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림 파괴를 비롯해 인간이 환경에 미친 영향으로 나타난 직접적인 결과들이었다.
그 여파는 더 참혹햇다. 기아로 시작해서 싸움이 빈발했고
급기야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식인풍습)으로 반전했다.
살아남은 섬사람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기아의 참상은
'모아이 카바카바(moai kavakava)'라는 작은 석상의 확산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야윈 뺨과 갈피뼈를 선명히 드러낸 굶주린 사람의 모습이다.
1774년 쿡 선장은 섬사람들을 '작고 마르고 겁 많고 초라한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거의 모두가 모여 살았던 해안 저지대의 집터들도
전성기이던 1400~1600년에 비해 1700년대에는 70퍼센트가 줄었다.
인구도 줄었다는 증거였다. 야생 동물이 사라지자,
섬사람들은 가까이 있지만 그때까지 식량 자원으로 샹각지도 않던 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의 유골이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후기의 쓰레기 더미에서도 발견된다. 골수를 빨아 먹으려던 것일까" 쪼개진 뼈까지 있다.
이스터 섬의 구전설화에서 카니발리즘은 빠지지 않는다.
적에게 모욕감을 주는 가장 심한 욕은 "네 엄마의 살을 내가 씹어 먹겠다!" 였다.
이스터 섬의 족장들과 성직자들은 신과의 밀접한 관계를 주장하면서
풍성한 수확과 번영을 약속하면서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정당화시켰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주려고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고
제식(祭式)을 집전하면서 그런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했다.
먹을 것이 넘쳐흐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약속이 점좀 공수표가 되면서 족장들과 성직자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졋고,\\
1680년경에는 '마타토아(matatoa)'라는 군부 지도자들이 족장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복잡하게 통합되었던 이스터 사회가 거듭된 내란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 전란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흑요석 창('카타아')이 얼마 전까지 이스터 섬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째부터 과거에는 지배계급에게만 허락되었던 해안 지역에 서민들도 작은 집을 지었다.
안전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굴을 거처로 삼았다.
동굴을 파서 안쪽 공간을 넓혔고, 입구는 적의 침입으 막기 위해 부준적으로 폐쇄해서 좁은 통ㅇ로로 만들엇다.
음식의 흔적, 뼈로 만든 바느질용 바늘, 목공 연장, 타파 천을 수선하는 도구 등이
동굴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판단하건대 동굴은 일시적인 은신처가 아니라 일상적인 거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터 사회가 저물어가면서 낡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무너졌고,
족장의 권위와 더불어 종교적 전통까지 허물어졌다.
구전설화에 따르면, 마지막 아후와 모아이가 세원진 것은 1620년경이었다.
가장 큰 석상인 파로도 이때쯤 세워진 것 중 하나였다.
지배계급이 일정한 생산량을 징발해서 석상 제작에 투입된 사람들을 먹엿던 고지대의 플랜테이션은
1600년부터 1680년 사이에 점차적으로 황폐화되었다.
그런데도 석상이 점점 커졌다는 것에서 상대를 압도하려는족장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의 위협을 조상의 힘으로 피해 보려는 간절함이 읽혀진다.
일종의 쿠데타가 일어난 1680년경, 씨족 들 간의 다툼은
더 큰 석상을 세우려는 경쟁에서 상대 씨족의 석상을 무너뜨리는 파괴로 변해갔다.
그 때문에 석상들이 들판에 쓰러지면서 파괴되엇다.
제4장과 제5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아나사지 문명과 마야 문명에서도 그랬듯이
인구, 기념물의 건축, 환경의 충격이 궁극점에 이르면서 이스터 사회는 금속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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