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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보라
-‘한’ 사람 주체성과 삶·사회의 전환
사발지몽(2015. 1. 15)
1. 완성할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향촌(鄕村) 건설을 통해 사회주의 중국을 완성하겠다는 굳센 의지를 지진 청년 공산당원과 탈물질-탈국가의 열망을 숨기지 않는 형형한 눈빛의 청년 농민이 아름답다. 적어도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지난 10월 상하이 근교 한 농가에 한국의 원로·중견 사회운동가들과 중국의 청년 사회운동가들이 모인 자리였다.
청년 공산당원의 향촌건설운동은 단호한 신념이다. 삼농(三農/농민·농촌·농업)의 위기가 곧 중국 사회주의의 위기이며, 삼농의 부활이 없다면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도 없다는 믿음이다. 굴기하는 사회주의 중국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중대한 ‘결손’에 대한 커다란 염려다. ‘충족’이 절체절명의 과제가 된다.
청년 농민의 자연농업과 도농직거래는 비즈니스를 넘어 상하이 시민들의 생태적 삶, 영성적 삶에 대한 열망과 닿아있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이미 논외다. 낡은 체제에 불과하다.
청년 공산당원의 목표가 ‘완성’에 있다면, 청년 농민의 시선은 ‘초월’을 향하고 있었다. ‘완성할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필요의 충족’과 ‘열망의 실현’의 양자택일이라고나 할까.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의 충족과 실현은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협동조합 정의에 나오는 협동조합의 존재이유다. 청년 공산당원의 목표가 ‘충족’이라면, 농민 청년의 지향은 ‘실현(realizing)’인 셈이다.
완성할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이것은 나만의 물음표가 아니다. 한국사회 지식인과 사회운동가와 정치인들의 공통된 질문이기도 하다. 미완의 근대적 과제를 완성할 것인가? 아니면 근대를 졸지에 뛰어넘을 것인가? 물론 후자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아직 다수는 아니다. 그러나 과제 자체로는 모두가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그리고 흔한 답 중 하나는 ‘이중적 과제’에 대한 ‘이중적 전략’. 장기적 과제와 중단기적 과제의 복합적 대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복지국가는 중단기적 과제에 대한 해답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탈성장 녹색사회에 대한 기대는 장기 과제에 대한 응답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복지국가가 근대의 완성이라면 녹색사회는 근대 이후의 전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아니 그렇다면, 그 프로세스는 어떠할 것인가? ‘우선순위의 결정’ 혹은 ‘선택과 집중’을 전략이라고 말한다면, ‘이중과제 전략의 전략’은 무엇인가? 그 열쇠는 무엇인가? 옛날 식 표현으로 하자면, 연결고리를 찾아야 할 일이다. 그렇다. 이것이 이 글은 목적이다.
다시 그런데,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척도 혹은 프레임이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사회’가 아니라 ‘사람’,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이다. 완성인가 초월인가에 대한 지금까지의 프레임은 이미 전제가 있다. 사회가 그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 없이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대전제가 있다. 그것이 진보의 테제이고 우리는 이러한 사고의 중력장 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사람은 단지 교회나 절집에서 하느님과 부처님을 만날 때, 연인과 밀당을 할 때만 진실로 실존한다. 상하이에서의 완성과 초월의 범주와 척도도 당연히 사회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사회가 아니라, 사회 안에 있는 ‘한’ 사람을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 뒤집어 물어야 할 일이다. 완성의 목적은 무엇인가? 초월의 목적은 무엇인가? 완성은 사회적 완성이기도 하거니와 개인의 삶의 완성이기도 하다. 초월함으로써 완성하려 한다.
요컨대 지금은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한 지금, 전환의 주체도 출발점도 척도도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웃들과 지구생태계와 우주와 종횡·좌우·상하·표리로 연결된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을 통해 사회를 본다. 사회를 통해 인간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전환의 특이점, 혹은 열쇠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 사람을 보라!”
향촌건설운동가들이 완성코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회주의조국일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러나 그것은 조건의 완성일 뿐 아닐까? 초월의 열망을 지닌 상하이의 농민 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완성을 지향했던 것 아닐까? 자기초월, 즉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완성.
2. ‘한’ 사람의 출현
그렇다면, 그 ‘한’ 사람이 누구인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 사회를 보면, 군중을 보면, 계급을 보면, 정당을 보면, 무리(大衆/mass)를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변화도 도무지 기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람을 보면 다르다. ‘한’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우선 멈추어야 한다.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라는 베스트셀러 제목처럼 멈추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세 모녀의 눈물과 한숨소리도, 고향 어머니의 깊은 주름도, 소쩍새 소리도, 개울물 소리도 멈추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특별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잠깐 멈춰서기만 해도 보이고 또 들린다. 멈추어 한 사람을 지긋하게 바라보아야, 그의 욕망 안에 열망이, 그의 에고 안에 셀프가, 사(私) 안에 공(公)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욕망과 에고와 사(私)만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멈추어 한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면 보인다. 아쉬움, 그리움, 슬픔, 기쁨, 억눌린 분노, 그리고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한’ 마음.
1)거리의 성인들
500여년 전 일이다. 제자가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와 선생에게 여쭈었다.
“오늘 기묘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기묘하다는 말이냐?” 스승이 묻는다.
“거리 안의 사람이 성인으로 보였습니다.”
“그러한 광경은 보통 일이 아니냐! 무엇이 기묘하다는 것이냐!”
양명학에서 나오는 만가성인(滿街聖人) 이야기다. 길거리에 성인이 넘쳐난다. 테러의 공포 속에서도 자신을 몸을 희생해 다른 이를 구하고, 600일째 세월호의 아픔을 하루 빠짐없이 함께 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적 영성에 환호하고, 골목마다 명상·힐링센터가 들어서고, 5차원과 사랑의 에너지를 말하는 영화를 1천만 명이 관람하고, 서점엔 자기계발서가 넘쳐나고, 인터넷을 검색하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접할 수 있고, 촌로들도 TV를 통해 글로벌 시민임을 자각하는 시대, 진짜 만가성인의 시대가 도래한 것 아닐까?
미국의 풀뿌리 영성운동 단체인 휴머니티 팀(huminity team)는 하나됨선언(Oneness declaration)을 통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시대를 천명한다. 선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나. ‘하나됨 선언’은 인류와 더불어, 생명세계와 더불어, 나아가 신과 더불어,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고 상호의존하는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이는 지속가능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인류의 미래를 고대하던 오랜 기다림에 대한 답변이기도 합니다.
둘. 영적 시민권의 힘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셋. 인류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변화가 개인의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삶의 여정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신성과 내면의 지혜를 발휘하여 인류에게 최고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를테면 ‘나’를 찾는 과정이었다. 서구적 근대는 귀족과 사제들에게 독점되었던 물질을 해방시켰다. 물질적 욕망은 ‘나’의 일부이다. 억압된 육체를 해방시켜야 했다. 국부론의 저자는 그 통찰력을 시장경제에 적용했던 것 아닐까. 서구적 근대는 신으로부터, 신분으로부터, 선택불가의 공동체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자기 결정권을 갖는 주체가 될 수 있게 하였다. ‘나’라는 주체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서구적 근대는 오버했다. 넘쳤다. 독립을 강조한 나머지 ‘나’ 외에, 인간 외에 모든 존재를 타자(他者)로 만들었고, 마치 질풍노도의 청소년처럼 부모의 품을 뛰쳐나갔다. 가진 돈을 탕진하고 부모의 가슴팍을 파헤치고, 급기야 부모의 존재마저 부정했다(반면 동아시아는 나를 ‘우리’ 안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다. 우리가 진짜 우리(감옥)가 되었다. 한반도 북쪽은 동아시아 전통과 서구적 근대의 ‘잘못된 만남’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21세기, 돌아온 탕자처럼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자각한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타자가 곧 자기임을 깨달은 사람, 자신이 우주와 연결된 존재임을 인식한 사람, 지구에서 태어났으나 이제 지구의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인간과 인공지능 기술의 결합을 이야기 하며 ‘인간3.0’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새로운 인간이다. 신인류다. 이를테면 인간개조가 아니라 ‘인간개벽’이다. 진짜 때가 된 것 아닐까.
미국의 마음챙김(mindfulness) 열풍과 한국의 인문학 열풍 사이에서 말 그대로 ‘뜨거운’ 열망이 느껴진다. 사람의 근본에 대한 성찰과 탐구 속에서 보살과 철인과 군자와 신선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 일본의 교포 동학 연구자 조경달은 동학을 ‘만인신선(萬人神仙)’ 운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서유럽의 대안운동가들은 ‘출현(emergence)’, ‘떠오름’이라고 말한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 태평한 바다 한 가운데서 흰수염고래가 솟구쳐 오르듯 새로운 존재로 나타난다. 상하이에서 만난 농민의 얼굴에서 500년 전 만가성인의 그 얼굴을 떠올린다. 태평천국의 홍수전을 그려본다. 길 위의 성인들은 제각각의 모양과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이다. 그리고 중국판 신인류를 예감한다. ‘한’ 사람이다. 13억 중 한 명의 그 ‘한’ 사람이면서, 직거래를 통해 상하이의 마음을 출렁이게 하는 ‘한’ 사람이며, 초월을 통해 자기를 완성하려는 ‘한’ 사람이다.
2)그날은 언제 옵니까?
사실 ‘언제’라는 물음표는 함정이다. 그날이 따로 없으니 ‘언제’도 없다. 개벽은 후천에만 오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수운 최제우도 그래서 ‘후천개벽’이라 말하지 않고 ‘다시개벽’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개벽은 이미 와있는 지도 모른다. 지나가버렸을 지도 모른다. 수십만 년이 지나야 올지도 모른다. 지금의 시간 개념으로는.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수십 개의 TV 채널이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고 있다. 그 사이 청년들은 점점 더 희망을 잃어가고, 사람들의 마음도 강퍅해져 간다. 만가성인은 부르주아들(?)만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갑오년의 혁명이 참혹한 실패로 끝이 나고, 몸과 마음을 추스린 제자들이 묻는다.
“그날은 언제 옵니까?” 스승이 대답한다.
“산이 검게 변하고 길바닥에 비단일 깔리고 만국이 교역을 할 때.”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무슨 뜻일까?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해월 최시형의 답은 그 조건에 대한 답이 아니었을까. 절실한 제자의 질문에 스승이 친절하게 대답한 것이다.
그 귀한 비단이, 그 당시 부의 척도였던 비단이 흔해빠져 누구나 걸칠 수 있게 될 때, 그리고 그 부가 인류 모두에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때, 또한 황폐해진 생태계가 어느 정도 복원될 때, 그때가 ‘그날’ 아닐까. 그날의 필요조건이 만들어진 것 아닐까. 산업화를 통한 물질로부터의 해방, 민주화를 통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그날이 오는 것 아닐까. 이러한 물적 사회적 토대위에서만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 가능한 아닐까. 물질개벽이 있고서야 정신개벽이 가능한 것 아닐까. 상하이의 열망도 중국의 경제성장이 있고서야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최근 [중국일기]라는 책을 출간한 도올 김용옥이 한 인터뷰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중국 사람들의 종교적 출구를 언급한 바 있다. “공산주의의 허망함을 지금 한국의 격렬한 기독교인들이 가서 메워주고 있다. (중략) 요즘 돈 번 사람들이 많아져 어떤 출구가 필요한데 에너지가 전부 종교적인 데로 빠지고 있다.”(중앙일보 2015년 12월 4일). 때가 된 것일까?
도올만이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프라센짓 두아라 시카고대 교수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보다 명확하다. 중국의 변화는 다당제에서가 아니라 다종교에서 온단다.
“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속 여부가 다당제로의 이행에 있다고 여기지 않아요. 오히려 다종교의 허용이 얼마나 가능할지가 관건입니다. 즉, 개혁 개방으로 '소강(小康) 사회'에 진입한 다음에는 인민들의 초월적, 영성적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켜줄 수 있느냐에 중국 공산당의 장래가 걸려 있습니다. 중국 뿐 아니라 모든 국가들이 그러할 지도 모릅니다.” (이병한 두아라와의 인터뷰, 프레시안 2015년 9월 1일)
사실 이미 맹자 시절부터 이런 통찰은 있었다.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먹고사는 게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갖기 어렵다. 자본주의는 항심의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거룩한 ‘한’ 사람’은 진화의 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필연이기도 하다. 물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피를 먹고 자라지만, 빵이라는 필요조건이 필수적이다. 경제발전과 민주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론은 분명 일리가 있다. 산업화가 있었기에 민주화 가능했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상보적 관계라고나 할까.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 상하이가 그것을 웅변한다. 자본주의를 비난할 일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역할은 여기까지. 우리는 지금 인류사적 사명을 다한 자본주의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소득 2만달러가 넘어서면서부터는 소득 만족도가 줄어든다. 때가 된 것이다. 열망의 실현이 절실하다. 애벌레의 시대가 지나가고, 질풍노도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나비를 예감하는 시대가 되었다. 특별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부처와 공자와 예수와 소크라테스가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 거리를 활보할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3)새로운 주체성: ‘한’ 사람으로 거듭나기
이번에도 제자와 스승이다. 이현주 목사와 무위당 장일순이 노자를 읽으며 묻고 답한다.
“왜 인간은 사욕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요?”
“무명(無明) 때문이야. 깨닫지를 못해서 실재를 보지 못해서, 그러니까 진리를 몰라서 그래서 ‘사(私)’라는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라“
“깨닫는 게 도대체 뭡니까?”
기독교에서는 그걸 거듭난다(重生)고 하지? 새 사람이 되는 것 말일세. 그러니까 다르게 사는 거지, 깨닫기 전하고“
요점은 세계의 실상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통한 삶의 전환이다. 그것이 새로운 주체다. 여기서 주체란 객체를 전제한 주체가 아니다. ‘나’다. ‘자기’이다. 굳이 말하면 ’에고‘이면서 ’셀프‘인 나에 대한 자각이다.
나의 실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다. 그것은 ‘사회적 실존’을 넘어서는 ‘생태적 실존’, ‘우주적 실존’에 대한 각성이다. 그렇다. 80년대 초 원주에서 발신한 ‘생명’이라는 화두는 ‘한 사람’의 몸과 마음에 대한 구체적인 물음에 대한 응답이었고, 실재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한 포기 풀’의 존재론적 비밀에 대한 앎이었다. 추상화된 집합적 주체들인 계급, 인민, 국가, 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람의 실존, 즉 애욕과 열망과 눈물과 시름과 몸·마음의 변화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었다. 지금은 그 ‘생명’이 또다시 추상화되어 화석이 되어가고 있지만...
이러한 자각은 ‘나’의 삶과 사회적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나는 새로 태어났다. 이를테면 나비적 주체다. 물질적 충족이 존재의 이유였던 애벌레의 시절이 지나고 이제 하늘을 날고 있다. 그러나 나비의 몸에도 애벌레는 살아있다. 에고이면서 셀프다. 이기(利己)이면서 이타(利他)다. 자기 몸에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 너와 내가 하나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기 없는 이타가 아니라, 이기에서 이타로의 중심이동으로 존재의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2차원을 살던 애벌레가 3차원의 공간을 산다. 신세계다. 그러나 1차원이나 2차원을 떠난 것은 아니다. 나는 복(複)차원적 주체다. 내 안에는 여전히 애벌레가 꿈틀거린다. 애벌레시절에도 내 안에 나비가 존재하고 있었듯이.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먹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하늘의 나는 쾌감은 어찌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회적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한’ 사람 개인 주체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주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민(民), 이를테면 21세기의 ‘신민(新民)’이다. 1909년 신민회(新民會)를 만들어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도산 안창호가 1920년 3.1독립운동의 성과로 수립된 상해임시정부 신년인사회에서 연설을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나요? 있소. 대한 나라의 과거에는 황제는 1인밖에 없었지마는 금일은 2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요. (중략) 황제란 무엇이요. 주권자를 이름이나 과거의 주권자는 오직 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제군이 다 주권자외다.”
일찍이 해월 최시형은 “내가 하늘이다(我卽天)”라고 선포했고, 강증산은 스스로를 옥황상제라 칭하며 거룩한 존재임을 천명했는데, 안창호는 2천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황제라고 말한다. 한국사회 고유의 역동성도 “내가 하늘이다“라는 자각,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사회적 주체, 근대 한국적 주체의 출현이다. 대학(大學)에서 말하고 있듯이 큰 배움의 길은 또한 신민에 있으며(在新民), 그 신민이란 하늘의 도를 깨우친 사람인 것이다. 전체성을 자각한 개인, 즉 전일적 존재인 것이다. 과연 신민(新民), 거듭난 ‘한’ 사람이다.
21세기 신민은 공동체에 파묻힌 존재도 아니고, 계약에 의해서만 관계가 형성되는 결사체적 존재도 아니다. 전체성을 자각한 개체이다. 사(私)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공(公)을 자각한 민(民)이다. 이를테면 ‘거룩한 개인’이다. 거룩하다는 사전적 의미는 ‘높고 위대하다’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개인주의란 이를테면 땅 위의 위대함을 중하게 여기자는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탁월한 공공철학자 김태창은 새로운 주체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활사개공(活私開公)이 그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글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나’를 살려 ‘공’을 연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명하다. 사(私) 안에 공(公)이 있기 때문이다. 외형은 육체와 자아에 갇혀 있으나 동시에 생태적이며 우주적으로 열려있는 민(民)이다. 함석헌은 그러한 존재를 ‘씨ᄋᆞᆯ’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맥락에서의 한 사람, 즉 개체이면서 동시에 전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새로운 주체는 ‘인식론적 오만’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사람은 실재를 인식할 수 없으며, 단지 자신의 주관으로만 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업적 탐구를 통해 끊임없이 ‘실재’에 가까이 가려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지(無知)의 지(知),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다음으로 ‘존재론적 오만’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상대를 통제와 관리와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네’가 있어 ‘내’가 있음을 자각한 사람이다. 나는 나, 너는 너로 단절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는 연결된 전체라는 자각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듯이, 공기와의 끊어짐이 곧 죽음이듯이 ‘단절된 삶’이란 있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나만 살아있는 주체가 아니다. 너도 살아있는 주체다. 내가 만들었지만, 내가 샀지만, 내 아이디어지만,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숨겨진 하나됨을 느끼고 자각하여 자비심이 흘러나오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물론 피부라는 경계가 있어 한없이 욕구에 충실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몸과 마음이 우주로 열린 사람일 것이다. 한국의 고대사상인 한사상에서 말하는 그 ‘한’이다. 하늘사람의 ‘한’이고, 칸(우두머리)의 ‘한’이고, 전체로써의 ‘한’이다. 낱이면서 온인 그 ‘한’이다. 전체성을 지닌 개체이다. 전일적 주체다.
‘한’ 사람 없이는 새로운 공동체도 협동조합도 기대할 수 없다. 필요의 충족에서 출발했으나 보이지 않는 열망의 실현에 응답하지 못하면 협동조합도 공동체도 지속할 수 없다. 유토피아는 말할 것도 없다. 새로운 사람 없이 새로운 사회 없다. 이제 때가 되었다. 새로운 사회의 조건은 충분해졌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주인공들이 자라나고 있다.
3. 전환, 지금여기 그날
예사롭지 않다. 말 그대로 위기(危機)는 기회(機會), 하늘 땅 사람의 세 기틀이 새로운 차원으로 재구성될 때다. 대전환의 징후다. 큰비 뒤 대나무 숲속에서 새로운 싹 돋아나듯이, 에너지의 분출 그 뒤끝에서 새로운 하늘과 땅과 사람을 예감케 한다.
그러나 지금여기 인류사적 대전환은 ‘결핍’의 결과가 아니라 ‘적공(積功)의 결과다.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적 진화와 정신적 성숙의 결과다. 그리고 만가성인, 수많은 ’한‘ 사람의 출현 덕분이다. 문제는 전환의 프로세스. 나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여기 새로운 공동체로 그날이 실현되고, 나아가 ’나라 바꾸기‘, 즉 ’보국(輔國)‘을 통해 문명전환의 징검다리를 놓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
그렇다. 오늘의 위기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전환, 즉 탈바꿈(transformation) 혹은 이행(transition)의 전망으로 답해야 한다. 극복이 아니라 전환이다. 이겨 원래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렇다. 전환이다. 보완을 통해 완성에 이르는 개혁과도 구별되고, 과거의 것을 철폐하고 새 것을 건축하는 혁명과도 다르다. 전환은 질적 변화이다. 그것은 사람의 질적 변화, 즉 환골탈태와 거듭나기이면서, 사람의 변화를 통한 질적으로 다른 관계(사회)의 창조이다. 그리고 그 질적 변화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 닫힌 완성이 아니라, 열린 완성이다. 끊임없는 완성의 과정이다. 동시에 초월의 과정이다. 이를테면 ‘내재적 초월’이다. 그러나 다차원적 초월이다. 몸의 세계를 부정하는 마음의 세계가 아니다. 3차원은 1차원과 2차원과 ‘복층(複層)’으로 공존한다. 차원변화의 진실은 새로운 차원의 발견이다.
다시 묻는다. 완성할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이미 대답은 나온 셈이다. ‘한’ 사람의 관점에서는 지금 여기서 초월함으로써 ‘나’와 ‘우리’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열망이기도 하고, 거듭난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관계, 즉 ‘지금 여기의 그날’이기도 하다.
1)자기구원시대
‘싸안고 넘기’, 포월(包越)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삼농의 과제를 싸안고 동시에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간다. 상하이 근교의 한 농가에서 그것을 예감한다. 아니 기대한다. 초월적 전망을 가지고 있으되, 지금여기 그날을 실현하려 하는 ‘한’ 사람을 본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은 여기저기에 있다. 편재한다. 그의 눈빛은 120년전 전봉준의 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21세기 태평천국의 홍수전일까?
세월호 600일, 이제는 잊히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무도 그이들을 치유해줄 수는 없었다. 자구(自求), 내가 나를 구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몸과 마음은 내가 치유한다. 병든 사회를 치유해야 하지만, 먼저 병든 한 몸을 치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치유가 이루어져야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
상하이 농민의 눈빛이 “내가 메시아”라고 속삭인다. 그렇다. 만인진인(萬人眞人)시대다. 지금여기 나의 삶을 충만케 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완성하는 전환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조선의 성리학은 모든 존재 안에 하늘의 이치가 작용하고 있다고 인지했지만,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양반들뿐이었다. 심지어는 양반의 씨인 서자조차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성인이 될 수 없었다. 홍길동도 허생도 나름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냈지만, 백성들은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아야할 객체일 뿐이었다.
동학 역시 만인의 신선화를 열망했지만, 여전히 정도령과 같은 존재를 기대했다. 갑오년 혁명이 일어났던 전라도 인근에서는 손화중이 미륵이었고, 김개남은 진인을 자임했으며, 전봉준 역시 또 다른 의미의 구세자로 기대되었다. 그리고 3.1운동의 지도자 의암 손병희마저도 조선 이후 새 나라를 세울 또 다른 정도령이었다. 오직 해월 최시형만이 그 믿음을 단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 “만인신선”. 그리고 말년엔 온 천하에 선언한다. “내가 하늘이다.” 아즉천(我卽天)을 선언하고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선포한다.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tion), 세계화의 중심은 지역이다. 지역의 자기중심성이다. 최신 경영학은 흐름 중 하나는 셀프리더십이다. 자기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리더가 되어 스스로 통제하고 행동하는 것을 셀프리더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정읍이 우주의 배꼽이다.” 또한 나는 출렁이는 우주적 그물의 중심이다.
자기치유, 자기구원은 열망이기도 하고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과제이기도 하다. 농촌지역에 정신과 의원이 급속히 늘고 있다고 한다. OECD 국가 중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산업화 세대들은 늙어서도 마음 둘 곳이 없다.
청년들을 N포세대로 내모는 현실이 역설적으로 자기구원의 불가피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스펙쌓기와 자기계발의 그늘 아래 자기구원에 대한 자각이 깨어나고 있는 지도 모른다. 120년 전 동학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섰듯이 이제 스스로 나설 수밖에 없다. 서양사람들은 ‘그리스도의식(christ consciousness)’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내가 하늘님이라는 자각은 곧 내가 스스로 구원자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무엇보다 진정한 자기구원이란 스스로 새 사람이 되는 것, 환골탈태/거듭나기로써의 전환(transformation)이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정확히 말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덕분에 저절로), ‘가르침 없이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구원이란 “내가 곧 진리가 되는 것”이다. ‘자기실현’ 함으로써 ‘자기구원’ 한다.
2)땅 위의 천국
소설보다 현실이 극적으로 탁월하다. 다시 동학 이야기다. 궁궁촌을 찾아 헤매던 수운 최제우는 고향 용담에 돌아와 신비한 체험을 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체험. 그리고 접(接)이라는 이름으로 16개의 공동체를 만든다. 지금의 여기의 궁궁촌이며, 땅위의 천국이다 (기독교의 초기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백정과 양반이 서로 존대를 하고, 노비를 딸과 며느리고 삼고, 없는 이와 있는 사람이 함께 밥상을 받으니 지상천국이 아닐 수 없었다. 유토피아는 이미 나와 너, 우리 사이로 왔다.
상하이의 상류층들은 대안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내는 것으로 초월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은 도피다. 회피다. 각자도생이다.
전환이란 이를테면 지금 여기서,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이루어내는 초월적 완성이다. ‘나’와 ‘우리’에게 초월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계룡산과 청학동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 그날이다. 땅 위의 천국이다. ‘새로운 사회’의 출현이다. 허생의 섬나라와 홍길동의 율도국, 그리고 18세기의 민초들의 열망이었던 십승지(十勝地)와 궁궁촌을 지금 여기서 창조해내는 일이다.
그것은 사회적 전환(혹은 이행)의 출발점이다. ‘이렇게 사는 건 아니야’ 라는 자각인 ‘각비(覺非)’가 1단계라면, ‘탈(脫)’이 2단계(탈도시, 탈노동, 탈성장의 그 ‘탈’이다), 그리고 진정한 깨달음과 거듭나기가 3단계, 그리고 4단계에서 땅 위의 천국이 출현한다. 수운 최제우의 스토리이다. 그리고 그것의 사회적 확장과 다시개벽을 향한 ‘나라바꾸기’과 ‘문명전환’까지...
그렇다면 땅위의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나와 나 사이, 우리 안에서 그것이 실현된다. 가족 단위로, 마을단위로, 동호인모임으로, 종교인모임으로... 그렇다. 그곳에서는 탈도시, 탈노동, 탈성장이 이미 이루어진다. 정치가, 경제가, 사회가, 새로운 차원으로 실현되었다. 3차원의 세계 안에 4차원이 열린 것이다. 땅위의 천국은 낱 한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는 근대국가마저도 넘어선다. 이제 생명은 생태적 우주적 실존으로 확장되고, 재산은 사적 소유를 넘어 공유(共有)와 공유(公有)로 확장된다.
한국의 선가에서는 이러한 공동체를 신선의 나라, 선계(仙界)라고 말한다. 지리산에서 선계의 삶을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밝은마을] 대표 윤중 황선진은 이렇게 선계의 모습을 설명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중심이다.
-내가 그러하듯이 너도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중심이다.
-각각 중심인 사람들이 중심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서로 돕고 어울려 산다.
-서로 돕고 어울려 살기 위해 구축하는 삶의 시스템이 곧 마을이다. 마을과 마을이 모여 나라를 이룬다. 나라는 인간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중심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식물도 마찬가지다.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계와 인간은 서로 돕고 어울리며 살아간다.
선계 마을의 관계의 특징은 ‘어울림’이다. 중심과 둘레의 관계인 ‘더불어’가 아니다. 힘센 자만 살아남는 정글의 구조와는 아예 인연이 없다. 정글의 대안인 피라미드와 같은 수직적 위계와도 전혀 다르다. 웬일인지 일본말로 자기는 ‘자분(自分)’, 나누어진 존재다. 피라미드의 최상단에 천황이 있고, 그 아래로 주군와 사무라이들이 있는 모양새다. 민초들은 그저 부분, 아니 부품일 뿐이다.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그러하다.
새로운 공동체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의 관계망이 곧 마을이고 사회고 공동체다. 요체는 ‘무엇으로 이어져있는가’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으로, 신분제 사회는 신분을 매개로 한 권력이 관계의 핵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선계의 관계는 무엇으로 이어져 있을까? 그렇다. 이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 더 이상 물질/돈이 아니다. 관계의 중심이 달라진다. 자본주의적 관계의 중심엔 돈이 있다면, 새로운 관계의 중심엔 ‘한’ 마음이 있다. 관계개벽, 사회개벽이다. 물질과 물질의 관계 속에서도 정신이 더 중요하다. 선물경제가 그것이다.
선계의 사회조직 모형을 상상해본다. 이를테면, 공동체와 결사체를 넘어 ‘서로 살림의 마당’으로. 말 그대로 ‘한’ 마당이다. 하나이면서 모두인 마당. 공동체와 결사체를 안고 넘어, 아니 네트워크까지를 포함하여 그 모두를 품은 마당이다. 마당 ‘둥근 빈터’, 장, 영어로는 필드(field)이다. 조금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플랫폼이라 해도 좋다. 그런데 한자로 ‘장(場)’은 신을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플랫폼에 운영체계가 있듯이 마당에는 관계의 중심, 혹은 공심(公心)이 있다. 내부에 황무지조차 품고 있는, 여백이 있는 거대한 숲이다. 그 안에는 자연군락(공동체)도 있고 조림지(造林地)(결사체)도 있으나, 무엇보다 갖가지 모양의 나무와 풀과 동식물들이 다양하게, 그러나 하나하나 오롯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며 전체로써 어울려 있다. 그리고 나무들을 관통하는 숲의 정령, 숲의 신. ‘사회적 영성’이 있다.
3)천개의 달 천 개의 유토피아
2006년 아일랜드의 킨세일이라는 작은 마을에서는 놀라운 일이 시작됐다. 석유로부터 독립한 마을을 지금 여기서 당장 이루어내는 일이었다. 지금은 전 세계 40여개 나라 2,000개의 마을이 참여하는 지구적 전환마을운동의 태동이었다. 전환마을운동은 기후변화와 피크오일(Peak Oil)에 대한 공동체의 대안을 함께 만들자는 삶의 전환이면서 사회전환 운동이다. 전환마을은 석유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마을 공동체의 회복, 관계의 재구성을 이루어간다. 또 하나의 ‘지금 여기 그날’이다. 더욱 이미 이행 중인(in transition).
유토피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유토피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과 함께 지금 이곳을 유토피아로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망을 만드는 일이다. 이미 상식이 된 이야기. 유토피아는 ‘이곳에 없는 곳(no-where)’가 아니라 지금여기(now-here)다.
50만 조합원과 2천 생산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생산-소비 하나의 한살림운동, 40년 동안 선물거래를 고집해온 일본의 쓰고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 한국 화성에 있는 30년 역사의 무소유 공동체 야마기시즘 실현지. 그리고 점심때마다 공동체밥상으로 파티를 여는 시골 어느 마을회관, 영성적 일터공동체 당근농장, 영혼을 이야기하는 유토피아 경영학, 행복한 교실을 만드는 아이들과 선생님, 선물경제세상을 꿈꾸는 No-Money센터, 청년농사꾼들의 공동체 해남의 미세마을 등등. 그리고 이를테면 미국식 유토피아와 부탄식 유토피아, 영국식, 이탈리아식, 불교식(부처로 살기), 기독교식(예수로 살기)...
지난 10월 장강 하류의 작은 마을, 상하이의 달을 떠올린다. 아마도 서울에도 같은 달이 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하이의 달. 서울의 달과 상하이의 달은 하나이면서 둘이다. 숨겨진 하나가 제 각각으로 실현된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깃드는 것을 '월인천강(하나의 달이 모든 강물에 비침)‘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달이다. 태양이다. 천개의 강에 비춘 하나의 달이기도 하지만, 천개의 강에 뜬 천개의 달인지도 모른다(또 한 가지 초승달도 달, 반달도 달이라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땅위의 천국도 마찬가지다. 천개의 달에 천개의 유토피아가 있다. 간디는 70만개의 마을공화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3만 6천개의 마을공화국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도에는 70만개의 각기 다른 ‘그날들’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면서 동시에 수천, 수만, 수십 만이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만인성인, 만인신선이 만개의 마을, 만개의 유토피아를 창조한다.
가지가지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도 있다. 모든 존재 안에 신이 있듯이, 모든 삶과 사회에는 유토피아가 현존한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절반의 유토피아도 있고, 1/3 유토피아도 있고 3% 유토피아도 있다. 만약 단 1%의 유토피아도 없다면 그곳은 아마도 그곳은 지옥일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중층과제이다. 한국 사회 역시 중층적 과제를 안고 있다. 전근대적 과제와 근대적 과제. 다른 한편 정글자본주의에 적응도 해야 하고, 정글 자체를 벗어나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한 사람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그것은 시간적으로 순차적이면서도 동시적이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를테면 널리 알려진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욕구의 5단계를 사회에 적용해 보는 것이다. 인간은 생리적 필요의 충족, 즉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이 가장 기초적이지만, 이것이 단계적인 것만은 아니다. 동시에 필요하다. 인정욕구와 자기실현과 자기초월의 열망이 동시에 꿈틀거린다. 더욱이 어느 정도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더욱 거세게.
사회적 진화의 정점에 다다른 인류는 이미 숨은 열망을 포기할 수 없다. 물질개벽에 걸맞은 정신개벽을 요구하고, 직장은 필요한데 탈노동도 절실하다. 안전의 욕구와 생리적 욕구와 인정욕구와 자기실현의 욕구와 초월 욕구, 어느 하나 소홀할 수가 없다. 자기구원시대, 욕구는 단계적이지 않다. 지금 여기 그날은 다차원적 욕구와 열망에 동시에 응답해야 한다.
2016년이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세상에 나온 지 500년이 되는 해이다. 글로벌 유토피아 페스티벌이라도 열어야 할 일이다.
4. ‘한’ 사람을 위한 나라
수천수만 ‘오늘의 그날들’은 초봄의 새싹처럼 돋아나지만, 아직 대전환의 전령들이며 시그널일 뿐이다. 충분치 않다. 지구적 문명전환의 출발점일 뿐이다. 그것들은 반딧불처럼 이심전심의 촛불이 되었지만, 거기에 머물 수는 없다. 그것만으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체제전환과 문명전환 없이 삶의 전일성을 온전히 회복할 수는 없다. 지구적 차원에서 의식과 삶과 기술과 사회제도가 질적으로 변화하는 문명전환으로 확장, 확산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그 징검다리가 된다.
150년 전 1862년 수운이 16개의 ‘접’이라는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해월이 30년을 숨어다니며 전국 곳곳에 수많은 공동체를 만들어 지금 여기의 궁궁촌을 실현했지만, 그것만으로 백성 모두를 편안케 할 수는 없었다. 다시개벽을 열망한 수운 최제우의 나라, 조선이라는 나라는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배고픔도 전란도 전염병도 막지 못했다. 당장 조선을 통째로 지상천국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공동체를 기초로 보국(輔國/바르게 하다 보, 나라 국), 우선 나라를 바르게 해야 했다. 그렇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갑오년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은 대원군과 일본의 밀사와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을 위한 나라를 상상한다. 집합으로써의 국민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 존엄, 품위를 지켜주는 나라를 고대한다. 이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 아닌가. 동시에 그 나라가 자본주의 이후, 다음 사회로 이행하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새 문명의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1) ‘한’ 사람 사회 ‘한’ 사람 사회운동
‘한’ 사람 사회가 도래했다. 정확히 말하면, 전일적 ‘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1인’ 사회다. 그러나 그 흐름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 수의 1/4, 25%에 이르렀다고 한다. 먹을거리 문화가 바뀌고 주택시장이 바뀔 수밖에 없다. 생활협동조합의 물품구성과 이용패턴이 바뀌고 있다. 1인 사회다.
1인 미디어가 세상을 움직인다. 1인 제작 동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지구촌을 출렁이게 한다. 블로그뿐 아니다. 실시간 중계를 할 수 있는 인터넷플랫폼들이 나오고, 수많은 팟캐스트들이 이야기를 건다. 집합적 시민단체들 대신 1인 NPO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1인 출판사는 이미 주류가 되었고, 개인 간 거래 시스템인 p2p(peer to peer)경제는 만만치 않은 힘이 되었다. 개인 간 중고품 거래 커뮤니티인 네이버 중고나라에는 2015년 현재 1,300만의 회원이 하루 평균 약 10만 건의 중고품 매매글이 올라온다고 한다.(물론 사기꾼이 워낙 많아 ‘사기나라’라는 오명도 쓰고 있지만.) 이를테면 ‘한’ 사람 경제다.
1인 사회는 ‘한’ 사람 주체성의 사회적 조건이 된다. 결사체에서 자신을 확인한 한 사람이,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윤리적 소비와 연말의 자선와 1천원의 ARS기부를 가벼이 볼 수 없다. 전체성을 자각한 한 사람의 ‘거룩한 행동’이다. ‘1인 사회’의 ‘한 사람 공동체’로의 전환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니체는 스스로를 가리켜 ‘이 사람을 보라’고 말했지만,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을 보라’고 외쳐야 할 때다. 나라를 바꾸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우선 ‘한’ 사람에게 관심해야 한다. ‘한’ 사람을 보아야 숨어있는 사회적 과제를 찾을 수 있다. 더 깊은 민주주의, 더 공평한 경제가 가능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을 헤아리는 획기적 재분배가 가능해진다.
경제적 민주화건 정치정 민주화건 정치와 경제도 ‘한’ 사람을 보아 더욱 깊고 넓어질 것이다. 세 모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본다. 그녀들에게 정치란 무엇이었을까? 투표는 어떤 의미였을까? 1인 1표가 불행일까 다행일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깊은(deep) 민주주의’라는 말이 떠오른다. 깊은 민주주의는 이를테면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헤아리는 민주주다.
사회운동도 ‘한’ 사람이다. 대중(大衆/mass)의 관점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롯이 살피지 못한 채 ‘무리’로만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규모가 커지고 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이러한 경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집합적’ 운동의 한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마음과 형편이 보이지 않는다. ‘대중’운동은 ‘전위’운동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이지만, 근본적으로 양(量)의 운동, 고체적 운동의 한계 속에 있다. ‘진영(陣營)’이나 ‘세력화’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밖에 없다.
사회운동도 이제 ‘한’ 사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사회운동에 헤아려야 한다. 단지 인종차별 버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미국의 흑인인권운동의 상징인 된 로자 파커스의 ‘한’ 사람 혁명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링컨의 명구(名句)를 다시 읽는다. ‘한 사람의, 한 사람에 의한, 한 사람을 위한 사회운동을 상상해본다.
2) 탈성장재균형: 제로성장시대의 경제보국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보국(輔國)’할 것인가? 수많은 제도와 정책의 개혁을 이야기해야겠지만, 현실인식과 방향이 더욱 중요하다. 특히 ‘그날’의 조건과 관련하여 경제현실에 대한 인식이 관건이다.
글로벌경제와 그 일부인 한국경제는 전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른바 뉴노멀(new nomal) 시대다. 2008년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는 초장기 불황시대에 접어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예측조차 불가한 시대라 하여 뉴애브노멀(new abnormal)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제 ‘저성장(실질적으로는 제로성장)’이 정상인 시대가 된 것이다. 팔기 위한 경제인 자본주의는 시스템적 한계에 봉착해있다. 새로운 시장의 부재와 소비정점으로 인한 유효수요 창출의 한계 말이다. 부채경제와 경기부양으로도 성장을 회복할 수 없다. 출구가 없다. 경제 보국(輔國)이 절실하다.
갈 길은 하나, 경제위기 극복이 아니라 경제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성장시대로의 회귀에 대한 욕망은 헛되고 헛된 일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한국의 경우엔 북한이라는 미개척시장이 있어 다른 양상으로 갈 수도 있다.) 장기적 ‘저성장 현상’이야말로 극복이 아니라 새로운 단계/차원으로 전환해야 할 때라는 것을 반증한다. 바로 ‘탈(脫)성장’이다. 성장경제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탈성장이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다. 글로벌 전환운동이 대안경제 시스템으로 제안하는 ‘정상(定常)경제(steady state economy)’가 그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란 다시 말해, 경제의 ‘재균형(re-balance)’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람 안에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듯이 경제에도 ‘보이는 경제’와 ‘보이지 않는 경제’가 있다. ‘양(陽)의 화폐’와 ‘음(陰)의 화폐’가 있다. 유럽의 경제학자 리이테르 베르베르라의 이론이다. 국가통화에 대비하여 지역통화 같은 것이 그것인데, 경제 전체로 영역을 넓이면 화폐경제를 지탱해주는 숨어있는 경제영역을 말한다. 가사노동, 수공예품, 봉사활동, 자가돌봄 등등 GDP로 계산이 되지는 않지만, 살림살이경제의 바탕이 된다. 한 사람의 경제생활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음의 경제’가 확연해진다.
그렇다. 한 마디로 ‘탈성장재균형’이다. 양의 경제와 음의 경제의 균형이기도 하고, 나아가 경제적 ‘삼재’, 즉 시장경제(market economy)와 공공경제(public economy)와 사회경제(social economy)의 재조화(再調和/re-harmonize)이기도 한다. 원리를 중심으로 말하면, 교환과 재분배와 호혜의 재균형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심은 재조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재분배경제(국가)를 지렛대로 하여 호혜경제의 성장을 꾀해야 섬세한 전략이 요구된다.
이때 중요한 것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처럼 삶의 전환은커녕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다. 저성장이라 하더라도 한국의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내다보는 경제부국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가난하다. 여전히 애벌레의 감각에 머물러있는 이들을 고려하더라도 절대빈곤이 적지 않다. 기업과 나라는 부자인데,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 시대의 꼬리칸 사람들이 적지 않다. 컵밥과 컵라면과 교도소 독방보다 더 작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나비를 꿈꿀 수는 없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에게는 생존을 보장하고, 나아가 물질적 조건을 만족시켜주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만족시킬 기회를 주어야 한다. 먹을 것을 찾는 애벌레에게 푸른 하늘로의 비행은 조롱이 될 수 있다. 때가 아직 아니다.
정상경제는 균형의 회복를 차원으로의 전환이다. 문명과 자연, 있는 자와 없는 자, 자본과 노동의 재균형이다. 이를 통해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편안해지고, 삶의 전환의 조건을 제공받아야 한다. 다시, 재균형이다. 소득불균형, 자산불균형, 교육불균형, 남녀불균형, 지역불균형, 도농불균형, 그리고 남북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한다. 분배과정의 불균형 해소와 획기적 재분배의 실행이 좋은 나라의 도리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이 있다. 나라의 또 다른 반쪽, 북한이다.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써 북한 주민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더구나 널리 인정되고 있듯이 구조적 위기에 봉착한 북한권력은 베트남이나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북한 주민 한 사람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에게 성숙경제가 요구된다면, 북한에는 지금 ‘성장경제’가 절실한 때다.
다만 전환의 관점에서 ‘좋은 성장경제’에 대한 기획과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이다. 혹시 장마당에 호혜시장적 성격을 도입할 수는 없을까. 협동농장을 노동자협동조합으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을까.
3)전환의 징검다리
전환은 그날이 오면 이루어질 꿈이 아니라 ‘이행(transisiton)’과정이다. 좋은 나라는 삶의 전환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좋은 나라는 나아가 그 이행을 돕는다. 재분배를 통한 재균형과 성장경제 지원이 남과 북의 사람들에게 전환의 디딤돌이라면, 전환의 징검다리도 있다. 이를테면 선계로 가는 길, 혹은 지상천국 연습이라고나 할까.
‘주 21시간 노동’, 꽤 오래전 영국에서 나온 보고서다. 기후변화와 지구적 불평등과 경제위기에 대한 영국의 엔지오 nef(new economy foundation)의 해법이다. 여기서 ‘노동’이란 물론 기업이나 정부조직에 고용되어 돈 받고 일하는 임금노동(paid work), 고용노동을 말한다. 그렇다면 노동시간 단축으로 어떻게 당면한 위기를 해결한단 말인가? 그 답은 대충 이런 정도이다. 예전에 썼던 글에서 다시 인용한다.
“주 21시간 노동은 초과노동시간, 과소비, 실업, 탄소배출, 삶의 질 저하, 불평등의 고착과 같은 절박하고도 서로 연결된 여러 가지 문제들의 열쇠가 된다. 오히려 삶을 즐기고, 서로를 돌보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해준다.”
생명활동으로써의 노동은 그 자체로 생존노동적 성격과 창조노동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생존을 임금을 통해 실현해왔지만, 노예노동만은 아니었다. 의미와 보람은 모든 노동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생존노동에서 창조노동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지고 있다. 나비의 노동은 무엇일까? 물론 나비도 새끼 밥은 먹어야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은 음개벽 문명전환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는 일이라고나 할까. 탈물질 정신문명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며, 그 자체를 연습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너무도 유명하여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다. 돈벌이가 절실한 맞벌이도 있고, 국가복지 시스템의 취약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노동시간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유행어로 만들 만큼 치명적이다. ‘한’ 사람의 관점에서 노동시간을 줄이지 않으면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일자리 나눔 등등은 그 다음 이야기다. 진정한 노동해방이 절실하다. 프랑스의 주 35시간 노동이나 주 4일제 노동 등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인 제도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노동시간 단축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기본소득, 혹은 사회적 배당이 그것이다. 사회적 배당은 공유자산에 대한 사유화 및 국가독점에 대한 시민의 권리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관점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한 사람은 사회와 지구행성과 우주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 있어 사회도 지구행성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가 생산해낸 부를 배당받을 천부의 권리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노동가치설에 대한 성찰이기도 한다. 내가 만든 것은 내 것인가? 내가 만든 것은 내 것만이 아니다. 이것이 생명세계의 실상이다. 물론 ‘자본가치설’이라는 무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사회적 배당/기본소득은 이상이 아니라, 자각된 국민국가의 현실적 선택지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스위스가 월 300만원의 기본소득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핀란드가 월100만원 기본소득을 정책적 시행가능성을 두고 토론하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미국의 알래스카 주에서는 이미 기본소득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기본소득과 관련해 생각할 것이 있다. 국가에 대한 의존성 문제다. 이와 관련해 자치단체의 역할이나, 종교기관의 자금 조성과 관련한 역할에 대한 토론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산업문명을 안고 넘어 새로운 사회와 문명으로 가는 연결고리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창조사회’의 길이라고나 할까. ‘한’ 사람의 그 ‘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이 노동시간 단축과 사회적 배당으로, 다음 사회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기를 기대해본다.
5. 다시 고부
전봉준과 사발통문을 쓴 그이들은 ‘자기’를 역사에 드러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를 바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겠다고 서명했다. 전봉준은 군자되기와 사회변화를 동시에 염원했다. 동학의 접주가 되기 전 아마도 그는 다산 정약용의 경제유표를 공부하고 200여년전 인근 부안에 기거했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토지개혁론을 검토했을 것이다.
다시 고부다. 갑오년 혁명 전야, 사발통문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뜻을 모은다. 변방 한 고을에서 개벽의 열망이 터져 나왔다. 비록 종국에는 참혹한 실패로 귀결되었으나 한 고을에서 시작된 혁명의 들불은 전국을 불살랐다. 그리고 2015년 오늘, 변방은 노자가 말대로 창밖을 열지 않아도 지구로 열려있다. 고부 안에 서울과 뉴욕이 있다. 쓸쓸한 노인들과 실패한 도시의 장년들도, 심지어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까지 인터넷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한’ 사람이다. 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 재구성, 재창조, 재균형이다. 2015년의 다시개벽이다. 120년 전과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역시 ‘향아설위(向我設位)’ 아닐까. 한 사람의 청년과 여성과 노인이 자신을 향해 제사를 모시는 것. 자신을 지극히 돌보고 인식하고 실현하는 것, 푸코가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했다는 ‘자기의 테크놀로지’.
한 사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물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새롭게 포태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나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다. 수운 최제우의 다시개벽은 무엇보다 자기개벽, 거듭남이다. 개벽은 초월적 자기완성이다. 해월은 말한다. “도(道)는 안다 함은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이니...”
출판가에서는 여전히 자기계발서가 넘쳐나지만, 이제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을 물어야 할 일이다. 여기 ’리셋(reset)세대‘가 있다. 적공의 핵심은 역시 사람이다. 한 사람이다. 새로운 주체의 양성이다. 산파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실 한 사람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보는 눈‘이 중요하다. 발견이 중요하다.
언론은 ‘젊은 육체에 성숙된 정신으로 리셋’이라는 타이틀을 뽑고 있다. 삼성이 보고한 글로벌 신세대소비동향 보고서의 일부라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금융위기와 이에 따른 불확실성은 리셋 세대들로 하여금 삶을 진지하게 보게 만들었다. ‘생활의 변화에 욕구를 희생 하겠다’는 비율이 65%였다. 3분의 1이 절약하기 위해 소비를 줄인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명품(46%)∙최신기술제품(39%)∙영화(37%)∙외식(36%) 순으로 소비를 줄였다고 한다. 리셋세대에게 성공∙행복에 대한 정의는 이전 세대들과 달랐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3가지 덕목’을 묻는 질문에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를 꼽은 비율이 67%에 달했다. ‘건강’을 선택한 비율은 58%, ‘사랑과 로맨스’는 47%였다. 반면, 명품 옷(11%)∙비싼 차(14%)는 중요도가 떨어졌다.
‘진정한’ 리셋을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계발이 요구된다. 자기는 자기만이 아니고, 이웃이고, 자연이고 우주라는 각성 말이다. 자의식과 더불어, 70-80년대 386들을 설레게 했던 사회의식도 외면할 수 없다. 나아가 집단무의식에 대한 자각이나 우주의식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한살림선언은 전일적 주체로의 거듭나기 위해,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 ‘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을 제안한다.
그렇다. 하나의 촛불이 100만개의 촛불이 되는 개벽 전야다. 구성원이 절반은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청년들), 구성원의 절반은 너무 일찍 밀려나는(장년들) 시스템이라면 폐기될 수밖에 없다. 시스템 밖에 있는 것이 행운인지도 모른다. 돔 건축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미국의 한 건축가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변화는, 기존의 현실과 싸워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델을 통해 기존의 모델을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으로 만들 때 이루어진다.”
이미 리셋은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나를 살리고 서로를 살리는 시스템 말이다. 나아가 리셋세대에 의한 문명의 리셋.
“물질계와 정신계를 통해서 자유평등의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하자.” 해월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가 참여한 고려혁명당의 강령이다.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지금 나의 이웃과 함께 하면 된다. 이것이 리셋코리아의 출발점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사발통문이다. 도덕과 정치가 둘이 아니고, 수양과 혁명이 둘이 아니듯 말이다. ‘양심건국(良心建國)’, 상하이 임시정부 건물에서 본 백범 김구의 글씨가 떠오른다. 더 이상 양심을 조롱하는 사회는 나락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새로운 녹색의 길이기도 하다. 다시 두아라다.
“나를 사회와 자연과 우주와 연결시키는 삶의 기술을 복원해야 합니다. 아시아의 종교는 영성과 양생의 기술들을 오랫동안 발전시키고 전수해 왔습니다. 20세기를 지배한 민족주의와 소비주의에 맞설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지구적인 주체를 양성하는 방법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환경 단체와 녹색당은 20세기형 NGO와 정당으로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영성과 양생의 기술을 전파하는 새로운 전위 조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프래신짓트 두아라(시카고대학 교수), 프레시안
이미 시작되었다. SF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적공은 이미 그들 내면에 무위이화로 쌓이고 쌓여왔던 것,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예수님처럼. 단지 물방울 하나가 부족한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대전환이 나를 통해 일어날 수 있을까?” 도와 덕으로 체코혁명을 이끌었던 ‘한’ 사람 바츨로프 하벨의 시가 내게로 온다.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일단 내가 시작해야 하리, 해보아야 하리,
여기서 지금,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어디서라면
일이 더 쉬웠을 거라고
자신에게 핑계대지 않으면서,
장황한 연설이나
과장된 몸짓 없이,
다만 보다 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알고 있는
존재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나는 홀연히 알게 되리
놀랍게도
내가 유일한 사람도
첫 사람도
혹은 가장 중요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에서,
모두가 정말로 길을 잃을지 아닐지는
전적으로
내가 길을 잃을지 아닐지에 달렸다는 것을.
첫댓글 한사람의 의미에 참 많은게 담겨 있네요
우주도 티끌에서 비롯되었다하니
한티끌에도 웬지 우주가 담겨있을것도 같습니다
사발지몽은 전봉준의 꿈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