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이란 '나라를 지키고자 희생·공헌한 국가유공자들의 희생·공헌에 보답하는 것(공을 갚는 일)'입니다, 국가 보훈대상자는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과 국가의 수호 또는 안전보장,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의 발전, 국민의 생명 또는 재산의 보호 등 공무수행 등을 위하여 특별히 희생하거나 공헌한 자와 그 유족 또는 가족으로서 국가보훈 관계 법령의 적용대상자가 되어 예우 및 지원을 받는 분들이라할수 있습니다.
6월은 보국보훈의 달입니다. 하여...
6월의 정기모임을 북한산 둘레길로 정하였지요, 결혼시즌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적은인원이 참석되긴 하였지만 나름대로 조촐한 가운데 의미가있고 즐거웠던 하루가 되었습니다.
특히 둘레길 코스가 이준열사등 순국선열들의 묘소등이 함께있는 둘레길이어서 더더욱 의미가 있었던 정기모임이 되었습니다.
호국보훈은 6월 한 달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가지고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동창 희제님의 부친 조 시원(時元)선생께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시다가 돌아가신 독립투사의 한분이십니다.
〚조시원(趙時元, 1904년 10월 23일 ~ 1982년 7월 18일)선생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조용원(趙鏞元)이며, 아호는 호일(胡逸)이다.
경기도 양주 출생으로 조소앙의 친동생이다. 중국으로 망명한 둘째형 조소앙과 다른 형들을 따라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 광복 시점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그의 형제들은 6남 1녀중 조소앙과 그 자신을 포함한 여섯 명이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 가문이었다.
상하이의 대학에서 수학한 뒤 1928년 청년 조직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베이징,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의 김무정, 동만청년동맹의 양세봉 등이 이때 조시원과 함께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1930년에는 상하이에서 통일 전선인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했다. 1935년 조소앙과 홍진의 월간지 《진광(震光)》 발행에도 참가했다.
1938년 임시정부 선무단장, 1939년 임시의정원 의원, 1940년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을 지냈고, 광복군 창군에 참가한 뒤 간부로 활동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그의 부인인 이순승여사께서도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받았으며, 광복군 출신의 딸 조순옥과 사위 안춘생(전 독립기념관 관장) 역시 독립유공자이다.〛 이상은 위키백과에 기록된 희제님의 아버지 이신 조시원 선생의 프로필이다. 정말 대단한 집안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6월의 둘레길은 더더욱 의미가 있었다. 다만 개인사정으로 인하여 그와 함께하지 못한것이 아쉽기는 하였지만.......
우리령길 입구에서 시작되는 1코스와 2코스 연이어 3코스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트레킹코스는 그리 어렵지도 않은, 난이도가 약한 길이고 소나무등 숲이 우거진 시원한 코스이다. 특히 2코스에 집중되어 있는 순국선열들의 순례길이 우리의 마음을 경건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호국불교의 흔적 또한 여러군데 있어 학창시절의 역사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또한 중간에 사찰이 여러곳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화계사는 규모면에서도 다른 사찰보다 훨씬 클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야사도 많이 전해지는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다.
화계사는 1522년(중종 17)에 신월 선사(信月禪師)가 창건한 절이다. 원래는 고려 때 법인 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화계사 인근에 보덕암(普德庵)을 세우고 오랫동안 법등을 이어왔는데, 신월 선사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화계사라고 하였다. 그래서 절 측에서는 보덕암을 화계사의 전신으로 여긴다고 한다.
화계사가 창건된 조선시대는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펴던 시기였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500년을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에서는 가장 어두웠던 시대로 꼽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정책적으로는 불교를 탄압하였으나 실제로는 왕실에서까지 불교를 믿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서울 근교에는 화계사를 비롯해 도선사와 흥천사, 망월사 등 왕실 사람들이 드나들던 절이 꽤 많이 남아 있다.
화계사는 창건 때부터 왕실 가족이 참여하였다. 신월이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의 도움을 받아 법당 3처(處)와 요사 50칸을 짓고 절 이름을 화계사(華溪寺)라 한 것이다. 그러나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1618년에 화재로 전소되어 이듬해 3월 도월(道月)이 재건하였는데, 이때는 덕흥대원군 (德興大院君)가문에서 시주하였다.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일곱째 아들로 선조의 생부이다. 그리고 1866년에 용선(龍船)과 범운(梵雲) 양 선사가 불전과 승방 건물들을 중수할 때 시주한 사람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다.
왕실의 비호 아래 절의 특색을 살리면서 착실히 발전해온 화계사는, 특히 흥선대원군의 원찰이라 불릴 정도로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원군이 화계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부인 여흥 민씨가 이 절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 일화가 이 절에 전해진다.
어느 여름날, 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너무 목이 말랐는데, 때마침 느티나무 아래에서 동자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 사발을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신기해서 연유를 물으니 만인萬印이라는 스님이 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원군은 만인을 만나게 되었으며, 만인은 대원군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는 자손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충청도 덕산德山의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가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니, 남연군 묘소를 그곳으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후에 대원군이 가야사를 찾아가 돈을 써서 금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남연군의 묘를 썼다. 본래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니, 500리나 되는 곳으로 옮긴 것이다. 묘를 이장한 지 7년 후인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이다.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대원군이 오랫동안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대원군은 절 중창을 위해 시주를 하였으며, 전각 곳곳에 자신의 글씨를 써놓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한글학회 주관으로 이희승, 최현배 등 국문학자 9인이 화계사에 기거하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화계사를 끝으로 오늘의 걷기를 끝내고 드디어 김 거사님이 기대하고 고대하는 뒷풀이 시간. 이곳 저곳을 찾아헤메던중........ 드디어 찾아낸 빈내떡에 지평막걸리집을 거쳐 오래간만의 4각링에서의 끝없는 혈투까지................ 종합트레킹을 마치고 6월 00일 평화누리길에서의 오디 체험번개팅을 약속하며, 각자의 보금자리로 ...... 안녕
<남 과 북>
<뭐니 뭐니해도 먹는 즐거움이 제일이다>
<4.19기념탑을 바라보며..>
<내 피부는 내가 지킨다->
<하나,둘 -하나,둘>
<이준 열사의 기념탑 앞에서서>
<안주가 빨리나와야 할텐데....>
<정말 먹음직 스럽네>
<지평막걸리가 너무 맛있어 ~ 근데 저 아저씨 막걸리땜시 아닌가벼>
<나를 두고 가지마! >
<폼들은 세계 선수권자임>
<겔러리들은 짜장면이나 먹으면서....>
<공부들을 저렇게 열심히 했으면 지금쯤....> - 그래도 이 나이면 똑같지 않을까?
첫댓글 내당구실력은 50정도 였는데 지금도 그실력은 변함없을거야 ? 아주오래전에 친구들 껨돌이하던 기억이 새롭다. 삼양동 에서 말이야. 맘을 비워야 공이 잘맞는데 욕심이 그놈의 욕심이...건강한 모습들이 보기좋다 .
수고 하셨습니다. 푸른하늘님,
언제나처럼 옛날 이야기도 들려 주시고,
또 어느새 자랑스러운 항일 독립지사의 후손인,
우리 친구 조희제군 부친의 족적까지 알려 주신 푸른하늘님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역사 열정에 경애를 드립니다.
수고많이 하셨어 푸른하늘 그대가 있어 둘레길 녹음길은 항상즐거워 다른 동기생들도 많이 참석하여 건강한 동행길을 같이 햐였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