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중의 시 <감나무 그늘 아래> 시평/우병택
감나무 그늘 아래
고재종
감나무 잎새를 흔드는 게
어찌 바람뿐이랴.
감나무 잎새를 반짝이는 게
어찌 햇살뿐이랴.
아까는 오색딱다구리가
따다다닥 찍고 가더니
봐 봐, 시방은 청설모가
쪼르르 타고 내려오네.
사랑이 끝났기로서니
그리움마저 사라지랴,
그 그리움 날로 자라면
주먹송이처럼 커갈 땡감들.
때론 머리 위로 흰 구름 이고
때론 온종일 장대비 맞아 보게.
이별까지 나눈 마당에
기다림은 웬 것이랴만,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그래 그래, 밤이면 잠 뒤척여
산이 우는 소리도 들어 보고
새벽이면 퍼뜩 깨어나
계곡 물소리도 들어 보게.
그 기다림 날로 익으니
서러움까지 익어선
저 짙푸른 감들, 마침내
형형 등불을 밝힐 것이라면
세상은 어찌 환하지 않으랴.
하늘은 어찌 부시지 않으랴.
고재종 시인의 「감나무 그늘 아래」는 '사랑 \to 이별 \to 그리움'의 정서적 흐름을 '감나무의 관찰 \to 땡감처럼 커지는 그리움 \to 내면적 성숙'이라는 독특한 구성 특징을 통해 심화시키는 수작이다. 시는 ‘익어가는 감’을 통해 인간사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 감나무 관찰과 정경 묘사 (1~8행)
시의 초반부(1~8행)는 감나무를 중심으로 한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을 관찰하는 데 집중한다. '바람뿐'과 '햇살뿐'이라는 반복을 통해 자연의 순수하고 당연한 이치를 제시하며, 오색딱따구리와 청설모가 등장하는 생동감 넘치는 시골 정경을 그려낸다. 이는 시가 전개될 성찰의 공간적 배경을 마련하며, 화자의 내면으로 들어가기 전 객관적인 자연의 섭리를 먼저 제시한다.
2. 땡감처럼 커지는 그리움 (9~12행)
자연 관찰 후 화자는 개인적인 정서인 이별과 그리움으로 시선을 옮긴다. 사랑이 끝났음에도 '그리움마저 사라지랴'라고 반문하며 그리움의 불멸성을 확인한다.
가장 핵심적인 비유는 '땡감처럼 커 갈 그리움'이다. 이 구절(9~12행)은 그리움을 단순히 소멸할 감정이나 아픈 기억이 아니라, '주먹송이처럼' 단단하고 충실하게 성장할 수 있는 생명력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별 후의 그리움은 고통이 아닌, 오히려 내면을 채우는 양분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3.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성숙 (13~21행)
중반부(13~21행)는 이 '땡감 같은 그리움'을 시간 속에서 겪어내며 성숙해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화자는 때론 '흰 구름'을 이고 때론 '장대비'를 맞듯이,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감당하며 이별의 마당에 머무른다.
화자는 '감나무 그늘에 평상을 놓고', 밤에는 '산이 우는 소리'를, 새벽에는 '계곡 물소리'를 듣는 등, 자연의 가장 깊고 근원적인 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 기다림과 관조의 시간은 이별로 인해 닫혔던 화자의 감각을 오히려 세상과 자연의 섭리 쪽으로 확장하고 심화시킨다.
4. 잘 익은 감을 통한 내면적 성숙의 가치 (22~27행)
시의 결론부(22~27행)는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얻은 내면적 성숙의 가치를 확연히 보여줍니다. 화자는 '그 기다림 날로 익으니'라고 표현하며, 그리움이 응축된 시간이 화자를 단단하게 만들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마침내, '저 짙푸른 감들, 마침내 / 형형 등불을 밝힐 것이라면'이라는 구절을 통해, 땡감처럼 떫고 아팠던 그리움과 기다림의 시간이 익어 '깨달음'의 빛으로 승화될 것임을 확신한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개인적 위안을 넘어, '세상은 어찌 훤하지 않으랴 / 하늘은 어찌 부시지 않으랴'라는 설의법을 통해 세상 모든 존재가 본래 아름답고 빛나고 있음을 재인식하는 숭고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결론적으로, 고재종 시인은 '사랑 \to 이별 \to 그리움'의 인간적인 과정을 '감나무 그늘 아래'라는 자연의 공간에 투영하여, 상실의 고통이 '익어가는 감'처럼 시간을 통해 내면의 성숙과 세상에 대한 깨달음으로 변모하는 긍정적인 서정성을 훌륭하게 완성하고 있다.
「감나무 그늘 아래」의 이미저리와 의미망 안착 과정
고재종 시인의 「감나무 그늘 아래」는 일상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고, 이 이미지를 화자의 내면세계와 연결하여 심화된 의미(의미망)로 안착시키는 과정을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에서 핵심 이미저리인 '감나무'와 '감'이 어떻게 사랑, 그리움, 성숙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망에 안착하는지 단계별로 살펴보자.
1. 1차 이미저리: 감나무 그늘 아래의 자연 현상
| 이미저리 | 현상 | 1차적 의미 (직접적 의미) |
| 바람, 햇살 | 감잎을 흔들고 반짝이게 함 | 자연의 순수한 섭리, 일상적이고 당연한 현상 |
| 딱따구리, 청설모 | 딱따구리, 청설모 | 생동감 있는 시골 정경, 현재의 구체적 삶 |
안착 과정:
시인은 감나무 주변의 구체적인 자연 현상(1~8행)을 제시하며 시적 공간을 구축한다. 이 현상들은'단순하고 명료한 자연의 섭리'라는 1차적 의미를 가지며, 이후 전개될 인간사(사랑과 이별)의 복잡한 감정과 대비되거나 이를 포용하는 배경이 된다.
2. 2차 이미저리: 땡감의 비유적 확장
| 이미저리 | 현상 | 2차적 의미 (비유적 의미) |
| 땡감 | 시간이 지나야 익는, 떫고 단단한 열매 | 그리움, 상실감 |
| '주먹송이처럼 커 갈 땡감' | 미숙함, 성장의 가능성 | 성숙하고 충실한 그리움 |
안착 과정:
화자는 이별 후의 감정인 '그리움'(9행)을 자연물인 '땡감'에 연결한다. 그리움은 보통 아픔이나 고통으로 인식되지만, 땡감은 당장은 떫을지라도 미래에 반드시 익어 단맛을 낼 잠재력을 내포한다. 따라서 '땡감처럼 커 갈 그리움'이라는 이미지는 상실의 고통을 '단단하게 응축되어 성숙해질 감정'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망에 안착시킨다.
3. 3차 이미저리: 감나무의 고난 수용과 관조
| 이미저리 | 현상 | 3차적 의미 (정서적 의미) |
| 흰 구름 이고, 장대비 맞고 | 자연 현상 수용 | 삶의 고난과 희로애락 수용 |
| 산이 우는 소리, 계곡 물소리 |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임 | 자연과의 합일, 내면의 성숙 |
안착 과정:
화자는 감나무가 흰 구름(평화)과 장대비(고난)를 모두 겪어내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이별까지 나는 마당'(17행)을 견디는 과정을 투영한다. 특히 감나무 그늘 아래 '평상'을 놓고 앉아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행위(18~21행)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을 '세상 만물을 관조하는 성숙의 시간'이라는 의미망에 안착시키며, 내면의 깊이를 더한다.
4. 최종 이미저리: 익은 감과 등불의 깨달음
| 이미저리 | 현상 | 최종 의미 (철학적 의미) |
| 잘 익은 감 (짙푸른 감) | 떫음이 사라지고 단맛이 됨 | 완성된 성숙, 깨달음 |
| '형형 등불을 밝힐 것' | 빛을 발함 | 희망, 세상의 진리, 훤함
|
안착 과정:
땡감처럼 단단하게 버텼던 그리움이 시간의 흐름(기다림)을 통해 마침내 '잘 익은 감'이 된다. 이 잘 익은 감이 '형형 등불'을 밝히는 이미지(24행)는 상실감과 고통의 시간이 결국 '세상이 훤해지는' 근원적인 기쁨과 깨달음이라는 최종적 의미망에 안착됨을 선언한다.따라서 시에서 '감'은 단순한 열매가 아니라,'사랑의 상실을 겪고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완성된 인간 내면의 성숙'이라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담는 그릇이 된다.
주제 정리
사랑의 상실(이별)로 인한 그리움이 감나무의 익어가는 감처럼 시간 속에서 성숙해져 마침내 세상을 밝히는 깨달음과 희망으로 승화되는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