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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내의 숨소리조차 싫을 때>의 줄거리:
한 여자로 만족하라! 이 말은 윤리적인 보편 타당성을 띤 말이지만 온전히 신앙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물론 두여자 세여자로 만족하라는 것은 더 더욱 틀린말입니다. 본문에 결혼과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펼쳐집니다. 시대적 배경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너무나 판이했던 그 당시에 하신 말씀 속에, 과연 결혼에 대한 영원히 타당한 진리는 어떤 모습으로 숨어 있을까요?
아내의 숨소리조차 싫을 때
(마19:1-12)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아내의 숨소리조차 싫을 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대화를 하는 장면입니다.
‘나는 당신의 숨소리조차 싫다’, 이게 남편이 얌전하게 생긴 아내에게 하는 말입니다.
아내가 묵묵히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입을 열어서 드디어 말을 합니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나의 이러이러한 습관이 싫다든지, 화장을 하지 않고 있는 게 싫다든지, 하여간 나에 대해서 싫다고 하는 모든 것은 다 고치기 위해서 노력할 수는 있어, 그런데 내 숨소리가 싫다고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당신 마음에 들 수 있게 고쳐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야, 여보, 이혼해 줄게!’
단편 드라마 중 하나로 제목도 모르고 전후 내용도 기억이 어슴푸레 합니다만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어요.
‘나는 이제 네 숨소리조차 지긋지긋해!’
‘여보, 내가 다른 모든 것은 당신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노력해볼 수 있지만 숨소리는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혼을 해 줄게요.’
조용하게 이루어진 대화이지만 충격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충격적입니까?
사람이 싫어지면 그것이 백년해로를 약속한 부부 사이일지라도 모든 게 다 싫은 거예요.
공감이 가는 얘깁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할 때 발뒤꿈치 모양이 달걀모양처럼 예쁘게 생겼어도 미워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그 사람이 좋게 여겨지면, 정말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모든 행동이 다 귀엽게 보이고 이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우리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혹시 아내의 숨소리가 싫어지십니까?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들어요?
또 거꾸로, 남편이 하는 행동거지 모습 모든 게 다 마음에 안 들어요?
말 한 마디도 듣기 싫고, 코골며 자는 모습도 콱 한 대 쥐어박고 싶습니까?
그러면 이거 어떡하지요?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나와서 시비를 겁니다, 이혼문제에 대해서.
그 당시 이혼이라고 하는 것은 아내가 남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증서를 써줘서 보내면 되었어요.
그런데 바리새인 중의 일부는 주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를 버리지 않는다’라고 하는 이 말씀을 아주 엄격하게 지키는 샴마이 파가 있었고, 또 힐렐 파는 그 당시의 풍습대로 ‘마음에 안 들면 이혼증서를 써서 주고 내 보내라’, 바리새파 안에 이렇게 두 가지 흐름이 있었는데, 예수께 와서 시비를 걸며 물어봅니다.
샴마이 파처럼 엄격하게 말씀하시면 ‘그런데 왜 당신은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의 친구처럼 살고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려고 그러는 것이고, 힐렐 파처럼 좀 자유롭게 말씀하시면 ‘당신은 분방한 자유주의자이다’고 책을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때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
결혼식 할 때마다 주례 서시는 목사님들께서 하시는 말씀 아닙니까?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기 때문이다, 음행한 연고 외에는 절대 아내를 버릴 수 없다’ 이 말을 듣고 나타난 제자들의 반응이 너무너무 낯섭니다.
제자들이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럴 바에는 사람이 장가가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에요?
혹시 아내가 음행을 했건 안 했건, 음행한 것으로 이혼사유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보편타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음행한 연고 이외에는 버릴 수 없다고 한다면 장가를 안 가는 게 낫겠습니다’라고까지 하는 겁니까? 아, 이 사람들 웃기지 않습니까?
그 당시의 배경이 말씀드린 대로 무엇이든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증서를 써주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그러면 왜 모세는 음행을 안 했을 때조차도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릴 수 있도록 허락을 했느냐?’ 하니까, 주님의 말씀이 ‘너희가 완악하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완악하기 때문에 이혼증서를 써서 보내는 이혼을 허락했다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어제 뉴스에 서울 가정법원의 판결이 소개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술에 취해 있고, 외도도 하고 이러면서 육아도 게을리 하고 가사를 게을리 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마땅히 이혼소송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거꾸로 아내가 이혼소송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이혼신청 기각을 주장합니다, ‘저 여자는 이러이러한 여자이니까 이혼을 신청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랬는데 그 여자의 이혼신청을 인정했고 위자료 오천 만원, 재산 분할 3억 6천만 원,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 70만원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결혼해서부터 남편이 10년 동안을 폭행한 거였어요.
어느 정도로 두들겨 팼느냐 하면, 가위를 가지고 휘두르다가 아내의 손가락 끝이 잘려나가고, 임신한 아내를 때려서 어깨가 탈골이 되고, 커텐 봉을 뽑아서 아내의 배를 찌르고, 이 정도로 폭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술을 마시고 우울증에 빠져 육아를 게을리 하게 되고, 심지어는 외도까지 하게 되었는데, 재판관은 ‘비록 여자가 그랬을지라도 이 가혹한 폭력행위에 의해서 이혼사유가 성립한다’고 판결을 내린 거예요.
모세가 완악하기 때문에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했다는 말, 이제 이해가 갈까요?
좋아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들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의 여자는 소유 개념이었고 숫자를 셀 때, 그 수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독자적인 독립된 삶을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게 되면, 이 남자가 자기 아내를 때린 것처럼 그 삶이 형성될 수도 없을 만큼의 가혹행위를 해도 누구도 간섭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혼도 못하게 정해놓아서 그렇게 두드려 패고 사람답지 못하게 대우하는 것보다는 이혼증서를 써서 내주면 다른 남자에게는 예쁘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모세는 그 당시 풍습을 고려하면서 여자를 위해서 이혼증서를 써줄 것을 얘기한 겁니다.
지금으로 보면 너무도 말이 안 되지만…
자, 이렇게 볼 때, 제자들은 끔찍한 거예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닌데 음행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참고 여자를 데리고 살아야 된다는 게 질식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발끈하며 볼멘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 그럴 바에는 장가가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아, 참 대단한 사회였죠?
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신 말씀 속에 들어있는 참 의도, 그리고 이 말씀과 남자의 완악함의 문제, 이게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될까요?
여러분, 결혼은 제삼자 관계 안에서만 온전하게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삼각관계가 아니라 제삼자 관계.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을 때, 아담이 하와를 처음 봅니다.
이때 하와를 보고 기뻐합니다.
혹시 우리가 착각할 수가 있어요, 이 장면을 보고.
하와가 예쁘고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아담이 하와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며 사랑의 감정이 싹텄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이게 오해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받아들인 이유가 하나님께서 하와를 자기에게 데려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와가 다행히 예뻤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음에 안 들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 때문에 받아들이는 겁니다.
요즘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결혼할 때조차도 매력적인 여자를 찾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습니다.
내 가슴이 첫눈에 반해서 쿵쾅쿵쾅 뛰는 여자를 찾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이게 오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고 하나님이 좋고 그래서 어느 정도로 하나님이 좋은가 하면, 어떤 여자를 짝으로 데려다 주시든지 간에 하나님이 좋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행동이 다 좋아서 그 여자와 사는 것, 이게 바로 결혼이었다는 겁니다.
그 여자가 내 마음에 들어서 그래서 결혼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하나님이 좋고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러우신 분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미운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데려오신 여자라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결혼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는 거예요, 내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따져 결혼상대자를 골라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도록 사랑하고 결혼했는데 1년 만에 이혼하게 되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결혼의 이유로 삼으니까.
내 마음이 뭡니까?
아침에 다르고 저녁때 달라요, 조석변개예요, 조석변개.
그렇게 변덕스러운 마음에 들었다고 ‘백년을 같이 살자,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래’
여러분, 그냥 소설 속에 있는 이야기예요.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가 만들어 낸 창작물입니다.
얼마나 그런 사랑이 세상에 없으면 그걸 소설로 썼겠습니까?
소설로, 영화로라도 대리만족을 느끼라고…
어떻게 영원히 마음에 듭니까?
그리고 내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를 가지고 어떻게 결혼생활의 토대로 삼습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완악함’이 뭡니까?
하나님 말고 아내에게서 만족을 찾으려는 마음이 완악함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완악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완악한 게 뻣뻣한 것, 굳은 걸 말해요.
하나님 말고 고기로 만족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말고 푸른 초장으로 만족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는 게 완악함인데, 그 연약한 여자 하나 데려다 놓고 그 여자에게서 만족을 찾으려 하니까… 무슨 수로 그 여자가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남자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줄 수 있겠느냐는 거예요?
그러니 이혼증서가 남발할 수밖에 없고, 모세도 허락할 수밖에 없지요, 그 마음의 완악함을 보고.
안 그러면 여자를 데리고 앉아가지고 날마다 두들겨 패고 못살게 굴 테니까, 차라리 나가서 일시적이라도 다른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느라고 모세가 이혼증서를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모세가 가냘프게 숨통을 열어놓은 이혼증서까지 막아버리시는 겁니까?
‘이제 진짜 너희가 숨통을 열고 숨을 쉴 수 있는 길을 열어줄게, 왜 한 여자로 만족하려고 그러느냐?’
그러면 두 여자, 세 여자로 만족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으로 만족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지금 가정법원의 판사의 의견도 아니고 치유사역을 하는 목사님의 의견도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입장표명에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인 것이에요.
‘왜 여자를 데려다 놓고, 그 여자로 만족하려고 하느냐, 이 완악한 놈들아!’ ‘여자가 무슨 수로 너희 마음을 만족시켜줄 수가 있다는 말이냐?’
‘그러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주님!’ 제자들이 펄쩍 뛰는 겁니다.
‘그러면 어쩝니까? 마음에 안 드는데, 한번 미워지기 시작하면 숨소리까지도 미운데 어떡하라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 19장 앞과 뒤 모두 다 천국에 관한 말씀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곧바로 어린 아이에 관한 말씀에 또 천국 얘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부자 청년 얘기가 나오고 또 천국 얘기가 나와요.
앞에도 천국 얘기였어요.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결혼이 유지되려면 제삼자 관계가 유지되어야 되는데 제삼자 관계라는 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천국을 가져온다, 그리고 너희가 성령님의 감각작용을 통하여 그 천국을 느낄 수 있고 아버지를 실감할 수 있어서, 아담이 죄짓기 이전에 하나님아버지를 대할 때처럼 하나님아버지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아버지로 만족한 상태로 아내를 맞이할 때, 그 결혼관계는 온전히 유지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한 여자로 만족하라’ 굉장히 타당한 얘기 같습니다.
‘두 여자, 세 여자로 만족하라’ 있을 수도 없는 얘깁니다.
그러나 한 여자로 만족하라는 말도 신앙의 말은 아니라는 거예요.
아예 여자로 만족하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님 말씀은 ‘하나님으로 만족하라’, 그리고 고자 얘기가 나와요.
이게 무슨 얘깁니까?
결혼생활 없이 살아야 될 운명에 처해진 자들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자가 내 마음의 만족에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결혼관계를 주님이 무시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사는 삶을 허락받은 자들은 살아라’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나 혼자 사는 자들은 무슨 죕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보실 때는 불공평하지 않다는 것이에요, 왜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사람 마음의 만족은 여자가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으니까.
사람 마음의 만족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만 돼야 되는 것이니까, 천국으로만 되어야 되는 거니까…
날 때부터 고자로 태어나도 그가 불리하거나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아내에게 뭘 기대하십니까? 남편에게 뭘 기대하십니까?
요즘 세상이 바뀌어서 옛날의 남자 입장이 지금 여자의 입장인 것처럼 살고 있는 가정이 많아요, 여자가 더 드센 집이 많아요.
이러나저러나 남자 여자 똑같이 물을 수 있는 거예요.
뭘 바래요? 배우자에게.
그를 통해 내 마음에 만족을 채우려 하는 것은 완악함의 표현입니다.
우리 마음은 만들어지기를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먼저 만족한 자가 하와 같은 배우자를 얻고 아담 같은 배우자를 얻게 되어 있는 것이죠.
완악해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기를 거부하고 아내와 남편으로 만족하려 할 때에 그 부부관계는 이혼 안 해도 이미 부부관계가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노략질하는 맹수들의 약육강식의 관계 이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내와 남편은 하나님으로 만족한 상태에서만 진정으로 아내로 보이고 남편으로 보일 수 있을 뿐입니다.
숨소리조차 듣기 싫을 때,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 내 마음을 채우세요.
그리고 아내를 보면 아내의 숨소리조차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하나님, 우리의 완악함이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완악함이 가장 감사해야 될 선물인 아내를 가장 큰 저주로 느끼며, 가장 귀한 선물인 남편을 가장 큰 재앙으로 느끼게끔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완악함이 깨어져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