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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지수 제로 만들기
(창 30:25-43)
오늘 창세기 30장 25절에서 43절까지 '은혜지수 제로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은혜지수 제로 만들기!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안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내 스스로 그 은혜를 느끼는 내 마음의 감도를 제로로 만들어 버립니다.
참 특이한 재주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아담 이후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의 범죄에 가장 두드러진 특색 중 하나일 수가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곧 기쁨으로 연결이 됩니다. 은혜가 느껴지면 기쁨이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기쁨이 안 나타나는 이유는 은혜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성취를 통해서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해서 느껴지는 그런 성취의 기쁨과, 하나님이 은혜로 주셔서 느껴지는 기쁨은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오늘 야곱의 이야기는 은혜지수를 제로로 만드는 험악한 인생살이, 다시 말해서 야곱이 자기의 130년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한 마디로 규정했던 그 단어 험악한 인생이라고 하는 그 말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 것인가, 험악한 인생의 구체적인 내용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외삼촌 라반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또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자기가 라반을 위해서 일하는 것에 대한 그 대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고, 그래서 양과 염소를 양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요.
그러니까 양 중에서 사실은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이 나올 확률이 많지 않습니다. 염소 중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염소는 까만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들이 나오기가 쉽지가 않지요.
그러므로 라반이 일한 대가를 그런 것들로 달라는 야곱의 말을 쉽게 동의를 합니다. 해봐야 몇 마리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결국은 어마어마한 부를 야곱이 쥐게 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양과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들을 내 것으로 삼기로 했어요. 그런데 양들과 염소들이 물을 먹으러 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심풍나무 가지를 벗겨서 뒤집어보면 속은 하얗고 겉은 가지가 거무죽죽하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교차해서 만들어 놓으면 얼룩무늬 모양의 무엇인가를 대상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물 먹으러 온 양들과 염소들 앞에서 또 교미하고 있는 양들과 염소들 앞에서 그 얼룩진 모양의 나무무늬 모양의 무엇을 갖다 댑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면서 교미하면서 얼룩진 것과 아롱진 것들이 태어나게 된다고 이렇게 지금 야곱은 생각을 하고 일을 꾸민 것입니다.
왜 야곱의 삶은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의 삶처럼 그렇게 좀 정직하고, 순탄하고, 편안하지를 못한지 몰라요. 왜 이런 짓을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약속을 했으면 그대로 태어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또 아주 튼튼하고 실한 양들이 오면 얼룩진 무늬를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라반 삼촌의 양을 치는 사람의 태도로서, 그 주인의 양을 치는 사람의 태도로서 이러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실지로 이 얼룩무늬 모양을 보이는 것은 그 당시 목자들 간에 통용되고 있던 미신이었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반드시 되는 것도 아니었고, 또 그걸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실한 양이 올 때마다 그것을 그렇게 보이는 태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뻐서 아롱진 양들이 태어나게 했겠습니까?
내일 우리가 읽은 텐데 31장을 보면 라반의 집을 떠나려고 아내들에게 자기의 결심을 얘기할 때에 아롱진 것과 점박이 있는 양들과 염소들을 하나님이 내게 주실 것을 꿈으로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이에요.
하나님이 분명히 아롱진 것과 점박이의 양과 염소를 주기로 꿈에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수를 쓰지 않아도 내 것이 되는 것들이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아롱진 것과 점박이 것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고, 실한 양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거기다가 속임수와 정말 주인이 볼 때 노발대발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에요.
라반이 야곱에게 부당하게 했어도 내가 그 부당함을 부당함으로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라반을 심판하셔서 라반의 것들의 실한 양들을 아롱지게 태어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 것이지마는, 나에게 악을 행했다고 악으로 갚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야곱은 꼭 이런 식으로 해나가는지 모르겠어요.
따지고 보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장자권 문제만 해도 분명히 리브가 어머니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언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나중에 태어난 야곱이 영적인 의미에서 장자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리브가 어머니에게 그 말을 들었을 것이에요. 들었으니까 장자권을 더 탐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팥죽으로 사지 않아도, 아버지를 속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무려면 야곱을 영적인 장자로 만들려고 결정하신 사실을 아버지를 어머니와 야곱이 작당을 하고 속이지 않았으면 이루지 않으셨을까요?
이렇게 속임수로 하나님의 역사를 도와야 하나님이 장자권을 야곱에게 주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말이 되는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삭 보세요. 아비멜렉의 사람들이 우물 판 것을 와서 방해를 놓고 시비를 겁니다. 피해요. 또 다른 우물을 파요. 또 시비를 걸어요. 또 다른 우물을 파요. 싸우질 않아요.
롯과 땅을 갈라야 될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가지라고 합니다.
야곱과 같은 태도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장자권의 축복을 세상에서 주겠다고 땅을 주겠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 자손을 주겠다 얘기하는 데도 늘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영광의 하나님, 즉 자기 마음 속에 조명을 받아서 보이고 있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온 정신이 다 팔려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야곱의 행위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고 있습니다마는 왜 이렇게 속임수가 끊임없이 작동이 되어야 하는 인생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에요.
제일 무서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롱진 양과 점박이 양과 염소를 주시겠다고 꿈으로 보여줬는데 그것을 자기가 아롱지게 한다고 하는 의미로 그 나무 무늬를 얼룩지게 만들어서 교미할 때 그것을 보여요. 그럼 교미하는 양들이 그걸 보고 교미하면 얼룩진 것이 태어나요.
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그 모든 주시는 것들에 대해서 ‘자기의 행위’로 대가를 지불해버리고 맙니까?
이게 은혜지수 제로로 만드는 것이에요.
은혜지수를 제로로 만든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
자, 은혜를 하나님이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주셨다는 객관적인 사실과 그 은혜를 느끼는 나의 은혜지수 감도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좋은 음식을 주셨습니다. 복입니다. 은혜입니다.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입맛은 또 다른 것입니다. 입맛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셔도 그게 행복한 이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침대가 있습니다. 너무너무 비싸고 아름답고 좋은 침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불면증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침대는 은혜고 복입니다마는 그 침대로 인해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은혜를 주셨습니다. 안주셔서가 아닙니다. 지금 내 마음이 기쁘지 않고 행복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가 그저 그렇고 부담만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은혜를 안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분명히 내 영적인 입맛이 없는 것이고, 영적인 단잠을 잘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에요. 은혜를 느끼는 감도가 제로상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그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고 다 제로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떻게 제로로 만들까요?
오늘 야곱처럼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내가 값을 지불해버립니다. 장자권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팥죽으로 사고 속임수로 삽니다. 아내를 주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받습니까? 속임수로, 즉 자기가 속아서 레아를 받게 되고 또 14년 노동의 대가로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아내 라헬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14년 노동한 세경으로 받은 것이에요. 그러므로 은혜를 다 까 뭉게버립니다.
하나님이 아롱진 양들과 점박이 양들을 줌을 통해서 왜? 라반이 욕심쟁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욕심쟁이 안에서 살고 있는 야곱에게 물질의 축복과 은혜를 주시려고 아롱진 양과 점박이 양을 주시겠다고 결정을 합니다.
라반이 들을 때 목자를 한 경험상 아롱진 양과 점박이 양이 태어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러므로 흔쾌히 승낙을 합니다. 그러면 기다리면 되고 자기는 주인의 양과 염소를 치는 종으로서 아주 정직하게 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얼룩진 양과 점박이 양을 다 주십니다. 그것도 튼튼한 양으로 주실 것입니다. 라반의 욕심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인 야복의 몫을 챙겨주실 겁니다.
그런데 자기기 실한 양을 판단해서 실한 양이 올 때 얼룩무늬를 만들어서 아롱진 양이 태어나게 한다는 행위를 거기다 덧붙여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아롱진 양과 점박이 양들은 야곱의 행위의 대가가 되어 버립니다. 야곱의 행위의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 다 값을 지불해버린 것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월급받는 사람치고 은혜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왜? 자기의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 전에 현대자동차에서 또 노조들이 파업을 하고 난리를 쳤습니다. 참으로 이럴 수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현대라고 하는 현대자동차 회사가 제가 개인적으로 영적 차원으로 볼 때 근심스러운 것은, 공산당의 영성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감사가 없다는 것이에요.
감사가 없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으면 근로에 있어서 근로에 임하는 자들이 기쁨이 없다는 것은 그 회사의 장래가 상당히 어둡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지금 세계의 유수한 기업들이 망해가고 있는 게 한두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소니도 지금 저물어 가고 있어요. 소니가 저물어 갈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그리고 RCA같은 텔레비전, 내가 어렸을 때 RCA같은 텔레비전 갖고 있으면 그거는 지상에서 최고의 부자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물건이었습니다. RCA가 지금 망해가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가 언제까지 그렇게 될 수 있겠어요? 그 직원들의 마음에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어요. 지금 다른 나라의 자동차 근로자들에 비해서 못 받는 게 아닙니다. 이유도 안 되는 걸 가지고 그렇게 노동쟁의를 하고 틈만 있으면 파업을 하는 거예요. 파업이 정말 밥이야 밥.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자!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이 삶을 살아갈 때 은혜를 제로로 만드는 아주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월급을 받을 때 어떻게 받느냐? 적다 많다 불평은 물론이려니와 내가 노동을 한 대가로 응당히 받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삶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사느냐?
노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은혜라는 것이에요. 그게 이미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았잖아요. 건강도 받았어요.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집사님이 호스피스 봉사를 하시는데 토요일날 호스피스 봉사를 가면 참 많은 걸 깨닫게 된다고 그래요. 호스피스라는 게 죽음이 정해진 사람들이 아직 죽지 않고 있는 마지막 인생의 구간을 살아가는데 너무너무 힘들게 살지 않습니까? 그걸 돕는 일을 하시는 것인데,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식도암에 걸려서 음식을 못 먹어요. 그러니까 죽과 함께 섞은 음식물을 고무호스을 통해서 배속에 집어넣습니다. 그것을 보며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음식을 씹어서 삼키는 것이 그렇게 은혜인 줄 몰랐다는 것이에요.
내가 건강한 몸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 있고 돌아다니며 발로 뛸 수 있다고 하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면 이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이 또 월급이라는 돈을 주십니다. 그것도 은혜에요.
그런데 이 은혜, 내 노동할 수 있는 건강의 은혜를 가지고 이 은혜를 사버립니다. 그러므로 두 개가 다 은혜인데 이 은혜로 이 은혜를 사버리니까 마땅한 것이 되어버리고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면서 은혜를 느끼는 마음의 감도가 제로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내가 노동할 수 있는 자체가 은혜야. 돈을 얼마를 주든지 간에 사장님에 의해서 돈을 주시는 게 하나님이 사장을 통해서 준다고 믿고 은혜라고 생각하면 노동할 수 있고 근로할 수 있는 것도 은혜이고, 월급을 받는 것도 은혜야. 그러니까 은혜가 두 개가 돼. 그런데 이 은혜로 이 은혜를 쳐버려요. 이 은혜로 이 은혜를 사버려요. 그러니까 제로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여기에 은혜가 없어요.
내가 열심히 노력을 했으니까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좋은 대학 들어갔어. 또 은혜를 은혜로 쳐버리는 거에요.
내가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할 수 있었던 자체가 은혜에요. 그리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따로 또 은혜라구요.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라니까요.
공부를 안 하고 있는 자녀를 둔 친구가 와서 나한테 의논을 해요. 아이가 이렇게 공부를 안 해서 참 걱정이고. 그런데 본인은 서울대학을 들어갔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저랑 같이 동창이었으니까 그 친구한테 "이보게. 자네 열심히 공부하고 서울대학에 들어갔어. 대단한거야. 대한민국에서 서울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이. 그런데 니가 공부할 때에 정말 공부하기가 죽어도 싫은데 그런데도 너를 부인하고 그렇게 공부했냐? 솔직히 말해봐. 야, 공부가 되니까 공부를 한거야. 다른 얘들 공부하기 싫어서 안 하냐? 안 되는거야. 그냥 앉기면 똥끝이 타고 20분만 앉아 있어도 못 견디고 그거 안 되니까 안 되는 거야. 넌 되니까 한 거지. 니가 정말 절간에 계신 스님들이 도를 닦듯이 너를 부인하고 극기하면서 공부했냐? 내가 빤히 알고 있는데..."
그랬더니 가만히 생각하더니 "맞아. 되니까 했어."
그게 은혜에요. 은혜....
나는 은혜로 공부한 걸 자식한테는 왜 강요합니까? 이거 안 되는 것이에요.
내가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 들어간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은혜고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도 은혜고 은혜가 두 개, 「은혜 위에 은혜!」
내가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라고 하면 다 대가로 치러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 잘 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 들어간 것이지 하나님이 이 대학을 들어가게 하신 것도 아닌 것으로 돼 버린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삶의 태도에요.
오늘도 무엇인가를 벌고, 무엇인가를 이루고,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듣습니다.
"대가를 지불하라. 대가를 지불하라. 비전을 봤으면 대가를 지불하라. 대가를 지불하라."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은혜지수 제로로 만드는 것이에요.
더운 여름에 시원한 냉면을 마시면 시원해집니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에요. 은혜를 느끼게 되면 그러면 내 마음이 행복해지고 기뻐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출발합니까?
지금 내가 아침에 눈을 뜬 이 현실부터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차가 있습니다. 좋은 차건, 나쁜 차건 그것이 주어진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가 돈 주고 산 게 아니에요. 돈은 돈 대로 은혜이고, 차는 차대로 은혜인 것이지 내가 돈주고 사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법칙은 돈 주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모든 게 다 은혜입니다.
은혜로 다른 은혜를 사서 제로 만들지 말고, 대가를 지불해서 은혜지수 제로 만들지 말고 모든 것 지금 상태 자체를 은혜로 출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셨다. 일할 수 있는 시간과 일할 수 있는 힘과 일할 수 있는 건강 이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얘기합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복 주시나? 아닙니다. 복에 대한 대가를 기도로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수 있는 게 은혜 아닙니까? 30분 기도할 수 있는 게 은혜이고, 1시간 기도할 수 있는 게 더 큰 은혜이고, 그 자체가 은혜인데 그 은혜를 누리다 보니까 하나님이 또 복을 주셔서 「은혜 위에 은혜」가 되는 것이지요.
내가 봉사합니까? 그거가 은혜이지요.
내가 헌금합니까? 헌금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게 은혜이지 어떻게 내가 헌금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많은 돈을 주십니까?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헌금 안 하면 교회가 이루어지지 않고 진행되지 않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헌금을 안 하시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메울 것이고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영광스러운 헌금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뺏길 뿐이지요. 여러분이 헌금했기 때문에 이런 것 아니라는 겁니다.
기도합니까? 다른 사람을 통해 기도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지 마세요. 그렇게 대가를 지불돼야 되는 뭐 대단한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하지 마세요.
다 은혜입니다. 은혜로 은혜를 지불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 다 그냥 받으면 됩니다.
은혜의 마음이 있을 때 또 다른 은혜가 느껴지고 또 다른 은혜가 주어지고 「은혜 위에 은혜」로서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지수 제로 만들기. 어떤 것입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주실 것이다.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꼭 명심하셔서 오늘 하루종일 은혜가 기쁨으로 통하는 것을 기억하시고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하루가 되게, 여러분 한번 따라 해보실래요.
"내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홈채플 하는 게 은혜다! 내 자식이 은혜고, 내 남편이 과분한 은혜고, 내 아내가 은혜다! 내 경제형편, 자동차 은혜다! 은혜다! 은혜다!!"
이렇게 생각하고 출발하십시다.(070130)
✝기도
하나님!
그저 가만히 있어도 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은혜와 복을 쟁취하기 위해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복을 은혜로 감사하며 노래하면서 그 은혜 위에 더 붙여지는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근로합니까? 노동합니까? 은혜입니다. 월급 받습니까? 또 다른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사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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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은혜인데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짜증과 불평이 수시로 터져 나오네요..주님,용서하여 주시고 은혜 위에 은혜인 삶을 누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