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정(淸遠亭)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고려 말 명신인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이 공민왕 때 고려로 환국하여 만년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건립했다. 강가 바위에 국파의 벗인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전서(篆書)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918년 복원되었다. 정자는 일자형(一字形)으로 온돌 양협 칸에 마루를 둔 형태이다. 암벽에 새겨진 척약재의 전서체를 탁본하여 편액으로 달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용궁의 청원정(淸遠亭)은 전원발(全元發)의 옛날 살던 곳으로 성화천의 동쪽 언덕에 있다. 전자(篆字)로 淸遠亭 세 글자를 석벽(石壁) 위에 새겼다.”라고 했다.
전원발의 호(號)는 국파, 고려 충숙왕 때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에 이르렀다. 국파의 신도비(神道碑)에 “국파의 가계를 정선(旌善)에서 이어 오다가 축산인(竺山人)이 되었다. 정선은 신라시대 정선군(旌善君) 휘(諱) 선(愃)으로부터 비롯 되었고, 축산(竺山)으로 관(貫)을 삼은 것은 선생의 5대조 평장사(平章事)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문정공(文貞公) 휘(諱) 방숙(邦淑)으로부터 비롯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원(元)나라가 세금을 징수하는 정동성(征東省)을 설치하여 공세(貢稅)를 절제 없이 징구하였는데, 국파가 원나라 순제(順帝)에게 백성들의 어려움 등을 상주(上奏)하여 마침내 조공(朝貢)을 삭감하게 되어 그 혜택이 조선조에까지 이어졌다. 명(明)나라가 개국되자 고려를 떠난 지 38년만에 환국하여 고향으로 낙향하자 공민왕이 당시 용궁 고을의 성화천(省火川)을 국파가 나라를 소생시켰다는 뜻을 기리기 위해 소천강으로 개명하여 국파에게 주고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으로 봉작(封爵)하였다. 만년에 정자를 지었고, 바위에 전서로 새긴 글자는 고려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성리학을 흥기한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으로 국파의 벗이다.
청원정중수기(淸遠亭重修記)에 “소백산이 내려와 천인(千仞)을 솟아 무이(武夷)가 되었고, 낙동강 상류의 삼강(三江: 낙동강, 금강, 내성천)이 모인 곳에 성화(省火: 蘇川江)가 흐른다. 여기 물 좋고 아름다운 곳에 청원정(淸遠亭)이라 이름하니 축산군(竺山君) 국파(菊坡) 전(全) 선생이 만년에 유유자적하기 위해 지으신 정자이다. 곁에 있는 돌 위에 새겨진 ‘淸遠亭’ 세 글자는 김척옹(金惕翁: 惕若齋 金九容)이 손수 쓰신 글자이니, 지금부터 오백여년 전 고려 말 이다.”
또한 기문에 정자의 연혁을 기록했다. “퇴계 이황의 읊은 시가 있으니 400여 년 전 명종과 선조 때였다. 임진왜란으로 정자가 소실되고 소천서원(蘇川書院)이 건립된 지 200여년 되었으니 숙종 때였다. 신미년(1971)에 서원이 철폐되고 빈터가 된 지도 40여 년이 지났으니 고종의 대행(大行) 때였다. 무오년(戊午年, 1918)에 원래의 자리에 정자를 세워 오래토록 보존할 계획을 세웠으니 이것이 청향정의 연혁이다. 국파는 위로 5세의 문헌(文獻)을 이어받고 당대의 삼현(三賢: 惕若齋 金九容, 蘭溪 金得培, 益齋 李齊賢)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는데 발탁되어 중국에서도 높은 벼슬을 했다. 원나라 순제에게 상주한 것이 받아들여져 그 혜택이 우리나라에 크게 미치었다. 이와 같은 공로가 드러났음에도 미련 없이 전원(田園)으로 돌아와서 꽃 중의 군자인 연꽃처럼 진흙 가운데서도 오염되지 않고, 은일(隱逸)의 국화처럼 모진 풍상 가운데서도 의연하였으니 이것이 국파가 여생을 이 정자에서 보낸 모습이었다. 이 모두가 청원정 고사에 잘 나타나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더 기록하리오. 오직 오랜 세월을 지남에 정자가 여러 번 재앙을 입어 국파의 글이 보존되지 못하고 오직 시로써 난계(蘭溪: 金得培)에게 화답한 것이 동문선에 나타나니 그 속에 담긴 뜻은 감히 부족한 사람이 논의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고찰해 볼 때 국파가 만년에 지키신 지조가 고려의 국운이 다 했을 때였고, 난계가 화를 당할 때 비로소 국파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으니 국파가 이로써 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시에 ‘강이 넓으니 고기가 멋대로 논다[江滑脩鱗縱]’는 것은 권력을 잡은 간신들을 지적한 뜻이 아니겠는가. ‘숲이 깊으니 지친 새가 돌아온다[林深倦鳥歸]’는 것은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한 뜻이 아니겠는가. ‘전원으로 돌아감이 나의 뜻이요 진작 기미를 알지는 못했다[歸田乃吾志非是早知機]’는 진실하면서도 겉으로 그 자취를 숨기려 함이 아니겠는가. 아! 수많은 현인들이 일망타진(一網打盡) 되는 날에 때를 만나지 못한 군자의 처신인 독선기신(獨善其身)할 곳을 정하고 한 말씀이 참으로 청아하여 은연 중 정치가 잘못되어 선왕의 정치와 비교하며 시대를 한탄한 변소아(變小雅) 같은 뜻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지조를 굳게 지키기를 잠룡(潛龍)처럼 확고부동하게 하였고 원대하게 높은 뜻을 가졌다. 벼슬하거나 물러날 때도 항상 주역(周易)의 교훈에 맞게 하였으니 과소평가 할 수 없고 적적하고 고요하다고 할 것도 아니다. 퇴계는 당대의 드문 명현으로 마땅히 사당을 세워야 할 분이라고 하였으니 그 시에 뜻이 나타나지 아니했는가. 곧 무극옹(無極翁) 기상으로 말하였으니 과연 국파는 평생 지조를 굳게 지킨 것이 모두 광풍제월(光風霽月) 같은 인격의 함양에서 나타난 바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정자와 서원을 세워야 할 까닭이 퇴계의 말씀 가운데 포함되어 있으니 다시 감히 무엇을 더 기록하리요. 그러나 청원정이 폐할 때는 국가적으로 임란 등으로 어지러웠을 때였고, 소천서원을 세웠을 때는 유학이 융성할 때였으니, 정자와 서원의 흥폐는 낙양(洛陽: 周나라 문화의 중심지)의 성쇠와 관련이 깊으므로 오늘 청원정의 복원은 곧 앞으로 우리나라에 문명의 징조가 아니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문 말미에 기미년(己未年, 1919) 김소락(金紹洛)이 우인(友人) 전옥현(全玉鉉), 병태(昞泰), 병윤(炳胤)의 요청으로 기록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
도를 깨닫고 은거하여 못을 만들어[聞道幽居作小塘]
꽃 중의 군자인 연꽃을 심으니 향기 그윽하네[花中君子發天香]
어여쁘다, 식물의 맑고 깨끗함이여[可憐植物淸如許]
비 그친 뒤의 바람과 달과 같이 고매 한 인품을 지닌 대장부 대하는 듯 하네[曾對高人映霽光]
고매한 인품은 백세를 전하고[光霽高懷百世風]
청하하고 중통(中通)한 꽃을 못 가운데 심었네[淸通嘉植一塘中]
마음과 눈을 씻고 와서 본다면[洗心洗眼來看處]
완연히 당시의 무극옹(無極翁: 濂溪 周惇頤)을 만나리[宛見當時無極翁]”라고 시를 읊었다.
박광영 / 성균관 의례부장
[출처] 축산전씨 - 전원발의 청원정(淸遠亭)|작성자 허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