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각해일륜_50. 화두를 참구하는 데 제병통(諸病痛)을 자세히 밝힘(詳明)(제5)
무릇 모든 병은 아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중생의 아는 마음은 파리와 같습니다. 파리가 모든 물건마다 다 옮겨 붙지만 불 끝 위에는 엉겨 붙지 못하는데, 중생의 아는 마음도 이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아는 가운데에서 두 가지 병이 있으니, 하나는 마음이 총명하여 잘 아는 것으로 교묘한 꾀(計巧)를 잘 내며 생각을 잘하여 재주로 도를 알려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법을 입으로 의론하여 ‘알 수 없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알 수 없소’ 하는데, 두 가지 병이 있습니다.
이 아는 것과 모르는 두 가지 병으로부터 네 가지 병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는 병으로부터 유심병有心病을 일으키는 것이니, 혹자들은 ‘눈으로 보고 아는 것(眼識)과 귀로 듣고 아는 것(耳識)과 코로 냄새 맡고 아는 것(鼻識)과 입으로 맛보고 아는 것(舌識)과 몸에 닿아서 아는 것(身識)과 뜻 뿌리(意根)로 분별하여 아는 것(眼識)48) 등 이 여섯 가지 문으로 감각하여 아는 것을 지키라’고 하는 자도 있으며, 혹 ‘소소영영昭昭靈靈으로 도道를 삼으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것이 육근六根의 광영光影을 지키는 것이므로 종놈을 잘못 알아서 상전으로 삼는 것이니라.
혹 ‘공空함을 돌이켜 보라’ 하는 자도 있으며, 공을 증득하는 것으로 도를 삼는 자도 있으니 이것이 다 병이다.
혹 나의 본심本心으로 계행戒行도 지키고 절도 지으며, 불사(聖事)도 하고 모든 복덕福德을 지어야 대각이 된다고 하는 것이니, 우치愚痴한 병이로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나의 본성은 억지로 조작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보아라! 허공은 사람이 만드는 것인가? 우리의 본성을 짓는 것으로 아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네가 아는 마음으로 무량겁無量劫을 이리저리 생각하여 볼지라도 추호도 상관이 없다.
그러면 모르는 마음이 도道인가? 혹자들은 무심無心이 도라고 하여 일부러 무심을 짓되 얼굴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죽이며, 얼굴은 고목枯木나무와 같이 하고 마음은 식어 버린 재와 같이 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이 병이다. 혹자들은 마음을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아는 것으로 도를 삼으며, 혹자들은 ‘어느 때든지 마음을 쉬라, 쉬고 쉬어 가면 정념情念이 생겨나지 아니한다’고 한다.
이것은 달마 성사達摩聖師가 중국(支那)에 처음 왔을 때에 2조 혜가 성사慧可聖師께서 밖으로 치구馳求하는 마음을 쉬지 못하여 한없는 총명聰明으로 마음이니, 성품이니, 이치이니, 여러 가지를 설하여 도를 증거하는데, 달마께서 2조 혜가를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도를 알고자 한다면, 밖으로 모든 인연을 없애 버리고, 안으로 마음이 헐떡거리지 아니하여 장벽墻壁같이 하여야 도에 들어가리라’ 하시니 혜가께서 달마의 말씀하신 그 자리에서 모든 인연을 쉬고 크게 깨쳤으니, 이것은 혜가의 치구심馳求心을 없애라는 잠시방편暫時方便이다. 진실한 법이 아닌데도 지금 사람들이 마음을 고목枯木나무와 돌덩이같이 만들려고 하니 참 불쌍하도다!
또 맑은 것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도 도道를 삼으니, 이것은 제8식第八識을 지키는 외도外道이어서 각법覺法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탕탕무애蕩蕩無碍하여 마음대로 자재自在히 하라. 생각이 일어나든지 생각이 멸하든지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라고 하니 이것은 자연외도自然外道이어서 각의 도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다 아는 병과 모르는 병의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는 것이니, 학생學生에게 만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식善知識이 잘못 가르친 병이 있는 것이다.
도를 알지 못하거든 남을 가르치지 마시오. 그 죄악이 천지에 용납하기 어렵소. 남의 대사를 그르치게 하니 그 허물이 적지 않소. 요즘에 견성見性한 사람이 많으나 실제로 보면 참으로 없다고 하여도 옳을 것이오. 일시一時에 적은 명리名利를 탐하여 그렇게 하다가는 무량겁 동안 허물이 됩니다.
또 하나는 도를 진실하게 참구하여 진실하게 깨치는 것이 옳거늘 눈치와 말로 알려고 하니 참 어리석소.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진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어찌 눈치로 알고 말로 알며, 문자文字에 있는 언설言說로 알겠는가?
또 하나는 말없이 고요히 하고 잠잠한 것으로 알 수 없소. 나의 진면목眞面目은 적묵寂默도 아니고, 유심이나 무심이나 언어言語나 적묵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진성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 묻기를,
“육조六祖 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위로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 땅을 기둥하였다’ 하니 천지 사이에 가득히 찼다고 하는 말인지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위로 하늘을 버티는 기둥이 되니 하늘이 이것이 아니면 덮을 수가 없고, 아래로는 땅을 버티는 기둥이 되니, 땅이 이것이 아니면 실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천지만 버티겠는가? 온 세계世界와 허공虛空과 법계法界를 온통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 묻기를,
“무자 화두無字話頭에 열 가지 병이 있는데, 다른 화두도 열 가지 병이 있습니까?”
대답하기를,
“화두마다 있소.”
“그러면 그 열 가지 병을 자세히 일러 주십시오.”
대답하기를,
“열 가지 병이 아는 것으로부터 있으니, 첫째, 이 아는 한 글자가 도에 장애障碍되는 것이다. 둘째, 이 아는 것으로부터 ‘이것은 이 뜻이다. 저것은 저 뜻이다. 이것은 이 이치다. 저것은 저 이치다’ 하는 병이며, 셋째, 귀로 듣고 마음으로 뜻을 풀어 내어 이리저리 생각하며, 넷째, 이것으로부터 뜻으로 생각하며, 다섯째, 입으로 의론하며, 여섯째, 또 생각할 수 없는 두 가지 병이 있고, 이것으로부터 네 갈래로 병이 있으니, 일곱째, 있는 마음으로 구하고자 하며, 여덟째, 없는 마음으로 얻고자 하며, 아홉째, 말로 하려고 하며, 열째, 잠잠한 것으로 통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열 가지 병이 있으니, 첫째, ‘있다, 없다’ 하는 것으로 아는 것과, 둘째, 참 없음이라고 아는 것과, 셋째, 도리로 아는 것과, 넷째, 뜻 뿌리(意根)로 이리저리 헤아리는 것과, 다섯째,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작깜작하는 곳에 무겁집을 짓고 뿌리를 박는 것과, 여섯째, 말로 장기를 삼아 살아갈 방도(活計)를 짓는 것과, 일곱째, 일 없는 구덩이 속에 있는 것과, 여덟째, 불조의 향상관向上關을 들어 일으키는(擧起) 곳에 받아들여 감당하는(承當) 것과, 아홉째, 문자文字 가운데 인용하여 증거로 삼는(引證) 것과, 열째, 미혹(迷)을 갖고서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 등을 열 가지 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열 가지 병이 경교經敎 가운데에 있으면 법계부사의법문法界不思議法門이 되겠지만, 경전 밖에 따로 전한 것(敎外別傳)으로 보면 큰 병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자세히 가르쳐 주기를 바랍니다.”
대답하기를,
“첫째는, ‘있다, 없다’ 하는 ‘무無’로 아는 병이니, 학자學者의 대병大病은 ‘깨쳤다, 알았다’ 하는데 모든 병이 있는 것이다. 확철確徹히 깨치지 못하면 병이 가득 찬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화두만 참구하는 것이 좋다.
혹 어떠한 사람은 내가 조주께서 ‘무’를 말한 것을 ‘깨쳤다’ ‘어떻게 깨쳤소?’ ‘예, 내가 깨친 것은 각성覺性이 있는 것을 대하여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각성이 있다’고 하는 말은 깨치는 성품이 있다는 말이다. 이 신령하고 참된 성품이 외롭게 드러나 각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일체중생에게 각성이 있다는 말이다. (신령하게 깨치는 성품을 각이라고 한다.)
각성이 없다는 말은 신령하게 깨친 그 당처當處가 본래공本來空하여 한 법도 없는 것이니, 무엇을 마음이니 각이니 성품이니 하는가? 그러므로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용성이 말하기를,
“당신의 말씀은 불조의 설화문說話門의 입장에서 보면, 병이 될 것 없다. 그러나 화두를 참구하는 데는 큰 병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있다, 없다 하는 것으로 알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둘째는 참으로 없다는 병이니, 가령 어떠한 사람이 ‘화두를 깨쳤다’ 하거든 곧 묻기를, ‘어떻게 깨쳤는가?’ ‘예, 나의 깨친 뜻은 나의 본래면목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절대絶對로 없어 각성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이것을 다 없애버려 참으로 없는 것이니, 이같이 깨달았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유무有無를 함께 보면 정각正覺을 수순한다는 말씀은 경에도 있는데, 이것은 불조의 설화문에 좋은 말이다. 그러나 화두를 참구하는 데는 큰 병이 되는 것이다.”
셋째는 도리道理로 아는 병이니,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내가 한 가지 깨침이 있다. 이미 있고 없는 것으로 알 수 없고,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가 다 공한 것으로도 무 자 뜻이 아니니라.”
하니, 내가 또다시
“깨친 곳이 있소? 그러면 어떻게 깨쳤소?”
“예, 내가 묘妙한 것으로 알았소.”
“묘한 것으로 알았다니 무슨 말이오?”
“말로 보일 수 없고, 분별로 알 수 없는 것이 묘한 것이오. 내가 『법화경法華經』을 보니, ‘그치고, 그치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나의 법法은 오묘하여 사의思議하기 어렵다’49)고 하시니, 조주趙州의 ‘무’ 자도 이와 같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 말을 경교로 보면 병이 될 것이 없겠지만, 활구참선에는 큰 병이 된다. 그러하므로 고인古人이 혹 현현묘묘玄玄妙妙한 도리道理로 도를 삼을까 싶어 하여, 도리로 알음을 짓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넷째는 뜻 뿌리로 헤아리는 병이니, 이 사람이 ‘모두 병 되는 것이다’라고 함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 하여 까막까막 생각하여 헤아려서 알려고 하는데, 급히 호령하여 말하기를,
“이 여우 정령(狐狸精靈)이여! 무슨 계교사량計較思量을 하는가?”
그러하므로 옛날 사람이 뜻 뿌리로 헤아리지 말라 하신 것이다.
다섯째는 눈썹을 찡긋찡긋하고 눈을 꿈적꿈적하니, 이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내가 깨친 바 있노라.”
라고 하였는데,
“여보시오 당신이 어떻게 깨쳤소?”
“예, 이것은 참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가만히 작용作用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면 가만히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그 진상眞相을 보이는 것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용성이 급히 소리쳐 말하기를,
“곧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지 못하고, 옛사람의 기틀을 따라 한번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자기의 깨침을 삼는가? 그러므로 옛날 사람이 말씀하시기를,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빡이는 곳을 향하여 무겁집을 짓지 말라’고 하시니, 이것은 무자의無字意를 깨친 것이 아닌 것이다.”
여섯째는 진실로 공부는 하지 아니하고 말로만 도를 닦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말은 도가 아닌 것이다.
일곱째는 일 없는 갑(無事匣) 속에 있는 병이니,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내가 ‘무’ 자를 또 깨친 바 있노라.”
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깨쳤나요?”
“예, 내가 깨달은 바는 곧 일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도를 듣고 갖가지 분별심分別心과 갖가지 치구심馳求心이 있기 때문에 한칼로 두 구절을 내어 당하當下에 일 없는 것을 깨치게 하기 때문에 ‘무’라고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자기가 자성을 확철히 깨달아야만 ‘무’ 자를 타파打破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제 너의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할 것이 없다, 일이 없다’고 하지만, 다시 대답하여라. 어떤 것이 조주의 ‘무’를 말하는 뜻인가?”
저 사람이 다시 대답하기를,
“하염없고 일 없는 것이 ‘무’를 말하는 뜻입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이까짓 소견으로 어찌 무상도無上道를 알겠는가? 요사이에 학자들이 흔히 이러한 폐단이 많다. 자칭 ‘일 마친 사람’이라 하여 고기 잡는 집과 술 파는 집에 한가히 노닐 것이며, 녹수청산에 뜻대로 하여 하염없이 즐겁다 하는 것이니, 이것은 네가 무단히 절로 깨쳤다 하는 것과 같다. 그러하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 없는 갑匣 속에 있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여덟째에는 그 사람이 묵묵부답하였는데, 용성이 말하기를,
“아란야승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狗子)에게도 도리어 각성覺性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무無’라고 하심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이 예배하였는데, 용성이 급히 말하기를,
“예배는 무슨 일을 위함인가? 알고 예배하는 것이냐,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것인가, 아니면 승당承當하는 뜻인가?”
대답하기를,
“승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고 하는 것인가, 모르고 하는 것인가?”
하니 그 사람이 호령하는데, 용성이 천연한 태도로 소리쳐서 말하기를,
“큰 용을 낚으려 하였는데, 쓰지 못할 작은 자라가 앙금앙금 걸어 나온다. 다시 일러라.”
그 사람이 잠잠하고 있는데, 용성이 웃으며 말하기를,
“참 벙어리로다. 현현玄玄한 지취旨趣를 알지 못하고 한갓 적묵寂默하기만 해 괴롭게 하는구나.”
그 사람이 눈만 뛰룩뛰룩 굴리고 소향所向을 알지 못하는데, 용성이 소리쳐서 말하기를,
“무상도無上道를 눈치로 알려고 하는가? 요사이에 종사宗師가 고인古人의 향상법向上法을 들어 말한다면, 얼른 눈치로 알아 승당하는 사람이 많은데, 가히 애석하도다! 그러하므로 옛사람이 고인의 화두를 들어 말하는데 승당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문자 가운데 인증하는 법이니, 그 사람이 이 말 저 말 여러 말을 끌어대어 말하기를,
“어떤 경에는 어떻게 말하고, 어떤 글에는 어떻게 말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의 도안道眼이 명백明白하여 가슴 가운데로 솟아난 것이라도 지극히 정밀하고 세세히 하여야 간택할 것인데도, 어찌 고인의 책자가 가운데 있는 것으로 인증하는 것이냐 말할 것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이 문자文字 가운데 인증引證함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이다.”
열째는 미혹함을 가지고 깨치기를 기다리는 병이니,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나는 미혹한 사람이니 어서 깨치기를 기다리노라.”
용성이 말하기를,
“내가 미혹하였다고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병이로다. 어찌 그러한가? ‘내가 고인의 현관玄關을 알지 못하니, 어서 급히 공부를 할 것이다’라고 하여 머리에 불 끄듯이 하는데, 급히 깨칠 마음이 앞에 있어 큰 장애障碍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십종병이라고 하니 부디 깨치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혹자或者가 헤아려 생각해(商量) 말하기를,
“조주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사람을 보고 공연히 방긋방긋 웃고 물건을 가지고 희롱하지만,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무’ 자의 뜻이 이와 같다고 하며, 또 혹자들은 말하기를,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요, 구자狗子는 다만 구자요, 무 자는 다만 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며, 또 혹자들은 조선문朝鮮文에 ‘무’ 자라 하는데, 이것이 큰 병이 되는 것이다.
이 문중門中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만 화두話頭만 참구하고 아는 마음은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천하만세天下萬歲 영웅호걸英雄豪傑이며, 고금철학가古今哲學家가 하나도 이 마음을 깨친 사람이 없고, 오직 대각능인大覺能仁 삼십삼성사三十三聖師와 오파분방五波芬芳의 모든 성사께서 크게 깨쳤도다.
이 마음을 어떻게 아느냐, 말하여라.”
혹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떳떳하여 변치 아니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하늘과 땅이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사시四時가 변하여 바뀌는 것과 만물이 변하여 옮기어 가는 것과 삼세가 간단없이 흘러가는 것들이 가지가지 허망하고 허깨비 같은데(虛幻) 어찌 떳떳하다(常)고 하는가? 그대 몸이 떳떳하다고 할 수 없다. 백세광음百世光陰이 자꾸자꾸 흘러감에 목숨이 아침 이슬과 같으니 어찌 떳떳하다고 할 것인가? 너의 마음이 떳떳한가?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또 생멸심生滅心이 변화무쌍變化無雙한데 이 어찌 떳떳하다고 할 것인가? 또 너의 성품이 떳떳한 것인가? 그러면 고금에 응연凝然히 변치 아니하여, 나는 이치가 끊어질 것이다.
또다시 묻노라. ‘어떠한 것이 너의 성품인가?’
만일 빈 것이 너의 성품이라고 한다면 길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만일 맑은 것이 너의 성품이라고 한다면 길이 맑아 흐리지 아니할 것이며, 만일 착한 것이 너의 성품이라고 한다면 길이 착하여 악하지 아니할 것이고, 만일 악한 것이 너의 성품이라고 한다면 길이 악하여 착하지 아니할 것이니, 성인은 길이 성인이 되고 범부는 길이 범부가 될 것이다. 겁劫이 다할 때까지라도 한 사람도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참된 성품이 매우 깊어서 미묘微妙하여 제 자성自性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이룬다’고 한다. 또 만일 일체 제법을 그르다고 한다면 천지 만물과 사대오온四大五蘊과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없는 데로 돌아가 허무虛無할 것이니, 이것들이 다 외도外道의 견해見解인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비고도 신령하고, 고요하고도 오묘하다’고 하니 네가 감히 끊어져 없는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이치가 스스로 내가 이치라고 함이 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인하여 이치를 세운 것이니, 본래 이치가 끓어진 것인데, 감히 이치라고 말하는 것인가?
기운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람에게 허령지각虛靈知覺의 기운과 공기와 전기와 물기운과 불기운 무리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본래 모든 기운이 없는 것인데, 감히 모든 기운이라고 말하겠는가?
인연因緣은 화합化合한 것으로 이룬 것이다. 이 한 물건은 인연으로 조작된 것이 아닌데, 감히 인연이라고 말하겠는가? 자연自然은 천진天眞만 믿는 것이다. 성품은 자연도 아닌데, 네가 감히 자연이라고 말하겠는가?
사제법四諦法이라 하는 것은 첫째는 괴로운(苦) 법이니 이것은 삼계三界 괴로운 과보果報이고, 또 둘째는 모으는(集) 업이니 그 삼계에 모든 고를 받는 것이다. 입 뿌리와 몸 뿌리와 뜻 뿌리, 이 세 가지 곳에 모든 죄악이 모여 있는 것을 인因이라고 하고, 또 셋째는 멸滅하는 법이고, 또 넷째는 도법이니, 이 도법인道法因을 닦아 몸 뿌리, 입 뿌리, 뜻 뿌리에 모인 죄악의 근본인根本因을 끊고 청정적멸과淸淨寂滅果를 증득하는 것이다. 참다운 도는 마음을 불 꺼진 식은 재와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니, 감히 사제법이라고 말하겠는가?
십이인연十二因緣이라 하는 것은 일체중생이 모든 가히 사량思量할 만한 경계를 대하면 참으로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탐착심을 일으키는 것인데, 알음이 없는 것은 어두운 무명無明이 인因이 되고, 탐착심貪着心을 일으키는 것은 행行하는 과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인연으로부터 탐착을 행하는 과果가 생生하는 것이다.
또 탐착하는 인연으로부터 모든 경계를 낱낱이 가려 분별하여 아는(識) 과가 생겨나고, 또 하나는 이 아는 인연으로부터 가지가지 차별을 갖추었기 때문에 명색名色의 과果가 나고, 또 명색의 인으로 육근六根에 들이는 육입과六入果가 나며, 또 육근에 들이는 인으로부터 육근에 닿는(觸) 과果가 나고, 육근에 닿는 인으로부터 낱낱이 받아들이는(受) 과果가 나고, 받아들이는 인으로 사랑하는(愛) 과果가 나며, 사랑하는 인으로부터 취取하는 과가 나고, 또 취하는 인으로부터 업이 있는(有) 과果가 나며, 또 업이 있는 인으로부터 생生하는 과가 나고, 생하는 인으로부터 늙어 죽는(老死) 과가 나며, 또 늙어 죽는 인으로부터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과가 나는 것이다.
본래 무명이 끊어졌는데 감히 십이인연이라고 말하겠는가? 각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데, 감히 각승覺乘을 말하겠는가? 아는 것으로도 알지 못하고, 지혜로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원래로 이름과 말이 아닌데 감히 최상승最上乘이라고 말하겠는가? 본래 격식의 안(格內)이라는 것이 없는데, 누가 격식 밖(格外)의 도리를 말하겠는가? 모두 이것이 아니면 무슨 물건인지 한번 궁구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하루살이가 곳곳마다 엉기어 붙지만 불꽃 위에는 붙지 못하는데, 세상 사람의 아는 마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또 한 사람이 묻기를,
“기운이 모이면 사람이 나는 것이고, 기운이 흩어지면 사람이 죽는 것이다. 무슨 궁구할 가치가 있겠는가?”
용성이 대답하기를,
“기운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또 기운은 자각自覺이 있는 것인가, 자각이 없는 것인가? 만일 기운이 자각이 있다고 한다면, 허공 기운과 전기 기운과 물기운과 불기운이 다 아는 자각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분명히 알 것이고, 나무와 돌덩이라도 기운이 다 있는 것이니 그것들이 다 자각이 있어서 말하던가? 아무 자각도 없이 기운으로만 사람이 난다고 할 수 없다.
또 네 말대로 사람이 기운으로만 나고 죽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자각이 기운 가운데 있는 것인가, 기운이 자각 가운데 있는 것인가? 자각이 기운을 인因하여 나타나는 것인가, 기운이 자각을 인하여 나타난 것인가? 그 기운은 어디에서 나는 것이며, 그 자각은 어디로부터 있는 것인가? 그 자각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의 형색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 물건이 무슨 물건인가? 궁구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공부를 할 때에 한가히 앉아 잠만 자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혹 잠이 오거든 곧 일어나 서서徐徐히 걸어 다니며 공부를 놓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