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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이미지(심상)
이미지(심상心象)는 인간 욕망이 신체적 지각에 의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입니다. 문학적 이미지는 이런 몸각 ․ 기억 ․ 꿈 ․ 병 ․ 등이 과거 현재 미래의 상상력에 의해 언어로 구체화됩니다. 시에서 이미지는 표면상으로는 묘사로 함축해 표현하며, 이런 이미지를 언어화 하는 능력이 상상력입니다. 즉, 이미지는 언어로 그려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러스킨은 “상상력의 암시 없이 시가 생산될 수 없다. 시는 독자에게 직설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 읽는 독자에게 상상력을 자극시켜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연상하고 공감하게 하는 예술”로 보았습니다. 이미지의 역사는 태초 인류의 출발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초기 인류는 동굴벽화를 통해 그림과 기호로 그들의 삶을 표현했으며, 이것은 고대의 상형 문자를 거쳐 기록의 도구로 발전해 오늘 날 소리와 그림이미지가 복합된 영상 언어가 됩니다.
알고 보면, 이미지는 우주의 무의식이 시인을 매개로 의식의 영상을 통해 언어로 찍힌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시사에서 줄곧 이미지를 파고 든 김춘수는 후기에 “언어의 의미로부터의 언어의 해방”이라는 “소위 무의미시를 주창합니다. 실재로 그는 언어를 언어(의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병치시킨 이미지 상호간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립니다. 그러면, 이미지들 사이의 연결고리(논리관계)가 사라지면 언어는 의미의 전달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대상이 된 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낯설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이룩”(이진흥)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무의미시는 미완성의 실패로 끝났으며, 이미지의 파편들만으론 시가 될 수 없음을 반증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시파의 젊은 시인들은 현대의 온갖 이미지의 조각을 더 미세하게 잘라, 조작의 기법으로 무의식적으로 마구 뿌려댑니다. 물론 언어가 모든 것과 소통할 이유야 없지만, “오늘날의 새로운 경향의 시는 상관관계가 멀게 느껴지는 이미지의 조합이나 산문적인 형식의 실험을 통해”(2012, 매일신문 심사평) 너무나 작위적으로 흐른 것이 문제입니다.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내는 것은 반길 일이나 시가 얼토당토아니한데 까지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어도단입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걸 좋아하고, 남들에게 들려주길 좋아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길 좋아”합니다. “이야기에 웃고 울고 공감하며 자신의 행동을 조절”합니다. “우리의 뇌는 기억을 이야기의 형태로 저장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도록 디자인 되어 있으며, 이야기를 통해 동료를 평가하고 세상을 판단”(정재승)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미지는 현대사회의 모든 기표와 기의들을 조작해 사람들에게 진짜 현실과 가상 세계를 혼동케 했습니다.
이문재는 이런 이미지 과잉이 도로 시의 독자들을 멀어지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미지는 고급스럽고 세련될지 모라도, 이미지를 추구하는 시는 현실과 시차가 있다. 이미지는 독자들의 삶의 문제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미지 위주의 시는 현실의 바깥에서 더 먼 바깥을 바라본다. 이미지 위주의 시는 다 읽고 났을 때 독자로 하여금 “그래서?”라고 질문을 하게 만든다. (…) 한국 현대시의 천칭은 이미지 쪽으로 내려가 있다. 그것도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내려가 있다. 시가 독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개입하려면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이미지의 효과를 버리지 않으면서 거기에 메시지의 힘을 결합해야 한다. 이름 하여 ‘이메시지’(image+message =imassage)"를 주창합니다.
일반적으로 시는 감각적 이미지(심상), 상징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로 크게 나눕니다. 상징과 비유는 다른 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감각적 이미지에만 국한 시킵니다. 첫째가 시각적 심상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감각을 떠오르게 하는 시각은 외부의 물체의 크기·형태·빛·밝기 등을 비롯하여, 공간에 있어서의 위치와 운동을 인지합니다. 둘째가 청각적 심상입니다. 매질(물, 공기)에 전달되는 음파를 적당한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기계적 감각으로, 시각처럼 청각 역시 소리 파장으로 측정 합니다. 셋째, 냄새를 느끼는 감각인 후각은 수용기(受容器)란 코의 후점막(嗅粘膜)에 있는 후세포(嗅細胞)를 통해 약 3천 가지의 미세 냄새를 구분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입니다. 넷째는 맛을 느끼는 미각적 심상으로, 주로 혀에 있는 맛봉오리가 침에 녹은 화학 물질에 반응하여 일어납니다.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의 네 가지 기본 미각을 시속에 수용합니다. 다섯째, 피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감각인 촉각적 심상은, 물건이 피부에 닿아서 느껴지는 감각, 압각(壓覺) ․ 통각(痛覺) 따위의 총칭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가 공감각적 심상입니다.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되어 2가지 심상이 함께 공존하는 심상입니다. 공감각적 심상은 주로 모순 어법에 활용되며, 시적허용으로 인정합니다. 앞의 6가지 감각은 상호 침투하며 시 속에 변용 굴절 수용의 과정을 거치며 이미지화됩니다.
① 시각적 심상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 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
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이다 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준다
때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
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한다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밤새 뭉친 실밥무늬가 비치기도 했고 꾸벅 졸다가 삐끗한 실밥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풍경 재봉사의 마지막 바느질이 아닐까 주먹을 꽉 쥐려던 수련의 얼굴로 톡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꽃이 활짝 피어 호수의 브로치가 되었다 ― 김민철,「풍경 재봉사」전문
김민철의「풍경 재봉사」는 2012년『문화일보』신춘문예당선작품입니다. “호수에 떨어지는 장맛비를 풍경 재봉사로 인식하는 형상화 과정 하나하나가 자상하고 섬세”하며, “한국시가 근래 들어 잃고 있는, 우아한 아름다움”이 깃들었다는 심사평을 받습니다. 1연부터 시인은 장맛비가 수련 꽃잎에 떨어지는 순간의 시각 이미지를 포착해, 비가 꽃잎을 ‘꿰멘다’는 놀라운 의태적 이미지로 변용하는가 하면, “봄눈”, 혹은 “하얀 달”의 시각적 이미지를 “공기의 현”을 뜯는 소리로 청각화 함으로써, 수준 높은 이미지를 창조합니다. 이토록 창작자의 고뇌는 늘 한 사물의 다양한 이미지를 어떻게 시어 속에 적확하게 표현할 것인지를 놓고 숙고합니다. 2연의 장맛비가 때리는 상황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촉각화로 변환 시킨 시안 역시, 사물을 뒤집어 본 신선한 시각입니다. 직선 또는 사선의 ‘허공’에 내리는 장맛비의 빗줄기를 ‘휘어진다’라고 본 시각적 이미지도 기막히지만,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으로 연상시킨 수법 또한 기발합니다. 무엇보다 이 신인의 놀라운 시적 인식은 호수의 장맛비가 불어나는 현장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잰다는 깊은 사유의 내공입니다. 호수 가운데 피어있는 “수련꽃”을 “호수의 브로치”로 비유한 시각 이미지는 참 아름답고 인상적입니다. 김민철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중입니다.
②청각적 심상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전문
만약, 백석이「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출출이”란 시어를 ‘뱁새’로 썼다거나, “마가리”를 ‘오막살이’로 “고조곤히”를 ‘고요히’라고 표준어를 사용했다고 가정하면, 백석 류의 북방정서가 가져다준 이루 헤아릴 길 없는 애틋한 사투리의 서정적 정조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을 테지요. 저는 수 백 번 이 시를 읽으면서도 아직까지 왜 그가 마지막 연에서 “응앙응앙”이란 청각적 이미지를 사용했을까 의문합니다. 또한 그가 ‘응앙응앙’ 대신 다른 청각적 시어로 바꾸었다면,「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적 분위기는 어떻게 변했을까를 또 상상합니다. 물론 “아름다운 나타샤”와 “나”의 순수한 세계를 잇는 “흰 당나귀”의 의인화된 아기 울음을 통해, 백석은 이 우주의 가장 숭고한 ‘사랑’의 의미를 독자들의 가슴 속에 감동의 여운으로 남기고 싶었겠지요. 이렇듯 시작(詩作)에서는 시어 한 자 한 자를 얼마나 고심하여 선택해야하는지 창작자는 뼈 깊이 새겨야 합니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이 젊은 날 심취한 프랑시스 쟘(프랑스 1868~1938년)의 시편「당나귀와 천국으로 함께 가기 위한 기도」속의 그 ‘당나귀’의 순수함에서 착상한 이미지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1938년 3월『여성』에 발표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는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사랑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곱게 채색되어 있어 오늘날까지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김영한으로 불렸던 자야의 본명은 김숙이다. 기명은 진향(眞香), 호가 자야(子夜)다. 일제 시대 별장으로 쓰였던 ‘청암장’을 1951년 인수하여, 고급 요정 대원각을 차려 운영하다 이곳을 법정스님께 전부 시주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자야는 백석이 늘 읊조리던,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 왔다. (장안에는 한 조각달 / 집집마다 들리는 다듬이소리 / 가을바람은 끝없이 부는데 / 이것은 모두 옥관을 향한 그리움 / 언제 오랑캐를 무찌르고 / 님은 원정을 끝내고 돌아오시려나), 자야라는 여인이 읊은 민요를 이백이 듣고 쓴 시라 한다.
자야는 집안이 사기를 당해 파산한 후 열여섯 나이에 기생이 된다. 그녀는 기생이 된 후 춤과 노래와 문학 등에서 높은 예술성을 드러냈다. 특히 그의 스승이자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한 신여성이자 문학여성이었다.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김영한은 스승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곧바로 귀국해 면회하기 위해 함흥으로 간다.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하나 불가능해지자 아예 함흥에 눌러앉았고, 다시 함흥의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생이 되면 법조계 유력인사들과 만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스승의 면회가 보다 쉬워 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스승과의 면회를 위해 기생의 길을 선택했던 일만 보아도 그는 대단히 의리가 깊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스승과의 면회는 끝까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김영한은 이곳 함흥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 함흥에서 영어교사로 있던 시인 백석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함흥 영생여고보의 회식자리에서 처음 이뤄진 두 사람의 만남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시작이었다.
자야에게 첫눈에 반한 백석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다고 한다. 당시 자야 나이는 스물 둘, 백석의 나이는 스물여섯 꿈같을 때이다. 함흥의 자야 자취방에서 사랑을 키우던 두 사람. 그때 백석은 그녀에게 호를 지어주는데, 그 호가 자야(子夜)다.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 중 먼저 서울로 올라온 사람이 자야이다. 결국 백석도 함흥의 교사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 다시 그녀의 자취방에서 뜨거운 사랑을 이어간다.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보금자리를 튼 두 사람은 혼례만 올리지 않았을 뿐 엄연한 부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자야와 백석의 꿈같은 사랑의 동거는 3년 만에 위기를 맞았다. 하늘도 말리지 못할 것 같았던 이들의 불같은 사랑도 결국 백석의 부모에 의해 엇갈린 운명으로 치닫게 된다.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마땅한 백석의 부모는 백석을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인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내려가지만, 혼인을 치루고 도망쳐 다시 자야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함께 만주로 도피하자고 재촉하지만 그녀의 반대로 결국 백석 홀로 만주로 떠나게 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자신이 싫어 만주로의 사랑의 도피를 포기한 이가 자야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백석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김진호 기자. 출처: 성북동 길상사에 얽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작성자 : 향산) 참조.)
남이 하면 치정(癡情)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 했던가요. 우리는「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젊은 날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살내음이 시 속에 풍기는 것을 느끼며, 실연의 뒤안길에서 쓸쓸히 방황하던 그의 아름답고 외로운 시의 선율에 온 몸과 영혼을 흠뻑 적십니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이며, 1912년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태어나 1995년(83세) 1월 양강도 삼수군에서 사망한 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4연 19행의 이 시는 비극적 사랑을 체험한 시인이 순수한 피안의 세계를 찾아가고 싶은 무의식을 흰 눈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깊은 산골 오두막집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살고 싶은 화자의 소망이 독자의 마음에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비련이야말로 사랑의 극점입니다. 펑펑 눈이 오는 겨울 저녁, 촛불을 켜고 고요히 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읊조려 보십시오. 그 밤 구슬픈 음조가 빈 들녘의 바람소리와 함께 흩어지는 애잔한 해금의 서정적 선율을 켜두면, 눈 더미 속에서 두 청춘 남녀의 사랑과 이별이 애틋한 영상으로 떠오를 것입니다. 시인이 사랑에 목숨을 걸때 비로소 명시가 탄생합니다.
③후각적 심상
어둠 속 벽은 언제나 피였다
문 안쪽이 고름으로 끈적거리면, 문 밖 세상은 썩은 내로 진동한다는 것을 그들만 모르고 산다
긁는 것만큼, 딱 그만큼 피딱지는 문 안쪽과 문 밖 사이 벽을 친다
콧구멍 둘이 뻥 뚫리는 날 만세, 만세, 만세를 부르리라 ! ― 김동원,「비염鼻炎」
졸시「비염鼻炎」은 독서 공부를 하는 제자로 인해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시입니다. 그는 곁에서 보기만 해도 안쓰러울 정도로 비염이 심했습니다. 단순한 비염을 넘어서 30분 단위로 재채기, 콧물, 코막힘 증세로 화장실을 들락거렸습니다. 꽃가루가 날리는 봄과 차가운 겨울은 늘상 그의 코 주위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으며, 만성 두통과 중이염의 합병증까지 동반했습니다. 한두 달 짧은 기간에 치료될 것 같지 않은 그의 비염은 수 년 째 두 콧구멍을 막는 중증이었습니다. 원인이야 알레르기 천식이지만, 이것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합쳐진 그야말로 고질병이었습니다. 가을에는 좌․우 몸의 증상이 숙지다가도, 조그마한 기후변화에도 비특이적 증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비염입니다. 비염은 부모 중 한 쪽에 알레르기가 있을 때 자녀가 그 질환에 걸릴 가능성은 50% 정도이며 양 부모가 그 질환을 가졌다면 확률은 약 75%로 증가합니다. 비염은 노동인력보다는 상류사회와 지식인이 더 심각하며, 농촌 지역보다는 도시 지역이 발병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비염을 앓은 탓인지 비강 내 혈액순환의 장애로 아래 눈꺼풀 안쪽의 피부색이 검푸르스름 하며, 코가 가려워 손으로 콧구멍을 자주 긁어 콧등과 코닥지에는 진득진득한 핏물이 농익었습니다. 어떤 날 그가 팽~하고 코를 푼 직후엔, 두 콧구멍이 뻥 뚫렸는지 참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의 비염을 지켜보면서, 작동하지 않는 인간 후각 기능이 어떤 면에서는, 한국 사회가 앓고 있는 좌 ․ 우의 문제점과 흡사하다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상상과 연상이 꼬리를 물자 불현듯 시상(詩想)이 착상되어 작품화된 것이「비염鼻炎」입니다. 이 시는 풍자적 기법으로 치고 들어갔으며, “고름으로 끈적”거리는 “썩은 내(냄새)”를 “그들만 모르고 사” 는 어리석음을 후각적 심상을 통해, 병증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데올로기는 “긁는 것만큼, 딱 그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만들며, “문 안쪽과 문 밖 사이 ” 증오의 “벽”을 친다는 것을, 저는 한국 사회의 극단적 편갈림 현상을 통해 목격했습니다. 만약 한국 사회의 고질적 좌 ․ 우 비염이 “뻥”리는 날, 대다수의 국민들은 “만세, 만세, 만세를 부르리라 !” 확신합니다. 리영희의 말처럼 “진실은 균형 잡힌 감각과 시각으로만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左)와 우(右)의 날개가 같은 균형을 다할 때의 상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전환시대의 논리’ 그 후』(1994, 두레)) 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④미각적 심상
아삭, 창문을 여는 한 그루 사과나무 기척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은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간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누군가 붉은 전구를 둘러 끄고 있다 당분간은 철조망의 계절
어두워진 빨강, 눈 밖에 난 검은 여름이 여름 내내 흔들리다 간 곳에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 집 한 채를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고 유독 허공의 맛을 즐기는 것들의 입맛에는 어지러운 인이 박혀 있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 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비스듬한 접목의 자리 망종 무렵이 기울어져 있어 씨 뿌리는 철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 바람을 가득 가두워놓고 있는 철조망 사과는 지금 황경 75도 윗목이 따뜻해 졌는지 기울어진 사과나무를 이 밤, 철모르는 그믐달은 풋사과처럼 삼만 광년을 달릴지도 모른다 ― 황은주,「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기성 문단에서 신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원숙한 장인처럼 시의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시의 연장을 골고루 다뤄 본 경험이 있는 가, 기존 문단의 “관성과 타성에 기대있는 것”은 아닌 가, 또는 “남의 것 흉내 내기”, “조악한 모국어 사용 습관”(중앙일보 시평) 등은 없는 가, 이런 몇 가지 기본기를 점검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2013년『중앙일보』신춘문예당선작품인 황은주의「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는 “오장육부를 뒤흔들 만한 놀라운 개성은 아니지만”, “발랄한 상상력, 풋풋한 사유, 오랜 시적 내공”과 함께 “새롭게 찾은 사물의 성질, 감각의 명증성, 모국어를 최적화할 수 있는 약동(躍動),”과 더불어 “‘진탕만탕 생명력의 잔치’(보들레르)들이 잘 어우러진” 야무진 시로 평가 받았습니다.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의 1연 첫 행 “아삭”이란 이미지는 시작(詩作)에서 첫 행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상기시킨 재기발랄한 시구입니다. 처녀가 한 입 사과를 베어 물 때 나는 상큼한 소리를 통해, 느닷없이 시 행간의 여백을 신맛의 미각적 상상과 청각적 소리 이미지로 가득 채웠습니다. 아침을 알리는 “사과나무 기척”이란 기찬 의인화도 집어야하지만, 커가는 사과 둘레를 비유한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의 기교는, 허공과 사과의 접촉을 통해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사상까지 시적 의미의 해석을 요구합니다. 섬세한 관찰이 이미지로 도드라진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 가는 아침 사과의 시각적 심상은, 인상파 화가들의 색체에 대한 놀라운 감각까지 연상시킵니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 누군가 붉은 전구를 둘러 끄고”있다는 이 번뜩이는 시적 표현은, 낮과 저녁 사이의 시간이동에 대한 기존 화법을 완전히 뒤집은 참신성입니다.
2연의 사물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신인의 키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썩은 사과의 움푹한 한 쪽을 “어두워진 빨강,”으로 관찰한 시적 화자의 매서운 눈매 역시 화가의 그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움은, 태풍이 쓸고 간 과수원 한 쪽에 떨어진 사과를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고 묘사한 이 부분과 사과의 단맛에 취해 “어지러운 인”을 박으며, 마구 과일을 파먹고 있는 벌레들을 “집 한 채 허무는 공사”로 비유한 것은, 와우 ! 미각적 이미지의 절경입니다. “죽은 옹이”를 “사과의 말을 듣는 귀”로 은유한 3연의 시 읽는 맛도 일품이지만, 지난 가을 남쪽 햇살에 씨알을 너무 많이 달아 찢어진 사과 가지들의 무지를 “방향의 편애”로 본 시선 또한 독창적입니다. 4연의 빠른 시상의 전개를 위해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 거리는 과수원 / 바람”의 행 걸침과 늦여름과 가을 사이를 “망종”과 “황경 75도”로 처리한 계절의 시각이동도 창작자는 눈 여겨 볼 대목입니다. 물론 은하 중심으로부터 약 3만 광년 떨어져 살고 있는 지구의 풋사과의 존재를 시 제목으로 설정한 시인의 통찰 역시 압권입니다. 1966년 홍천 출생인 황은주는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⑤ 촉각적 심상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寶石)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琉璃)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러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琉璃窓) 1」
시「유리창(琉璃窓) 1」은 1929년 잡지『조선지광』89호에 발표된 두 편의 연작시 중 하나입니다. 시인 정지용이 27세 되던 해 자식을 잃고 아비의 비통한 심정으로 쓴 슬픈 노래입니다. 추운 겨울 유리창에 달라붙은 ‘죽은 아이’의 혼령으로 비유된 “차고 슬픈 것”은 시의 촉각적 이미지를 유발합니다. 차갑고 싸늘한 유리창 밖에 떠돌고 있는 죽은 아이와 차가운 유리창 안쪽에서 참혹하게 눈물짓는 아비의 두 세계가,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점 같은 ‘유리창’에 어른거려 독자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언 날개를 파다거리”며 아비의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불쌍한 ‘새’의 환영은, 죽은 아이를 차마 잊지 못하는 정지용의 부정(父情)의 피울음이 화자에 스며든 감정이입입니다.
입김에 어린 유리창을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는, 그 어느 시공에도 존재하지 않는 죽은 아이의 이미지는, 정지용의 혹독한 실존의 허무의식의 깨달음과 외로운 몸부림을, 독자의 뼈 속에 아프게 각인시킵니다. 또한 화자의 눈물에 비친 아이의 모습을 “물 먹은 별”로 형상화한 점은 가히 언어의 주술사입니다. 그리고 ‘유리창’을 통해서나마 잠깐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죽은 아이에 대한 간절한 아비의 심정을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고 역설로 표현한 언어의 기교는 천하일품입니다. “고흔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러갔구나!”라는 대목에서 애통함이 극에 달합니다. 아이의 죽음 원인이 ‘폐병’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나뭇가지에 잠시 앉았다 산새처럼 날아가 버리는 데서 ‘인생의 허무의식’에 닿아있기 때문입니다.「유리창(琉璃窓) 1」은 죽은 아이를 애도하며 쓴 만시(輓詩)입니다. 만시 중 으뜸은 자식을 앞세운 부모가 짓는 곡자시(哭子詩)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숙명적으로 고독하고 불안합니다. 하지만 슬픔이나 죽음을 극복하고 승화시켜 나갈 때 “외로운 황홀한 심사”의 또 다른 삶의 체험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정지용의 시「유리창(琉璃窓) 1」은, 바로 이러한 사별의 아픔과 삶의 허망함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절제의 미학으로 형상화해내고 있습니다. 1902년 5월 15일(음력) 생인 정지용은 12살 어린 나이에 꼬마 신랑이 되어,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폭사당합니다. 1988년『정지용전집』(민음사)이 간행되었습니다.
⑥ 공감각적 심상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 온다
물 안에 스며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의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의 쇄골이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펴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들을 본다 ― 김경주, 「저녁의 염전」전문
김경주의「저녁의 염전」은 2006년 랜덤하우스에서 출간된 첫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속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일상성의 파기 혹은 낯설게 하기’를 시도합니다. 시 창작상의 오래된 두 가지 관점인 시를 ‘영감’의 문제로 볼 것인가, 문체의 새로운 ‘표현’의 문제로 접근할 것인가의 두 축을 교묘히 이어주는 접점에「저녁의 염전」이 서 있습니다. 시행 하나 하나를 뜯어보면, 마치 화자는 시의 인식의 문을 열고 ‘신(神) 지핀 자의 몰아적(沒我的) 언어’ 세계로 들어가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상상력이 풍부합니다. 시인에게 있어 신(神) 지핀다는 뜻은 신의 부름을 받은 징표이며, 신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심장에 새길 수 있음을 허락받은 표식입니다. 한편,「저녁의 염전」은 다각도로 초점을 맞춘 촬영기법에 의해 시의 장면이 교묘하게 편집되어 있음을 직감합니다. 각 시행의 이미지가 한 장면(scene)을 구성하고, 이 장면들을 연결해 보면 한 편의 완성된 시나리오처럼 멋진 시 세계가 펼쳐집니다.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 염전의 어둠은 온다” 고 한 첫 행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94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심보선의 시「풍경」이래, 급속도로 현대 젊은 시인 군(群)에 퍼진 영화의 한 장면을 따온 것 같은 영상 시법은 이제 일반화 되었습니다. ‘어둠이 온다’는 무의미한 일상적 표현을, 시인은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란 구체적인 의태, 촉감적 표현으로 살짝 바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시에 있어 ‘시는 표현이다.’란 명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실증입니다.
화자는 3행에서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 온다 /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저녁 어스름이 몰려올 때 그늘진 섬을 본 사람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에 실려 오는 ‘그늘’을 본 사람은 몇일까요? 무시무시한 시안입니다. 두 시행을 겹쳐 클로즈업시켜보면,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착시현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화자는 곧바로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는 겨울 저녁 바다로 ‘초점’을 옮겨갔습니다. 이때부터는 폐선 선실 바닥의 어린 갈매기의 얼룩이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란 절묘한 시구에 모입니다. 참 황홀한 표현입니다. 그 다음은 저녁 염전 위로 번진 밀물과 노을, 그리고 화폭 가득 퍼져 내려오는 흰 눈의 아름답고 슬픈 서정의 풍경 묘사입니다. 마치 하나의 풍경이 다가서면 다른 풍경이 이어서 겹치고, 다른 풍경이 물러나면 이내 하나의 풍경만 또렷이 형상을 드러내는 그런 자연의 묘사입니다. 특히, 15행에서 “희디 흰 물소리” 속의 공감각적 표현은 상당한 함의를 내포합니다. “흰”의 시각적 이미지를 “물소리”의 청각적 이미지와 결합시켜, 죽음의 비유인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소리”로 인식하길 요구합니다. 또한 ‘흰색’은 죽은 자의 부활을, ‘물소리’는 도솔천을 건너는 복합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김경주의 시적 정신의 ‘초점’은 동양적 사유의 ‘찰나적 홀림’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 물의 내장들을 본다” 20행에서 표현한 이 시행은 절묘한 선(禪)적 화두를 독자들에게 던집니다. “물의 내장을 본다” 멋진 화두입니다. 김경주는 미래 시의 대표 급 주자입니다. 1976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하여, 원광대학교 국문과 4년 재학 중, 2003년『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꽃 피는 공중전화」로 당선되었습니다. “삶을 객관적으로 투시하는 시선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동시에 사물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시적 역량이 신선”하다는 심사평을 얻습니다. 혼불 주최 최명희문학상과 2009년「연두의 시제」외 49편으로 28회 김수영 문학상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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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의하시는 선생님으로 부터 자주 시가 지닌 창조적인 공간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제는 풍경 재봉사 해설을 들으며 문득 한 폭의 초현실주의 회화가 떠올랐습니다. 시를 듣고,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색채 풍부한 그림 하나가 "뿅" 하고 떠오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