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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홍 친구 펜션 방문기
오월도 이제 중순에서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다.
태양빛은 맑은 하늘에서 빗살처럼 강력히 내려 쏟아지고 차창 밖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무들은 검푸른 색깔로 오월의 여왕답게 싱그러운 향기를 내 뿜어 우리들 가슴을 흥분시키고 있다.
지금 우리들 경술회 멤버들이 강원도 홍천군 오대산 자락에 자리하고 문제홍 친구의 펜션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퇴직 후 문제홍 친구가 강원도 홍천에 휴양용 펜션을 지었고 그동안 사적으로 몇몇 친구들이 이미 다녀온 봐 있어 오늘 공식적인 방문행사에는 9명의 친구들만이 동행하여 최정소 회장이 렌트하고 직접 운전하는 승합차가 신나게 달리고 있는 중이다.
우리들 모임에서 친구네가 살고 있는 거처로 직접 방문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지만 주택이 아닌 펜션시설을 갖추고 있어 방문이 가능한 것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구네 펜션에서 하룻밤 함께 묵으면서 살아온 해묵은 이야기도 나누고 이어 인근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가벼운 산행 및 유명 관광지를 두루 살피자는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문제홍 친구와 일산 숲속마을 서로 다른 아파트에 살면서도 말만 듣고 관심만 가졌을 뿐 오늘에서야 경술회 공식방문기회에 동참케 되어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목적지 친구네 펜션에 가까워지면서 산을 높아지고 있었고 계곡을 깊어졌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집단거주동네를 지나 물 좋고 산세 좋은 경치가 있는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자동차는 우리들을 품고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런 깊은 산속에 큰 길이 나있고 사람 사는 집들이 있을까할 정도로 깊은 산골짜기 어느 계곡에 이르렀을 때 우리들 앞에 외국 풍 건물 한 채가 갑자기 우뚝 나타났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마친다는 여자 나레이터의 목소리에 목적지 도착하였음을 즉각 알게 되었다.
내가 차를 타고 오면서 상상했던 아담하고 작은 집이 아닌 천 평의 넓은 대지에 평면적 60평의 3층 건물에 건물 외벽이 영국 풍, 잭 유니온 건축양식으로 국내가 아닌 알프스산 산자락 어느 골짜기에 외국관광객으로 우리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하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착각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이 바로 이 펜션 이름의 간판이었다.
“Tirol"이란 이름의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주인장 친구에게 물었던 봐 직장 독일지점에 근무하면서 오스트리아 Tirol 지역을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언제가 퇴직 후 그 지역의 고풍을 지닌 건물을 짓고 살아보겠다는 소망을 오늘날 현실에 실천하면서 따온 이름이라 하였다.
주인장 고등학교 친구가 한번 다녀간 후 동창 카페에 여기 Tirol 펜션 사진을 올려놓고 스위스관광 다녀온 사진이라고 소개하였던 봐 동창들도 속았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덧붙여 주었다.
건물을 중앙에 두고 대지를 감싸고 돌아가는 계곡에서 맑은 물이 반 타원형으로 구비 처 흐리고 있었고 대지의 경계선에는 오래된 붉은빛 소나무가 계곡천변 수문장처럼 고고하게 서있어 주변 경치가 일품이었다.
오대산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인제로 흘러 내려가는 내림천 상류계곡의 물은 너무도 맑아 그냥 손으로 물을 쥐어 먹어도 아무런 탈이 없을 것 같았고 깊지 않은 소(沼)가 있어 어린이들을 동반한 가족단위로 여름휴가보내기에 딱 좋은 그런 곳이었다.
계곡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급경사로 약 100m이상 되는 산 봉오리까지 소나무며 낙엽수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봄경치보다 가을 오색단풍이 더욱 아름다울 것으로 상상되었다.
주인장의 안내로 집 구경을 하였는데 동시에 3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들이 1, 2층에 8개나 되고 특히 단체손님들을 위한 응접실을 별도로 만들어 놓아 일반적인 펜션시설 형태보다는 다른 점이 많았다. 펜션 주방시설도 방에서 분리하여 별도로 만들어 놓아 방에 들면 안락한 침대가 웬만한 호텔 수준 분위기였다.
3층 다락을 활용하여 절반은 교회분위기 시설로 만들어 놓았고 주로 믿음을 갖고 오는 손님들이 전용으로 언제든지 합동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아 아주 색다른 점이 있었다.
주인장 친구는 열렬한 교회 장로이다.
일산에 있는 대형교회인“아름다운 교회”의 장로로서 여기 가까운 곳에 일산 그 “아름다운 교회”의 신자 중 말기환자들의 힐링을 돕기 위한 기도원을 지어놓고 있어 문 장로가 직접 그 건물관리하는 총책을 맡아 말기환자가족 방문객이나 교회신자들의 단체 방문자들을 맞는 기본 봉사정신으로 펜션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뜨내기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이 집을 지은 지가 10년이 넘었어도 아주 깨끗하게 잘 유지 관리되어 있었다.
이집에서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3층 다락방을 서재로 꾸며났는데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해외거주 때에 사용하였던 때 묻은 낡은 책상 앞에 작은 창문 사이로 이곳 아름다운 경치가 한 눈에 들어왔다. 독일 괴테생가에서 본 작은 서재와 같은 분위기의 방이 있었다.
내가 이런 분위기 좋은 방에서 오래된 책상을 두고 독서라도 하면서 노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부러움을 갖게 한 곳이기도 하였다.
조용히 모두 친구들 열 명이 응접실에 모여 앉아 차를 나누면서 내가 주인장 친구에게 어떤 계기로 이곳 멀리 연고도 없는 강원도 깊은 곳을 찾아내 마지막 여생지로 택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물어봤다.
나는 여행을 가도 그렇고 어디를 가나 많은 것들을 의문을 갖고 물어보는 폐습을 갖고 있다.
사실 많은 것을 의문으로 대들어야 그만큼 알게 되고 얻는 것도 많았다.
그는 이곳으로 오게 된 동기를 이렇게 대답했다.
퇴직 후 직장생활하면서 못 찾아본 처고모가 이곳에서 이미 휴양별장을 짓고 말년 고질병 치유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인장 부부가 처고모 병문안 왔었다가 이곳 경치에 매료 되었고 과거 독일근무 중 갈망하였던 알프스 산자락의 아름다운 오두막집을 바로 이 곳에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 펜션건물 자리의 땅도 마침 처고모가 소유하고 있어서 싼값에 땅을 구입할 수 있었고 유리한 조건에서 건축도 쉽게 착수 할 수 있었던 깊은 사연이 숨어 있었다.
그 후 처고모는 건강을 되찾아 이곳 별장이며 소유하고 있던 땅을 모두 다 정리하고 지금은 아들네 집에서 노후를 편히 보내고 있다고 했다.
문제홍 친구는 우리들 누구나 마음으로만 염원하던 노후 전원생활을 발 빠른 결단으로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들의 꿈을 이루고 살고 있다.
10년 전 약 3억 드려 지은 집이 지금은 10억을 주고도 지을 수 없다니 그는 얼마나 큰 장사를 한 셈인가?
그가 이렇게 빠른 결정과 먼 안목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과거사 이야기를 들어보면 감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이북 함경도 함흥에서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소년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6.25전쟁이 터졌고 1,4후퇴 때 온 가족이 그 유명한 미국화물선 수송 배에 올라타 남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거제도난민수용소에 정착한 후 거제도에서 학교도 다녔다.
어느 정도 남한에 익숙해 진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시면서 자신도 서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께서 의사라고 하지만 기본 재산이 없었으니 잘 살 수 없어 고생을 많이 하였다. 원래 이북 사람들의 생활력이 남쪽 사람들 보다 훨씬 강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북쪽은 첫째 기후가 남쪽보다 추었고 또 평야가 없어 산악지대에서 많은 노력과 고생으로 생존경쟁에서 우리들 보다 훨씬 치열한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절약하고 아끼며 모든 부문에서 남들보다 빠른 결정과 멀리 보는 안목을 키우지 아니하면 그 만큼 생존경쟁에서 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삶이 몸에 밴 이북사람들이 남한 내려와 고생은 많이 했어도 크게 성공하는 인물이 많이 나왔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이 되는 사실이다.
그래서 문제홍 친구도 이북에서 내려와 지금은 집이 두 채나 되고 노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부자가 되었으니 성공한 한 인물로 분류되는 것이다.
오후 5시가 되었다.
서울에서는 이 시간대면 태양은 중천에 떠 있을 것인데 이곳은 강원도 하고도 오대산 자락 깊은 계곡이라 보이는 하늘이라고는 반항아리 주둥이 같아 작고 높아 해가 일찍 지고 만다.
어둡기 전에 우리들이 준비해 온 돼지삼겹살 바비큐 가든파티 준비에 나섰다.
펜션이라 바비큐요리 시설은 이미 다 갖추어져 있었고 준비된 숯에 불을 붙이기만 하면 기본준비가 다 되는데 숯불 붙이는 것도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기를 품어내고 눈알을 비비면서 부채질까지 하면서 각자 집에서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누구 한 사람도 불평불만 없이 각자 파트를 맡아 열심히 행동한다.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손쉬운 상추 씻기와 마늘 고추 잘게 자르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가만히 받는 밥상보다 이렇게 자신이 스스로 만들고 참여한 자리에서의 음식 맛이 훨씬 더 있다.
주인장 안방마님도 모처럼 대 부대로 침입해 들어온 남편 친구들을 위하여 쌈 된장을 만들고 밥을 짓고 된장국까지 장만하느라 귀찮은 일이지만 그래도 모처럼 달려온 남편 친구들을 위해 열심히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모두가 고마운 사람들이다. 친구가 그렇고 친구의 아내가 그렇다.
40년 지기 직장친구란 남자들만의 친구며 남편의 인간관계일 뿐인데도 이제는 남편과 아내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내도 곧 남편친구가 자신의 친구가 된 것이다.
부부란 참 이상한 관계다 남남으로 만나서 자식 낳고 미운 정 고은 정으로 살다보면 이제는 갈라 놓을 수 없는 일심동처가 된다. 전원생활 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선 쪽이 남편이 아니라 아내였다고 하니 이 집안은 평온하고 행복 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아내가 반대하여 시골생활에 못 나선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소화 겸 산책길에 나섰다.
산중이라 해서 오솔길만 생각하면 큰 착오다. 계곡에 나는 길은 포장된 오로지 2차선 왕복 자동차길 뿐이다. 도로라고 해서 가로등이 있는 길도 아니다. 밤이 되어서인지 자동차도 다니질 않는 대로에 우리들 멤버들만이 종대가 아닌 횡대로 걸어도 누구 시비하는 사람도 없고 가슴을 크게 벌리고 갈지자로 걸을 수 있는 자유인 이었다.
밤을 정말 어두웠다. 그러나 별빛은 더욱 밝았다. 별빛을 받아 걷는 낙이 또한 군자가 되는 기분이다. 정말 밤공기가 상쾌하다. 깊은 산속이라 낮의 뙤약볕이 그리울 정도로 추위가 느껴온다.
그렇지만 이 산장에서의 밤의 정취는 도시에서 갖지 못한 서정의 감정을 갖게 한다.
혼자서는 이 길을 걷지 못할 것인데 친구들과 그리고 군집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더욱 크게 보이고
대담해지고 더욱 아름답고 행복해진다.
나이 들어 갈수록 친구들과 어울리어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소인삼락의 하나 인 것이다.
얼마를 걸었을까? 누구 한 사람이 이제 되돌아가자고 해도 모두가 좋다고 하지 반대론자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어느 정도 소화도 되었고 바비큐 쌈과 곁들었던 소지의 취기도 가신 것 같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응접실에서 밤 술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이야기 시대로 몰입한다.
중세기 유럽에서는 콜레라 전염병이 창궐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렇지만 돈 많은 귀족은 그들만의 아지트에 모여 전염병을 피하며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그것을 이태리 작가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이라는 소설로 남겼다.
오늘 밤 우리들이 마치 데카메론을 연상케 하는 술잔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술잔을 몇 잔씩 돌린 후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먼저 제안했다.
우리들 과거 직장에서 추억의 연애담 이나 아내를 만난 이야기를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는 기분으로 남자들만의 이야기를 털어 놓기로 하였다.
먼저 차례는 당연히 주인장이다. 오늘 자리를 마련해 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자신은 정말 살기 바빠서 연애라는 것을 생각조차 못하고 직장생활에만 충실하였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을까 반신반의 하면서도 일단 믿어주기로 했다.
70년대 우리들의 결혼시대에는 지금처럼 여자가 선택권을 갖지 않았고 오로지 남자만이 결정권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도 속내를 들어 내지 못하고 넌지시 암시의 냄새만 풍길 뿐, 남자 쪽에서의 프로포즈를 기다리는 것이 당시 여자들의 입장이었다.
당시 직장의 남자들은 뚫기 어려운 경쟁 속에서 공채시험을 통해 선발된 인물들이었기에 남자 직장으로서는 최고의 직업 이였음은 물론이고 완벽한 남자이었기에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들 당시만 해도 여자들은 선발시험이 없이 빽 이나 돈의 힘으로 직장을 얻었기 때문에 여자들이 남자들의 결혼선택받기 위해 직장에 취직하였다는 설까지 나왔었던 시대였다.
사회적으로 당시 남자직업으로서는 안정되고 깨끗한 환경에 장래가 보장된다는 전제아래 여직원들이 직장 내 남자들을 잡지 못해 안달 하던 그런 시대였다.
그런데 주인장은 여자에 관심 없고 오직 출세일념만으로 직장생활 하였으니 여직원들이 안달이 날 수 밖에, 언젠가 청계지점에 근무 할 때 한 번은 담당차장이 저녁을 사겠고 불러내 감히 차장이 초대한 자리를 거절 할 수 없는 자리인 만큼 순수히 따라나섰다 한다.
저녁을 거나하게 얻어먹고 다방에서 차까지 얻어먹었던 판에 차장은 본론을 꺼냈다. 내용인 즉은 자신을 좋아하는 여직원이 사람을 통하고 통해서 담당차장까지 동원하여 그 여자의 내심을 전해 주면서 집안도 좋고 장래 좋은 배필감이 될 것이라는 충고까지 곁들어 말했으니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자신을 먼저 좋아했던 여자를 만나게 되어 연애는 거칠 것이 없이 잘 나가게 되었고 오늘 날 부부가 되어 잘 살고 있다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남자들은 여자문제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경향도 있었다. 그만큼 자신 만만한 사회생활의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김태승 친구 경우에도 직장자리가 좋아서 항상 자신이 좋아하는 술친구와 어울리는 시간으로 세월 보내다 보니 노총각이 되었고 나중에는 직장 동료들이 노총각구출작전까지 돌입한 끝에 34세에 늦장가 갔으나 아들만 셋 두었고 지금 그 셋 아들 다 장가보내고 노후를 걱정 없이 산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아들 장가를 못 드려 손자는 고사하고 며느리도 못 보았으니 내 팔자야 말로 개 팔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밖에도 친구들의 직장에서 여직원과의 진지한 다양한 연애담도 있었으나 오늘 이 지면에 다 언급 할 수가 없어 생략키로 한다.
이렇게 이야기 나누고 술잔을 돌리다 보니 어느덧 밤 12시가 넘어섰고 내일 일정을 위해 잠자리에 들기로 하였다.
요즘 비수기인지 아니면 우리가 온다고 하여 다른 손님 받지 않았는지 모르는 일이나 펜션을 우리들 일행이 온통 전세를 낸 샘이 되었다.
우리들이 짝을 지어 두 사람씩 방 하나를 쓰겠다고 주장하였으나 둘이 자면 코 골고 이 가는 사람도 있다면서 구지 한 방씩 배정해 주어 독수공방이었지만 정말로 편하게 잠들었다.
이튼 날 인근 식당에서 해장국을 앞에 두고 주인 장로의 아침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승합차에 올랐을 우리들 여행 일정계획이 어떤 것이냐고 독촉해 최 회장께 물었던 봐 현지 도착해서 문 장로와 협의하여 추진하겠다고 하였는데 사실 협의한 일도 없었는데 문 장로가 이미 혼자만의 치밀한 계획을 짜 두고 있어 우리들은 그냥 따라만 나서면 되었다.
오늘 우리들이 먼저 나선 코스는 이곳 오대산 입구에서부터 비로봉정상까지는 14km 거리였음으로 감히 정상까지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계곡따라 둘레길 같은 2.5km을 걷다가 되돌아오는 스케줄이었다.
그리고 다음 코스가 삼봉휴양림을 탐방하고 삼봉약수터에서 약수를 들어 마시는 것이다.
휴양림하면 많이들 가보아서 경험했겠지만 산림이 욱어져 사람들이 발을 들어놓지 않은 울창한 숲을 오로지 오솔길에 의존하여 제한된 인원만 입장시키는 숲속 힐링 장이다.
가칠산 계곡등산로를 따라 말 그대로 더덕 향기가 코를 자극하고 희귀 잡풀들이 발밑에 밟히는 그런 길을 한 시간정도 걷다가 다음 일정을 감한하여 중간쯤에서 되돌아 나왔다.
그리고 삼봉약수터에서 사이다 탄산수 같이 똑 쏘는 약수를 마시고 나니 속에서 시원한 트림이 절로 나왔다. 이 약수가 삼봉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 약수터 중심으로 가칠산, 응복산, 사삼봉의 정기 받아 솟아난다고 해서 유래됐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약수가 나오는 세 개의 구멍이 있는데 물맛이 구멍마다 다 다르다는 데서 삼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신기하게도 세 개의 구멍거리가 1m가 채 되지 않는데도 물맛이 각기 다르니 그것 참 특별할 따름이었다.
문제홍친구의 계획된 일정을 다 마치고 나서 우리들을 초대해준 두 부부에게 감사의 하직 인사를 건네고 나서 상경 길에 올랐다.
이제는 우리들만이 돌아오는 길에서 인근 봉평의 메밀꽃 피는 들녘을 찾아가기로 했다.
봉평은 일제 강점기하에서 우리민족의 어려운 삶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 소설을 남긴 이요석의 고향이기도 하다.
먼저 점심으로 봉평 메일막국수며 메밀전 메밀묵 등 다양한 메밀음식을 맛보았다.
모두들 서울에서의 메밀음식 맛보다 맛깔스럽다고 모두가 일치했다.
이어서 이효석 생가와 문학관을 찾았다.
생가는 4칸 집에 마구간이 있는 너무나 평범하고 초라한 초가집 이었다. 당시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어떻게 경성제대 법학부까지 다닐 수 있었는지 의문점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되지 않았고 법을 전공한 자가 문학에 도취되었는지가 오히려 의문점이었다.
그는 36세 젊은 나이로 병들어 일찍 세상 뜨면서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대표적인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은 작은 봉평 고장을 유명한 관광명승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 고장의 후세 사람들은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고을 뒤 산, 읍내를 다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언덕위에 그의 문학기념관을 잘 지어놓고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었다.
기념관 앞으로 넓은 밭에는 지금은 감자를 심어 놓고 있지만 감자를 거둔 다음 8월이면 이 밭에 메밀 씨를 뿌려 9월에 메밀꽃축제하고 10월에 메밀을 수확한다고 한다.
메밀은 토박한 땅에서 잘 살아나는 우리민족의 얼이 담긴 곡식이다.
그 옛날 강원도 화전민들이 비탈진 산을 개간하여 처음으로 뿌린 씨가 메밀이라 한다. 그 만큼 박토에도 잘 살아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가뭄이 들어 콩이며 밭곡식이 다 말라 죽고 난 자리에 메밀씨를 뿌려두면 어김없이 농부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고 흉년에도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식이 되어 주었다.
옛날에는 배고프고 어려워서 먹었던 메밀음식이 오늘 날에는 다이어트 식품으로 메밀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래서 메밀은 어려운 세상에서나 넉넉해진 세상에서도 효자식품이 되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낙엽을 태우면서” 수필가 이효석의 만남 이후
처음으로 이효석의 본고장 봉평에서 그의 생애일대를 더듬어 볼 수 있었던 “이효석의 문학관”을 찾아보았음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9월이면 달빛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 한다는 메밀꽃 축제 때 꼭 한 번 다녀가고자 마음에 작정을 해본다. 그가 죽은 지 70년이 되어가도 그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길이길이 더욱 빛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죽은 후에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던가?
이렇게 하여 짧은 1박2일 강원도 문제홍 펜션방문 일정은 끝이 났다.
그렇지만 짧은 시간동안에서도 친구간의 많은 우정을 나눴고 친목을 다지는 큰 보람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 친구들은 초대해 준 문제홍 장로 부부에게 감사하다는 말 거듭 올리는 봐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초지일관 운전대 잡고 우리들 생명 끝까지 지켜준 최정소 회장께도 감사의 말씀 올리는 바이다.
그리고 금년 내 앞으로도 더욱 더 좋은 기회 마련하여 회원친구들 즐거운 모임 되도록 봉사 많이 해주길 바라는 바이다.
2014. 5. 20. 금 치
첫댓글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사고 없이 잘 다녀와서 축하드립니다
함께 했으면 좋았을텐데 씰데없는 약속이 있어서리~~~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일들이 계속있기를...
한작가 역시 대단하오 내그럴줄 알았소. 우리 집 사람과 함께 읽었는데 관찰력과 글 솜씨가 대단하다고 감탄 했소
문 지점장은 이글을 퍼다가 집에 보관 하시요 그러면 티롤 해설서가 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