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 송언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성범죄 경력조회 및 아동학대 관련 범죄 전력조회 동의서’이다. 올해 들어와서도 나는 이 찝찝한 동의서를 열 번 넘게 썼다. 일단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를 요구하는 양식이 날아오면, 먼저 한숨부터 내쉬고는 빈칸을 꼬박꼬박 채운 다음 그것을 출력한다. 그리고 자필로 서명하고 스캔을 받아서 이메일로 전송한다. 그럼 징그러운 뱀의 허물인 양 원본이 남는다. 그것들이 내 책상 서랍에 수북하니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동화 작가가 위험한 성범죄자 무리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닐 테고, 내가 학교나 도서관에 정규직 또는 계약직으로 취업하려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2시간 정도 ‘작가와의 만남’을 진행하고 돌아오는 것뿐인데, 집요하게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를 요구하는 까닭을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의 과거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예방 차원의 효과를 노리려는 꼼수가 아닐까, 하고 이해해 보려고 애도 써보지만 마음속 찝찝함이 반감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굳이 의심스러워 성범죄 전력을 알아볼 작정이라면, 이름과 주민 등록 번호만 입력해도 경찰서에서 충분히 밝혀낼 수 있을 터인데, 굳이 작가 본인이 자필 서명한 동의서를 요구하는 심보가 무엇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런 찝찝함 때문에 ‘작가와의 만남’을 포기해 버릴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그런데 과거의 아픔이 늘 발목을 잡아채는 것이었으니, 젊은 날에 해직교사가 되어 자그마치 10년 동안 처자식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죄가 크기 때문이다. 해서 어떡하든 그 미안함을 ‘반까이’ 해보려는 눈물겨운 탐욕이 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에도 나는 전라북도 남원으로, 충청남도 공주로, 다시 전라남도 벌교로 허벌나게 발품을 팔고는 허덕허덕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만 다녀야지 하면서도 차마 발품 파는 일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쓴 동화책 가운데『축 졸업 송언 초등학교』라고 있다. 내가 교사였을 때 담임을 맡은 1학년 꼬마 소녀가 그 뒤로 4년 동안 줄기차게 우리 교실을 찾아와 인사하고 간 사실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결석도 안 하고 일수쟁이 아줌마가 일수 도장 찍듯이. 나중에 고 맹랑한 녀석이 자기를 주인공으로 동화를 써서 선물로 보내달라고 요구해서 세상에 나오게 된 책이다. 그 귀여운 제자가 4년 동안 끈질기게 찾아왔을 때, 하늘에 맹세하건데 나는 단 한 차례도 고사리 같은 손 한 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했다. 행여나 불필요한 오해를 사면 어쩌나 두려워서. 그런데 환갑도 지난 이즈막에 걸핏하면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에 자필 서명을 하고 있는 꼬락서니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불현듯 참담하여 속내가 지랄 같을 때가 있다.
출판계가 장기 불황에 빠져 허덕이고 있어 염려스럽다. 책만 좀 팔리면 그까짓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에 자필 서명 안 하고, ‘작가와의 만남’ 한다고 동에 번쩍 남에 번쩍 발품 팔러 다니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무려나 동화책이 팍팍 팔리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후배들이 마음고생 그만 접고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촛불 혁명으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으니, 그런 훈훈한 소식이 하루빨리 들려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어린이와 문학>2017년 9월호 '여는 글'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