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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의 활동 (누가복음6:1~5)
드라마의 한 장면. 주지스님이 앉아 설법을 베풀고 신도들이 앉아서 듣는 장면. 우리 여기 왜 왔습니까? 좋은 말씀 들으러 왔습니다. 마음공부 하러 왔습니다. -> 드라마속 정답. 종교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통제하고 닦아나가는 과정. 종교의 주체는 자기.
사악한 마음 버리고 선한 마음으로 채우는 마음공부. 일체유심조. 모든 만물이 마음에 달려있다. 절에서 하는 얘기. 우리는 왜 모임? 좋은 말씀 들으러? 예배라는 것은 어떤 분을 예를 다해 경배하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 온갖 예를 다한 경배.
그 분의 어떠한 요인 때문에 그 분을 섬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어떤 것 때문에 그 분을 섬기게 되는 것. 연극 여신님이 보고 계셔. 어떤 여자에게 반한 남자 입장에서는 그 여자가 신. 항상 그 남자는 그 여자를 숭배한다. 물론 잠깐.
사랑에 빠진 순간에는 그 여자의 대답 한 마디에도 황송. 마치 그런 것처럼. 혹은 유명한 스타 앞에서 열광하는 소녀처럼. 아낌없이 아이돌에게 경배 열광. 선물 보내가며. 혜화 전철역 샤이니 종현 생일 광고. 우상이니까. 뭐라도 섬기고 기념하고 숭배하고픈 본능.
그 본능때문에 이미 죽어 없어졌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환한 미소를 띤 사진을 걸고 스스로 만족. 예배 숭배 섬기는 것. 그 모든 예배행위의 주안점은 나를 잊어버리는 것. 나를 버리는 것. 부인하는 것. 그게 경배.
반대로 모든 종교라는 것은 마음공부. 더욱더 자기에게 몰입할 수밖에. 내 속에 악한 마음 교만한 마음 버려야. 나를 들여다보면 끝없는 사악함이 올라오는데 그걸 매일 버리다보니 점점 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밖에.
반대로 예배는 나를 잊어버리는 것.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 대상한테만 몰입.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일 때. 그게 예배. 반대로 교회에 내 가치 챙기러 왔다, 말씀 통해 내 존재가치 확인받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자신의 가치에 몰입하면 그 순간 종교가 된다.
예배라는 것은 모든 육체는 풀이요 영광은 꽃이다. 나는 한 떨기 풀처럼 말라져도 상관 없는 것. 내 아름다움은 들의 꽃처럼 사라져도 상관없는 것. 오직 그분만이 드러나면 ㅇㅋ.
똑같은 과정인데 하나님 말씀 지킴으로 축복 얻고자 하면 종교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하나하나 지킬때마다 우리 존재가치는 점점 격상된다. 하나님 말씀 지키려고 하면 반드시 종교가 되고 점점 더 자기 중심적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려 하면 안 된다. 위험한 말. 하나님 말씀 지키려고 하면 자신의 가치가 더 두터워진다. 그래서 안 된다. 스님 다큐 한 평 방에 틀어박혀 천일동안 수행. 열 명중 두 명은 정신병 걸려 나온다. 스스로를 수행..
부끄럽다 승려들도 천일동안 득도하려고 애쓰는데 사십일 금식도 안하고...... ? 진정 복음을 안다면 그런 이들 앞에서 더 자유롭게 충분히 넓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자면서 놀아야지 예수님처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 제자들은 금식 안하느냐?
신랑과 함께 있는데 금식 왜함. 예수 그리스도 은총으로 모든 죄문제가 끝났음을 안다면 먹고 마시고 즐기고 살아야지. 천일동안 자기를 가두고 면벽참선하는 수행자를 부러워하다니. 오히려 딱하다 아직도 네 속에 수행하면 뭔가 하나님 진리의 세계에 이를 요소가 있다고 믿고있음?
뭔가 우리 속에 덜 먹고 덜 자고 자기 괴롭히고 참선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자신을 모른다. 모를 수밖에. 이 세상 신이 혼미케 하는 영을 보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 혼미하다. 혼미하다는 뜻은 자기가 자기를 모른다는 것. 내 속에 아직도 뭔가 선한 요소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것인가. 선을 행하고 싶은데 악이 나를 끌고간다. 사망의 몸. 진리의 영이 임하니까 무엇을 해도 사망의 몸이라는 나의 실상 알게 된다.
바울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 왜?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악의 요소가 이미 들어와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가 육체를 입고 이 땅 오셔서 모든 계명 완성하시고 십자가에 죽은 것.
우리 자신 믿는 것 아니고. 기도하고 말씀 지키고 금식하고 주일 지키고 헌금구제... 그러면 하나님이 이뻐하시겠지? 아니다. 그걸로 안 되기 때문에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것.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 구속. 목회 오래하고 말씀만 전하고 살았단 인간들도 뜯어보면 완고함 뿐.
목회 오래하신 분들 무섭다. 그분들이 내뿜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완고함. 격식없이 살아온 사람에게 불편. 나는 목회를 사십 년.. 내 교회는 몇백 억... 뭘 했다. 그 완고함. 견고한 자기 세계. 평생토록 새벽기도 통해 쌓아온 자기 의. 자기 성벽.
그런 사람이 무슨 예배? 예배라는 것은 내 세계 와장창 무너지는 것. 선을 행하고픈 나에게 악이 함께. 나는 사망의 몸.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지금 달랑 들어 지옥에 던져넣어도 합당. 나란 존재는 사망의 몸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 완전 포기한 사람만이 경배할 수 있다. 그런 인간을 대신해서 실제로 십자가에 죽고 지옥 들어가신 분이 예수님이니까.
비기독교 친구. 우리 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전제를 붙이고. 사람이 죽으면 다 불태워버리는데 육체가 없는데 지옥가서 고통받을 육체가 어디? 몸이 있어야 고통받을 것 아냐? 그 말처럼 몸뚱이를 태웠다, 똑같은 논리로 천국 가서 영생 누릴 몸은 어떤 몸?
요5 부활이 있다. 생명을 위한 부활이 있고, 심판 위한 부활 있다. 천국 들어갈 영광의 몸 따로, 지옥 들어가 고통 받을 몸 따로. 아무도 안 죽는다. 다 불러내서 너는 영원한 생명 위한 부활생명, 너는 영원한 지옥 저주의 몸 새롭게 몸을 입혀버린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을 위한, 심판을 위한 부활로 나눠진다. 그러나 생명을 위한 부활을 믿지 않기에 심판을 위한 부활도 믿지 않는다. 그냥 보이는 몸이 전부.
안식일 오른손 마른 사람. 아마도 마비된 몸.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 고발하려 가자미눈 뜨고 보고 있다. 예수라는 저 놈이 과연 안식일날도 진료행위 할까? 만약 그러면 저 인간은 안식일에 진료행위, 곧 일했기 때문에 안식일 어긴 놈이다 고소하려고.
예수님은 그들 생각 아셨다. 그래서 회중 가운데 손 마른 자를 세워놓고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걸 믿는 사람. 성경에 나온 모든 말씀의 생활화로 하나님 기쁘시게 한다. 지금도 똑같다. 교회 나오면서 성경에 나온 모든 예수 말씀 지켜서 기쁘시게 할거야 생각한다면 현대판 바리새인 서기관.
하나님 말씀 지킬수록 내가 견고해진다. 안식일 계명 지킴으로 나는 하나님 계명 지키는 사람이라는 자기확인 절차에 들어간 사람들. 계명 지킴으로 자기 가치 스스로 입증. 수학문제 푸는 학생. 그 문제를 풀면 나는 이 문제 정도는 풀 수 있는 사람이야 자기 확인.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안식일 지켜라 계명 주시면 그 계명 지킨 사람은 지킨 것으로 자기 존재 가치를 확인. 나는 하나님 말씀 지키는 사람. 그 자기존재 가치 확인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를 막아버린다.
학생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낼수록 가치 올라간다. 하나님 계명 하나 두 개 세 개 지킬수록 가치 올라간다. 아무리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빼도 마음 속에서는 스스로 확인된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빛은 희미해진다.
문제는 그렇게 높아진 자기 가치를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면 참 좋겠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빵빵해진 인간 가치를 그냥 내버려두시는 게 아니고 굳이 찔러서 터뜨려버린다. 그게 문제.
음식물 쓰레기 국물. 젓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부피 줄이듯. 예수님이 이 땅 오셔서 우리 존재가치 인정해주시며 구원해주고 같이 가면 좋겠는데. 우리 행함50 주님 은혜50....예수님이 일딴 우리 가치를 펑크낸 상태에서 100% 주님의 은총으로만 채우고 싶으신 것.
우리 내부에 우리 행함 가치 다 제거되고 예수님 사랑 행함 예수 생명으로만 채워진 상태로 천국으로 인도. 어쩔 수 없이 우리 존재가치에 손을 댄다. 너 계명 지켰어? 몇 개나?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 너 하나 모자란다 너 소유 다 팔아서 나눠주고 따라와라.
그 소유를 팔아 나눠주라는 말씀이 젓가락처럼 그의 평생의 부풀어온 존재가치에 구멍 뚫는 작용. 이에 청년이 심히 근심하며 돌아간다. 나의 소유의 가치는 포기할 수 없으니.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잠 안자고 돈 벌어 부자 됐는데 어떻게?
가난한 자에게 주는 순간 돈 개념 없기 때문에 줄 수 없다... 장학재단 세워 본인이 운영. 어떻게든 소유에 담긴 나의 행함의 가치 포기불가. 바리새인 서기관 하나님 계명 지킴으로 자기 존재가치 최대한 확대한 사람. 이렇게 말씀 지키는 경건한 나를 하나님은 알아주실거야.
그런데 육체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님은 그들의 행함의 가치를 평생 일회 두 번 금식 안식일 철저히 계명 지키고 소득의 십일조 드리고 그렇게 살아온 그들의 행함의 모든 가치를 쓸데없는 것, 심지어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규정.
하나님의 말씀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그럴싸한 신자라고 자기를 확인하는 순간 바로 악행. 생명 죽이는 것. 목사가 설교하고 나 오늘 설교 잘했어 괜찮은 목사야... 그게 생명 죽이는 것.
목사가 설교 목회 행위 통해서 존재가치 챙긴다? 그 교회 있으면 모든 교인들이 다 똑같이 바뀐다. 장로는 장로대로 존재가치, 집사는 집사대로. 각자 행하는 서로의 행함의 가치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인간의 영광으로 꽉 찬 교회.
사람의 영광. 너희가 피차 영광 주고받는다. 하나님께 영광 구하지 않고 피차 사람의 영광으로 주고받고 있으니 사람 집단. 그 교회에 예배 없다. 하나님 섬긴다는 자부심만 경배 받는다.
사도바울. 기껏 교회 세우고 목회하고 난 이후 바울의 고백은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다. 존재가치를 스스로 구멍뚫는 과정 통해 뭔가 교회 세우고 교회 위해 했다는 존재가치에 동일하게 구멍을 내버리는 것.
바울이 죄인중에 괴수인데 교인 중 누가 나는 바울보다 덜 죄인이다 나서는 순간 교만한 사람. 너나 나나 똑같이 예수님 자비, 십자가 희생 없이는 하나님의 세계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 피차 고백할 때 예수님 희생 가치만 드러난다.
말씀 전하는 목사나 듣는 교인이나 동일하게 죄인 위해 죽으신 예수 가치만 높게 드러날 때 비로소 예배가 이뤄진다.
성가대 완벽한 하모니. 그렇게 성가를 멋지게 하고 앉았을 때. 오늘 예배를 내가 빛냈어. 그게 예배가 아니다. 자기 숭배. 예배라는 것은 죄인 중 괴수라는 것으로 자기 존재가치 구멍낼 때.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 이뤄질 때. 그때 오직 우리가 아니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은총만 드러난다.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핍박받고 힘썼지만 내가 아니요 나와 함께하신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 그 때 비로소 주의 은혜 경배받는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단적으로 충돌하는 장면. 얼마나 크게 박치기했으면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의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했다 나온다. 충돌이 너무 강력해서 죽이기로 결정.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만나게 되면 예수를 향한 살기 분노가 다가와야.. 진짜 예수를 만났다면. 가짜 예수 만났다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나온다. 나는 사랑받기 합당한 사람이야. 예수님 나를 사랑하러 오셨대.
진짜 예수 만나게 되면 열받게 되어있다. 비기독교 친구의 말. 하나님은 어디다 고발해야 되냐?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 섬기는 목사 아내를 아프게 하냐? 직무유기 아냐? 탄핵해야... 낯선 논리. 그 말이 상식적으로 일리 있다. 오히려 자비로운 부처님이...
모든 인생은 환상 속에 살아간다. 인생은 행복해야 한다.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인생의 진실은 저주와 심판이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도. 그게 진실. 그러나 인생은 환상속에 움직인다. 잘 살아보세.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그 속에 있을 때 행복하다.
결혼할 때 행복하게 살아 인사. 부케 던지고 받고 박수치고 좋아하는데. 인생의 진실은 저주와 심판. 고난받지 않으면 자꾸 허상속에 살아간다. 본래 인생은 가시 엉겅퀴 땅. 가인이 아벨 처 죽인 땅. 형제간 서로 죽인 땅.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 형제가 잘 지낸다면 땡잡은 것. 형이 나를 벌써 죽였어야 되는데 안 죽이고 돈을 주니 너무너무 감사. 인생의 진실은 고난. 병들고 고통 괴로움 이별 이혼 살인... 다윗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다. 진실을 봤기에 유익.
더 이상 인생에서 환상을 거둬버리고 진실을 보니 인생은 원래 고난 병듦 고통의 땅인데 웬일인지 나에게 건강 있다면 놀라운 축복. 그 고난의 양탄자 위에서 인생 사는 모든 자들은 주어진 모든 게 감사. 그런데 인생에 행복의 카펫을 쫙 깔아놨다면. 서로 허상 속에서 싸운다.
인생의 진실이란 것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 - 에덴 밖 전쟁 기근 수많은 것 있지만- 십자가. 하나님의 안목으로 봤을 때 인생의 진실 보여주는 장소. 하나님 보시기에 너희는 이처럼 저주받고 죽어 마땅. 그것을 선언하는 게 십자가.
너희 진실은 예수가 못 박혀 죽었듯 예수와 함께 죽어 마땅. 니들이 무슨 행복을 바래. 너희들의 진실은 십자가에 피 흘려 죽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그 십자가 자리.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계명 하나씩 지킴으로 만들어가는 그 환상의 세계, 말씀 안식일 십일조 지켰다...
그러나 주님은 그 창고에 홍수를 내리게 한다. 그래서 인생의 진실을 알게 하신다. 너의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야. 그 자리에 서서 창고를 보니 웬일인지 창고가 차있네? 이게 왠 기적. 원래 인생은 싸우고 아프고.
가족이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은 것. 그 사람이 조금 인생 본질에 근접. 진짜 가족이란 가인이 아벨 때려죽이는 것.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 가족은 서로 사랑. 스윗홈. 그 이면에 우리 주님의 십자가 희생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 때려죽이는 과정 통해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하는 화목한 가정 존재. 그 아픔 없었다면 왕상6 사마리아 성 포위되었을 때 자기 아이 잡아먹음. 그게 하나님 자비가 없었을 때 어떻다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그림.
독일군 유대인 잡아 실험할 때. 밀폐된 방에 가둬놓고 바닥 온도를 올림. 아기를 안고 있던 엄마가 나중에 아기를 밟고 올라섰다. 인간의 모성이란 것은 절대적인 것 아니었나? 모성이 위대한 게 아니다. 자기 아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하나님의 희생 있었기에 그 바탕 위에서 엄마아빠 사랑 다 이뤄진다.
아들 죽인 하나님 사랑 빠져버린 자리에서는 자기 새끼 끓여먹는다. 한 엄마가 자기 아기 숨긴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다음 날 자기 먹으려고 숨겨놓은 것. 그게 인생의 진실. 이런 진실은 싫다. 우리는 환상 좋아하니까.
가족 사랑.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하늘의 별도 따다 드리리. 그러고 이혼. 이세상 모든 사랑찬가 들어보면 그 순간 마취된 것. 허상의 세계에서 만족 느끼는 것. 주님은 거기 구멍 낸다. 말씀 지켰기에 우리 가족 화목. 아픈 사람 없고... 아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 빠진 자리엔 곧바로 질병 저주 자식 아비 반목 형제가 형제 죽이는 사태.
말씀 제목 안식의 활동. 이미 모든 계명 지켜 안식 들어가신 그 분이 우리에게 안식 주신다. 그분이 어떻게 마련하신 안식? 하나님 아버지 앞에 버림받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련한 그 안식을 우리에게 공급하실 때. 그로 말미암아 우리 팔이 마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인다. 두 다리가 움직여 교회 출석. 두 눈으로 하늘 감상.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대신해 받으신 그 모든 저주, 심판 형벌 아픔 다 짊어지고 가셨기에 오늘 우리에게 잠깐의 행복, 건강한 몸으로 느끼는 활력들 그 모든 것이 있다. 그것을 알 때마다 그 안식 준비 위해 희생당하신 예수 노고 칭송.
나 잘나서 누리는 안식 아니라 주님 희생으로 주신 안목임을 늘 새롭게 볼 때마다 주를 향한 온전한 경배 예배.
성경 말씀 몇 개 지켰다고 자부심 품는 알량함 구멍내시고 실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행복이 십자가 죽으신 예수 희생 때문임을 알게 하시는 성령 인도하심 충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