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으로 읽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 3편
모공편, 칠찬량 패전과 패잔 원인 분석
아들아, 손자병법으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는데...
어려운 말, 한자가 많이 나와 어렵지?
어려운 한자 하나하나 보다는 그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였으면 한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1592년 임진년 세차례 출정과 그 결과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가지는데 성공했다는 얘기까진 했고,
이때 쯤부터 전세(戰勢)는 변했단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일본군은 평양에서 발이 묶였고, 함경도 일대까지 진출한 일본군은 정문부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에 고전했으며, 일본군의 계속되는 호남진출 시도가 모두 좌절되었고
사방에서 일어나는 의병에 시달렸으며..
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수군함대에게 바닷길도 막혔고,
거기에 명나라의 원군이 투입되어 일본군의 전쟁 전략은 크게 틀어지고 말았지.
결국은 일본군은 물러나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왜성을 구축하고 방어태세에 들어가고
우리는 일본군의 방어를 뚫을 여력이 없어 그대로 전쟁은 오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우리를 젖혀두고 명과 일본이 오가며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있는 남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진 않았단다.
한산대첩과 부산포해전의 결과로 남해안의 제해권을 잡았는데, 일본은 이 시점부터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회피하고 거제와 통영해안부터 부산포에 이르는 해안과 섬에
견고한 왜성을 쌓고 주둔하였지.
거제의 왜성 위치도 및 구조도
비록 임진년의 해전에서 패배를 거듭하며 일본 수군이 큰 타격을 입었다지만
여전히 수백척 이상의 전함을 보유한 일본 수군의 전력도 무시할 수 없었고,
견내량(見乃梁)을 중심으로 부산에 이르는 물길 주변에 촘촘하게 배치된 왜성 때문에
공격하고 싶어도 우리 군의 모든 움직임이 노출되고, 육지에서 포격당할 우려가 있고..
거제를 벗어나 부산에 이르는 물길은 넓고 또 거친 바다라..뱃길이 험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승리만 믿고, 무턱대고 쳐들어 갔다간 낭패를 당할 악조건이
수두룩했단다.
일본 수군은 견내량 주변 육지, 부산에 이르는 여러 섬과 포구에서 웅크리고 있고,
우리 수군은 견내량을 넘어가지 못하고 훨씬 적은 수의 전함으로, 압도적인 수의
일본 전함의 진격을 틀어막아야 하는 상황이라
자연히 통영과 거제 사이의 좁은 물길인 견내량이 군사분계선이 되어 오랜 대치상태에
들어갔단다.
견내량(見乃梁, 거제와 통영사이 좁은 물길)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계속된 승전으로 공을 인정받아 경상좌,우수영, 전라좌,우수영과
충청수영의 수군을 총지휘하고자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올랐고
통제영을 한산도에 설치하여 그곳에서 견내량을 시야에 두고 일본수군을 막았단다.
손자병법의 모공(謀攻)편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故用兵之法, 十則圍之. 五則攻之. 倍則分之
고용병지법, 십즉위지. 오즉공지.배즉분지
용병을 하는 법에는 아군이 열배라면 포위하고, 다섯배라면 공략하고,
배라면 나누어 공략한다.
敵則能戰之, 少則能逃之(高壁堅壘, 勿與戰也)
적즉능전지, 소즉능도지(고벽견루, 물여전야)
적과 동등한 전력이라면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우고, 적보다 수가 적다면 싸울수는 있으나
성벽을 높이 쌓고 견고하게 하여 맞붙어 싸워서는 안된다.
不若則能避之(부약즉능피지)
만약 맞서 싸울 수 없을 정도로 약세라면 싸움을 피해야 한다.
결국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수군함대는 전력상 일본 수군보다 열세이므로
견내량이라는 험한 지형에 기대어 지키는 것이 최선이었던 것이지.
판옥선이 일본의 아다케부네를 압도하고 화포의 화력과 성능이 우위에 있다하나..
적은 수의 군사로 무모하게 적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병법상 자살행위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는..섣불리 팽팽한 균형을 깨는 경우 위험에 처하게 되지..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 드라마 징비록 中
그런데 조선의 임금 선조와 조정에서부터 엄청난 비극의 전조가 보이고 있었단다.
오랜 소강상태에서 선조(宣祖)와 조정은 그 어떤 조급증을 보이고 있었지.
아마도 선조는 임진년에 몽진길 과정에서도 그렇지만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던 것
때문에, 그와 반대로 전쟁을 수행하며 공을 세우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있던
이순신에 대한 질시 때문에 더 부담감을 가졌던 것 같아.
바둑에서 치열하게 머리 싸움을 하고 있는데 냉정을 잃으면 십중팔구 악수(惡手)가
나오고, 그것은 큰 재앙으로 이어지는 법인데..그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단다.
아들아, 손자병법 모공편에는 또 이런 구절이 있어 경계로 삼을만 하다.
故君之所以患於軍者三(고군지소이환어군자삼)
군주가 군사에 해를 끼치는 세가지가 있다.
不知軍之不可以進而謂之進, 不知軍之不可以退而謂之退, 是謂縻軍.
(부지군지불가이진이위이진, 부지군지불가이퇴이위지퇴,시위미군)
군사가 진격해서는 안되는 상황을 알지 못하고 진격하게 하고,
군사가 물러나서는 안되는 상황을 알지 못하고 물러나게 만드니,
이를 일러 군사를 속박하는 미군(糜軍)이라 말한다.
不知三軍之事, 而同三軍之政者, 則軍士惑矣.
(부지삼군지사, 이동삼군지공자, 즉군사혹의)
군사의 일을 알지 못하면서 군사의 일에 간섭하는 경우이다.
이러면 군사들이 헷갈려 혼란스러워 한다.
不知三軍之權, 而同三軍之任, 則軍士疑矣
(부지삼군지권,이동삼군지임,즉군사의의)
군권(군사의 지휘계통)의 속성을 알지 못하고, 군령에 간섭하면,
군사들이 의심을 품는다.
三軍旣惑且疑, 則諸侯之難至矣, 是謂亂軍引勝
(삼군기혹차의, 즉제후지란지의, 시위난군인승)
군 내부의 의심과 불신을 사면, 다른 제후의 침입을 초래하니,
이것을 군을 혼란하게 만들어 적에게 승리를 바치는 꼴이다.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어느 순간부터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조선수군에게
무리한 작전과 진격을 강요하기 시작했어.
군사의 일에는 무지한 그들이, 남쪽 최전선 상황에 대해서 무지한 그들이 말이다.
손자병법에서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했구나.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그 부당한 영에 잘 따르지 않으니 의심하고 불신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그런 선조와 조정대신들의 의심을 부추기고 선조와 조정대신들과 충무공 이순신
제독 사이의 그 틈을 벌리려는 전략을 일본은 아주 잘 활용했던 것 같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요시라(要時羅)라는 일본인 승려가 경상우병사 김응서 장군을
은밀히 만나서 일본군 내 두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사이의
불화(不和)를 슬쩍 흘리면서..
가토 기요마사가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재침공 하니
조선의 강력한 수군으로 중도에서 요격해 그를 제거하라며.. 미끼를 던졌단다.
이 내용은 조정에 보고되었지.
조선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사이의 불화를 익히 아는 터였지만..
그렇다고 냉큼 이들 일본군을 친다?
그런데..선조와 조정대신들에겐 일본군의 재침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이 있고
또 가장 악명 높은 왜장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고
두 왜장 사이의 불화(不和)도 익히 아는 바였으니,
그 보고 내용이 상당히 솔깃 했는지 모르겠다.
설사 그렇다쳐도..가토 기요마사를 잡기 위해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기 까지,
그 행로는 그야말로 사지(死地)였는데..
한번더, 두세번 더 신중에 신중을 기할 문제였다.
일본인 승려 요시라의 정보를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고..
당연히 의심부터 했어야 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우리 수군을 사지로 끌어 들이기 위한
일본의 간계(奸計)라고 쉽게 간파했지만, 그 미끼를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너무도 쉽게 덥썩 물어버렸지.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충무공 이순신 제독에 대한 질시와 불신이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단다.
아들아, 일본의 반간계(反間計)에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다같이 놀아난 덕분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군왕의 명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정확히는 조정기망(朝廷欺罔), 무군지죄(無君之罪).
그러니까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수이 여기고 항명한다는 죄목으로 파직되고
한성으로 압송하어 고신을 받았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이때 육신이 무너졌으며, 죽을 뻔 했지.
그리고 한산도 통제영에서 우리 수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군 기강이 해이하게 되는데도
신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방치 내지 오히려 조장하는 행태를 보였다.
원릉군 원균
선조와 상당수 조정 대신들은 이 기회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제거하려 들었고..
그와중에 약포 정탁 선생(藥圃 鄭琢, 1526~1605)같은 지사가 있어 목숨을 건 충언,
신구차(伸救箚)를 올리며 힘써 구원한 덕분에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또다시 백의종군
처분을 받게 되고..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노모께서 백의종군길에 오른 아들을 만나고자
올라오는 길에 도중에 배 위에서 돌아가셨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이때에 몸도 무너지고 마음도 무너졌단다.
약포 정탁 선생
결국..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없는 조선 수군, 그리고 후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무리한 작전을 펼치다 일본의 작전에 말려 한순간에 조선 수군 함대가 전멸하는
사단이 벌어졌지.
칠천량 해전 개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패전 후 도주하여 고성 춘원포에 상륙했다가 추격해온
왜군에게 죽었고,
전라우수사 의민공 이억기 제독, 충청수사 최호 제독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은 도주하고 조방장 김완 제독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고..
배흥립 제독은 큰 부상을 입고 실종.
그외 12척의 판옥선을 제외한 모든 함선과 수천, 1만 이상의 조선 수군이 모두 죽고,
흩어져 버린 대참사..1597년 7월 16일, 거제의 칠천량 해전이었다.
하룻밤 사이 조선 수군함대가 전멸하고 남해안의 제해권을 상실한 이 엄청난 사태를
초래한 것은 누구 탓인가?
당시 조선 수군을 지휘하던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더냐?
아니면 원균을 곤장쳐가며..싸우러 나가라 몰았던 도원수 권율 장군이더냐?
물론, 그들 잘못은 분명하다.
아들아, 하지만 가장 큰 잘못은 선조와 조정대신들에게 있단다.
전방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군사의 진퇴와 군령과 군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하여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지.
일본군이 원하는 대로 그대로 당해주는 가장 심각한 이적행위를 한 셈이지.
손자병법에서 군주가 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 세가지 모두 다 했더구나.
그들의 무지와 무능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해.
칠천량 해전공원에서 바라본 칠천량 해전 현장
아들아, 전에 거제도 가서 맹종죽 테마파크 보고 다리 건너서 찾아갔던 그곳이
바로 칠천량 해전공원과 기념관이었다. 기억하느냐?
칠천량 해전공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고 긴 물목이
바로 칠천량이고 그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나저나..또 한번 당시 조선 수군을 총지휘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무능함에는
할 말을 잃는다.
아무리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당한 수모와 그의 강요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그 수모 때문에 격분해서 한순간에 진군을 결정한단 말인가.
적정을 살피고, 진군을 위해 적절한 물때와 조류(潮流)를 살피지도 않고..
행군 중에도 후퇴하면서도..탐망도 제대로 안하고 장수된 자가 기본이 안되었어.
진군해서 부산 앞바다까지 가는 길에도 그렇고 후퇴하는 길에도 그랬다.
안되면 빨리 포기하고 전장에서 이탈해야지..참사를 막을 기회가 몇번이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다 허비해 버렸어.
칠천량(漆川梁)-칠천도와 거제도 사이 좁고 긴 물목
아들아, 우리가 칠천량 해전공원에 갔을때 그곳에서 본 현장은 좁고 긴 물목..
한마디로 병법에서도 머물러서는 안되는 사지(死地)에 해당하는 곳이고,
나는 한눈에 그게 보이던데..
어떻게 대군을 이끄는 장군이자, 군경력이 1,2년도 아니고 수십년이 된 자가
그 정도의 안목도 없었단 말인지... 이해가 안갈 정도였단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심각한 자질 부족, 무능이라고 할밖에.
아무리 패배하여 사기가 꺾이고 군사들이 피로에 지친 상황이라 버티기 힘들다고
할지라도...야영할 곳이 있고 절대 해서는 안되는 곳이 있는 법이야.
게다가 거제는 적진 한복판이고 바로 코 앞에 장문포 왜성이 있는데...
적진 코 앞에서 진을 치고 하룻밤 묵는단 말인가? 자살행위가 따로 없지.
상식이 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야.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이 쌓인 상황에서 조선 수군의 패전과 전멸은 당연한 결과요,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는 무조건 군사들을 재촉해 함대를 몰아서 빨리 견내량을 통과하여 전장을
탈출하고 견내량 입구를 봉쇄하여 버티기가 답이었다.
이런 인사를 믿고 채용한 선조와 조정대신들의 한심한 지인지감(知人知鑑)..
두고두고 역사 속에서 비판의 칼날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동시대에 7년 조일전쟁을 만나 임금으로서, 장수로서 살았던 선조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역사적 평가는 이미 내려졌고, 명확하다.
왜 한명은 다시 없을 성웅으로 칭송받고, 왜 한명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군주로
두고두고 많은 이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가?
아들아, 이들의 행보가 역사 속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느냐.
이들의 행보를 보며 느끼는 것이 많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