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 나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
가슴의 말
- 백현종
60 생 걸어온 길, 아내는 되짚었다
앞이 트여 보일 때는 한 번도 없었다고
꽉 막힌 골목에서 늘
열어주신
기적의 쪽문
내 밟아 온 삶의 길도, 안 힘들 때 거의 없어
재주 없어 두꺼비 같이 견디는 맘 주셨고
자잘한, 이팝나무 꽃잎
가끔씩 안겨 주셨지
그렇다, 희망과 길은 그분에게만 있는 것
별 없는 벌판의 밤, 홀로 맞는 것 같지만,
분명코, 열릴 것이다
마음의 씨
굳게 붙들면
불안해하지 마라
약속된 것 하나 없다고
척박한 지리산 골짝, 돌멩이처럼 떨어졌지만
그분은 빚어내셨다
‘무’에서 소박한 ‘유’를
의심 소심 금물이고, 굳게 오늘 디딜 일이다
정녕 우린 하늘 자원으로, 살아가는 나그네
힘들 것 하나 없어라
걸어갈 때
받는 힘
*백현종 : ‘아람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금서 새 축복교회 담임 목사, 제25 전라 시조 문학상 수상
사랑의 기쁨. 나는 그날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미친 듯이 어두운 공간을 돌아다녔다. 아니, 아니. 내가 실제로 밤마다 밖으로 나가 칙칙하고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다녔다는 말이 아니고, 나의 온전한 정신이 그렇다는 말이다. 어떤 한 사람을, 어느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게 이렇게 떨리고 두려울지 예전에 미처 몰랐다. 눈을 감고 있으면 그녀의 눈과 코 그리고 얼굴, 심지어 옅은 미소가 내 온몸을 돌아다녔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나는 때아닌 열병에 밤마다 아팠다.
새벽까지 문자는 계속되었고 그녀의 마지막 인사, ‘잘 자요’라는 말이 없으면 잠들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나는 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한껏 들떠있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직장 내에서 소위, 사내 연애를 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나는 여전히 그녀가 내가 있는 사무실의 연희를 만나러 올 때, 낮에 구내식당에서 잠시 잠깐 만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때때로 좁은 복도를 지나칠 때 그녀를 우연히 만나는 날엔 그녀의 의미 있는 미소와 수줍은 몸짓에 종일 가슴이 설렜다.
겨울이었다.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 무산 시에도 웬일인지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렸다. 몇 년 만의 눈이었기에 사무실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모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지 근무시간임에도 삼삼오오 모여 옥상으로, 빌딩 밖으로 직원들이 나갔다 오곤 했다. 눈은 아침부터 시작해서 퇴근할 때까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시내에서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정시에 퇴근하려는데 휴대전화에 문자가 왔다.
‘눈 오는데 기차 여행 가요’
그녀였다. 나는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디로 가고 싶어?’
‘아무 데나요. 오늘 돌아올 수 있을 지점까지.’
초겨울 퇴근 시간 오후 6시는 벌써 캄캄했다. 다행히 사무실과 가까운 거리에 기차역이 있었다.
‘아는 곳이 있어. 6시 30분까지 무산 역 대합실에서 봐.’
나는 별수 없이 고교 동참 모임 총무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면 다음에 보자는 문자를 남기고 무산 역으로 차를 몰았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대합실에 서 있으니 그녀가 왔다. 긴 롱코트에 하얀 목도리를 한 그녀의 얼굴을 상기되어 있었다.
“여기도 눈이 오긴 하네요?”
“그럼,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지.”
“서울에 있을 땐 눈 오는 밤이면 광화문, 종로, 인사동 거리를 미친 듯이 쏘다녔어요.”
열차는 시내를 빠져나가자, 동해안 철길로 천천히 달렸다. 낮이라면 벼랑 끝에 마주한 바다가 보일 터인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음, 일광이라고. 기장, 아니 그곳은 그대가 잘 모르겠지. 어쨌든 해운대를 지나가는 거야.”
“우와! 말로만 듣던 해운대요? 그럼, 지금 기차가 해운대를 지나가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 밤이라 보이지 않는 게 아쉽네.”
“이다음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기차는 해운대를 지나, 기장을 거쳐 목적지인 일광에 도착했다. 여름이면 해수욕하러 오는 피서객으로 넘치는 이곳이지만, 눈 오는 밤 을씨년스러운 날씨다 보니 바닷가엔 아무도 없었다. 간간이 카바이드 불을 밝혀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포장마차 몇 이 덩그러니 해변 도롯가에 있을 뿐이었다.
소담스러운 눈은 해변에도 도심과 똑같이 내리고 있었다. 거친 파도 소리와 세찬 바람에 몸은 추웠지만, 나는 어여쁜 그녀와 단둘이 이곳에서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녀 역시 도심을 빠져 나와 한적한 바닷가에 나와 있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묻지도 않은 자신의 서울 생활을 주절거리듯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때처럼 똑같은 질문을 내게 던졌다.
‘이제 어떻게 하지?’
우산 하나로 두 명이 쓰기엔 역부족일 만큼 눈은 더욱 세차게 내렸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카바이드 불이 있는 포장마차로 발길을 돌렸다. 실내는 연탄불과 조그만 전열기가 있어 나름대로 따뜻했다. 술 생각은 별로 없었으나, 그녀와 함께 있으니 분위기상, 싱싱한 해산물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크리스마스 전후엔 뭘 해?”
나는 행여나 그녀에게서 의외의 대답을 기대하며 물었다.
“서울에 가야죠.”
“꼭 가야 해?”
그러자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랑 같이 있고 싶어요?”
나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잠시 주춤했다. 하긴, 마음이 그렇다는 말이지, 나 역시 성탄절 당일과 전후엔 주로 교회에 있어야 하고, 오랜만에 가족들과 조촐한 파티라도 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나와 있겠다면, 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글거리며 웃음을 보이던 그녀는 갑자기 침울해졌다.
“오늘부터 호칭을 바꿀래요. 사무실도 아닌데 자꾸 과장님, 하니 이상해요.”
“그래? 뭐로?”
“아저씨.”
그녀는 이 호칭을 쓰면서 다시 한번 더 날 빤히 쳐다보았다.
“어때요?”
“뭐가?”
“아저씨란 말이 괜찮냐구요.”
“뭐, 싫지 않아. 과장보다 더 친근감은 있네.”
그녀는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성탄절 날은 아저씨도 교회에 가야 하잖아요. 또, 사모님과 아이들과 오랜만에 함께 있어야 하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서울에 아빠랑 엄마 그리고 동생과 약속이 잡혀있어요. 제가 다니던 교회에 성탄 예배도 있구요. 마침 성탄절 다음날이 제 생일이에요. 친구들과 조촐한 파티라도 할 거구요.”
그녀의 조곤조곤한 말에 나는 그만 정신이 바짝 들었다. 너무 내 생각만 했다는 자책이 들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낙지 한 점과 소주를 벌컥, 하고 들이켰다.
“너무 앞서 나가지 마세요. 아저씨는 집에서 늘 기다리는 아내분이 있으시잖아요. 그러면 나는 뭐예요? 성탄절 같은 날에도 만약 나와 함께 있다 해도 아저씨는 결국 밤에 집으로 돌아갈 거잖아요. 그럼 나는 뭐가 되냐구요?”
나는 왠지 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무척 민감했다. 나는 더는 그녀의 입에서 난처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낙지를 참기름에 무쳐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이런 장난스러움을 거절했다.
“그러니까 우리 오버하지 말자구요. 아저씨랑 전 그냥 만나는 사이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어요.”
나는 괜히 오늘 그녀에게 성탄절 계획을 물었나 싶었다. 나 역시 서로 불편할 수 있는 아내 문제나 우리의 앞날 같은 것에 대해 말하고 싶진 않았다. 젊은 청춘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나 인정해줄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나도 그녀와 불유쾌한 문제 때문에 입씨름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낮에 연희랑 밥 먹으면서 아저씨, 부인에 대해 좀 들은 게 있어요.”
그녀가 또 말을 시작하자 나는 괜스레 마음이 불안했다.
“연희가 처음 입사하던 날, 아저씨가 연희를 위한 환영회를 열어 시내에서 1차 하다, 2차로 아저씨 집으로 갔었죠? 연희가 그날 깜짝 놀랐다. 그래요. 늦은 시간임에도 술에 취한 직원들을 위해 사모님이 직접 안주를 만들고 분위기를 띄웠다 하더라구요. 끝에 연희가 취했을 때 화장실까지 가서 등을 두드려주었던 분도 사모님이구요. 미대 교수에 독실한 크리스천인 사모님의 고매한 인격과 예술적 취향이 묻어나는 분위기에 연희가 완전히 압도되었다, 말하더군요.”
그녀는 점점 도가 넘기 시작했다. 짐작으로 지금 그녀는 나와의 만남이 불안하고 두렵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여과 없이 내 앞에서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연희가 그날 느낀 것은 아저씨랑 사모님이랑 너무 사이가 좋았다고 하더군요.”
이쯤 되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나는 내 앞에 놓인 소주를 병째로 들이마셨다. 추운 날씨 탓일까. 취기가 금방 올라왔다.
“그런데 왜 절 만나는 거죠?”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술기운 때문인지 화가 나기 시작했고,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뭘? 내가 언제 그대더러 만나 달라고 사정을 했나? 그게 아니잖아.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래서요? 날 어떻게 할 셈이죠?”
대화가 자꾸 빗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는 어이없게도 그녀가 보는 앞에서 성질을 내고 있었다. 물론 이건 내 의도가 아니었다. 나도 두려웠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와 둘이 있으면 나는 불안하면서도 행복했고 이 세상이 모두 내 것 같았다. 그뿐이었다.
“날 좋아하세요?”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이 늦은 밤에 이런 곳에 오냐?”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게 말이나 돼요?”
“무슨 두 여자? 내가 그대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집에 계신 분은 여자 아니에요?”
그녀는 마치 날 옭아매고 괴롭히려 작정하고 나온 사람 같았다.
“도대체 오늘 왜 그래? 우리 그냥 눈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야. 눈 때문에 기차 여행을 온 거라고.”
그러자 이번엔 그녀가 내가 마시던 술병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소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면서 무척 아팠다.
“날 정말 사랑하냔 말이에요.”
그녀의 눈을 보니 설핏, 눈물이 고였다.
“그래, 유희야.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이제 그만하자. 난 정말 널 좋아해. 매일 밤 그대 생각으로 난 잠도 잘 못 이룬단 말이야. 사랑해. 정말 사랑하고 있어.”
“사모님보다요?”
나는 결정적으로 그녀의 이 말에 폭발하고 말았다.
“그만!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아내와 이혼할까? 그러면 되겠어?”
나는 너무 답답해서 하마터면 자리에서 일어날 뻔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내 말에 한참을 생각하더니 짧은 탄식과 함께 이 말을 꺼냈다.
“우리, 이제 그만 헤어져요.”
순간, 밤하늘 눈이 모조리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