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산 성주사(지)(聖住山聖住寺(址)) / 구산선문 - 성주산문
- 사적 제307호,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백제 법왕(재위 599~600년) 때 오합사(烏合寺)로 창건
신라 문성왕(재위 839~859년) 때 '낭혜화상 무염'이 중창하고 성주사로 개칭함.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 기록된 내용 외는 이 절에 대한 기록이 없는 모양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하나 그 사이 700여년동안 이토록 대사찰에 대한 기록이 없다니.
절터는 사방을 돌담을 쌓아 잘 보존하고 있다.
무려 8,800평이라 하니 얼마나 큰 절이었는지 상상이 된다.
성주산은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다. 그래도 절 앞에 계곡이 있다.
산지 사찰보다는 평지 사찰이다.
절터, 뭐 볼 게 있을까 하였지만 요즘 절터도 볼만 하다고 느꼈다.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다.
북한의 개성에 있는 수미산문 광조사(지)을 빼놓고 9산선문의 8곳을 돌아봤다.
3곳(봉림사, 성주사, 굴산사)은 터만 남았지만.
절을 구경하면서 불교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양이 너무 방대하여 평생을 공부하여도 다 못할 것 같다.
또한 종파(宗派)도 많다. 그 종파를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석가모니 말씀에 해석이 붙고 그 해석에 또 다른 해석이 붙고.......
이것저것 흡수하다가 보니 사찰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공부는 재미있다.
* 낭혜화상 무염(朗慧和尙 無染, 801~888년)
태종 무열왕의 8대 손, 속성은 김씨. 호는 무량無量, 무주無住
낭혜는 시호, 탑호는 백월보광으로 탑비는 진성여왕 때 제작한 것으로 추정.
12세 출가, 821년 중국 유학. 847년 귀국, 성주사에 40여년 주석함.
동방대보살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음. 구산선문의 성주산문 개산조.
5층석탑, 석등, 삼층석탑 3기, 석불, 낭혜화상탑비각 등 문화재가 다 보인다.
당우의 주춧돌 같기도 하다.
성주사지 석등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신라 말기 작품, 석주가 가늘게 제작되었다. 훼손된 것을 근래 수습하였다.
오층석탑 / 보물 제19호
백제탑과 신라탑의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 상륜부가 없어진 상태이다.
석계단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금당(본전불) 출입구인 석계단 입구 좌우에 사자상 있다.
조각기법이 뛰어난 작품이지만 1986년 도난, 지금은 사진 자료를 근거로 근래 근래 제작한 것이다.
절도 당한 불교문화재들은 도대체 어느 부자들의 수중에 있을까?
금당 터
중앙 삼층석탑 / 보물 제20호
신라 말기 작품
서 삼층석탑 / 보물 제47호
동 삼층석탑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위 3개의 3층석탑은 모두 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이다.
조사 결과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승탑(사리탑)으로 추정.
정광, 가섭, 약사여래의 사리탑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2개의 석탑은 보물이고 1개의 석탑은 지방유형문화재일까?
석불입상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3호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
민불(民佛, 권위적인 모습을 모두 배제하여 친밀감이 느껴지는 불상)로 추정.
훼손이 많이 되어 있다. 여인네의 모습이기도 하다.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 국보 제8호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을 개산한 무염대사의 비이다.
비문은 최치원이 지었고 글씨는 최인연(최치원의 아들)이 썼다.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잘 보존되어 왔다 남포는 보령에 있다.
절터 이곳저곳에 석조물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