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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2279.2024.12.8)
막 10:35-45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서로인사- 옆 사람 얼굴보고--오늘 얼굴이 여우주연상 같은 인상입니다. 남우주연상 같은 인상입니다.
금년도 벌써 12월 둘째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일년동안 뒤돌아보면 감사한 일들 뿐입니다. 지난 추수감사절기에 여러분이 쌀을 봉헌 해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지역내 어려운 주민들을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오후 2시에는 동사무소 직원들이 오셔서 사진도 찍고 행사를 할 것입니다. 공성면장님이신 주용덕 성도님도 함께 참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지역에 50명에게 나누어 드릴 것입니다. 비록 한 사람이 하나씩 가져다 놓았어도 50포대가 되었습니다. 작은 것이라면 작지만 나눔을 통해서 행복을 느껴봅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구원받은 상주감리교회에서 목회하는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제자들에게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13:15절‘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섬김을 통해 표현되어집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섬김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도리어 섬기는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거꾸로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세상나라에서 거꾸로 살아야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2:5-8절‘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어떻게 세상나라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빌2:9-11절‘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렇게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그리고‘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12월이 되면 교회마다 당회를 합니다. 어떤 교회는 당회때마다 직분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직분을 받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누가 크냐는 것입니다. 직분을 올려받은 것은 더 잘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장로의 직분을 받으면 그 직분을 감당을 합니다. 그러니 장로를 우숩게 여기셔도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 중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하나는 주의 좌편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섬길수 있다는 것이 은혜가 될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았고 하나님으로 부터 만가지 은혜를 받았는데 우리가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강력한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섬김을 통해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섬김의 신앙을 확실하게 우리 심령속에 새겨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는 왜 우리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1.예수님의 삶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섬김’이라는 말은 참 듣기에 아름다운 말입니다.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실천하기에는 매우 힘들고 부담스러운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섬김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섬기러 오셨고 또 우리를 섬기셨고 섬기시되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섬김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며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이라는 원리를 통해서 돌아갑니다. 세상의 원리는 다스리고 지배하고 그리고 섬김을 받는 원리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 세상의 가치에 의하면 성공했다고 하는 것은 섬김을 받는 거예요. 다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섬김은 우리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왔음을 밝힘으로써 예수님의 삶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이 지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섬김받을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으셨으나 친히 종의 신분으로 비하하셨던 것입니다. 대속물이라는 헬라어 ‘뤼트론’은 빚진 사람이 노예가 되었을 때 그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생명을 바쳐 죄인을 해방시켜 주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엄청난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면 이제 자신의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인정하고 회개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아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인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길인 것임을 믿습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짊어집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짐은 낙타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일을 다 이룬 후에는 주인의 손에 의해 내려질 짐이기 때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 낙타에게서 인생을 배웁니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인 앞에 무릎 꿇는 모습, 매일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행하는 모습, 아무 불평없이 지고 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낙타만이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도 주인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주인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내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낙타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짐을 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님의 몸인 상주감리교회를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섬기고 지키고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돌을 던지고 비난하고 공격한다고 할찌라도 성도는 목숨을 다하여 교회를 지키고 섬겨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믿음 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교회가 하는 모든 행사에 적극 협력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나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를 세우는 일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엡4:12절‘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나의 섬김을 통해서 다른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려 하심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섬김이 교회사역의 근본정신입니다.
2.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섬기는 가정, 서로 먼저 섬기는 교회, 섬기는 직장이 되면 거기서부터 천국이 시작이 됩니다. 섬기되 말 없이 행동으로 섬기면 더 좋습니다. 물론 말로 섬기는 것도 있어요. 행동으로 못하면 말이라도 잘해야 돼요.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지지하고 격려하고 자꾸 찌르고 비판하고 정제하고 아프게 하면 안 되고, 우리가 입을 열어서 누군가를 향해서 말을 할 때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는 거 그것도 섬김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더 중요한 섬김은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면 더 좋습니다. 사실 말을 잘하면 좋은데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말에 실수가 많습니다. 말을 잘하려면 자기 내면 세계를 잘 가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잘하다가 어느 순간에 툭 튀어나오는게 자기 속에 있는 것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늘 문제가 됩니다. 그게 말이 적으면 말이 적으면 허물이 적은 법입니다. 가능하면 우리 입을 닫고 묵묵히 섬기는 자리에 간다면 그건 진정한 섬김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 42-43절에서 예수님은 보편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세속적 리더십’ 혹은 ‘권력지향적 리더십’과 주님의 새로운 ‘섬김의 리더십’을 차별화하셨습니다. 먼저 42절‘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여기서 ‘임의로 주관하고’라는 말을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마구 내리 누르고’라고 번역하였고, ‘권세를 부린다’는 말은 ‘세도를 부린다’는 말로 번역하였고,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 누른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리더십의 전형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내리 누르고, 자신을 높이는 리더십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리더십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저는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 우리 한국사회의 ‘유교적 리더십’이 바로 이런 계급지향적 혹은 권력지향적 문화를 만들어온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사람들은 그 모임이 어떤 성격의 모임이든 간에 ‘누가 높은 사람인가’를 결정해야 그 다음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남자들이 만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나이를 따지고, 입사한 연한을 따지고, 학교 선후배 가리는 배후에도 윗사람과 아래 사람을 구별하려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초대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내는 선교편지에서, 한국사람들은 살고 있는 방에도 계급이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상석과 하석, 윗목과 아랫목, 심지어 우리는 인체도 차별하여, 발가락을 천시하여 변변치 못한 사람을 가리켜 발가락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손도 오른손은 좋은 손이고, 왼손은 안 좋은 손으로 차별을 당합니다.
저는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무엇보다 건강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섬김의 리더십’으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높게 여기고 존중하고 이해하고 섬김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섬김으로 체질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세상과 다른 리더십을 보여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촛불은 자기가 녹아야 빛이 드러나고 소금 역시 자기가 녹아야 맛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섬길 때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3.그런데 왜 우리가 섬기기를 싫어합니까?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되기 때문입니다. 43-44절‘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가 섬기기를 싫어합니까? 섬김속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섬김은 우리 육신이 싫어합니다. 어느 때는 자존심조차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섬김 속에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섬김 속에 하나님사랑의 실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섬김을 통해서 영혼의 기쁨, 성령의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섬김하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감격이 바로 섬김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김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정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섬김의 도를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장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세상을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가 한결같이 성공을 추구하고 높은데 올라가기를 갈망하는데 섬김의 도는 낮은 데를 찾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을 거꾸로 사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기독교 역사에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을 소개한다면 우리 삼남연회에 속해있는 경남거창입니다. 거창에 거창고등학교를 세운 전영창교장선생님이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국내 유학 제1호로서 미국에 가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 3학년 때 6.25 사변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영창은 1주일 후인 1950년 7월 어느 날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34세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반 학생인 전영창입니다. 당장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장면 박사는 ‘총들고 싸우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다. 훗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도 애국이다. 미국까지 어렵게 왔으니 졸업장 받고 돌아가도 늦지 않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분이 한국에 와서 군복무를 마치고 집에 와서 ‘이 황폐해진 땅에서 내가 할일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당시 그의 학벌이면 얼마든지 편하고 대접받고 월급 많고 출세가 보장된 직장을 구할 수 있었고 추천도 많이 받았지만, 그는 경상도 오지 거창 땅에 소재한 폐교 직전의 거창고등학교를 인수하고 기독교 정신을 반석으로 한 올바른 교육으로 애국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거창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훈을 ‘빛과 소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정하고 이성교육의 본산으로 키워 오늘의 거창고등학교가 된 것입니다.
고인이 된 ‘전영창 교장’의 정신이 담긴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 10계명’이 유명합니다. 1)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6)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사회적 존경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거꾸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제가 거창고등학교 출신들을 많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정신의 근본에는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선택하고 이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신앙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잠깐입니다. 그 이후의 부활의 영광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라고 한다면 이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의 고난을 견딜 수 있다면 성경은 섬기는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①몸의 영광-부활하신 주님의 몸과같이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②신분의 영광-왕같은 제사장으로, 왕같은 권세를 가지고 주님과 함께 다스리며 하나님 자녀로 하나님나라를 기업으로 받습니다. ③사역의 영광-하나님의 영광가운데 살면서 주님과 함께 섬김의 삶을 사다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계20:6절‘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그런데 우리가 섬김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은 섬김의 보상이 빨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력의 대가가 빨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좌절하고 원망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사도바울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고후4:18절‘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이런 약속된 영광을 분명하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40절‘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보상은 ‘예수님께서 임의로 주기보다는 스스로의 섬김의 결과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아서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묵묵히 고난을 견디고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37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우리에게 영광의 자리를 보장해 달라’는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먼저 마실 잔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마신 고난의 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고난의 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도 먼저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과 하나가 되어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마다 먼저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섬김이란 땀흘림이요, 희생이요, 헌신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섬겨야 할 이유는 고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몸의 영광, 신분의 영광, 사역의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높은 사람이나 으뜸이 되기를 원하면 종처럼 섬겨야 합니다. 높은 자리의 결정적 특징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보다 낮고 약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섬겨야 됩니다. ‘섬기는 자’의 헬라어‘디어코노스’는 ‘일꾼, 협력자, 봉사자, 시중드는 자라’는 뜻입니다. 또한 분주히 먼지를 일으키고 다닌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결국 최선과 최고의 봉사를 아낌없이 쏟아붓는 심부름꾼이라는 뜻입니다. ‘디아코노스’란 말은 주인의 뜻을 전하는 ‘사자’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오늘날의 성도와 제직과 사역자들을 뜻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대접이나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심부름꾼처럼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섬김의 삶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친히 섬김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다면 바로 섬김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섬길 때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것만이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섬김은 우리의 몫이며, 우리의 차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섬기다가 주님 곁으로 가야 할까요?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섬김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주님께서 받으신 영광을 얻기 위해 어떻게 드려지는 섬김의 삶이기를 소망하십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주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 목적있는 삶을 살기 위해 섬김의 삶, 겸손의 삶을 살아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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