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0:25-37, 영생과 율법, 25.3.16. 박홍섭 목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웠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사 갈릴리를 떠납니다. 눅 9:51부터 19:45까지는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는 여정입니다. 그 여정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열두 사도와 칠십 인의 제자들을 각 고을로 파송하되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훈련 시킵니다. 제자들이 돌아와서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항복하고 쫓겨나갔다고 기쁨으로 보고하자 주님은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보다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그들이 주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큰 기적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교훈을 하는 중 한 율법 교사가 일어나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 교사는 항상 율법을 연구하고 주야로 묵상하여 백성들을 가르치는 율법 선생으로 율법 전문가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니 단순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신학과 신앙 정통을 반영하는 질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인해 기뻐하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이 생각하는 구원과 예수님의 구원관이 다르다는 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들의 구원관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나”라는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적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영생이 무엇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깨우쳐주기 위해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라고 되묻습니다. 이 사람은 “온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합니다. 율법 교사답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람의 답변을 칭찬하시면서 “네 대답이 옳으니 그 대답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여전히 자신만만한 율법 교사는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려고 누구이든 기꺼이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30-36을 다시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거의 죽을 정도로 맞고 길거리에 내버려 졌습니다. 마침 제사장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피하여 반대편으로 지나갑니다. 한 레위인도 그를 발견했지만 제사장처럼 그렇게 피하여 지나갑니다. 피를 철철 흘리며 거의 죽어가는 이 사람과 접촉하면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되니까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율법을 앞세워 율법의 핵심인 이웃 사랑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혐오하고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이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다가가 상처를 싸매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줍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칭찬받을 행위입니다. 그런데 끝이 아닙니다. 자기가 타는 나귀에 이 사람을 태워 여관으로 데려와 돌보아 줍니다. 여기도 끝이 아닙니다. 다음날 길을 떠날 때 데나리온 둘을 여관 주인에게 맡기면서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 주라고 합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고 하면서 부탁합니다.
비유를 마친 예수님이 율법 교사에게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들 셋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 유대인에게 사마리아 사람은 원수이고 사마리아인에게도 유대인은 원수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앞세워 죽어가는 동족을 피하여 외면하고 있는데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것도 과도하게 했습니다. 원수가 강도 만나 피 흘리며 죽어가는 유대인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사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는 주님의 물음에 감히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라고 비유를 마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살아서 영생을 얻으라는 뜻입니까? 이 말씀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 영생에 이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 교사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보면 무엇을 행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대로 유지될까요? 사마리아인은 마음과 뜻과 힘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요구와 표준을 잘 보여줍니다. 율법을 지켜 행하여 구원을 얻으려면 한 번만 아니라 계속 영원토록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족족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율법을 행하여 영생을 얻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질까요?
율법 교사의 처음 질문처럼 무엇을 행하여 영생을 얻으려 한다면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로마서 7:10을 보십시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내게 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율법을 행하면 사는데 행해보니까 무엇을 확인받습니까? 내가 율법의 요구에 이르지 못하며, 생명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의 저주와 사망에 이를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롬 3:20도 보십시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에 대해 자신만만하여 내가 사랑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면서 물었던 율법 교사에게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너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 무슨 뜻입니까? 이와같이 해보면 네가 강도 만난 자임을 알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자신만만하게 “내가 자비를 베풀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달려들기 전에 네가 먼저 자비를 입어야 할 사람임을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행하여 영생을 얻으려고 하고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너는 무엇을 행하여 영생을 얻기 이전에 율법을 통해 너의 영혼과 실존이 강도 만난 사람처럼 거반 죽어가는 존재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스스로 슬기롭게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당신의 나라를 감추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율법 교사처럼 무엇을 행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지혜롭고 슬기롭다 생각하는 부류입니다. 본문의 율법사와 비슷한 사람이 눅 18:18-23에 나오는 부자 청년입니다. 이 청년도 “네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유업으로 얻을 수 있냐”고 영생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 말씀하셨고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에 관한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주님은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고 부자 청년은 이 말씀에 슬픈 기색을 띠며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은 이처럼 스스로 슬기롭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감춰져 있지만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율법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자신이 강도 만난 사람처럼 파탄한 영혼의 소유자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요청하는 자들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율법 교사는 그런 율법의 용도와 의미를 잘 가르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었지만, 정작 율법의 본의를 제대로 몰랐고 백성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도 무관심했으며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배척했습니다.
이들에게 미움을 당했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려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 교사와 부자 청년의 질문은 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제대로 알았다면 주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기 전에 자신이 강도 만난 자임을 인정하고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해야 합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 영생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과 같으며 자신을 도와줄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들에게는 먼저 구원자의 은혜가 임해야 하고 그때야 비로소 무엇을 행할 수도 있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율법은 영생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은혜로 영생을 얻은 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지침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고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율법을 실천하면서 매 순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강도 만난 자 같은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로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총에 기대어 삽니다. 이들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은금과 배낭과 전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주님의 이름만 의지하고 각 고을로 가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귀신을 쫓아내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만 의지하게 하는 믿음의 수단입니다. 오늘 한 율법 선생과의 대화, 그와 논쟁 속에 사용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모두 “너희들은 나의 은혜 없이는 영생은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강도 만난 사람 같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교훈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도 선한 이웃이 되라는 말씀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발견되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그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내가 바로 강도 만난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면 내가 강도 만난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서 거반 죽어가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따르게 됩니다. 말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