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서울에 사십년 넘게 사는 가시리 사람, 제주어를 사랑하는 정공철이 쓴 맛나는 글을 두번에 나누어 올립니다)
고구마, 우리 시골에서는 감저라 부른다. 조선 영조시대에 조엄이라는 일본 통신사가 대마도에서 종자를 얻어다 재배 풍토에 맞는 제주도에서 시험재배한 것이 고구마 농사의 그 始原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甘藷(감저)또는 조엄의 성을 따서 趙藷(조저)라고도 했던 모양이다. 하여튼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고구마를 감저라 불렀고, 아직도 노인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우리 시골에는 감저가 무지하게 많았다. 때로는 밥으로 먹고 떡으로도 만들고 술도 되고, 소나 말 돼지도 감저로 키웠다.
이른 봄 묘종으로 심겨진 감저는 봄비를 맞고 줄기가 쪼빗쪼빗 고개를 내밀면 사람들은 바빠진다. 겨우내 움막에서 하품하던 황소도 기지개를 켜고 종달새가 하늘 높이 지지 배배 재촉하면 사람들은 들판으로 모인다. 아이도 나서고 할머니도 가야 한다. 아기도 이랑에서 젖을 먹고 송아지도 밭에서 어미젖을 빤다. 웃드르 산간마을에 감저 소리가나면 학교에선 종도 울릴 수 없다. 아버지는 담배 피울겨를 없이 소 끄는 쟁기와 씨름하고, 온 식구가 이랑에다 감저 줄기를 들입다 쑤셔 넣느라 허리 펼 시간이 없다. 아이는 이랑에 감저줄기를 바쁘게 흘리며 하늘의 해를 원망해 보지만 하루 해는 길기만 하다. 시커먼 얼굴 범벅된 손과발 허기진 뱃속이 야단이다. 어둑어둑 사람들은 울담사이를 기어 든다
흐릿한 호얏불이 환하게 나를 반긴다 줄기에 신맛 단맛 다뺏긴 지리도 못생긴 구감(모종감저)으로 배를 채우고 잠을 청한다.
흙 깊이 심겨진 줄기는 한여름 긴 가뭄에도 밭 이랑이 고랑을 메우는 홍수를 견뎌내며 실한 알들을 흙소에 품고 온통 푸르름으로 넓은 밭을 덮는다.
저 멀리 동녘 하늘에서 붉은 숯덩이를 토해 내는 듯 둥근 태양이 기어 오를 때면,
아이는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취한 잠에서 떠밀려 일어 서야만 한다.
어느새 10여리 목장에서 소를 몰고 오신 아버지는 밭갈이 채비에 분주하고, 어머니와 누나는 무쇠솥에 검질불로 화급히 삶아내어 뜸 덜 든 보리밥을 커다란 밥채롱에 퍼 담느라 바쁘다.
한 낮 뜨거운 태양보다 이슬맺힌 아침이 작업 능률이 더 있음을 어른들은 스스로 알고 있기에 모두가 서둘러 감저밭으로 향한다. 구덕 안에 누워 잠든 애기는 누나가, 대 식구의 점심 구덕은 어머니가 등짐으로 지고, 지실 볶아 가득 담긴 주전자 손에 들고 천근 무거운 걸음으로 따라 나선 아이는 죽을 맛이다.
울퉁불퉁 자갈길 잡초 위엔 아침의 기운을 먹고 동글동글 맺힌 이슬 방울은 따가운 아침 햇살에 보석처럼 영롱하지만 아이의 검은 타이어 고무신을 흥건히 적셔 걸음에 불편을 줄 뿐이다. 저 멀리 우뚝 선 한라산은 아이의 미래를 안다는 듯 정겹다 손짓을 한다.
한라산이 오름줄기타고 내를 건너 바다로 줄기차게 내려서다 쉬어가는 우리 마을이다. 오름과 동산을 가르며 바람막이 나무심고 엉기성기 돌담 쌓아 많은 밭을 만든 넓은 땅이다
첫댓글 저의 어릴적을 보는듯합니다. 정공철님 반갑습니다. 저가 알고있는 단어를몇자 정정해봅니다. 밥채롱-밥차롱이라고도 했고, 지실-지슬이라라고도 합니다. 잡초-검질, 동산을 예기할때는 ~~돌똥산이라는말도 많이 사용했죠. 개나재나 반갑수다. 나도 그소르에서 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