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 제29권
44. 초품 중 ‘보시의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이 보다 더 뛰어나다’의 뜻을 풀이함 ②
【經】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을 구하는 사람의 모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과 삼매(三昧)에 대하여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隨喜心]1)으로써 그보다 더 뛰어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선정이라 함은 4선(禪)과 9차제정(次第定)이다.
해탈과 삼매라 함은 8배사(背捨)와 3해탈문(解脫門)과 시해탈(時解脫)과 불시해탈(不時解脫)과 유위해탈(有爲解脫)과 무위해탈(無爲解脫) 등이며,
유각유관삼매(有覺有觀三昧)와 무각유관삼매(無覺有觀三昧)와 무각무관삼매(無覺無觀三昧)와 공삼매(空三昧)와 무상삼매(無相三昧)와 무작삼매(無作三昧) 등의 모든 삼매이다.
【문】 위의 여섯 가지 일 중에서의 삼매는 바로 그것이 선정과 해탈과 삼매인데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설명하는가?
【답】 두 가지의 삼매가 있다.
하나는 혜해탈의 갈래(慧解脫分)요,
하나는 공해탈의 갈래(共解脫分)이다.
앞의 것은 혜해탈의 갈래라 선정에 들어갈 수도 없고 다만 미도지(未到地)2) 중의 삼매만을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공해탈의 갈래를 설명하는데 선정과 해탈과 삼매가 갖추어져 있다.
거기서는 간략하게 설명을 했지만 여기서는 자세하게 설명하며,
거기서는 다만 이름을 설명했을 뿐이지만 여기서는 그 뜻을 분별한다.
또 앞의 수승하다는 삼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둘의 삼매는 깊은 삼매가 아니며 지금 이 안에서는 선정과 해탈과 심히 깊은 삼매를 자세히 설명한다”고 한다.
또 선정과 해탈과 삼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욕망을 여읠 때에 얻는 것이고,
둘째는 구해서 얻는 것이다.
욕망을 여의면서 얻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고,
여기에서는 구해서 얻는 것을 설명한다.
또 선정과 해탈과 삼매는 얻기가 심히 어려우므로 부지런히 힘써 구해야 얻게 되지만,
보살은 다만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만을 지니면 곧 그보다 더 뛰어나게 얻는다.
이것은 전에 없었던 법이기 때문에 거듭 설명하는 것이다.
【문】 그 안에서의 삼매와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 역시 얻기 어려운 것인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도 얻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먼저 설명에서는 바로 혜해탈(慧解脫)의 갈래이어서 심히 깊은 이치를 다하지 못했으며 공해탈(共解脫)의 아라한과 3명(明)의 아라한은 얻기 어렵기 때문에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또 이 삼매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이 비록 얻기 어렵기는 하나 두루 다 궁구하지 않은 채 곧장 열반을 위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아라한이 현재 세상의 선정의 즐거움을 얻고자 함을 밝히는 것이다.
이른바 멸진정(滅盡定)과 정제선(頂際禪)3)과 원지(願智)와 무쟁삼매(無諍三昧) 등은 곧장 열반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의 것에서는 곧장 열반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해탈과 해탈지견의 서로의 차례를 설명했기 때문에 한결같이 열반만을 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문】 만일 선정ㆍ해탈ㆍ삼매가 얻기 어렵기 때문에 말한 것이라면 지혜는 온갖 법 가운데서 가장 어렵고 미묘한데 무엇 때문에 거듭 설명하지 않는가?
【답】 위에서의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보다도 뛰어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한 가운데서 이미 설명했다.
이 선정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정과 지혜에 대하여 거듭 말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 법은 가장 미묘하며 이 두 가지의 행이 있으면 소원을 모두 얻게 된다.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으면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해탈은 이 두 가지 법으로부터 얻게 되니, 해탈지견은 바로 그것이 지혜이다.
보시와 지계 이것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요 거친 행(行)이라 얻기 쉬우므로 거듭 말하지 않는다.
【문】 보살은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으로써 성문이나 벽지불의 보시와 지계와 지혜보다 수승하다 하시는데, 그것은 옳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시와 지계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지혜도 역시 이것이 들은 법이면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정ㆍ해탈ㆍ삼매 같은 것은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법이 아닌데 어떻게 더불어 기뻐하는가?
【답】 보살은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지타심지(知他心智)로써 더불어 기뻐한다.
【문】 지타심지의 법에서는 유루(有漏)의 지타심지면 다른 이의 유루의 마음을 알고 무루(無漏)의 지타심지면 다른 이의 무루의 마음을 안다.
그런데 보살은 아직 부처님이 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성문이나 벽지불의 무루의 마음을 안다는 것인가?
【답】 그대의 성문의 법 중에서는 그렇겠지만, 마하연의 법 가운데서는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모든 번뇌를 끊었으며 온 세상마다 항상 6신통을 잃지 않으므로 유루의 타심지로써도 무루의 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그러니 하물며 무루의 지타심지로써 왜 모르겠는가.
다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뜻을 일으킨 보살은 아직 법성생신(法性生身)을 얻지 못한지라, 만일 성문이나 벽지불의 보시와 지계를 보거나 들으면 모두 알면서 아라한이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이 사람은 모든 법의 실상을 얻고 삼계(三界)를 여읜다’고 말하나,
내가 바라는 바는 온갖 중생들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제도함에 있으므로 그가 이미 해탈하게 되었으면 그것은 바로 나의 일이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더불어 기뻐하나니, 이 때문에 더불어 기뻐하는 데에는 허물이 없다.
1)
범어로는 anumodanācitta.
2)
범어로는 anāgamya. 이른바 초선의 경지에 들기 직전의 집중된 심리상태를 말한다. 미지정(未至定)이라고도 한다.
3)
범어로는 prāntakoṭika-dhyā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