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장 공로표창장
상장과 공로 표창장 수상
그 후 1970년
9월15일에는 추석을 맞아서, 대대장 지원섭
중령께서
대대원들을 위해서 특별히 베풀었던 추석파티 때, 나는 우리 지역대를
대표해서 노래 자랑 대회에 참가했다.
그 때 나는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울산 큰 애기”를 매우 흥겹게 불러서 함께 참가했었던 모든
대원들을 즐겁게
만든 덕분에, 노래 1등 상장(賞狀)과 부상(副賞)을
받았으며 특별히 1박2일의 외출허가도 받았다.
그래서 그 당시에 율촌 면장직을 마치고서
운봉에서 개간사업을 하던
작은 아버지 댁을 방문했었다. 그 때 “임씨 성 가진 사내 중에 노래를
잘 부른 사람은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특별한 조카를 보네”라 하면서
반갑게 맞아주던 작은 아버지의 농섞인 목소리가 아직 귀에 생생하다.
또한 10월
1일 국군의 날에는 경연대 팀원으로서 열심히 근무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대대장의
공로표창장도 받은 탓에 동료 대원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었다.
그 런 후 가을이 깊어가면서 서리가
내리자, 부대
주위의 감나무에는
감이 붉게 익어가기 시작했었다. 그러자 아침이 되면 하루 밤 사이에
빨갛게 익은 홍시(홍시)를 대원들은 따 먹을 수 있었다. 그런 까닭은
사려깊은
감나무의 주인들이 대원들에게 “감나무 가지는 꺽지말고
홍시는 따먹어도 됩니다” 라고 허락했던 까닭이다.
168
그래서 부대주변 수 많은 감나무에
달려있던 잘 익은 홍시는 대원들의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으나, 그렇게 홍시를 잘 먹긴했지만 아침에 일과
집합 때 문제가 생겼다. 왜냐면
홍시를 즐겨먹던 대원들의 화장실사용
시간이 많이 길어져 차례를 기다리는 대원들이 많았고,
때로는 아침
집합 시간에 늦는 대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일이 있다. 우리가
주둔하던 막사 옆의 언덕을
넘으면 작은 부락이 하나 있었고 그 부락으로 우리 팀장가족이 이사를
와서 민가에 세들어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팀장 댁을 방문했던 나는, 그 곳에서
예쁘고 풋풋한 시골처녀
한 사람을 만났었다. 어려보였지만 제법 처녀티가 났었고 수줍어하며
상냥하게 대답을 하던
귀여운 그 아가씨 눈에는, 한창 젊고 팔팔했던
내가 좋게만 보였고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가씨 청탁을 받은 팀장부인은
두어차례 방문꺼리를 만들어
일과 후에 일부러 나를 부르기도 했었고, 나는 퇴근하는 팀장과 함께
그 분 댁을 방문해서 아가씨도 만나 정답게 이야기도 했었고 민가의
귀한
밥을 대접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후 내가 남원 여단본부 의무대로 이동했던 탓에
들꽃같이
예쁘던 그 아가씨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으나, 팀장가족이
남원으로 이사했을 때 그분 댁을 방문했던
아가씨는 2 차례나 나에게
면회를 왔던 덕분에 나는 특별 외출을 할 수가 있었다.)
169
태권시범을 보이는 대원들
여단 창립기념일
1970년
가을에 여단 창립기념식이 남원에 있던 여단본부에서 열렸다.
그래서 지리산주변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던 여단소속
모든 대원들은
기념식에 참여하려고 모여 들었고, 기념식에는 초청 된 여러 군부대의
장군들과 관공서 주요인사, 지역유지와 주민들 그리고 군인 가족들이
함께 참석을 해서 크게 성황을 이루웠었다.
그 날 모든 대원들은 완전무장을하고서
도열을 해서 축사를 들은 후에
군악대의 행진곡에 맞추어 분열과 사열을 했고, 태권시범을 펼쳤으며
주민들과의 친선경기도 가졌었다. 그리고 오후 마라톤대회 때에 나는
4대대를 대표해서 마라톤에 참여를 했었다.
그 때 대대 관계자들은 마라톤에 대한
상식이 좀 부족했던 것 같았다.
그런 중요한 시합을 위해서는 마라톤을 할 선수에게 힘을 비축하도록
배려를 해야만 했는데, 전날 저녁에는 2시간 동안이나 보초로 세웠고,
마라톤이 있던 날은 기념식에 참가해 42 kg 닉삭을 메고 완전무장에
권총까지 찬 체로,
오전 내내 뜨거운 태양아래서 검은 베레모를 쓰고
기념사를 들은 후에 분열과 사열을 했기 때문이다.
그 때 열을 받아서 지치기도 했지만, 전날
밤에 보초를 교대 한 후에
힘내라며 준, 구운 통닭 한 마리를 급히 먹고서 바로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그만 체하고 만것이다. 그런 탓에
나는 아침밥을 걸러야만 했고
거북한 뱃속과 나쁜 컨디션 때문에, 기념식이 진행되던 오전내내 식은
땀을 줄줄 흘려야만 했었다.
170
창립기념 마라톤대회 .
그러나 그렇게 체한 상태로 나는 “달리면 괜찮아지겠지” 라고 막연히
기대하면서 마라톤 대회 출발선에 섰었다. 그러나 평소에는 출발선을
떠나 경쾌하게 내달리곤 했던 나는, 출발 때부터 불편한 배에 신경을
쓰면서 무거운 몸으로 출발선을 떠나
달리기 시작했었다.
그런 상태로 뜨거운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고 달려 어렵게 15 km 쯤
거리의 반환점을 돌았을 때에,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완전히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 그 때 평소와는 다르게 힘겹게 달리는 나를 위해 대대장
집짜를 타고 대대선임하사는 계속 큰소리로
격려했지만, 나는 기어이
2 위로 달리다가 3위로 그리고 4위로 뒤처지기 시작했었다.
그 때부터서 나는 오직 골인점인 여단정문이
나타나길 바라면서 마치
술에 취한 듯이 비틀거리며 뜨거운 열기를 내품는 비포장 길을 달리고
달렸다. 그토록
고통스럽게 달리면서 구부러진 코너 만 돌면 분명히
골인점이 나타나리라 굳게 믿으면서 나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코너을 돌았을 때, 기대를
했던 골인점은 보이지않고 2 km가
훨씬넘게 뻗어있던 마지막 길을 보고는, 나는 완전히 2 다리가 풀리며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거치른 도로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뒤따르던 앰브런스에 실리게 된 나는, 그 때까지 소화를
못한 전날 밤 급히 먹은 통닭을 모조리 토했고, 마지막 똥물까지 토한
듯 했을 때는 갑자기 혀가 굳어져서 말문이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감았던 두 눈에는 계속해서 밝게 빛나는 섬광이 명멸하기 시작했으며,
' 아!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죽음 문턱에 이른 듯한 생명의 위기감를
느끼면서 정신은 점점 흐려져 갔었다. 171
그런 후 꿈속인 듯 여단 의무대에
도착한 후에, 5 % 링겔을 맞으면서
군의관이 묻는 말에 말문이 막혀 대답을 할 수가없었던 나는, 링겔을
맞으며
몇 분이 지난 한 순간에 “어머니!”하고 크게 외마디를 지르며
말문이 트였고, 곧 바로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잠이 들었던 내가
다음 날 아침에 늦게서야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 잠결에
나는 나의 안부를 확인하려고 온 대대
참모에게 여단의무대의 선임하사가 애써 요청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곳 여단 의무대에 꼭 필요한 대원이니
보내주셔야 하겠습니다.”
“안됩니다. 임 상병은 4대대의
마라톤 선수이기도 하지만 경연대의
팀원이라서 절대로 내어 줄 수가 없읍니다” 바로 붙어있던 의무대의
사무실에서 흘러나오던 소리를 누워있던 나는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 때 의무대의 선임하사는 얼굴이
순해보이는 내가, 의무 주특기를
갖고도 일찍 힘든 공수교육을 수료해서 공수윙을 단 것을 확인 했고,
말단 중대에서 힘든 훈련의 연속이었던 경연대 팀원으로 복무하면서
등과 허리까지 벗겨진 채 많은 고생을 하는 것을 알았고,
마라톤에서
비틀거리며 억척스럽게 뛰던 나를, 무척 안쓰럽게 생각하고는 의무대
요원으로
불러서 함께 일할 욕심이 났던 모양이었다 .
검은 베레
보아라 장한 모습
검은 베레모
쏜살같은 우리를 누가
맞서랴
하늘로 뛰어 솟아
구름을 찬다
검은 베레 가는 곳에 승리뿐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내가
지킨다
안되면 되게하라 특전부대
용사들
아~아! 검은 베레 무적의 사나이
172
첫댓글 인생의 굴곡이 영상처럼 잘 묘사, 읽는 독사의 궁금증과 기대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십니다.
훈련이 군대에만 있겠습니다. 인생이 훈련의 연속아니겠습니까?
인간관계에서 잘 감내하고 최선으로 삶을 대하는 임길성 선쟁님의 인내력을 존경합니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네요. 스트레스 날리는데 노래가 최고 아닙니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귀한 댓글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글을 실은 후에 '수정'을 계속 할 수 있게
바뀐 것을 환영합니다. 이전에는 글을 실은 후 수정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많이 불편했습니다.
글을 싣기전에 확인하고 싣지만 실은 후에 다시 보면 많이 어색해서 계속 수정하고 있습니다.
좌충우돌격으로 지냈던 군 생활을 좋게만 봐주셔서 깊이 감사드리며 애들 처럼 기뻐합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