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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는 죄가 없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한국은 세계인에게 괜찮은 곳간으로 소문난 나라 중 하나다. 풍요가 쌓여있는 곳간에는 많은 생명이 터를 잡고 살기 마련이다.
가난한 여러 나라에서 온 이들이 한국이라는 곳간에서 꿈을 꾸며 산다.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군 생활 중 가난한 나라의 장교로 외국에서 교육받은 적이 있었다. 부족한 생활비에 여유 없는 체제비로 주눅 들고 힘들었다. 잘 사는 나라 그들의 풍요와 여유가 부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먹고사는 것만으로 볼 때 세상에 부러운 나라는 없다.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만으로도 가난한 몇 나라의 소득이 되고도 남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지금 세대는 양이 아니라 질을 찾아 긴 줄 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여러 나라 언론에 미담으로 소개된다. 여행을 왔던 관광객이 돈은 물론 여권까지 죄다 어딘가 두고 내렸는데 신고도 하기 전 혹시 잃어버린 적이 있느냐 연락이 왔다는 것에서부터 지하철에 두고 내린 물건을 곧바로 되돌려 받았다는 이야기 등.....
심지어 여행을 끝내고 귀국 후에도 분실물이 배달되어 왔다는 감동의 사연도 들린다. 우리는 이런 기사들을 접하면서 자랑스러운 나라에 감사한다.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해 월남의 전쟁터, 열사의 중동에서 피와 땀을 흘리던 전사들을 생각한다.
뿐인가. 체제와 이념이 전혀 다른 공산국가에서조차 힘들게 시장을 개척하던 선배들의 노력이 오늘의 풍요를 가져왔음에 경의를 표한다. 이러한 풍요는 개개인의 인격에 영향을 미쳤고 국격을 높이는 데도 일조를 했음이 분명하다.
남의 물건 욕심내지 않음을 넘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분실한 이를 수소문하여 찾아주기까지 하는 것은 참으로 마땅하면서도 아름다운 일이다.
생계를 잇기 위한 직장 생활을 접고 정착하여 사는 이곳은 우리나라 어느 곳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풍요의 땅이다. 사람들은 유순하고 문화와 전통은 찬란하다. 여러 곳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큰 갈등 없이 어울려 살 수 있는 것도 풍족한 곳간을 지닌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터를 잡아 글도 쓰고 운동도 하면서 나름 만족한 황혼의 인생을 즐긴다. 비록 고향은 아니지만 후덕한 인심을 가진 이들 덕분에 살아갈수록 정이 쌓인다. 햇살 좋은 곳이라 생산되는 농산물은 맛도 참 좋다. 곡창지대니 땅도 기름진 것이 분명하다.
집 근처 남는 땅에 고구마를 심어 가을이 되면 조금 여유 있게 수확하는 지인이 있다. 어릴 적 고구마는 가난이었지만 지금은 건강식으로 소문나 식사 중 한 끼를 가끔 고구마로 때운다.
아내는 밤고구마를 유달리 좋아한다. 정작 지인은 가족들이 먹기 위한 적은 분량이라 팔 물건이 없다는데도 수확기만 되면 일타로 찜을 하는 등 고구마를 팔라며 해마다 들이댄다.
마음이 넉넉한 지인은 올해도 겨우 먹을 것 한 고랑을 심었다면서 다소 난감한 표정이면서도 한 상자를 만들어 아내에게 가져다준다.
일이 생긴 건 보름전이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운동을 하고 있었다. 막무가내식 부탁에 지인은 가까스로 준비한 밤고구마 한 상자와 호박고구마 한 봉지를 가지고 와 우리 차 뒤에 두었다고 운동 중인 아내에게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으레 그랬듯 운동이 끝나고 갈 때 차 트렁크에 실으면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새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가긴 하지만 그곳에 어떤 물건을 두어도 없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굳이 운동 중인 나에게 지금 차에 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운동을 마친 아내와 나는 지인에게 고맙다는 말과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고 테니스코트와 근접한 주차장으로 왔다. 가져다 두었다는 고구마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때까지도 나는 고구마를 차 뒤에 두었다는 지인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주차한 곳에 조금 늦게 도착한 아내는 조금 당황한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 고구마를 두었다고 했는데 어딨지? 어 이거는 뭐야. 웬 고구마야?”
차 뒷바퀴 옆에 조그만 고구마 두 뿌리가 떨어져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얼마 전 아내가 지인께 고구마 한 상자를 부탁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고구마를 그날 가지고 와서 차 뒤에 두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아내는 뒤늦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발생한 것을 느낀 듯했다. 차 뒤에 두었다는 고구마 상자가 사라진 것이다. 몇 번을 주위를 돌면서 살피고 차 밑도 유심히 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순간 아내의 얼굴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내에게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지인에게 고구마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냐. 진짜 고구마를 차 뒤에 둔 것이 맞느냐?”라고 물어보아야 된다며. 하지만 아내는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고구마를 차 뒤에 두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차에 싣지 않은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면서......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니 마음이 심히 불편했다. 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곳에 터잡고 사는 사람들이 고구마 한 상자가 욕심나 들고 갔으리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남의 물건에 눈길도 주지 않는 욕심 없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믿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더구나 아침 운동으로 가뿐해진 몸과 마음이 사라진 고구마 한 상자로 오히려 축 처지는 것 같은 느낌이 심하게 들었다. 누군가를 의심해야 하는 마음이 몹시 언짢았다. 아내는 속상했겠지만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추스르는 듯이 보였다. 고구마 한 상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말없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자마자 차 옆에서 주워온 고구마 두 뿌리를 전자레인지에 구웠다. 지인에게 고구마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할 때 맛이 어땠냐 물으면 뭐라 말을 해야 하니 그나마 두 개라도 맛볼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며 해맑게 웃었다. 아내는 자책하면서 고구마값을 지인의 계좌로 보내는 듯했다.
그런 일이 있고 사흘인가 지난 뒤 집안 행사와 모임이 있어 고향에 갔다. 간 김에 친구도 만나고 이런저런 가을걷이도 얻어왔다. 고구마도 두 상자나 가지고 왔다. 굳이 고구마를 챙겨온 것은 아내의 서운함이 조금이라도 빨리 사라졌으면 해서였다.
아내는 이렇게나 고구마를 많이 가지고 왔냐며 당분간 고구마만 먹어야겠다고, 지인이 준 고구마까지 있었으면 어쩔 뻔했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라진 고구마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옅어졌다.
며칠 전이었다. 다른 동호회에서 운동을 하는 아내 친구가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하고는 차에 비닐봉지를 걸어두었다고 했다. 그녀는 가끔 주말농장에서 가꾼 채소 등을 나누어 먹는다며 우리 차 옆에 가져다 두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화단에 둔 가방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져 주차장 관리실에 들어가 CCTV를 확인하여 찾았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듯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혹 그 사라진 고구마도 CCTV를 돌려보면 행방을 알 수 있지 않겠냐며 한번 확인해 보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날짜도 보름이나 지났고 설혹 누군가 들고 가는 것을 확인한다고 한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고 찾겠냐는 생각이었다.
더더욱 망설여지는 이유는 이제 겨우 그 언짢은 기억에서 놓여날만한데 다시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찜찜함이 계속 가슴 한 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증을 확실하게 하는 것은 다시 신뢰의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결국 오늘 아침 주차장 관리실에 들려 이야기를 꺼냈다. 주저주저하면서도 단호하게 사라진 물건의 행방을 알고 싶어 CCTV를 돌려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사무실의 장인 듯한 중년의 남자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을 보였다.
그러면서 저장 기간이 보름밖에 되지 않아 녹화된 것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다며 약간 귀찮은 내색이다. 그때 사무실 입구 쪽에 자리한 젊은 여성이 일어나 고구마에 대한 설명을 한다.
“아 그 고구마 상자 저의 직원인 주임, 환경미화원 분이 들고 왔었습니다. 이곳 창고에 두었는데 그대로 있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하며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사무실 직원 서너 명은 그대로 침묵이다. 침묵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3분이나 지났을까.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고구마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오래 두어서 그런지 곰팡이가 나고 썩어서 버린 모양입니다,” 밭에서 금방 캔 고구마가 보름 만에 썩는다는 것은 거짓이다. 아무리 창고가 습하다고 저장 기간이 긴 고구마가 그럴 수는 없다. 그녀의 시선은 사무실 바닥을 훑고 있었다.
거짓말이다. 버렸다면서 굳이 확인하러 간 것은 왜인가? 궁색한 변명임이 얼굴에서 드러난다. 순간 중년 남자가 변명을 보탠다. “그런 일이 가끔 있습니다.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물건을 가져다 창고에 보관하지요. 진즉 사무실에 들러 확인을 해보실 걸 그랬습니다.”
순간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 얼토당토않은 변명에 분노가 폭발했다.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물건을 가져간 사례가 없었습니다. 이곳은 새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오고 가기도 하고 주차장이니 차도 지나갑니다. 물건이 없어지면 당연히 그 사람들이 손을 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요. 건물을 관리하는 분이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가지고 갔다면 주인을 찾아주기 위한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종이에 써서 건물 유리창이든 울타리든 분실물 습득이라는 홍보를 해야겠지요. 썩을 때까지 가지고 있다가 버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지하철에 둔 엄청난 금액의 현금도 어떻게든 수소문하여 주인을 찾아주는 나라입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양심이 살아있는 우리나라지요. 그깟 고구마 한 상자 별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 그 더러운 욕심이 한심할 따름입니다. 절취죠. 도둑질입니다. 아직도 도둑의 마음이 있는 이곳이 부끄럽습니다.”
남자는 더 이상 말이 없고 여직원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이한 표정으로 문을 나서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짐작했다. ‘말 한마디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모든 직원들이 공범이구나’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됐습니다" 하고 관리 사무실을 나섰다. 모든 것이 명백하게 정리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직원들이 입었을 마음의 상처가 조금은 걸리긴 했지만.
건물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아내는 고구마를 들고 갔다는 그 환경미화원에게 정말 고구마를 버렸는지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전화로라도 물어봐야겠다며 그 직원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기 위해 사무실로 되돌아간다. 나는 말리고 싶었지만 깨끗한 뒤처리에 필요한 일 같아 다시 사무실 쪽으로 가는 아내 뒤를 따랐다. 그 젊은 여직원이 사무실 문밖까지 나와 변상하겠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경위야 어떻든 물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헛웃음이 나왔다. 오전 중으로 입금을 해드릴 테니 계좌번호를 알려 달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계좌로 입금되었다며 아내가 어이없어 한다.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창고에 보관해두었다가 썩어서 버리게 된 고구마 한 상자를 왜 돈으로 굳이 변상할까.
생각이 많았다. 그것을 가지고 간 환경미화원이 조선족이라는 아내 친구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의 물건을 거침없이 집어가는 그 마음이 너무 무서웠다. 머나먼 타국에서 가난과 핍박에 시달리다 백의민족으로서 깨끗함을 잃어버린 동족 아닌 중국인을 보는 것은 참으로 참담했다. 모든 것은 내 탓이었다. 그냥 그렇게 두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의 아둔함이 부끄럽기도 했다. 고구마는 죄가 없다. 사람도 죄가 없긴 마찬가지다. 얌치를 모르는 서툴고 생각 없는 행동이 죄가 있을 뿐. <끝>

첫댓글 네. 우리 나라도 점차 동방예의지국의 품위를 잃어 가는 것 같아 속이 상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침 운동으로 가뿐해진 몸과 마음이 사라진 고구마 한 상자로 오히려 축 처지는 것 같은 느낌이 심하게 들었다."
이 짧은 글귀에서 느껴지는 허무함과 서운함이 저에게도 무겁게 와 닿네요.
살면서 수많은 물건들과 만났다 헤어지곤 하는데, 어떤 물건들은 단순한 소지품이 아니라, 추억과 애정이 깃든 소중한 보물이 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의 고구마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우리내 인생이 담긴 작지만 소중한 보물같은 것이지요.
그러니 사라진 고구마에 대한 미련과 마음의 상처가 클 수 밖에요.......
더욱이, 주차장 관리실 직원들의 행동에서 받게 된 2차적인 마음의 상처는 더욱 더 씁쓸하네요.
딱히, 위로의 표현이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담당님, 언능 훌훌 털어 버리시고, 오늘도 활기찬 하루 보내세요.
김부장
그곳에도 고구마가 있소?
이곳 고구마는 엄청 맛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