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글쓰기
- 전재완
인공지능을 영어의 약자로 AI라고 부른다. 어쩌다 좋은 시절에 태어나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명의 이기는 호불호가 갈리기 마련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약에 될지 독이 될지
아직은 잘 모른다.
기술은 잘만 쓰면 삶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기술을 제어하는 시스템이 부재하다면 그 기술이 나쁜 방향으로
탈주하여 잘못 악용될 위험이 있다. 인공지능의 먼조상이 인간이 만든 컴퓨터 언어라면 이제 인공지능은
단순히 0과1의 이진법적 논리어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탈컴퓨터화가 되어 가는 것이다. 말 그대로
기계가 스스로 생각을 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무섭지 않은가? 아널드 슈왈츠 제네거가 주인공인
영화 터미네이터를 떠올려 보라.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인 로봇과 인간의 대결이 영화가 아닌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로봇을 제작한 자들은 인간의 수고로운 노동을 로봇이 대신해 줄 것이라며
인공지능의 긍정적인 면만 광고하려 한다. 그래야 로봇을 한대라도 팔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할
줄 하는 이 위험한 로봇을 세상에다 출시하여 팔아먹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에 대한 안전장치는 가지고 있는가?
생각하는 로봇이 시스템 에러를 일으켜 제멋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리스크에 대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는가?
복사 베끼기와 편집@짜집기
문학은 모방의 학문이다. 모든 예술이 모방의 재창조가 아닐까 한다. 태초이래 오리지널 창조란 역사 이래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모방을 통한 재해석이자 재가공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에 있어 인공지능의 자리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날까?
어쩌면 미래의 시인과 소설가라는 작가들의 자리가 인공지능에 의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시인과 소설가들의 작품을 평론하는 일군의 평론집단 또한 인공지능의 침입으로 영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물음에 즉문즉답은 불가능하다. 단지 인간의 언어를 습득한 아마추어 인공지능
아티스트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은 시나 소설과 같은 다소 관념적이지 않은 미술과 음악분야부터 출발할 것이다.
인터넷상의 수많은 정보들이 인공지능 아티스트들의 메모리에 인식이 되는 그 순간부터 전혀 새롭지 않지만
로봇이 쓴 글쓰기라는 포장으로 세상에 알려질 것은 자명하다.
로봇의 글쓰기와 인간의 글쓰기는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로봇의 글쓰기와 다른 인간의 글쓰기
인간이 로봇과 다른 이유는 인간만이 언어를 습득하는 기술을 자생적으로 타고난다는 점이다.
이 단순하지만 스스로 언어를 습득하는 언어능력을 인간은 출생과 더불어 유아기 시절에 배우고
익힌다. 물론, 모든 인간이 언어능력을 습득한다고는 볼 수 없다. 생후 몇 개월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정글북에 나오는 늑대소년같이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품을 떠나 늑대에게 길러진다면 언어습득에
실패하고 만다.
로봇은 인간이 습득한 언어를 인간이 로봇언어로 재가공하여 로봇에게 학습시켜 만든 언어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인간의 언어와 로봇이 배우고 있는 언어는 다르다. 문제는 로봇이
스스로 언어를 배우게 된다는 역설에 있다. 이 상황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인간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로봇이 스스로 언어를 사고하여 인간의 언어를 습득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아마추어 로봇이 창작한 시나 소설이 인간의 글쓰기와 다른 것은 대상의 기술에 있다.
아직까지 그들의 글쓰기는 정교하지 못하다. 그들은 감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기계적이며 드라이한 그들의 글쓰기는 감정의 차고 뜨거운 기복을 모른다.
이것이 로봇의 글쓰기와 인간의 글쓰기가 갈라지는 틈이다.
가령 아래 이성복 시인의 그날의 시와같이
"세상은 병이 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역설의 아포리즘을
로봇은 결코 쓰지 못한다.
- 더 세부적인 분석은 앞일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