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타·얼차려는 옛말
예전엔 툭 치기만 해도 “예, 이병 ○○○” 복창…
지금은 불러도 그냥 “예”
훈련 철저히 원칙대로… 선임병 구타는 없지만 대들면 곧장 군기교육대
광주광역시가 고향인 김영철(20)씨는 지난 2월 입대할 때 여기저기서 염려 섞인 격려를 받았다. "힘들어도 꾹 참아야 한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겪어야 할 일이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부모님은 물론 친구, 친척, 대학 선·후배들 모두 한결같았다. 김씨는 강원도 춘천시 102보충대를 거쳐 지난 4월 삼척시 23사단 본부대에 배치됐다.하지만 실제 군생활은 입대 전 주위 걱정과는 많이 달랐다. 처음 김씨를 데리러 온 선임병은 나긋한 말투로 "누가 김영철이냐"라며 그를 찾았다.
생활관에 자리를 잡은 뒤로도 그의 이등병 생활은 비교적 순탄했다. 육군이 도입한 '불필요한 관등성명 복창 폐지'운동 덕에 매번 간부나 선임병이 찾더라도 계급과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칠 필요가 없었다. 간단히 "예"라고만 대답하면 됐다.
육군은 선임병이 후임병 이름을 연거푸 5~6차례 부르고 후임병이 어쩔 수 없이 번번이 "○병 ○○○"라며 관등성명을 반복해야 하는 관행이 본래 취지와 다르게 악용되는 측면이 많다고 보고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를 복창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있다.
- ▲ 검정고시 공부반 지난 8월 육군 백두산부대 전방 초소에서‘검정고시 공부반’에 가입한 병사들이 자유시간을 이용, 강의를 듣고 있다./육군 제공
이 사단 표어는 '신바람 나고 재미있는 부대'다. 국군 지휘통신사령부와 육군 6사단은 요일별로 점호 주제를 정해 안마점호, 신문구독점호, 음악점호 등을 시험 적용했고, 공군 17전투비행단은 점호 때 편안하게 앉아 독서나 자유시간을 즐기면서 인원 점검만 하는 '자율 점호'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육군 6사단이나 해군 1함대사령부는 전입 신병이 오면 선임병들이 발을 씻어주는 '세족(洗足)식'을 갖고 있으며, 육군 37사단은 '선임병 기득권 포기 선포식'까지 가졌다. 국군 지휘통신사령부는 실수로라도 욕이 나오는 병사들은 종류에 따라 100~500원씩 벌금을 매겨 매달 부대 단합대회 경비로 쓰고 있다.
바뀐 병영문화로 인해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군기(軍紀)는 엄격한 원칙에 따라 다뤄진다.
정훈참모 김용규 중령은 "서로 가족처럼 지내면서 화합·단결하면 나보다 동료를 먼저 생각하는 전우애가 자연스레 만들어진다"며 "이를 통해 부대 전투력 향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육군 정훈공보실 관계자는 "전에는 병사들이 사적(私的)으로 병영을 통제했다면 이제는 병사들이 자율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면서 일탈하는 인원들을 군법에 따라 다스린다"고 밝혔다. 선임병에게 대들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장병은 곧바로 군기교육대나 헌병대로 넘겨진다. 훈련도 원칙대로 진행한다. 모든 장병들은 예외없이 각종 훈련을 마쳐야 하고 '성과제'를 통해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면 '훈련 불참'으로 간주된다.
- ▲ 동아리 활동 올 2월 공군 19전투비행단에서 열린‘동아리 박람회’에서 병사들이 만 든 밴드‘스크램블’이 공연을 하고 있다./공군 제공
국방부는 2005년부터 표준 일과표를 바꿔 그날 상황에 따라 밤 12시까지 '자기 계발시간'이란 명목으로 개인시간을 보장하고 있다.
김 일병은 요즘 저녁 점호가 끝나면 생활관 내 도서관으로 향한다. 토익이나 전공 공부를 통해 제대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주말이나 휴일도 다채롭다. 사단 내 예하 부대 곳곳에서 컴퓨터자격증반, 검정고시반, 외국어(영어와 일어)반, 통기타반. 테니스·배드민턴반 등 다양한 동아리활동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원어민 영어교사나 통기타 강사가 찾아와 특강을 해주기도 한다. 공군작전사령부는 병사들이 업무 후 부대 내 미군과 영어 회화 모임을 갖는 걸 허락하고 있고, 20전투비행단은 3차원 전산 설계 프로그램(CAD) 연구 동아리를 운영 중이다.
육군 73사단 정비대대 김대훈(23) 병장은 입대 후 전산회계운용사 2급 자격증을 땄다. 입대 전 두번이나 떨어졌던 시험이었다. 온라인 학점취득제를 통해 1년 동안 27학점을 따 경영학사 학위까지 받았다. 김 병장은 입대 전 사이버대학에서 114학점만 마치고 입대한 뒤 남은 학점을 채운 것이다.
공군복지근무지원단 관리처에서 회계병으로 근무하는 권오현(26) 병장은 지난 9월 공인회계사 최종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국방부는 1998년부터 고려대·연세대·성신여대·계명대 등 전국의 대학(원), 전문대학, 사이버대학 90여곳과 상호 교류·지원체계를 구축하고 복무기간 중에도 학점을 딸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학점뿐 아니라 자격증 취득도 권장하고 있다. 각군 장병들이 제대 후 사회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1인 1자격증 취득'을 독려하고 있다. 올 상반기까지 자격증을 딴 장병은 연인원 17만8000여명에 달했다.
국방부는 현재 117개인 '사이버 지식정보방' 학습 콘텐츠를 더욱 늘리고 2012년 말까지 전역 예정 장병 전원이 1개 이상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군내 학습 여건을 개선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올 상반기 기준 전역자 자격 보유율은 32%. 군은 이를 올 연말까지 40%선으로 끌어올리고 2012년 말까지 100% 목표를 달성할 방침이다.
산업기사와 기능사 자격증을 딴 병사들은 각각 4일과 3일의 휴가를 받을 수 있게 했고, 국가자격시험을 치를 때 의무 복무 중인 장병들은 검정수수료를 면제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국방부는 이같은 학습 여건을 보장하기 위해 현재 전국 각군 3386개 부대에 컴퓨터(PC) 3만9900여대를 설치해 만든 '사이버지식정보방(PC방)'을 연말까지 5030개 부대 5만3471대로 늘릴 계획이다. 국방부 정근배 인적자원개발과장은 "전투 준비 태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학습 욕구를 채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전역 후 취업에 유리한 자격증 취득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방부 인사복지실 관계자는 "사회와 병영 간 문화적 거리감을 줄이고 선진 병영문화를 만드는 것이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군대로 발전해가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