어서 무의식에 현존을 인정해야 한다. 신체의 활동에서 노력(conatus)은 감화를 확장한다.
둘째는 신체를 통한 행동이다. 신체(와 영혼)는 동한다. 생명체의 과정에서 선과 악이 없었으며, 잘하고 못하고(서투르고) 정도의 차이가 있고, 훌륭하고 열등하다는 것은 주지주의의 기준에 의한 것이다. 주지주의자들이 말하는 법칙은 폭군의 법칙, 아브라함의 법칙과 그리스도의 법칙, 모세의 법칙은 유해한데, 표면 위에서 상층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초월적 존재(이상)에 의한 기준은 없고, 내재성이 양태를 생성하는 위상에서 잘함과 잘못(서툼)이 있을 뿐이다. 내재성의 연결된 행동이 제도라는 독극물의 해독제이다.
셋째 세상사의 삶에서 기쁨과 슬픔이라는 것이 정념에서 이루어진다. 권능이 부여한 행동의 능동적 활동에서 활기와 기쁨(환희)이 있다. 능동적 감화 작동의 지속(영속)하는 과정으로, 내재성의 발현, 무의식적 필연성의 정복[숙명], 이런 행동에서 지복에 이르며, 그 인간이 자유이다. (52VMC)
아래 글은 베사드(Jean-Marie Beyssade 1936-2016)가 스피노자를 평한 것이다. 들뢰즈가 유물론, 비도덕론자, 무신론자로 제시했는데, 이에 비해 베사드는 일원론 지침서, 도덕론 지침서, 자유 지침서를 말하고 하나 더 붙여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말했지만, 실제로 스피노자가 민주주의(공화정)를 옹호하였지만, 사실은 정치론 집필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을 끝내 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베사드 견해: 그(스피노자)의 친구들은 곧바로 그의 유고 전집(Oeuvres postumes)을 라틴어 원본과 네델란드 번역을 동시에 출판했다. 이 책은 오랫동안 범신론적 일원론의 지침서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이고 도덕적인 지침서, 종교적 자유의 지침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지침서가 되었다. 하나의 형식 또는 다른 형식 하에서 “스피노자의 분쟁(la querelle)”이, 두 세기 동안에 무신론자 스피노자에 대한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에 의한 고발에서부터 고결한 무신론자의 신화적 모습에까지 이어지며 계속된다. 19세기부터 회복(복구)의 시도들이 이어지고, 스피노자는 차례차례로 신비가 또는 유물론자처럼, 무신론자 또는 크리스트교인처럼, 비극적 사유의 선구자 또는 인문과학의 선구자처럼, 정신분석의 선구자 또는 맑스주의의 선구자처럼, 전체주의의 선구자 또는 소유의 개인주의 선구자처럼, 그리고 자유주의의 선구자처럼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벩송(Henri Bergson, 1859-1941)의 말에 따르면, 모든 철학은 두 가지 철학이 있다. 하나는 그 자신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의 것이다. 각자는 또한 스피노자의 것 위에서 자기 자신의 철학을 투사하는 것이다. (Jean-Marie Beyssade) (52RLE) -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해제 머리글’, J.-M. Beyssade,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p. 1474.>>
## 내용 ## - [II] 철학 21 [1970년판] -
제2장 윤리학(Ethique)과 도덕론의 차이에 관하여 (1981년판, 박기순]
스피노자의 이론적 주제: 유일 실체로서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은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갖는다면, 피조물들[인간들]은 이 속성들의 양태들 또는 실체의 변형들일 뿐이다.(27, 31)
이 실천적 주제들은 다음과 같은 삼중 고발(une triple dénonciation)을 포함하고 있다: “의식”에 대해, “가치들”에 대해, “슬픈 정념들에 대해. [다음 문장은 1970년 판에 없는, 1981년 판에 첨가된 문장이다] 이것은 니체와 크게 닮은 세 가지이다. 그리고 이미 스피노자가 살았을 때부터, 사람들이 그를 유물론(matérialisme), 비도덕주의(immoralisme), 무신론(athéisme)으로 고발했던 이유들이다. (27, 31) - [삼중 고발의 역사유(逆思惟, 전도) 또는 삼중구도는 상층의 아버지(성부)-어머니(성령)-자식(성자)의 삼위격과는 전혀 다른 위상(차히)으로 심층의 위상구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셋의 위상은 자연, 무한 속성, 양태의 변이들(긍정의 긍정의 긍정), 여기에 모순의 변증법이 낄 틈이 없고, 생성과 창발, 창안과 발명, 환희와 자유가 있으리라. (52VLE)]
제1절, 의식에 대한 평가절하(사유를 위하여): 스피노자 유물론자 32
§1. Dévalorisation de la conscience(au profit de la pensée): Spinoza le matérialiste
- [물체(신체)를 대상화하여 추론으로 사고하는 것을 의식이라 하지 말고, 생명체로서 내재성을 표출하는 과정을 의식이라 하고, 의식을 풀어나가는 것이 사유이다.]
스피노자는 철학자들에게 새로운 모델, 즉 신체(le corps)를 제안한다. ..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다. 우리는 알지 못하면서 말을 늘어놓는다. 니체가 말할 것인 것처럼, 사람들은 의식 앞에서 놀라지만 “놀라운 것은 오히려 신체이다….” (28, 32)
그렇지만 스피노자의 유명한 이론적 논제들 중의 하나는 평행론(le parallélism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 논제의 요체는 정신과 신체 사이의 실질적인 인과성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어떤 우월성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다른 한편] 영혼이 능동적일 때에는 반드시 신체는 수동적이라고 사람들은 말해 왔다(28, 32-33). [평행론의 가설은 라이프니츠 것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위상론과 별개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전혀 무관하다. - 스피노자에서 신체의 중요성을 주목하라. 벩송의 경우 영혼(의식)>신체로 파악하여, 싯달다의 생명(진여)>신체(인연연기, 제도)와 유사성이 있다.(52VLI)]
윤리학에 따르면, 영혼에서 능동적인 것은 신체에서도 필연적으로 능동이며, 신체에서 수동인 것은 또한 영혼에서도 필연적으로 수동이다. 한 계열(une série)[또는 선(ligne)]에 대한 다른 계열의 어떤 우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28-29, 33)
그것은[스피노자의 신체모델은] 신체란 사람들이 신체로부터 갖는 인식(la connaissance)을 뛰어넘는다는 것, 사유는 우리가 사유[생각]으로부터 갖는 의식(la conscience)을 그래도 덜 뛰어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 간단히 말해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의 모델은 너비와 연관하여 사유[인식]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사유와 관련해서 의식을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즉, 무의식(l’inconscient)의 발견이며, 그리고 신체의 미지[의 세계](l’inconuu)에 못지않게 깊은[심층] 사유의 무의식의 발견이다. (29, 33)
의식은 자연적으로 착각의 장소(le milieu d’une illusion)이다. 의식의 본성은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원인들을 모르는데 있다. (29, 33)
신체와 정신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것이야 말로 놀라운 것이다. 살아있는 부분들의 전체는 복잡한 법칙들에 의해 결합하거나 해체된다. 따라서 원인들의 질서는 자연 전체를 감화(변용)시키는(affecter), 연관들의 결합과 해체의 질서이다. (30, 34)
그러나 의식적인 존재들로서 우리는 이런 구성들과 해체들의 결과들(les effects)만을 받아들이다. 우리는 한 신체가 우리 자신의 신체를 만나 우리자신 것과 더불어 구성될 때, 또 한 관념이 우리 영혼과 만나 그것과 더불어 구성될 때, 환희(la joie)를 체험하며, 반대로 신체 또는 관념이 우리의 고유한 응집을 위협할 때 슬픔(la tristesse)을 체험한다. (30, 34)
간단히 우리가 사물들을 인식하고 우리 자신을 의식하는 조건들이, 부적합한(inadequates) 관념들만을, 혼란스럽고 절단된 관념들만을, 즉 자신들의 고유한 원인들로부터 분리된 결과들만을 가지도록 우리를 단죄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행복하다든가 최초의 인간이 완전하다든가 하는 것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 ... (그 누구도 스피노자 이상으로 완전하고 행복한 아담이라는 신학적 전통을 반대하지 못했다.) (30-31, 34-35)
어떻게 의식이 자기의 불안(l’angoisse)을 고요하게 할까? 어떻게 아담은 스스로 행복하고 완전하다고 상상할까? 삼중 착각(une triple illusion)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 결과들을 원인으로 삼는(목적인들의 착각) .. 의식이 스스로 제일원인으로 간주하고 신체에게 자기의 힘을 내세우는(자유 명령들의 착각) .. 영광과 처벌에 따른 세계[저세상]를 인간에게 준비하게 해 놓은(신학적 착각) .. 그 의식은 두 눈들 뜨고서 꿈을 꾸고 있다. (31, 35-36) [의식은 착각은 인간 자연 속에 주인 또는 제국의 제국처럼 사고하는 데 있다. 진솔한 사유는 자연 안에서 자연에 의해 자연 스스로 사유를 진행하는 것이 필연이며 숙명이다. ‘자연에 따라 살라!’는 (소크라테스-퀴니코스 이래로) 스토아를 통해 알렉산드리아로 전승되고, 그 전승이 지브롤터를 넘어서 리베리아를 거쳐 네델란드에 스피노자에 이른 것이다. 글고 벩송에서 들뢰즈로 (52VMC)]
“이와 같이 어린아이는 자유의지에 따라 우유를 욕구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화가 난 젊은이는 복수를 원한다고 생각하며, 겁 많은 사람은 도망가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취한 사람은, 이후에 제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말하고 싶지 않을 것을, 영혼의 자유명령에 의해 말한다고 생각한다.” (31-32, 36)
또한 의식 자체는 원인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식을 갖는 욕구(l’appétit)”로서 정의하기에 이른다. (32, 36)
(“우리가 어떤 것을 향해 노력하고 그것을 원하고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원하고 욕망하기 때문이다.”) (32, 36)
그런데 욕구(l’appétit)란 노력(l’effort)일 뿐이며, 그 노력에 의해 각 사물은 자기 존재 속에서, 각 신체는 너비 속에서, 각 영혼 또는 각 관념은 사유 속에서, 끈질기게 보존되고자 애쓴다(conatus). (32, 36)
필연적으로 코나투스에 대해 의식의 원인인[원인 되는] 것은 결정하는[규정하는] 감화작용(ces affections, 변용들)이다. .. 의식은 많은 것에서 적은 것에로 적은 것에서 많은것으로 그러한 이행의 연속적인 감정처럼 나타나는데, 이행의 연속적 감정이란 다른 신체들 또는 다른 관념들과 연관에 따라서 코나투스의 변이들과 규정작용의 증거이다. (32, 37)
나의 본성에 맞는 대상은 나를 우월한 총체성을 형성하게 규정하며, ... 나에게 적합하지 않은 대상은 나의 응집을 손상시키고, 또 나를 하부 부분들로 분할하는 경향이 있고, 극한에서는 이 하부부분들이 나의 구성적 연관과 화해할 수 없는 연관으로 들어간다(죽음).
의식은 이행(le passage)처럼 있으며, 오히려 보다 적은 능력의 총체성으로부터 보다 적은 총체성으로 이행의 감정처럼, 그 반대의 이행처럼 있다. 의식은 순수히 이전(transitive, 전이轉移)이다.
니체는 엄격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자이며, 그는 이렇게 쓴다. “가장 중요한 활동은 무의식적이다. 의식은 일반적으로 전체가 보다 큰 전체를 종속하고자 할 때에만 나타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보다 큰 전체, 나의 외부에 있는 실재에 대한 의식이다. 의식은 우리가 그것의 기능일 수 있는 존재에 관련해서 생겨난다. 의식은 우리를 그 전체에 통합시키는 수단이다.” (33, 37-38)
제2절 모든 가치들에 대한, 특히 선과 악에 대한 가치절하(좋음과 나쁨을 위하여): 스피노자 비도덕론자
§2. Dévalorisation de toutes les valeur, et surtout du bien et du mal(au profit du“bon” et du “mauvais”): Spinoza l’immoraliste
- [추상관념으로서 선과 악이 아니라, 구체개념 잘함과 못함이라..]
“너는 저 과일을 먹지 말라‥…” 불안에 사로잡힌 무지한 아담은 이 말을 금지의 표현으로 듣는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되는 것은 과일이며, 아담이 그것을 먹을 경우에, 과일이 아담을 독살하게 할(empoisonnera)것이다. ... 아담은 원인들을 모르기 때문에, 아담은 신이 자기에게 과일의 섭취로부터 자연적 귀결을 드러냈을 뿐인데, 신이 자기에게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금지했다고 믿는다. 스피노자는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우리가 악, 질병들, 죽음의 범주 아래 모아놓은 모든 현상들은 이런 전형(ce type)이라: 즉 잘못(나쁜), 만남, 섭취불량(소화불량), 음독(독기 마심, empoisonnement), 중독(intoxication), 연관의 해체. (33-34, 38) [벩송 MR의 첫 문장이 금단의 열매로부터 시작한다. 왜 인간에게 금지 또는 토템이 있는가라고. 정태적 사회는 금지와 강요, 억압이 먼저 있다.]
모든 방식에서 항상 연관들이 있고, 이 연관들은 전지연의 영원한 법칙들에 맞추어서 자기들의 질서 속에서 구성된다(se composer). 선(le Bien)도 악(le Mal)도 없으나, 좋음(le bon)과 나쁨(le mauvais)[잘함과 서툼]이 있다. “‘선악을 저 넘어’, 그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을 넘어’를 의미하지 않는다.) (34, 38)
좋음과 나쁨은, 첫 의미로서는 객관적이지만 관계적이고 부분적이다. 우리의 본성에 맞는 것과 안 맞는 것이다. 그 귀결로서 좋음과 나쁨은 둘째 의미로서는 주관적이고 양상적(modal)이며, 두 가지 전형, 즉 현존의 두 양태에게 자격을 부여한다. (34-35, 39) [들뢰즈는 음식물과 독을 예로 들었다.]
할 수 있는 한에서 만남들을 조직하고, 자신의 본성과 맞는 것과 통일을 이루며, 결합 가능한 연관들을 자신의 연관과 구성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능을 증가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훌륭하다(bon)고 (또는 자유롭다고, 이성적raisonnable이고, 강하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훌륭함(bonté)은 역동론의, 권능의, 권능의 구성작용의 일이기 때문이다. 만남의 우연에 따라 살아가고, 자신이 겪은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나타나고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날 때마다 한탄하고 비난함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들을 수동적으로 겪는 데 만족하는 사람은 열등하다(mauvais, 서툴다)고, 또는 노예적이라고, 약하다고, 미련하다고 말해질 것이다. (35, 39) [전자의 권능의 고양과 확장이고 후자는 권능의 무능과 무실이다.]
[열둥한 자에게서] 자기 자신의 무능과 자신의 예속성, 자신의 질병, 자신의 소화불량, 자기의 독극물과 독약을 도처에 퍼뜨리면서, 죄의식(la culpabilité)[la mauvais conscience]으로 인하여 어떻게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고, 또한 원한(le ressentiment)으로 인하여 어떻게 타인들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스스로 만나는 것조차 더 이상 알지 못한다. (35, 40) [죄의식은 크리스트교 사제에 의에서, 원한은 유대 사제에 의해서]
따라서 윤리학(l’Ethique)은, 말하자면 내재적 현존 양태들의 전형학(une typologie)은 언제나 현존을 초월적 가치에 연관시키는 도덕론(la Morale)을 대체한다. 도덕론은 신의 심판이며 심판의 체계(le système du Jugement)이다. 그러나 윤리학은 심판의 체계를 뒤엎는다(전복한다). 가치들(선-악, Bien-Mal)의 대립 대신에, 현존 양태들의 질적 차이(좋고 나쁨, bon-mauvais)로 대체된다. 가치들의 착각(l’illusion)은 의식의 착각과 하나를 이룬다. (35-36, 40)
“법칙이라는 말이 자연 사물에 적용되고, 따라서 모두 다 같이 법칙이라는 말을 단지 명령만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유비에 의한 것이다‥…” 니체가 화학에 대해, 즉 해독제들 과 독극물들에 관한 과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법칙이란 단어(le mot loi)는 경계해야 한다. 그 단어는 [개운찮은] 도덕적 뒷맛(un arrière-goût moral)을 가지고 있다. (36, 40-41) [특히 생화학에서 법칙이 완전한 진리와 거리가 멀다. 법칙은 명령적이 아니다. 해독제로서 법칙은 개연성을 지닌 일반화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도덕 법칙은 정언명법도, 신의 계명도 아니다. 그럼에도 실행하는 것은 사회의 안정과 관습에 의존한다. (52VLG)
그럼에도 두 영역을 분리하는 것은 쉽다. 이 영역들의 결과(효과)들에 의해서 일지라도, 두 영역이란 자연의 영원한 진리들의 영역과 제도의 도덕적 제도들의 영역이다. (36, 41) [들뢰즈는 자연은 존재론의 영역이고, 제도는 윤리 또는 도덕의 영역이다. 후자에서 원자를 기본요소로 삼을 경우에는 죽음의 허위를 비판하고, 신체를 현실태로 삼을 경우에는 무에서 창조와 최종 심판(판단)으로서 변증법을 비판하고, 영토화에 관련하여 기계를 내세울 경우 만들어진 것을 고착성과 정태성을 비판하며 새로운 창안 발명을 내세우려 한다.]
법칙(la loi, 법률)은 도덕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우리에게 어떠한 인식도 가져다주지 않으며, 법칙은 아무것도 인식하게[알게] 하는 것이 없다. 최악의 경우에 그것은 인식의 형성을 방해한다(폭군의 법칙, la loi du tyran). 최선의 경우에 법칙은 인식을 준비하고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아브라함의 법칙 또는 크리스트의 법칙, la loi d’Abraham ou du Christ).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법칙은, 자신들의 현존 양태를 이유로 인식할 수 없는 자들에게, 인식을 보충해 준다(모세의 법칙, la loi de Moïse). (37, 42). [주지주의(신칸트학파)의 인식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에 있다. 현실에서 새한당(황교안, 윤석열, 부일숭미신문)은 첫째 유형, 진중권은 둘째 유형, 유시민은 셋째 유형에 자리하고 있다. 파랑이이다. 촛불과 인민은 다른 위상에 있다. 여기에는 자연주의와 내재성이 동하고 용솟음치고 있다. 인식은 생성의 기호에서 시작한다. 빨강이이다.]
여기에서 도덕적이고 창조적이고 초월적인 신의 가설이 나온다. 우리가 아제 볼 것이지만, 여기에는 존재론 전체를 위협하는[타협하는] 혼동이 있다: 즉 긴 오류(une longue erreur)의 역사가 있는데, 여기에서 사람들은 명령을 이해해야할 어떤 것과, 복종을 인식 그 자체와, 존재(l’Etre)를 당위(un Fiat)를 혼동한다. 법칙, 그것은 여전히 선악이라는 가치들의 대립을 결정하는 초월적인 심급이지만, 그러나 인식, 그것은 여전히 좋음-나쁨[잘함-서툼]의 현존 양태들의 질적 차이를 규정하는 내재적 권능이다. (37, 41-42) [알뛰세류와 라깡류의 프로이트 해석자들은 심급의 문제로서 판단(심판)을 제시하는데 비해, 들뢰즈/가타리는 내재성의 권능의 발현, 창안, 발명, 혁명을 문제 삼는다. -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는, 이 영토와 8천만의 덩어리가 ‘이 뭣꼬’라고 문제 삼는다. ]
제3절 모든 슬픈 정념들에 대한 가치절하(환희를 위하여): 스피노자 무신론자 (37, 42)
§3. Dévalorisation de toutes les “passions tristes”(au profit de la joie): Spinoza l’athée
- [모든 슬픈 정념들은 외부와 관계 또는 유형들의 연관 속에서 생긴다. 그 외부가 추상으로서 관념이 실재로서 작동하는 데서 오는 착각 인데 r, 상aehms
윤리학과 도덕론이 동일한 원리를 다르게 해석하는 데서 서로 만족한다면, 둘의 차이는 단지 이론적일 뿐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모든 저작 속에서 세 종류의 등장인물들을 고발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 슬픈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들, 정념을 필요로 하는 인간들, 인간조건으로서 정념을 슬퍼하는 인간들(이들은 분개하기도 하고 비웃기도 한다. 이 비웃음(cette raillerie) 자체는 좋지 않은 웃음이다.), .. 노예(l’esclave), 참군(폭군), 성직자‥… 도덕론의 3위격(trinite maoraliste)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 이래로 누구도 폭군과 노예의 뿌리 깊고 내밀한 관계를 더 잘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 (37-38, 42-43)
“군주 정치체의 커다란 비밀과 그것의 깊은 관심은 인간들을 속박할 때 이용하는 두려움(la crainte)를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하면서 인간들을 속이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예속이 마치 자신들의 안녕(leur salut)이기라도 하듯이 예속을 위해 투쟁한다.” [오늘 아침에 9시 반경에(191122), 청사 별관 뒷길 앞에 ‘지소미아를 연장하라’ 고함치며 일인 시위하는 사람을 보고 지나가면서, 내가 “일본사람인가 했는데 우리말 잘 하네”라고 한 마디 던지며 지나치는데, (차량에는 마이크가 넷이나 달려있다)시위자와 그 옆에 보조하는 사람이 서로 뭐라고 말하다가, 내 뒤에 대고 고함을 치며 “빨갱이 새끼들은 다 쳐 죽여야 해”라고 한다. 내야 내 길을 가지. - 이 부일자들이 예속을 위해 투쟁하는 노예들이다.]
윤리학(Ethique)은 원한을 지닌 인간의 초상화
를 그리고 있는데, 그에게는 모든 행복은 공격이고, 또한 비천함과 무능을 자기의 유일한 정념으로 만든다. “영혼들을 강하게 하는 대신에 영혼들을 파괴할 아는 자들은 [타인에게도] 자기 자신에도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비참하다]. 따라서 {조급한 마음과 종교에 대한 그릇된 정념에 사로 잡혀} 많은 사람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살기보다 짐승들 가운데서 살기를 더 선호한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부모의 질책을 차분한 마음으로 견딜 수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군대로 피신하여, 가정의 안락함과 부모의 훈계보다 전쟁의 불편함이나 폭군의 권위를 선택하고 부모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자신들에게 부여되는 어떠한 짐도 감내한다.” (38-39, 43) .
스피노자에서는 “삶(la vie, 생명)”의 철학이 있다. 정확히 말해서 이 철학은 우리를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것들을, 삶에 반대하는 모든 초월적 가치들을, 우리 의식의 조건들과 착각들에 연결된 가치들을 고발하는데 있다. 삶은 선과 악의 범주에, 과오와 공로의 범주에, 죄악과 속죄의 범주에 중독되어 있다. 삶을 중독하게 하는 것, 그것은 증오(la haine)이고, 거기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증오, 즉 죄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39, 43-44)
슬픈 정념들의 연쇄로서... 우선 슬픔 자체, 그 다음에 증오, 반감, 조롱, 두려움, 절망, 양심가책(morsus conscientia), 연민, 분개, 시기(l’envi), 수치, 회한, 비굴(l’abjection, 자기낮춤), 치욕(la honte), 후회, 분노(la colère), 복수, 잔인함‥… 등이 나온다. (39, 44)
진정한 도시국가는 시민들에게 보상에 대한 희망이나 심지어는 재산의 안전보다, 오히려 자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훌륭한 행실로 보상을 받는 것은 노예들이지 자유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39-40, 44) [광주항쟁이후 그랬다.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명예회복이 더 중요하다고. 짧은 기간에 광주 시민이 보여준 성숙한 자유, 자치, 자주가 소중하다. 민주화운동으로 지정되었다.]
니체에 앞서, 스피노자는 삶을 위조하는[거짓으로 만드는] 모든 것, 삶을 폄하하게 하는 모든 가치들을 고발한다. 즉 우리는 삶을 겉치레(un semblant)로 살고 이끌어가는 것, 지도 않는다. 우리는 죽는다는 것을 피하려고만 공상하는 것, 우리의 모든 삶이 죽음의 제단(숭배)이라고 하는 것, 이런 가치들을 고발한다. (40, 44)
슬픈 정념들에 대한 이런 비판은 변용 이론(la théorie des affections 감화작용)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개체(un individu), 그것은 우선 특이한(singulière) 본질, 즉 일정 정도의 권능(puissance)이다. 이 본질에 특성적인 연관이 상응한다. (40, 44)
유들과 종들에 관한 고려는 또한 “도덕”을 함축한다. 반면에 윤리학(Ethique)은 행동학(l’éthologie)이며, 이 행동학은 인간들과 동물들에서 각각의 경우에 감화(변용)되는 능력/힘(le pouvoir d’être affecté)만을 고려한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행동학이라는 관점에서, 사람들은 먼저 두 가지 종류의 감화작용(변용)을 구별해야 한다. 능동들, 이것들은 감화된 개체들의 본성에 의해 설명되고, 개체의 본질로부터 유래한다. 수동들, 이것들은 다른 사물에 의해 설명되고, 밖으로부터 유래한다. 감화되는 능력/힘은, 능동적 감화작용들에 의해 채워지는 것으로 가정되는 한에서, 마치 작용하는 권능(puissance d’agir)[potentia agendum]처럼 현재로 있고, 그런데 정념들에 의해 채워지는 한에서, 마치 감내하는 권능(puissance de patir)처럼 현재로 있다. (40-41, 45) [벩송에서 작용하는 권능은 생명(영혼)의 것이며 감내하는 권능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신체에 연관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서 영혼과 신체가 둘 다, 두 권능을 지니고 있는 속성에서 연관인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수동(감내)에 대해서 신체의 작동(또는 작용)에 관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동일한 개체에서, 말하자면 몇몇 한계들[양태들] 내에서, 감화되는 능력/힘은 그 자체로 동일한 한계들 내에서 일정하다(constant). 그러나 작용하는 권능과 감내하는 권능은 반비례로(en raison inverse) 서로 서로를 깊이 변하게 한다. (41, 45) [개체에서(양태의 현실태 속에서) 두 권능의 발현은 반비례한다. 즉 둘의 양은 일정하다. 그런데 개체의 생산하는 본성(nature naturante)에서, 외부의 다른 물체(신체)들과 관계 및 영향을 받는 의식 상태들의 연관들, 이 두 양태들은 능동성과 수동성을 각각 반비례로 표현한다. 그럴까? - 들뢰즈는 수동성의 이중성을 구별한다.]
능동들과 수동들의 구별뿐만 아니라. 두 종류의 수동들을 구별한다. 모든 방식으로 수동[정념]의 고유함(le propre), 이것은 우리의 작동하는 권능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하면서도 또 이 권능으로부터 분리된 체 우리를 유지하면서, 감화(변용)되는 우리의 능력/힘(le pouvoir d’être affecté)을 채우는 것이다. (41, 45) [정념(수동성)은 작동하는 권능과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영향(감화)을 주는 힘이 있다. 즉 양태에서 이 외적인 정념은 지각처럼 신체의 경향일 것이고, 여기에는 수동이 미치는 내재적 권능의 감소와 증가에 따라 슬픔과 환희가 있다. 외부 물체나 상태가 수동성 자체가 아니고, 자아[개체]와 관계 또는 연관에서 소멸(파손)하는 것이 슬픔이고, 증가하는 것이 환희인 셈이다.]
우리의 작용하는 권능이 감소되거나 방해 받는다 것, 상응하는 정념들은 슬픔(tristesse) 이다. 반대로 그 권능이 우리 자신의 것에 덧보태지는 것, 우리를 감화시키는 것은 환희(joie)이며, 작용하는 권능이 증가되고 도움을 받는다. (41, 46)
작용하는 권능이 그래도 그것(정념)과 비례적으로 증가되고, 우리가 전환(conversion)점과 변환(transmutation)점에 “접근하는”데, 이 전환점이 우리를 (정념의, 작용 권능) 주인으로 만들고, 따라서 그 전환점이 능동을 즉 활동적 환희를 감당하게 할 것이다. (41, 46)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le baroque, 1988)에서는 다른 표현을, 즉 변곡점이란 개념을 쓴 것 같은데,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 ]
감화작용들의 이런 이론의 일체는 슬픈 정념(수동)들의 지위(le statut)를 고려하게 한다. 이것들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이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되는 간에, 이 슬픈 정념들은 우리 권능의 가장 낮은 정도를 표현한다. (42, 46)
오직 환희만이 가치가 있으며, 오직 환희만이 능동 가까이에 또 능동의 지복 가까이에 가게 만든다. 슬픈 정념은 언제나 무능력이다. 윤리학(Ethique)이 제기하는 세 가지 실천적 문제(le triple probleme pratique)는 다음과 같다. (온자연 속에서 우리의 처지로 인해 우리는 나쁜 만남들과 슬픔들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즐거운 정념들의 최대치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할 것인가? (우리의 자연적 조건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신체에 대해, 우리의 정신에 대해, 다른 사물들에 대해, 부적합한 관념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능동적인 감정들을 가능케 하는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기에 이를 것인가? (우리의 의식은 착각과 분리될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자기 자신을, 신을, 사물들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따라 의식하게 되는가? (sui et Dei rerum aeterna quadam necessitate conscius?) [즐거운 정념, 적합한 관념, 필연성 수긍: 한마디로 자연에 따라 살라! 이다. 이런 실천은 소크라테스의 ‘이뭣꼬’의 물음에서 시작한 것이기도 하고, 아집을 버리고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 였다. 이를 체계화하는 것이 AD 3세기, 그러고 나서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것으로 실재성을 부여 하는 추상화 작업이 생성 되는 데, AD 8세기경으로, 대수학에서 0의 개념이다. 0의 실재성은 나중에 무한의 실재성을 보장할 것이다. 물리적 구체성의 논쟁들은 갈릴레이가 살았던 17세기에서야 이루어진다. 인류가 이렇게 느리다.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52V]
기호들(les Signes) 즉 감화작동(affects), 용어들(les Notions) 즉 개념들(concepts), 본질들(les Essences) 즉 지각들(percepts)이 들어 있다.
윤리학(Ethique)의 중요 이론들은 – 실체의 유일성, 속성들의 일의성(univocité), 내재성, 보편적 필연성, 평행론 등은 – 의식, 가치들, 슬픈 정념들에 관한 세 가지 실천적 논제들과 분리될 수 없다. 윤리학(Ethique)은 동시성을 갖고 있지만, 두 번에 걸쳐 쓰여진 책이다. 한 번은 엄격한 정신으로 주요한 사변적 논제들을 발전시키고 있는 정의들, 명제들, 증명들, 보충들의 연속적인 흐름 속에 씌여졌고, 다른 한번은 가슴 속의 모든 분노를 표현하고 고발과 해방의 실천적 논제들을 제기하는 주석들의 분절적 연쇄 속에서, 비연속적 격렬한 전열 속에서 씌어졌다. 이 후자는 첫째 설명 방식에 숨겨져 있는 둘째 설명 방식 아래에서 씌어졌다. 윤리학(Ethique)의 모든 길은 내재성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내재성은 무의식 그 자체(l’inconscient lui-même)이며, 무의식의 정복이다. 윤리학적 환희(la joie)는 사변적 긍정(l’affirmation)의 상응 개념이다. (42-43, 47, 2장 마지막 문단) [내재성은 무의식, 기억, 생명의 생성, ..]
(13:22, 52VMBC)
**인명록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철학자.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유태계 네델라드 철학자.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1647 벨/바일(Pierre Bayle, 1647-1706) 프랑스에서 태어나 네델란드 로테르담에서 몰했다. 프랑스 철학자, 작가, 사전편찬자.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1697(1702, 1740)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문헌학자, 철학자. 망치의 철학자.
(14:05, 52V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