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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불평보다 더 좋은 이유(2110.2021.11.21.추수감사절)
합3:16-19
할렐루야!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로 지키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정말 힘든 여정을 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신앙을 잘 지키고 삶에 터젼에서 힘들게 코로나와 싸우며 이겨내는 것을 보고 올 한해를 돌이켜 보면 정말로 모든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우리 상주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올 한해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모자람 없이 채워주셨고 그 은혜로 인하여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이제 한해의 결실을 놓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인 오늘 저희들의 깨끗하고, 순결하며, 진심이 들어있는 감사예배와 감사예물을 주님께서 받아주시며, 주님의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저와 여러분은 참 힘든 여정속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와서 오늘 선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배후에 찹쌀 팥 시루떡은 한 사람이 하나씩 받아가시고 사과 한상자씩은 한가정당 하나씩 받아가셔서 잘 드시고 건강하시고 힘내시기를 축복합니다.
감사가 불평보다 더 좋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이 살면서 감사할 일도 많지만 감사하지 못할 일도 있습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당부하고 있지만 살다보면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빠르고 원망의 속도가 더 빠를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그늘 아래서 내 자신을 죽이며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현실이 우리를 불평으로 속이며, 상황이 우리를 원망스럽게 만들고, 모든 인간들도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보면 이리봐도 은혜요, 저리봐도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현실만 바라보면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쉽게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가운데 감사의 속도가 빠른지 아니면 불평의 속도가 빠른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의 성숙한 감사를 통해 성도의 바람직한 감사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은혜받기 원합니다. 감사가 불평보다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감사가 불평보다 좋은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성도에게 만족하십니다. 기뻐하시고 좋아하십니다. 불평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못할 뿐더러 하나님의 마음을 무척이나 섭섭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할지라도 대부분 조건적인 감사에 치우치고 맙니다. 조건적인 감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소아적인 수준입니다.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때문에 성도가 조건적인 감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며, 믿음이 없음을 고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믿음의 건강상태는 전적으로 감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감사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한마디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감사하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상주감리교회의 감사 권사님이 계시는데 박권사님이라고 이름을 못밝힙니다. ㅎㅎㅎ 이분은 언제나 어디서나 감사합니다가 입에 달고 삽니다. 여러분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조건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있는데 이유는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불평보다 좋은 이유는 명백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고 영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대항행위와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절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합니다. 오직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님도 매사에 감사하는 자식을 더 사랑하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원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는 별로 감사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처지가 감사할만한 상황은 아닐지라도 결코 그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무엇하나 보더라도 감사할만한 조건도 없고 상황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불평의 그림자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없는 것 때문에 감사하는 역설적인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박국의 감사를 존경하고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좋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 하나님은 더 잘 아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마찬가지구요. 바울은 옥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하라고 주문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리하니 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서도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라며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감사신앙 때문입니다. 감사신앙을 갖지 못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감사신앙을 가지면 우리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감사가 불평보다 더 좋은 이유중에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중에서 감사하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배가 될 것입니다.
내 영혼이 큰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감사하면 영혼의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으로 채워집니다. 그러나 불평을 한 다음에 내 영혼의 곤고한 상태를 점검해 보십시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평을 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부끄러움, 죄송함, 곤고함, 피곤함과 죄책감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혹시 감사하지 않으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으십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불평하면서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 본적이 없습니다. 감사는 내 영혼을 소생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불평은 내 영혼을 좀 먹는 더러운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불평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쏟아지는 재와 같습니다.
불평은 부메랑과 같습니다. 감사도 부메랑과 같지만 불평도 부메랑과 같습니다. 감사하면 감사의 조건들이 쌓여 가는데 반해서 불평하면 불평의 재난도 자기위에 계속해서 쌓여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우리가 노골적인 불평은 안할지 몰라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불평입니다. 사실 드러난 불평도 더럽지만 은근히 드러내지 아니하는 불평이 더욱 무섭고 더럽습니다. 한번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은근한 불평들을 보십시오.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의는 바로 감사입니다. 이처럼 얼마든지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 감사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영혼에 대해 기쁨과 즐거움을 얻기 원하신다면 반드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금년에 우리의 수중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감사하십시다. 얻은 것도 없고 잡은 것도 없으며 이룬 것도 없을지라도 감사하십시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불평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불평해서 상황이 나아지고 상태가 호전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불평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혹시라도 뒤에서 욕하고 비웃고 시기 질투 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두십시오. 이유는 그들은 항상 여러분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상황이 부정적일지라도 감사하는 자에게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식이 바뀝니다. 마음이 바뀝니다. 행동이 바뀝니다. 그리고 상황도 전환이 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십니다. 감사는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능력이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결국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신앙과 감사하지 않는 신앙의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가 당장에 상황이 호전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감사신앙을 통해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므로 인하여 두려움에서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고민에서 영적인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외적으로 찾아오는 즐거움에서 이제는 내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건강한 믿음의 상태로 호전이 되었습니다. 소아적인 믿음의 상태에서 성숙한 믿음의 상태로 호전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감사가 주는 영적인 혜택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긍정의 방향으로 호전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가 불평보다 좋은 이유인 것입니다.
구약성경 왕상 3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번제가 끝날 때 즈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 소원이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언젠가 저에게도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나타나셔서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솔로몬에게 일어났던 일이 저에게 안 일어나리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2000년도에 상주와서 교회부흥을 위해서 성도들과 함께 일천시간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동참 하신분들은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일천 시간 여러분과 같이 기도하고는 저도 기도했으니 솔로몬에게 처럼 저에게도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이라 생각하고 저녁마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네 소원이 뭐냐’물어 보아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물론 아직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도 해 보기도 합니다. 처음 여기와서 힘든 여정속의 목회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준 것은 천국에 네 면류관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이나 보여준 적이 있다고 여러분에게 설교도 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혹시 하나님이 저에게 나타나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하는 생각을 제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안 타나나시면 할 수 없지만 혹시 나타나셔서 물으신다면 뭔가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지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엉뚱한 대답을 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 아무렇게나 대답하지 않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나셔서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할지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드리면서 그래도 잘 준비하고 감사가 불평보다 더 좋다는 제목으로 설교도 들었으니 오늘밤 꿈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찾아와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 소원입니라고 하겠습니까? 대답을 잘 해야 합니다. 이런 대답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두메산골에 노인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산비탈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산골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필요한 것을 구입하여 살아가는 가난한 부부였습니다. 하루는 이 할아버지가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산신령을 만났습니다. 그 산신령께서 ‘나는 너처럼 착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주는 요술 방망이를 선물을 주려고 하니 받아라.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는데 소원은 딱 두 개만 말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뻐서 지고 갔던 지게와 낫을 다 내버리고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게도 낫도 없이 ‘할멈, 할멈’부르며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를 본 할머니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아니, 지게와 낫은 어디에 내버리고 뛰어오는가? 미친 영감이 아닌가? 나무를 해다 장에 가서 팔아야 보리쌀이이라도 팔아 저녁상을 차릴 것이 아닌가’하고 할아버지에게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화가 난 할머니는 소리만 질러댔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기가 막혔습니다. 자신은 그래도 할머니와 상의하려고 달려왔는데 이 미련한 할멈이 그까짓 지게와 낫을 놓고 왔다고 삿대질을 하며 미친영감이라고 하면서 무슨 말을 들으려고 하질 않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화가 나서 같이 소리를 지르니 할머니도 질세라 더욱 소리를 지릅니다. 참다못한 할아버지가 ‘이놈의 여편네, 저 주둥이 좀 닥치게 입 좀 비뚤어져라’하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정말 할머니의 입이 비뚤어져서 잔소리는 그쳤습니다. 더 이상 소란은 나지 않았지만 문제는 할멈의 입이 비뚤어져서 밥을 먹지도 못하고 침만 질질 흘립니다. 화가 나서 그렇게 했지만 평생 자신만 믿고 고생하던 조강지처가 입이 비뚤어져서 말도 못하고 침만 질질 흘리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니 측은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하나 남은 소원으로 입을 바르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중요한 기회를 한 번은 입이 비뚤어지는데 사용하고 또 한번은 바르게 하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헛되게 버리고 만 것입니다. 위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소중한 두번의 기회를 이렇게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질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에게 요술 방망이가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돈을 달라, 사업을 잘 되게 해 달라, 명예를 달라, 자식을 위해서, 병이 낫게 해 달라 혹시 여러분이 어디에 사용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무슨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면 무슨 소원을 말할 것입니까?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불평의 플러그를 뽑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의 플러그로 바꿔 끼우십시다. 믿음을 감사의 코드로 전환하십시다. 감사의 신앙으로 바꾸기만 하면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보약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안 나올 때 감사를 부르짖으십시오. 말씀이 자꾸만 멀어질 때 감사의 조건을 찾아 묵상하십시오. 찬양이 힘들어질 때 큰 소리로 감사를 외치십시오. 삶이 무기력하고 지쳐 있을 때 감사의 보약을 수시로 드십시오. 그리고 당당하게 선포하십시오. 우리는 감사하다고. 아니 나는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이번 추수감사 주일을 통해 우리들의 감사의 수준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키시고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초점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그림이 흐릿합니다. 요즘은 디지털 사진기가 나와서 별문제가 되지 않지만 과거에는 조리개를 열어서 찍는 사진기였기에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하면 이상하게 나오는 것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초점을 잘 맞추고 분명해지면 감사가 넘칩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흐릿하여 감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야 감사하게 됩니다. 모든 삶의 초점이 하나님께로 맞춰지면 인생의 그림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맞춰진 초점만이 두드러지고 다른 것들은 그 두드러진 것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만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의 말씀은 실로 엉뚱한 감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감사할 조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황 속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천연덕스럽게 감사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받았으니까 감사하는 성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성도들입니다. 둘째는 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받을 것을 믿고서 미리 감사하는 성도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믿음이 성숙한, 그러니까 이들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감사하는 성도들입니다. 셋째는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고, 받은 것이 많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성도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소위 영적 불감증에 걸린 성도들입니다.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우리 모두가 하박국 선지자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이기를 축원합니다.
1.기도 응답이 더딜지라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합2:3절에‘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여기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는 말씀’, 기억하십시다. 기다림은 믿음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물론 기다리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내심이 부족한 성도가 있습니까? 하박국을 통해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합1:2절‘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합1:13절‘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그러나 하박국은 어찌 했습니까? 기도 응답이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렸습니다.
시편 기자들을 보십시오. 시28:1, 35:22, 39:12을 보면은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합2:3절‘정한 때가 있나니’여기 정한 때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다리는, 또 기다리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전3:1절‘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정한 때에, 하나님의 정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항상 모든 일이 나의 때에, 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괴롭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고 답답하지만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의 경우 어찌했습니까? 기도의 응답이 너무 더디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쉴 수는 없습니다. 기도를 쉬는 일은 죄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박국이 순종했습니다. 합2:20절‘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 이 성전에 계십니다. 그리고 ‘어리석고 오만하고 불손한 죄인들아,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말씀하십니다.
매튜 헨리의 말입니다. ‘하박국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은 믿음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손도 발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입에 붓을 물고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악보도 그렸습니다. 그는 ‘입을 남겨 주신 하나님의 은혜, 이것 때문에 나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박국이 또 어찌했습니까? 그는 간증했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했습니다. 누가 홍해를 가르고, 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누가 사자 굴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까?
엘리야를 보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리고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받아 선교의 기원을 이룩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을 보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중세기를 동트게 한 그 시대의 횃불이 되지 않았습니까? 영국의 청교도들을 보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 20세기 요셉의 창고를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모두 이적을 만든 사람들이요, 역사의 행복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환경과 형편이 형통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도했고, 비록 더딜지라도 감사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확실히 기도는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 내리는 통로입니다. 누가 이것을 부인하리요, 우리의 체험이요, 우리의 간증이 아닙니까?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힘이 되십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돈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돈을 의지할 때는 돈이 줄 수 있는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의지할 때는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얻습니다.
2.창자가 흔들릴 정도로 환난이 기다린다고 해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합3:16절‘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하박국 당시의 국제 정세가 어떠했습니까? 강대국 앗수르 제국이 멸망하고, 애굽 역시 그 국운이 기울어지면서 신흥국가인 바벨론이 강력한 세력으로 국제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그 바벨론이 유대나라를 노리고 전쟁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앓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지금도 내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고 했습니다.
나라꼴이 어찌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사람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고 나팔을 백번 불어제쳐도 별로 관심 없습니다. 어쩌면은 우리들의 형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나라를 사랑하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슴을 치기도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하박국처럼 창자가 뒤틀리고 입술이 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처럼 환난이라도 감사하라 외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 150편까지를 살펴보십시오. 수많은 감사의 노래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데 공통점 하나가 있습니다. 감사의 노래 대부분이 환란 속에서 부른 노래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환란인데 감사할 수 있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의 성숙된 믿음입니다. 시50:14-15절‘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무슨 뜻입니까? 환난 날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하면 환난 가운데서라도 하나님께서 건져주시리라는 뜻입니다.
하박국이 가진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가졌습니다. 오직 예수, 예수님을 믿는 믿음 하나 가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것 없습니다. 내 놓을 것 없습니다. 명예도 없습니다. 권세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속량해 주신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때문에 천국 갈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보배입니다. 믿음이 축복입니다. 믿음이 구원입니다. 믿음으로 천국갈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환난이라도 감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화를 잘 들어보세요. 상추는 교만의 유전자가 있습니다. 상추는 자라면 자랄수록 나 잘났다고 자빠집니다. 아무리 자라고 또 자라도 상추는 속이 들지 않습니다. ‘나는 나, 너는 너’입니다. 모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먼저 난 잎이 먼저 자빠지고 나중 난 잎은 뒤 따라 넘어집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더 빨리 더 쉽게 뒤로 자빠집니다.
여기 강단에 배추가 올라와 있습니다. 학생 일어나서 배추 한포기 들어보세요. 무겁지요. 배추 속을 확 뒤집어 보세요. 속에것을 두집어 보세요. 안되집어지지요 꽉 차있지요. 수고햇어요. 박수해주세요. 짝짝짝. 이 학생이 들은 배추가 속이 꽉 차서 손가락이 안들어갈 정도입니다. 배추는 감사의 유전자가 들어 있습니다. 성장하면 할 수록 이렇게 속이 가득찹니다. 자랄수록 먼저 난 잎이 나중난 잎을 감싸줍니다. 서로 서로 보듬어주고 서로서로 감사합니다. 서로서로 겸손해 합니다. 비가오고 바람이 불면 더 서로서로를 감싸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성도들 중에도 상추같은 성도가 있고 배추같은 성도도 있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심령 속에 배추처럼 감사의 유전자가 풍성하게 자리잡고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께 드릴 많은 것이 없을지라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합3:17절‘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한 번 예수님께서 열 문둥병자를 깨끗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감사하고 나머지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어쩌면 이 시간에도 묻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서 물으십니다.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네 감사가 그 모양이냐’소원하는 것은 크면서 감사하는 마음은 적다는 것입니다. 답이 무엇입니까? ‘없어서요.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없다는 말입니까? 두 가지가 없습니다. 하나는 감사할 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들 등록금이 없습니다. 냉장고 살 돈이 없습니다. 자가용 살 재산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년에 한 번 드리는 추수감사주일에 열 번 물어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 없어서 못 드리는가?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 ♬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물론 예물이 없어서 감사를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을 보십시오. 없으며, 없으며, 없고, 없고, 백 가지가 없고, 외양간의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 없는 것 있습니다. 감사하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비록 없을지라도 감사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내 호주머니에 현찰이 없을 뿐이지, 내 통장 내 증서는 있기 때문입니다. 틀린 말입니까? 그러니까 가진 것이 없어서 감사를 못 하는 것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감사를 못 하는 것입니다. 물질 가난 때문에 감사를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가난 때문에 감사를 못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역경이 축복이 되고, 믿음이 있으면 슬픔도 불행도 행복이 되고 기쁨 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믿음이요, 이 믿음 있으면 감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예수님 안에서는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짜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근심 걱정이 다 물러갑니다.
바울이 감사할 때 모든 것이 풍족해서였습니까? 또 만사가 형통해서 감사하고, 감사하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환난과 곤고를 당했습니다. 몇 번이나 매를 맞았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바다에서 파선을 당하기도 했고 수많은 사람의 핍박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다메섹, 에베소, 고린도, 예루살렘, 가는 곳곳마다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매 맞고 정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만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자족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를 향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생각하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실이, 그래서 이 자리에 앉아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고 있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이 무엇입니까? 온통 비정의 세계가 아닙니까? 인생은 저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강도 만난 자 비슷합니다. 이웃을 찾으나 내 이웃이 없습니다. 병들었을 때에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고, 가진 것이 없으면 친구도 멀어만 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를 노래가 무엇입니까? ♬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 안 버려 안 버려, 이것이 우리의 찬송이 아닙니까? 바울의 간증이 무엇입니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주께서 사심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해 주셨고, 내 죽음은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심으로 예수 생명 내 생명이 되었는데 그 예수님이 지금도 내 속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욥의 경우가 어떠합니까? 자기의 자녀를 한꺼번에 잃어버렸습니다. 재산도 몽땅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것이 절망이요, 또 이런 경우 인생은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욥이 어찌했습니까? 욥1:21절‘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박국이 어찌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했습니다. 구원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했습니다. 살아있음을 감사해보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있는 것을 감사해보십시오. 감사할 일이 생겼을 때 즉시 감사해보십시오. 사소한 일과 작은 일부터 감사해보십시오. 문둥병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감사, 신발 살 돈이 없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감사, 아들이 잡혀갔음에도 불구하고 감사기도, 시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기도, 암으로 투병 중에도 불구하고 감사, 불의의 교통사고로 중화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 손양원목사님의 아들의 영결식장에서 발표한 감사.
우리 신앙 생활은 매일매일 순간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되지만 특별히 한해동안 농사를 잘 짓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잘 살 수 있도록 지켜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날을 택하여 특별한 감사 예배를 드리는 이 추수감사절 예배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감사절 절기는 구약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왔고 또한 정교도들이 미국에 들어와서 농사 짓고 첫번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어서 온 세계에 파급되게 된 것입니다.
역경 중에도 풍파 중에도 무슨 일이 잘 안되어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믿음이 깊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를 가다 보니까 한 사람이 자기가 믿던 우상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서는 그 우상의 볼기짝을 마구 때리더랍니다. 그래서 어째서 당신이 믿는 우상을 때리냐고 했더니 ‘내가 이 우상을 10년 동안 믿었는데도 복을 주기는 커녕 화만 자꾸만 주어서 때립니다’ 하고 말하더랍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식으로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좋은 일에만 감사하지 말고 궂은 일에도 역경 중에도 실패를 했어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살전5:18절‘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아무것도 없으셔도 주님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없을지라도..의 단계에서 감사와 만족을 배우시고 주님을 믿으면서 은혜로 세우시는 축복을 아멘, 아멘, 하면서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말씀에 은혜받고 행하여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모두 감사의 위력을 체험하여 은혜로운간증이 넘쳐나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감사합니다.
은혜로운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