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 주일-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2주 전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주님의 공현을 다음과 같은 세 사건을 통해 기념합니다. ① 첫째는 동방박사가 하늘에 떠 오른 큰 별을 보고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분께 경배드리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찾아온 ‘삼왕내조축일’(三王來朝祝日), ② 둘째는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오시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신원(身元)이 드러나는 주님 세례 축일, ③ 셋째는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사용되는 물을 하느님 나라의 기쁨의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표징을 행하심으로써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음(요한 2,1-11)을 기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요한 2,11)
요한 복음사가는 공관복음서의 저자인 마태오와 마르코, 그리고 루카가 예수님의 기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듀나미스’라는 표현 대신 ‘표징’(세메이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현상보다 그 기적이 지니는 의미에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그의 복음서 전반부(요한 1-12장)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곱 가지 ‘표징’을 언급합니다. ① 갈릴래아 카나에서 유다인의 정결례에 사용되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2,1-11), ②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심(4,46-54), ③ 벳자타 못가의 중풍병자를 고치심(5,1-9), ④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심(6,1-13), ⑤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으심(6,16-21), ⑥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심(9장), ⑦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소생(蘇生): 11,1-4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십니다. 영국 시인 바이런이 옥스퍼드 대학에 다닐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 카나의 기적에 관한 영성적 의미에 대해 논술하라.”는 종교학 시험 문제에 “물이 사랑하는 주인을 만나 얼굴을 붉히는 도다.”(“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는 짧은 시를 썼다고 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요한 2,3)
이스라엘에서 혼인 잔치는 보통 일주일간 계속됩니다. 가족들과 초대된 손님들은 7일간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시편 104,15)를 마시면서 맘껏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에서 술이 다 떨어졌다는 것은 신명 28,39(“너희가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어도 벌레가 그것을 먹어 치워서, 너희는 포도주를 마시지도 못하고 저장하지도 못할 것이다.”)는 말씀처럼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다 되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술이 철철 넘칠 정도로 많다는 것은 아모 9,13(“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밭 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과 이사 25,6(“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의 말씀처럼 구원과 천상의 행복이 성취됨을 의미합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τί ἐμοὶ καὶ σοί, γύναι; οὔπω ἥκει ἡ ὥρα μου.”: 요한 2,4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하느님의 뜻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십자가 상의 죽음의 때, 곧 그분의 영광의 때를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ㄴ)
성모님은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아드님을 굳건하게 신뢰하시며 혼인 잔치를 맡은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집트를 떠나 모세의 중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한목소리로 외치던 대답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탈출 19,8; 24,3.7)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요한 2,6ㄱ)에 가득 채운 물을 모두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물독 하나가 두세 동이들이고 한 동이가 40리터쯤이니, 모두 합치면 적어도 480리터가 넘는 ‘많은’ 양입니다. 유다인들이 자신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사용하던 정결례의 물을 예수님께서 포도주로 변화시켰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며 살 때,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사용되던 물이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의 포도주로 변했듯이, 우리 삶의 어둠은 빛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불안은 평화로, 죽음은 생명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의 기쁨에 초대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었던 성모님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지니며 오늘 하루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우리 삶에 충실하며 살아갑시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