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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안은 2017년 9월 10일, 17일 주일 교제 시간에 했던 공부 내용입니다.
성경본문으로 접근하는 구원론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성령님의 사역과 신비한 연합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과 속죄의 제사를 통해 획득한 구원(Acqulisitio salutis)은 성령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적용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속의 성취(Accomplishment of redemption)1)이고, 성령님의 사역은 구속의 적용(Application of redemption)2)이다. 그렇기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Mystical Union with Christ)’을 통해 이루어진다(요 16:14).3) 이런 점에서 성령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뗄 수 없고, 그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성령님께서 구속을 적용한다는 사실은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성령님의 강림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된다. 성령을 받은 이들이 “마음에 찔려”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는다(행 2:37). 디도서 3:6-7도 이 사실을 보여준다. 디도서 3:6-7 “(6)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 당신께서 획득하신 구원의 혜택을 택한 백성에게 나눠 주신다.
구원의 서정
그렇다면,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시는가? “구원의 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함에 있어서 어떤 순서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가리켜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4)이라고 부른다.5)
구원의 서정을 성경은 어떻게 가르칠까?
성경은 우리에게 완벽한 구원의 순서를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순서에 대한 충분한 기초를 제공해 준다. 성경이 구속 사역의 적용에 따르는 정확한 순서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순서에 대한 상이한 의견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실제로 기독교 신학은 구원의 순서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구원의 순서에 관한 교리는 종교 개혁의 산물이다.6)
구원의 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서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7) ‘부르심(召命, calling)-거듭남(重生, regeneration)-믿음(信仰, faith)-회개(悔改, repetance)-칭의(稱義, justification)-근본적 성화(聖化)(definitive sanctification)-양자(養子, adoption)-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견인(堅忍, perseverance)-영화(榮化, glorification)’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구원의 순서는 구속사역의 적용에 있어서 성령의 다양한 활동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또한 이들을 상호 연관 하에 서술하는 것일 뿐, 획일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구원 서정은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정리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서정을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시간적 순서로 보는 전통적 개념은 오늘날 성경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모두 비판을 받는다. 앤서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가 지적한 대로, “구원의 서정에 나타나는 여러 단계들은 전자가 후자를 대치하는 일련의 연속적 단계가 아니라, 그것이 시작된 후에 동시적으로 함께 진행되는 구원 과정의 다양한 측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는 말씀처럼 성령의 역사는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같아서 일정한 규칙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구원의 서정을 정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논리적 순서를 이해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점검하고 되새기기 위함이다.8)
참고로, 리처드 개핀(R. Gaffin)은 구원의 서정 교리는 성경에 나타난 구원을 구속사의 전망에서 분리시켜, 지나치게 개인적 전망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구원의 전 포괄적인 부요함을 지나치게 쪼개어 냉랭한 논리체계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였다.9)
이제 본격적으로 성경 본문에 기초하여 구원의 서정을 정리해 보자.
(1) 부르심-칭의-영화
로마서 8:29-30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9-30은 구원의 서정을 다루는 가장 고전적인 본문이다.10) “미리 아신 자들”과 “미리 정하셨으니”는 ‘예정’이고, “부르시고”는 ‘부르심 또는 소명’, “의롭다 하시고”는 ‘칭의’,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영화’다.
여기에서 ‘예정-부르심-칭의-영화’라는 구원의 서정이 나온다. 예정의 경우 구원론이 아닌 신론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부르심-칭의-영화’로 정리할 수 있다.
(2) 부르심-믿음-회개-칭의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에 의하면 믿음은 부르심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부르심-믿음’의 순서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위 구절들에 의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 그렇기에 칭의 앞에는 ‘믿음’이 와야 한다. 그러므로 ‘부르심-믿음-칭의’의 순서다.
다음 구절들에 의하면 믿음은 항상 회개가 수반된다.
사도행전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행전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사도행전 20:21의 경우 ‘회개-믿음’의 순서로 되어 있다.11) 여기에서 우리는 신학적인 접근을 해야 된다. 회개는 믿음의 결과이지, 믿음의 조건이 아니다. 회개가 믿음의 조건이 될 경우, 믿음이 우리의 공로가 된다.12) 에베소서 2:8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해서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회개-믿음’의 순서가 아니라 ‘믿음-회개’의 순서여야 한다.13) 이 사실은 칼뱅도 강조한다. 그는 “회개가 끊임없이 믿음에 뒤따를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에서 난다는 점은 논쟁의 여지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한다.1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14장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관하여”(Of Saving Faith)를 다룬 뒤에 제15장에서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관하여”(Of Repentance unto Life)를 다룬다. 이 때 분명히 기억할 것은 믿음과 회개는 논리적으로 구분할 뿐 그 자체는 하나다.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수반한다. 회개는 믿음에서 나온다.
※ 토마스 쉐퍼드의 회심론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쉐퍼드는 믿음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하는 네 가지의 준비 단계로 (1) 깨달음(conviction) (2) 통회(compunction) (3) 겸손(humiliation) (4) 믿음(faith) 의 과정, 혹은 요소를 갖게 된다고 봤다.
(1) 깨달음(conviction)
요한복음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에 근거하여 성령이 하시는 첫 번째 하시는 일은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으며 그들이 죄책과 죄의 지배아래 있음을 확신시켜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다음에 성령은 의에 대한 확신을 주시는데 그것은 믿음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이 없이는 믿음도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스스로 죄를 못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왜 구속주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죄에 대한 인식 없이 예수를 왜 믿을 것이며 누구로 알고 믿을 것인가?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지 못하면 우선 마음의 번뇌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성경적이 근거로는 그는 사도행전의 본문을 제시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행 2:37).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비로소 유대인들은 죄를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먼저 말씀을 듣고 자기들의 죄를 본 후 비로서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므로 순서를 정리하면, 먼저 죄를 ‘보고’(see), 그 다음에 그것을 ‘느끼며’(feel) 그런 다음에 ‘믿게 된다’(believe)는 식이다. 죄와 비참에 대한 감각 없이는 믿음이 있을 수 없다. 먼저 죄를 확실히 깨닫지 못하면 죄와 비참에 대한 느낌이 있을 수 없다.
(2) 통회(compunction)
깨달음의 바로 다음 목표는 “통회” 혹은 “죄에 대한 감각”이다. 여기 “감각”이란 자기가 범한 “악들에 대한 영혼의 슬픔과 괴로움의 느낌”이다. 그래서 회심에 대한 두 번째 단계는 양심의 가책 혹은 “죄에 대한 회환”으로 번역되는 “통회”이다.
셰퍼드는 통회를 참회(contrition), 혹은 죄로 상한 심령(brokenness of heart for sin)과 동의어로 본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죄책감 혹은 죄를 느끼는 것으로 강퍅한 마음과 반대 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마음의 찔림(pricking 0f the heart)을 뜻한다. 즉 영혼이 죄와 비참으로 인해 상하되 죄와 단절될 정도의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 통회다. 그래서 셰퍼드는 통회의 삼대 요소를 두려움, 슬픔, 죄와의 결별이라고 주장한다.
죄에 대한 통회의 첫 번째 요소는 두려움이다. 성령은 지옥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사망과 지옥, 죄에 대한 형별에 관한 커다란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그처럼 두려움이 주입되면 죄인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생각으로 움츠러들어 “주님 내가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부르짖게 된다.
죄에 대한 통회의 두 번째 요소는 슬픔과 애통이다. 성령은 죄에 대한 기쁨을 제거해 준다. 통회 상태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죄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죄에 대한 통회의 세 번째 요소는 죄로부터 분리(단절)이다. 죄로부터의 단절 없이는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다. 죄로부터의 분리란 죄의 존재로부터가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부터, 혹은 죄 짓고자 하는 의지로부터의 분리다. 즉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부터의 분리가 없는 모든 “금식, 겸비, 기도, 눈물”을 주님은 혐오하신다. 여기서 셰퍼드는 죄를 버리는 것을 신앙의 행위 시작 이전의 과정으로 본다. 죄인이 죄의식으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겸비해져 죄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다. 즉 회심과 신앙의 전단계로서 죄로부터의 이탈을 논한다. “새 감람나무에 접붙여 지기 전에” 그는 “옛 뿌리로부터 잘려야한다” 즉, 죄로부터의 분리를, 믿기 전 혹은 믿기 시작할 무렵의 “회개”와 연결시킨다. 죄를 끊지 않고 믿는 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멸망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3) 겸비(humiliation)
통회의 바로 다음 목적은 겸비해 짐이요, 마지막 목적은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다.
어떤 수단에 의해 주님은 겸비함을 주시는가? 첫째는 성령에 의해서요, 둘째는 성령이 직접 영혼에 역사하시지만 말씀 없이 그렇게 하시지는 않는다.
성령은 교만과 같은 죄악 된 성향을 근절하신다.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뒤에는 겸손의 습관과 믿음의 덕에 의해 자신을 낮출 약간의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성령이 율법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을 겸비케 한다. 의무를 행하는 자신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식을 얻을 수 없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 속에서 단지 죄와 연약함, 죽음과 정죄만을 보게 될 때 죄인의 마음은 낙심에 빠진다. 그로인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이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유기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죄인은 주 앞에 엎드러지게 된다. 만일 주님이 그에게 자비를 보이신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주는 의로우시다고 생각한다. 이런 단계에 이른 영혼은 자기가 벌써 지옥에 던져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큰 자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겸비의 핵심이라고 셰퍼드는 강조한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기 전에 죄인의 마음이 바로 이러한 상태, 즉 겸비의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이 회심론에 관련된 셰퍼드의 가장 중요한 요점들 중 하나다.
(4) 믿음 (faith)
셰퍼드에 의하면 믿음은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로서 겸비해진 죄인은 그것에 의해 “그리스도를 받아드린다.” 혹은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부르실 때” 온 영혼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을 받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나와 그리스도에게로 간다.” 그래서 셰퍼드는 “그리스도를 받아드린다”, “그리스도에게 간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신뢰한다”, “메달린다” 등의 표현이 다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이해한다. 그러한 이해의 근거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에서 성경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는 단어와 “믿는다”는 단어를 교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소명을 전제로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어떤 사람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그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주제 넘는 짓이다.
여기서 셰퍼드는 지적 동의와 참 신앙 사이에 아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believe in Christ)을 갖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어야(must believe Christ)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참 신앙을 소유하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혹은 지적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지적 동의는 믿음의 한 요소, 즉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일 뿐이다. 참 신앙은 단지 이해만이 아니라 의지를 포함한다. 셰퍼드는 이 의지가 주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셰퍼드는 어떤 믿음이 참된 것임을 보증하는 하나의 표지를 제시한다. 만일 믿음에 “회개”가 동반된다면, 믿는 것이 주제넘은 짓이 아니다. 그러면 회개가 따르지 않는 믿음도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죄를 알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뢰한다. 그러나 그들의 소위 “믿음”은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에는 죄에 대한 고백과 슬픔이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도 따르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기는 하나 회개치 않는 마음과 그분에 대한 멸시로 그분을 찌르는 “가시나무 믿음” 곧 거짓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즐겁게 여기나 그를 “따르는” 것은 부담스러워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합하는 것은 달콤하게 여기나 그의 “뜻”과 연합하는 것은 괴롭게 여긴다. “죄에 대한 슬픔, 사랑, 감사, 겸손” 등의 복된 샘들은 낳는 믿음은 “성령이 가져다 준 구원 얻게 하는 믿음”이다.
(3) 부르심-중생-믿음
요한복음 1:12-13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에 의하면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나다”는 말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13의 “하나님께로부터 난”이라는 표현에서 “나다”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3-5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다”의 ‘나다’가 곧 ‘거듭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은 믿음과 양자보다 앞선다.15)
또한 요한일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에 의하면 믿음은 중생에 기초한다.16)
그러므로 부르심-중생-믿음의 순서다.
참고로 부르심이 중생에 선행한다는 사실은 도르트 신조 셋째, 넷째 교리의 제11,12항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도르트 신조
셋째 넷째 교리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께로 회심과 그 회심이 일어나는 방식
11항 하나님께서 회심을 일으키시는 방법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 기쁘신 뜻을 택하신 자 안에서 이루실 때, 즉 참된 회심을 그들 안에서 역사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외적으로 그들에게 설교되도록 보살피시고, 그분의 성령으로 권능 있게 그들의 총명을 밝히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바르게 이해하고 분별하게 하신다. 또한 중생하게 하시는 그 영의 효력 있는 역사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속까지 침투하여, 닫힌 마음을 여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할례 받지 못한 마음에 할례를 베푸신다. 또한 새로운 자질을 의지에 주입하셔서, 죽어 있던 의지를 살아 있게, 악하던 의지를 선하게, 꺼려하던 의지를 자원하게, 완악하던 의지를 양순하게 하신다. 그리고 의지를 움직이시고 강하게 하셔서 그 의지가 좋은 나무처럼 선행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12항 중생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
이것이 성경에서 그토록 높이 찬양하는 중생이며, 새로 지으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살리심이라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 안에서 이 역사를 행하신다. 이것은 결코 복음의 외적 부르심이나, 도덕적 설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역할을 하시고 난 이후에, 중생할지 중생하지 않을지, 회심할지 회심하지 않을지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명백히 초자연적인 일이며, 가장 강력하고, 동시에 가장 기쁘며, 기이하며, 신비하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역이다. (이 사역을 행하시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에 따르면 중생은 그 능력에 있어 창조나 죽은 자의 부활보다 작거나 열등하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이런 기이한 일을 행하신 모든 사람은 분명, 틀림없이, 효과적으로 중생하며, 확실히 실제로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워진 의지는,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영향을 미치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향을 미치신 결과로, 그 자체가 활동적이 된다. 이런 이유로 사람 자신이, 그가 받은 은혜로 인하여, 믿고 회개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4) 칭의-양자-영화
요한복음 1:12-13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는 말씀에 의하면 믿음 뒤에 양자가 온다.
디도서 3:5-7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에 의하면 영화 앞에 양자가 온다.
그러므로 믿음-칭의-양자-영화의 순서가 된다.
(5) 칭의-성화-영화
사도행전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위 말씀에 의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은 거룩해 진다. 그렇기에 칭의-성화다.
성화는 칭의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근본적 성화’ 혹은 ‘확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라고 한다.17) 이렇게 근본적으로 일어난 성화는 계속해서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요약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결국 ‘부르심-중생-믿음-회개-칭의-근본적 성화-양자-점진적 성화-(견인)-영화’라는 순서의 구원여정이 있게 된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구원 서정은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일 뿐 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정리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양하며,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의 경우가 그렇고,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렇다.
각 구원 서정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
부르심(소명)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간 안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부르심이 있음으로 인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셔야만 믿음에 이를 수 있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에 의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비롯된다. 데살로니가후서 2:13-14 “(13)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에 의하면 부르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부르시니, 전도는 설교다. 즉 부르심은 말씀의 설교를 들음에 기초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1:13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한다.
거듭남(중생)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자를 거듭나게 하신다.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는 부르심을 받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엡 2:1).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이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이는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에 잘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 3:3-5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에 의하면 사람이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때 거듭 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소유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명을 주시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주시는 것인데,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하신다. 이 때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심”으로 하신다. 거듭남은 성령으로 가능하다. 이는 에스겔 11:19-20 “(19)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에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거듭난 자에게는 베드로전서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의 말씀대로 산 소망이 있게 된다.
믿음과 회개
거듭난 자에게 나타나는 것은 믿음이다. 요한일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를 역으로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믿는다. 그렇기에 중생은 믿음을 낳는다.
중생한 자는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돌이키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게 된다. 믿음은 회개를 수반한다.
칭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되는 수단이 된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와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에베소서 2:8-9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빌립보서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에 의하면 믿음은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수단이다.
양자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은혜를 주신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로마서 8:14-17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4:4-6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성화
칭의는 성화를 동반한다.
디도서 3:7-8
(7)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사도행전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위 말씀에 의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은 거룩해 진다.
성경에서 ‘성화’는 종종 ‘구원’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행 20:32; 26:18; 고전 1:2,30; 6:11; 살후 2:13; 히 2:11; 10:14; 벧전 1:2). 그 이유는 그만큼 성화가 구원의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18)
에베소서 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데살로니가후서 2: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등의 말씀에 의하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선택과 칭의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구원과 별개가 아니다. 그래서 존 머레이는 근본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라고 불렀다.
영화
로마서 8:29-30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에 의하면 영화는 구속의 완성이다.
히브리서 12: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에 의하면 죽음을 통해 영화에 이르게 되는데,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완전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진다.
빌립보서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John Murra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Grand Rapids: Eerdmans, 1955), 9.
2) Pope는 구속사역의 적용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결된 사역이 은혜의 선택이라는 고정된 목적에 따라 개인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예정론자들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선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포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포프가 구원의 획득(appropriation of salvation)이라는 용어도 반대한다는 것이 같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포프는 이 용어가 그리스도의 속죄 조항을 개인에 의한 자유로운 수용과 거부의 문제로 규정함으로써 펠라기우스주의를 포함하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속의 시행(administration of redemption)” 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이것은 훌륭한 용어이다. Berkhof, 『조직신학 (하)』, 659.
3) 요한복음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4) 구원의 순서(ordo salutis)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구원의 사역이 죄인들의 심령과 삶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용어다. 구원의 순서의 다양한 항목들을 체계적인 방법으로 분류한 최초의 인물은 칼뱅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따르면 칼뱅의 분류는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활동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다소 주관적이다. 후에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러한 결점을 바로잡았다.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란 표현은 공식적으로 1724년에 F. Buddeus가 자신의 책 Institutiones Theologiae Dogmaticae (1724)에서, 그리고 1737년 루터파 신학자인 야콥 칼포프(Jacob Carpov)가 자신의 책 Jacob Carpov, Theologia Revelata Dogmatica (1737)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독일어권에서는 구원의 획득(Heilsaneignung), 화란어권에서는 구원의 수단(Heilsweg), 또는 구원의 순서(Orde des Heils), 영어권에서는 구원의 방법(Way of Salvation)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16세기 말에 좀 더 유행한 용어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보다는 ‘구원의 황금사슬’(aurea salutis catena) 또는 ‘황금사슬’(armilla aurea)이었다. 16세기 말에 ‘황금사슬’이란 개념을 가지고 책을 저술한 두 신학자가 있다. 한명은 대륙의 신학자인 헤르만 렌네헤루스(Herman Rennecherus)이고, 다른 한명은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이다. 렌네헤루스는 ‘구원의 황금사슬’(aurea salutis catena)이라는 제목으로, 퍼킨스는 ‘황금사슬’(armilla aurea)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유해무의 경우 구원의 서정에 언급되는 각각의 은혜에 대해 “구원의 은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유해무, 『개혁교의학』(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436.
5)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시는가에 강조점이 있다.” Berkhof, 『조직신학 (하)』, 660.
6) Berkhof, 『조직신학 (하)』, 661. 참고로, 구원론은 종교개혁을 통해서 아주 발전하였다. 고대교회의 경우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등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구원론에 대한 관심은 약했다.
7) 구원의 순서를 다룬 책으로는 John Murra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Grand Rapids: Eerdmans, 1955), 79-87, 장호준 옮김, 『존 머레이의 구속』(서울: 복 있는 사람, 2011), 123-133; 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9), 11-27, 류호준 옮김 『개혁주의 구원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22-48; 유태화, 『삼위일체론적 구원론』(서울: 대서, 2010), 59-89; 노병기, 『거룩한 구원: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과 청교도의 조직신학 구원론 성령론』(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7), 291-299; Richard A. Muller, Calvin and the Reformed Tradition: On the Work of Christ and the Order of Salvation (Grand Rapids: Baker, 2012), 161-201, 김병훈 옮김, 『칼빈과 개혁전통』(서울: 지평서원, 2017) 등이 있다.
8) Berkhof, 『조직신학 (하)』, 660.
9) R. Gaffin, The Centrality of the Resurrection: A Study in Paul’s Soteriology (Grand Rapids: Baker, 1977), 140ff.
10) 이 구절에 근거한 고전적인 신학화의 예를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에게서 찾을 수 있다. W. Perkins, The Works of William Perkins, Ⅰ, 175-259. 이에 근거하여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구원의 서정의 논의를 시작한다. 퍼킨스는 “부르심, 칭의, 영화” 라는 3개의 핵심적 요소를 ‘삼중의 황금사슬’(Threefold Golden Chains)로 보았다.
황금사슬에 대한 비판으로는 싱글레어 퍼거슨, 『성령』(서울: IVP, 112-118)을 보라.
일부 루터교 신학자들은 사도행전 26:17-18에 나오는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라는 말씀을 근거로, 구속의 적용에 있어서의 다양한 활동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소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Berkhof, 『조직신학 (하)』, 661.
11) “때때로 성경에서 회개가 믿음보다 앞서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가 목적에 해당하고, 믿음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John Colquhoun, Repentance, 홍상은 옮김, 『참된 회개』(서울: 지평서원, 2007), 183.
12) 유태화의 경우 회개-믿음의 순서로 정리한다. 유태화, 『삼위일체론적 구원론』, 72-73.
13) 이 사실을 탁월하게 변증한 작품으로 John Colquhoun, Repentance, 홍상은 옮김, 『참된 회개』(서울: 지평서원, 2007), 167-187을 보라.
14) Institutes, III. iii. 1.
15) 유태화, 『삼위일체론적 구원론』, 73.
16) 노병기는 칭의와 중생 중 칭의가 먼저 일어난다고 본다. 노병기, 『거룩한 구원』, 297. 그러나 과연 이런 생각이 옳은지 의문이다. 특히 노병기는 구원론을 서술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자와 존 웨슬리를 함께 거론한다는 점도 특이하다.
17) 이 점을 강조한 분은 존 머레이(John Murray)이다.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2.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6-1982), 박문재 역, 『조직신학 Ⅱ』(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289ff.
18) John MacArthur. Jr,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 (Nashville: Thomas Nelson, 1993, 2000), 송용자 옮김, 『구원이란 무엇인가』(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