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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개갑장터 순교성지 - 동행 순교의 길손이 되어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157-1(도로명 주소는 공음면 선운대로 91)에 위치한 개갑 장터는 조선시대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매우 번창했던 시장이었다. 그러나 구한말 의병들의 물자보급소와 연락처로 활용되자 일제에 의해 폐쇄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곳은 또한 무장현(茂長縣, 지금의 고창) 출신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최여겸 마티아의 순교 터이기도 하다. 윤지충과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된 그는 고향 무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는데 힘썼다. 신유박해 때 체포된 그는 무장 관아와 전주 감영, 한양 포도청과 형조 등지에서 굳건히 신앙을 증언해 끝내 사형 선고를 받고 고향으로 이송되어 개갑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개갑 장터 (향토문화유산 제1호)
개갑(일명 凱歌里) 장터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한다. 조선 시대 이곳 공음 고을의 대종을 이루는 성씨는 전주 최씨와 안동 김씨이다. 두 성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그들의 조상이 임진왜란 때 피난차 여기에 머문 데서 연유된다.
그중 안동 김씨에 김질(金質, 호는 永慕堂)이라는 효자가 있었다. 진사로서 1496년(연산군 2년)에 동음치면 개가리(개갑)(현 공음면 석교리)에서 출생한 분으로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여 부모상과 조부모 승중상(承重喪)등 도합 12년간을 시묘살이로 일관한 사람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생전에 꿩 고기를 몹시 좋아 하셨기에 그는 매년 12월 제사 날에는 짚신을 삼아 그곳에서 8km나 되는 안장머리 장[鞍子市場](현 海里市場)에 가서 짚신을 팔아 꿩을 사서 제물로 쓰곤 하였다.
어느 해 눈이 많이 내려 시장이 서지 않아 제물을 구할 수가 없어서 크게 걱정하였다. 그는 그의 불효로 인하여 하늘이 내린 벌로 알고 제삿날을 맞이했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린 그날 석양 무렵에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날아 들어와 벽에 부딪쳐 죽었다. 김질은 그 꿩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고이 모셨다. 또 제사에 쓸 간장을 쥐가 흐려놓아 종일토록 통곡하였더니, 밤새 쥐들이 장독 아래에 떼 지어 죽어 있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다음 해에도 짚신을 등에 지고 눈길을 헤쳐 제물을 구하기 위하여 안장머리 장에 가는 도중 때마침 무장 원님께서 그 곳을 행차하다가 그의 모습을 보고 이 추운 날씨에 무엇 하러 가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원님은 김질의 효성이 지극함을 극찬하고는 그를 위하여 개갑(개가리)에 저자(시장)를 세워 주어 평생토록 눈길에 장을 보러 가는 고생을 덜게 되었다.
그 뒤로 퍽 번성해 오던 개갑시장은 한일합방 후 구한말의 의병 활동을 위한 보급소와 연락처로 낙인이 찍혀 왜인들이 물산의 중앙집산지가 못 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끝내 없애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장터의 흔적조차 없이 그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 개갑장이 세워진 200년 전만 해도 100호가 살았고, 1925년경만 해도 10여 호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개갑장은 전국에서 유명한 우시장으로 우시장이 서는 달인 7월에는 많은 소와 사람으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고창군은 2004년 6월 개갑장터의 역사적 · 문화적 가치를 인정해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하였다.
순교자 최여겸 마티아 - 고창 지역의 첫 순교자
최여겸은 1763년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동음치(현 고창군 공음면)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그는 일찍이 진산 출신 복자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또 혼인한 뒤에는 처가가 있는 충청도 한산에서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1759-1801년)를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이후 고향 무장으로 돌아온 최 마티아는 충실히 교리를 실천하고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파하는데 힘썼다.
최여겸은 고향에서 열렬히 전교하여 흥덕 · 고창 · 영광 · 함평 등지에서 그가 입교시킨 사람은 기록상에만 28명이 된다. 무장에 사는 조카 최수천, 최일안, 함평의 남중만, 흥덕의 김처당, 영광의 이화백 등 많은 사람을 입교시켜 전라도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최 마티아는 일단 한산의 처가로 피신하였다. 이때 무장에서는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결과 최 마티아는 4월 13일 한산에서 체포되어 일단 그곳에서 문초를 받고, 감사의 명에 따라 고향 무장(茂長)으로 이송되었다.
최 마티아가 무장 관아에 이르자, 관장은 곧장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문초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어떠한 형벌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하였다.
이곳에서도 최 마티아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옥중에서 열렬한 신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韓正欽, 1756-1801년)와 김천애 안드레아(金千愛, 1760-1801년)를 만나 순교의 동행인이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그 후 최 마티아와 동료들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해읍정법(該邑正法)에 따라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최 마티아는 고향인 무장으로, 한정흠은 김제로, 김천애는 전주로 이송되었다. 무장 관아로 이송된 최여겸은 며칠 후 그곳 우시장 개갑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형조에서 최여겸 마티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여겸은 처음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이후로는 이존창을 따르면서 교리를 독실히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성지 개발 과정
전주교구 고창 본당은 이런 역사적 · 교회사적 사실에 근거해 2002년부터 고창군과 함께 개갑 장터를 가톨릭 성지로 조성하고, 인근 유적지와 연계해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2004년 1차로 부지를 매입하고, 2009년부터 고창군과 함께 총 16,500㎡(5,000여 평) 규모의 부지를 추가로 마련한 후, ‘최여겸 마티아 순교터 성지조성 개발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그곳에 순교 현양탑과 야외제대, 400m 거리의 십자가의 길 등을 조성하였다. 12m 높이의 순교 현양탑과 야외제대 벽면은 최여겸 순교자의 활동상과 순교를 주제로 한 모자이크 색유리화로 장식하였다.
2013년 9월 28일, 오랜 준비 끝에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의 주례로 최여겸 마티아 순교성지 축복식과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하였다.
2015년에는 복자 최여겸 마티아 순교터 표지석을 세우고 부활동산을 조성했으며 2020년에는 마굿간 경당, 2021년에는 최여겸 마티아 수도원 축복식이 있었다. 기타 다양한 조각상을 배치하는 등 전주교구와 고창 본당 그리고 고창군은 개갑 성지를 서남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성지로 개발해 가고 있다.
개갑장터 도착은 오후 6시경이었다. 우선 이곳이 장터라기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무슨 장터가 집 한 채 없는 들판에 있단 말인가? 큰 도로변에 개갑성지 표지판과 표지석이 있어 이곳이 개갑장터였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표지석 뒷면에는 산상수훈 중의 한 구절인 의로움으로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뜻의 성구가 새겨져 있다.
순교 현양탑
드넓은 잔디 광장에는 색유리 모자이크로 된 높이가 12m나 되는 순교 현양탑이 솟아 있다.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최 마티아 순교자의 순교와 부활을 주제로 그렸다. 맨 꼭대기 단은 비워져 있는데 이는 하늘나라이다.
뒷면은 최 마티아 순교자가 천사의 인도로 하늘에 오르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모자이크화는 원로 유리화가 남용우 마리아의 작품인데 이 성지의 야외제대 벽화, 십자가의 길 등의 모든 모자이크화는 이 화가의 작품이다.
부활동산 가는 길에 독특한 십자가 형태의 최여겸 설명판이 있고, 최여겸 순교복자의 참수터 표지석이 땅에 박혀 있다. 개갑 장날 이곳 우시장에서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던 것이다.
부활동산 - 예수님 무덤
부활동산은 작은 인공 언덕이다. 대형 십자가가 높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 예수성심상과 피에타 상이 있다. 피에타 상 반대편엔 빈 동굴이 있는데 예수님의 무덤이다. 예수님이 막 부활하셔서 관에서 나오는데 여인 셋이 이를 놀라면서 지켜보고 있다. 너무나 극적인 순간이다. 부활동굴 지붕에는 승리의 십자가를 들고 하늘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자이크화가 세워져 있다.
야외 제단
잔디광장 맨 뒤쪽에는 야외 제단이 있다. 고인돌 같이 커다란 자연석 제대와 뒤편에 색유리 모자이크 벽화가 둘려져 있다. 최 마티아가 천사의 안내로 하늘에 올라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가운데 있고 그 좌우로 최 마티아가 살았을 적에 전교한 28명의 교우들이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죽을 때는 과연 몇 사람이 지켜볼 것인가? 전교를 많이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가?
야외 제대 주변 잔디광장 주변에는 십자가의 길이 색유리 모자이크화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부활동굴 부근까지 이어져 있다.
외양간 경당
경당 입구에는 아기 예수님을 업은 성모님에 서 계신다. 성전 안에 들어나니 맞은편 정면에는 투명 유리로 되어 있는데 야외제단과 벽화가 유리창을 통해 주존 십자고상처럼 들어앉는다. 대신 십자고상은 왼쪽으로 약간 비켜 서 있다. 마치 불전에서 본존불 대신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적멸보궁과 같은 방식이다. 두 덩어리 돌과 쇠 막대기 두 개로 이루어진 십자고상이 특이하다.
최여겸 마티아 수도원
한국순교성지복자수도회 소속 분원으로 1921. 5월에 건립하여 축복식을 올렸다. 현재 수사님이 실제 거주하며 수도원 경내 많은 건축, 시설은 설치미술가 강효명의 작품이다. 벽면에 청동상이 인상적이다.
전돌로 짜맞춘 견고한 건물이 수도원의 특징을 잘 살려주고 있는데 벽면에는 작가의 회심의 작품 청동상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질 때 옆에서 지켜보시면서 죽은 아들의 손을 잡기 직전의 성모님의 애절한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이 순례자 쉼터는 젊은 나이에 하느님 품으로 먼저 떠난 고 김성연(안토니오)를 기억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담아 봉헌되었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18시 40분경 개갑장처 순교자 성지 순례를 마쳤다. 이제 숙소지인 영광으로 가는 일만 남았는데 내일 일정에 잡혀있는 무장 관아가 바로 인근에 있기에 좀 무리이지만 오늘 들리고 내일은 좀 여유를 갖자는 의견이 나와 무장 읍성으로 향했다.
무장 읍성 및 관아(사적 제346호) |
무장읍성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석축 읍성이며 무장 관아는 이 성안의 중심이 되는 관청 건물이다.
무장 읍성은 1417년(조선 태종17) 왜구의 노략질과 침입을 막기 위해 무장진(茂長鎭) 병마사 김저래(金著來)가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茂長縣)을 두고 축조한 성이다.
무장 읍성은 높이 60m의 사두봉(蛇頭峰)을 중심으로 구릉성 야산을 장방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평지 읍성이다. 우리나라 읍성들이 주로 배산임수형의 풍수적 지형에 입지하고 있는 반면에 무장읍성은 구릉성 야산으로 이루어진 너른 들판 한가운데의 분지형 지형에 입지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축성 방법과 규모는 내벽과 외벽을 모두 돌로 쌓은 협축식으로, 둘레는 1,140m이며, 동벽 228m, 서벽 258m, 북벽 314m, 남벽 340m 정도이다. 그리고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해자(垓字)도 있었는데 둘레 2,127자로서 성벽의 거의 두 배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자는 서벽과 남벽, 북벽에서 일부 확인되었다.
무장 읍성은 행정적인 기능보다 군사적인 거점 지역으로서의 기능이 더 강한 읍성인데, 이것은 무장현의 설치와 함께 무장진(茂長鎭)의 병마사가 현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현재 있는 건물은 남문인 진무루(鎭茂樓)가 복원되어 있고, 동헌 취백당(翠白堂)과 송사지관(松沙之館)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객사(客舍)가 있다.
진무루(鎭茂樓)
진무루는 1417년 읍성 축조 때 초창되었는데, 진무루의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1581년 고쳐 세워진 이후 다섯 번에 걸쳐 개건과 중창이 계속되었다. 1975년 남문 석축 보수, 1984년 해체 보수 등을 걸쳐 1990년대에도 보수와 정비가 이루어졌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성문 방어시설인 옹성(甕城)도 존재한다.
무장 동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동헌은 현감이 집무하던 곳으로 객사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헌은 무장 읍성축성 당시 창건되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나, 1565년(명종 20)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무장초등학교 교사(校舍)로 이용되었다. 1983년 원형에 가깝게 중창을 한 후 전면에 취백당(翠白堂)이란 현판을 걸어 두었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네 귀에 추녀를 설치하고 겹처마 형식을 하여 건물 전체가 장중한 느낌을 준다.
무장 객사(客舍)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무장 객사는 1581년(선조 14)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1649년(인조 27), 1736년(영조 12)에 중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제강점기에는 면사무소로 이용되었다가 199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1988년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문관이 이용하는 좌익사(左翼舍)는 1895년(고종 26)에 신축했음이 밝혀졌고, 무관이 이용한 우익사(右翼舍)는 1849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어 초기에 객사로 세운 것이 아니라 중수 과정에서 객사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객사의 규모는 먼저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송사지관(松沙之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전 좌우의 익사(익헌)는 4칸이며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높이 80㎝의 축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가운데에 계단을 두었다. 돌계단 마무리 옆에는 태극무늬, 측면에는 동물과 나무 구름무늬 등이 양각되어 있고, 계단 양 옆의 축대 돌에도 연꽃과 꽃병에 꽃이 담긴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외에도 성황당이 성내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책실(冊室)·작청(作廳)·현사(縣舍)·읍취루(揖翠樓)·문루(門樓)·관노청(官奴廳) 등의 건물 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중 읍취루(揖翠樓)는 복원됐다.
오후 6시가 넘어 도착했기에 시간에 쫒겨 가며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바빴다.
남문의 누각은 진무루(鎭茂樓)다. 진무(鎭茂)는 무장진(茂長鎭)을 뜻한다.
옹성을 낀 남문 진무루를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난 넓은 길을 가면 길옆에 큰 누각이 하나 나온다. 복원한 읍취루(挹翠樓)이다. 읍취(挹翠)는 푸른 경치나 기상을 끌어들인다는 뜻이다. 아마 객사의 부속 건물로 음풍이나 접빈의 기능을 했을 것이다.
읍취루 아래에는 연지(蓮池)가 있다. 이 연못은 2015년 발굴 때 우물과 함께 드러났다. 직사각형 형태로 자연석 석축을 쌓아 만들었고 연못 안에 사각형 섬이 있는데 아마 건립시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의거하여 원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 중앙에는 정자의 기초로 보이는 초석이 발견되었으며 나무다리 목재도 발견되었다.
이 연못은 사두봉(蛇頭峰) 전설에 나오는 용소(龍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서 안개가 나와 퍼져 고을을 뒤덮으면 이 기운으로 인재(人才)가 나오고 주민들의 잘 살게 된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마을의 걱정, 근심을 없애기 위해 뱀의 머리에 속하는 사두봉을 깎아내어 연못을 매웠는데 이로 인해 인재가 나오지 않을까 하여 옛날 깎아낸 사두봉 높이만큼의 큰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을 만들어 고을을 번영하게 했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무장 객사(茂長客舍)
객사는 공무로 그 지방을 찾아온 관리나 사신을 묵게 하는 숙소이다. 건물 구조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정전(중당)이 있고 좌우에 익사(익헌)가 있는데 이곳은 관리의 숙소다. 중당은 맞배지붕이고 좌우익사는 팔작지붕이다.
관리가 이 관가를 찾아오면 가장 먼저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배알하고 수령은 매달 초하루, 보름에 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린다. 따라서 관아의 그 어느 건물보다 위격이 높고 규모도 크다. 전국의 남은 객사중 기단과 객사가 원형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예다.
사두봉(蛇頭峰)과 느티나무 전설
성 북쪽에서 시작하여 읍성 중앙을 향해 남쪽으로 향해 뻗어오다가 객사 뒤쪽에 문득 멈추어버린 구릉을 사두봉(뱀머리 봉우리)라고 한다.
무장현은 동북방에는 황새의 모양을 한 한재산이, 읍성 안에는 뱀의 머리와 같은 사두봉이, 읍성 남쪽의 남산이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황새와 뱀과 개구리가 먹이를 가까이 두고 있는 형국이어서 백성들이 항상 먹을 것이 넉넉하여 기근이 없이 풍요롭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안진머리(지금의 해리면 안산리) 장날이면 매번 젊은이가 한 사람씩 죽어갔다. 어느 날 도승이 나타나서 말했다. 황새는 뱀을,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으니 살인이 그칠 새가 없을 것이다. 뱀인 사두봉을 깎아내려야 황새와 개구리가 살아남을 수 있어 살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두봉을 깎아내면 옛날처럼 번창함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현감은 도승의 말대로 사두봉을 깎아내어 사두봉 아래 용소(龍沼)를 매워버렸다. 과연 그 이후 사람이 죽는 일은 없어졌으나 무장의 좋은 기운이 없어질 것을 우려하였는데 또 다른 도승이 지나가다가 일러주기를 사두봉에 나무를 심어 이 봉우리를 옛날의 높이만큼 자라게 하고, 개구리 연못을 만들면 뱀의 먹이가 생기게 되어 계속 번영할 것이라고 했다. 현감은 그럴듯하게 여겨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느티나무는 그때 심은 것이고 개구리 연못은 무장 장터라고 한다.
옛날의 무장현을 인증이라도 하는 듯 객사 옆에는 20개 가까운 수령들의 공적비가 도열하여 있다. 흩어져 있는 것을 한 곳에 모은 것이다.
읍성 가운데 가장 중심부가 되는 무장 관아는 무장읍성의 가장 깊숙한 성의 뒤쪽에 있었다.
무장 동헌
동헌(東軒)은 수령이 정무를 보던 관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주로 동쪽에 있다고 동헌(東軒)이라는 일반 명칭으로 부른다. 수령의 사적 영역인 살림집을 내아(內衙), 또는 서헌(西軒)이라고 부르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은 동헌뿐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동헌 이외에 내아, 책을 보관하던 책방, 휴식 공간인 육양정(六陽亭)이 있었다고 한다.
동헌 당호인 취백당(翠白堂)의 ‘취(翠)’는 푸른 나무의 기상을, ‘백(白)’은 결백을 뜻하는 글자인데 달리 말하면 ‘청백(淸白)’과 같은 뜻이다. 솟을 문인 아문(衙門)이 좌우 문이 개방된 채로 있다.
그런데 이곳 어느 안내판이나 설명에도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것은 없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성지로는 지정되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최여겸 순교자가 이곳 무장현에서 전교를 하다가 적발되어 전주, 한양 형조 등에 까지 올라가서 사형을 받았고, 고향 무장에 돌아와서 개갑장터에서 순교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증명되는 이상 이곳 동헌이 박해의 현장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마당에 놓인 각종 형구는 순교자를 국문 취조했던 형구라고 해도 무방하다. “만 번 죽여도 만 번 죽여도 개의치 않는다.(萬死無惜)”는 순교자의 기개가 들리는 듯하다.
또 하나의 연못과 복원 후의 생태 회복
무장(茂長)의 고지도와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면 무장읍성 안에는 객사 뒤편 사두봉을 중심으로 뱀의 눈처럼 좌우에 2개의 연못이 있었다. 이 연못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 읍성 철폐령에 따라 성곽이 헐리고 읍성의 기능이 없어지면서 메워진 후 2004년까지 무장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사용되어 왔었다. 2009년 연못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그 형태가 확인되어 2014년 운동장의 흙을 걷어내고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런데 연못 북원 후 이곳에 물이 고이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00여 년간 잠들어 있던 연꽃의 씨가 싹을 틔워서 연지가 된 것이다. 자연의 회복력은 이렇게 강하다. 지금 연지는 예전의 무장읍성 연지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이 연못이야말로 역사의 질곡에 허물어지고 벗겨졌던 예 무장지역의 영화를 다시 꽃 피우고 되살리는 시발점이자 상징적인 장소라 할 것이라고 안내판은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정자도 복원되어 있다.
이렇게 바쁘게 무장 관아를 둘러보았다. 벌써 7시가 넘었다.
요컨대 무장읍성은 삼국시대 이래 요지였던 무송현과 장사현을 합쳐 무장현으로 통합되었던 점이 괄목할 만하다. 무장현의 축조는 여말선초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들의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이다. 또한 조선 시대 해안 방어를 위해 축조된 무장현에는 무장진을 두어 군사적인 기능을 한층 강화시킨 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무장읍성은 1894년 동학 농민군들이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1894년 3월 20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운 창의포고문을 선포하고 거국적인 봉기를 선언했다. 동학 농민군의 흔적은 무장읍성 객사의 현판을 갑오 농민군의 자치 기구인 집강소라고 붙인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 아쉬운 것은 전주의 초록바위가 천주교 박해와 동학운동의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소개하듯 이곳 동헌도 동학의 봉기에 덧붙여 천주교 박해의 현장임을 밝혀주었으면 하는 점이다. 앞으로 이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성을 나왔다.
그리고 아직 성지로 지정되지 못함도 아쉽다. 비록 성지로 지정되기는 해도 현재 아무 순교의 흔적도 볼 수 없는 경주관아와 옥터에 비하면, 이곳은 당시 건물은 아니더라도 죄인 국문의 현장인 복원된 동헌이라도 있지 않은가?
무장 관아를 떠나 어둑해지는 일몰의 하루를 지켜보며 숙소인 고창 힐링카운티에 도착하니 8시가 가까웠다. 일단 숙소 체크 인을 하고 아랫마을 풍천장어를 주메뉴로 하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이 지역 특산주인 복분자자주로 피로를 푼 뒤 숙소로 돌아와 지친 몸을 눕혔다.
영광(靈光) 순교자 기념 성당 - 영광(榮光)의 순교자들 |
2023. 06. 11(일)
어제 강행군을 했기에 오늘은 퍽 느긋하다. 06시 경에 일어나서 석정온천 휴(休)스파까지 걸어 내려가 목욕을 하고 숙소 구내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에 보니 이곳은 휴양시설답게 호수를 중심으로 아늑하게 환경이 잘 조성되어 편안함을 준다. 오늘 일정은 영광 순교자 성당 순례뿐이다.
영광에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
영광은 지금은 전남에 속하지만 천주교가 먼저 시작되었던 전북에 인접한 지역이기에 복음이 전파된 유리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영광 지역의 복음도 호남의 사도이며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인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년)를 먼저 들 수밖에 없다. 그는 15,000마지기나 되는 많은 토지를 소유했는데 토지의 분포도 넓어 생가 초남이가 속한 전주뿐만이 아니라 인근 지역인 김제, 금구, 영광 등도 포함이 된다고 추정한다.
신유박해 때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을 신문하던 신문관도, “지금 허다하게 체포된 자는 너의 인척이나 가객이 아니면 모두 노비들이거나 소작인들인데, 그 무리가 거의 몇 개 군에 걸쳐서 성행했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영광 지역에 산재해 있던 유항검 형제 전답의 소작인과 마름 중에 천주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유항검과 비슷한 시기에 서울의 친인척들로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인 유항검의 이종사촌 윤지충 바오로도 또한 영광 복음 전파에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전하는 바, 윤지충은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무장(茂長, 현 고창지역)의 최여겸, 고산(高山, 현 완주지역)의 양언주, 무안(務安)의 고시윤 등에게 전교하여 복음을 전라도 각지로 전파시켰다. 특히 무안(務安)은 영광보다 더 남쪽에 있는 지역이기에 이때 영광에도 충분히 천주교가 전해졌다고 여겨진다.
이는 영광의 이우집 집안과 윤지충 집안의 혼인 관계를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다. 유관검과 이우집이 신유박해 때 신문 받는 과정에서 유관검은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과 영광에 사는 이우집이 서로 격려하며 천주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라고 진술했고, 이우집은 유관검의 권유로 그의 집에서 1795년 무렵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고 진술한 사실도 있다.
그리고 1791년 신해박해로 윤지충이 순교한 후 그의 동생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1764-1801년)는 고산 저구리로 거처를 옮겨 데 교우촌을 형성했는데 이때 영광 사람 윤종백이 포함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윤지헌도 영광 지역 복음 전파에 일조를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광과 인접한 무장현의 동음치면 개갑 출신의 복자 최여겸 마티아(1763-1801년)은 통해서도 영광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혼인한 후 처가가 있는 충청도 한산에서 충청도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1759-1801년)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무장으로 돌아온 최여겸은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고,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파하는 데 힘써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키고 신유박해 시 순교했다. 그가 인근 지역에서 입교시킨 사람은 28명인데 이 중에 영광에 살던 조카 최일안과 영광 고을의 양반인 이화백이 포함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영광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시기는 1791년 신해박해 이전, 우리나라 천주교가 시작된 1780년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
영광 지역의 교세
1801년 신유박해를 받아 영광 지역의 신앙공동체가 와해되기 전의 교세는 어느 정도일까?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 숫자는 이우집, 이종집, 오씨, 이화백, 윤종백, 남조이와 그녀의 남편 김득겸 등 7명이 전부이다. 그런데 이들 7명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처벌받은 신자들 숫자이지 당시 영광 지역의 전체 신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박해 때마다 전체 신자 중 일부만 체포되어 처벌받은 점을 고려하면 신유박해 직전 영광 지역의 신자는 이들 7명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신유박해 때 신문 과정에서 드러난 영광 지역 신자들의 수 7명은 전라도에서 전주 36명, 고산 16명 다음으로 세번째로 많았다. 그리고 처벌된 신자 수도 처형된 신자 3명과 유배된 신자 2명을 합해 모두 5명으로 역시 전라도에서 세번째로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영광 지역의 교세가 전라도에서 세번째로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광 지역의 순교자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광 지역은 1791년 신해박해 이전부터 복음이 전해진 곳으로, 전북 전주 · 고산 · 금산 · 무장 · 김제 지역과 더불어 호남 지역에서 천주교가 다른 지역에 비해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곳이다.
영광 지역 신자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정확한 이름은 모름)가 영광에서 순교했고, 이우집과 최일안은 전주에서 처형당했다. 그리고 이종집과 남조이는 황해도 문화와 운율로 각각 귀양 갔고, 여회장 복녀 강완숙 골룸바(1761-1801년)의 딸 홍순희 루치아가 영광으로 귀양 왔다.
병인박해(1866-1873) 중인 1867년 영광 뜸밭 출신으로 김치명이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1872년 한때 영광 신어실에 살았던 유문보 바오로가 나주에서 옥사로 순교했다.
영광 성당의 연혁 - 설립, 폐쇄, 재설립 과정
병인박해까지 6명의 순교자를 낸 영광 지역에서 공소가 시작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1920년대 초 나주 노안 본당의 서 미카엘 가족이 영광군 백수면 대신리로 이주하자 당시 노안 본당의 카다스(J. Cadars) 신부가 서 미카엘 가정을 방문해 성사를 베풀었고, 그 후 정읍 본당의 김사언 요셉, 목포(현 산정동) 본당의 박기철 토마스 등이 이주해 오면서 영광 지역에 10여 명의 신자가 거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영광 공소는 1930년대 초까지 노안 본당의 헨리(H. Henry) 신부가 관할했다.
1937년 광주지목구(광주교구)가 설정되면서 그해 10월 드디어 본당으로 승격되어 골롬바 외방선교회 소속의 멀컨(T. Mulkearn, 姜) 토마스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멀컨 신부는 대지 1,851평과 20평 정도의 한옥 1동을 매입해 성당 겸 사택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성당을 신축하여 본당의 기반을 다져갔다. 또 성심학원이라는 3년 과정의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200여 명의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이어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재석 요셉 신부는 1941년 준적성국민으로 분류된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수감되었다가 목포 본당으로 전출되었다. 그 이후 영광성당은 침체기를 맞아 다시 함평 본당의 공소로 격하되고 말았다. 이런 사정이 1960년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와 영광 지역 신자 수가 점차 증가하여 교구에서는 미국인 그리스머의 도움으로 1965년 5월 한국 전쟁 당시 전소된 성당 자리에 72평의 새 성당을 재건하고, 그해 12월 15일에 영광 공소를 함평 본당에서 분리하여 다시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본당의 재설립과 함께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 오록(C. O’Rourke, 吳) 가롤로 신부는 1967년 5월 13일에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를 주보 성인으로 정하고 성당을 봉헌했고, 7월에 본당의 종각을 건립해 그달 30일에 1873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제작된 종을 도입 설치했다.
영광 순교자 기념성당 지정 이후
2007년 9월 1일 제18대 주임으로 부임한 문병구 스테파노 신부는 영광 지역 순교자 역사 발굴 작업을 시작하고, 2009년 3월 27일 영광 순교자 고찰(1801년 신유박해) 학술회의 개최했다. 이러한 노력에 이어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는 2010년 9월 10일자 공문을 통해 신유박해 때 목숨을 잃은 영광 지역 순교자들을 기리고자 순교터와 인접한 영광 성당을 영광 순교자기념 성당으로 지정했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영광 순교자기념 성당 앞(현 전남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석장승 앞 남쪽 개울가 인근)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한 이화백과 오씨가 처형된 순교터로 확인되고 있다.
2011년 7월 28일 제19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상준 유스티노 신부는 그해 11월 ‘영광 순교자 현양사업회’를 구성하고, 2013년 7월 27일 영광 순교자기념 성당 신축 기공식을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의 주례로 거행했다. 2014년 6월 20일 “영광성당 75년사”를 발간하고, 그해 6월 28일 영광 순교자기념 성당 축복식을 가졌다.
2015년 1월 13일 제20대 주임으로 부임한 송홍철 루카 신부는 기념성당 1층에 영광순교자기념관을 마련해 2017년 5월 13일 김희중 대주교를 모시고 영광 성당 설립 80주년 기념미사 및 영광 순교자기념관 축복식을 거행했다. 본당 설립 80주년을 맞아 마련한 기념관은 영광의 여섯 분의 순교자와 세 분의 유배자(이종집, 남조이, 홍순희), 초기교회 신자 두 분(윤종백, 남조이의 남편 김득겸)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기념관 내부에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설치하고,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다섯 성인의 유해를 두 개의 성인 유해함에 나눠 안치했다.
9시 반쯤 도착. 성당 주차장에서 나와 성당으로 들어가는데 맨 먼저 맞아주는 것은 순교자의 문이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문은 성과 속의 경계로서 네 개의 칼 모양 기둥은 영광의 순교자 네 분(이화백, 오씨 양반, 김치명, 유문보 바오로)을 상징하고 있다. 기둥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배의 돛과 만장(輓章)의 이미지이며, 가운데 십자가는 조선 시대 죄인의 형틀로써 순교를 의미한다. 입구부터가 비장한 느낌이 든다.
영광 순교자기념 성당의 배치는 다음 안내도와 같다.
순교자의 문을 들어서면 경내의 넓은 잔디밭 가운데는 순교자 조각상이 있다. 잔디밭 맞은편 성전 건물 1층에는 순교자기념관과 소성당이 있고 2층에는 대성당이 있다. 잔디밭 오른쪽에 높은 종탑과 사무실이 있다. 그리고 잔디밭 왼쪽에는 순례자 쉼터가 있는데 이는 구 성당 건물이다.
성전 건물은 타원형으로 교회를 상징하는 배와 물고기 이미지를, 등대 형태의 종탑을 통해서는 순교자의 영광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빛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잔디밭 가운데 있는 순교자 상은 나주 성당의 ‘순교자의 기도상’처럼 거친 현무암 형태의 석재로 조성된 조각상인데 마치 불에 탄 형해와 같이 고통스런 모습으로 세 사람이 각각 시선을 달리하고 있다. 조각상 밑바닥에는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루카 1,38)라는 구절이 염원으로 돌에 새겨져 있다.
순례자의 쉼터 옆에는 큰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그 앞에는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다.
성모상 옆, 순교자기념관 입구 왼쪽에는 영광세서 순교한 4분 순교자의 비와 이해인수녀의 헌시가 있고 바로 십자가의 길이 둘러진 담장 따라 이어진다.
핏빛 사랑으로
작은 풀잎들도
순교자들의 눈물을 기억하는
거룩한 이땅에서
새로운 그리움으로
님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남도의 바람처럼 햇살처럼
우리를 축복하며
일상의 순교 영성으로 살아가다
오늘도 재촉한 고마운 님들이여
찬미 영광 받으소서
바다의 별로 떠오르는
영광의 순교자들이여
처절하게 목숨바쳐
신앙을 증거한 님들의
상사화 닮은 그 핏빛 사랑을
가볍게 말해버린 날들이
부끄럽습니다.
참회의 눈물속에 뜨거워진
하야 기도로 마음 적시며
겸손되이 다짐합니다
님들처럼 우리도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승리자가 되겠다고!
■순교자 기념관
미사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순교자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영광 순교자성당 순교자기념관은 앞에서 말했듯 성당 설립 80주년을 맞은 2017년 5월 13일 건립 개관되었다. 영광성당 순교자와 유배자, 그리고 초기 신자의 순교와 희생정신을 기리고 이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암이었다. 한국천주교사, 본당의 발자취 와 역대 주임 신부들의 사진, 귀한 책자, 본당에 전래된 성물, 현대작가의 성화 등을 전시했다.
전시실로 가는 도중에 영광과 나주, 곡성 지역의 박해 현황을 설명하는 판넬이 있는데 이 중 좀 특이한 것은 여기 영광군이 현재 우리나라 4대종교의 성지임을 밝힌 점이다.
영광 성당 앞 천주교의 순교터는 말할 필요도 없는 천주교 성지이며, 삼국시대 384년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가 영광 법성포이다. 동진으로부터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전했다. 그리고 개신교 영광 염산교회와 야월교회는 한국 전쟁시 북한 공산군에 의해 신앙을 지키다가 각각 65명, 77명이 순교하여 지금 순교탑과 순교비를 세워 현양하고 있다. 거기다 원불교 영산성지가 있는데 여기는 박중빈이 오랜 구도 끝에 깨달음을 얻고 원불교를 창시한 곳이다.
성 한재권(요셉)과 성 정문호(바르돌로메오) 순교자 합장 유해
성 한재권(요셉)과 성 정문호(바르돌로메오)는 둘 다 충청도 출신으로 1866년 병인박해시 전주 대성동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전주 숲정이에서 동시에 순교했다.
순교 성인 4위 유해 합장 유해
성 앵베르(라우엔시오) 주교, 성 모방(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야고보) 신부, 성 김대건(안드레아)신부의 합장 유해 성광이다.
주중직심도’(主中直心圖)
2015년 5월 그래픽 디자이너 강경미(실비아)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복자들을 그린 그림이다. 주중직심도’(主中直心圖)란 ‘주(主)님을 삶의 중심(中)에 두고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곧은 마음(直心)으로 나보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공동체가 되자’는 뜻이라고 한다. 원본은 서울대교구 고덕 성당에 있다. 여기 그 모사본을 전시한 것은 124면의 복자 중 유항검(아우구스티노), 강완숙(골롬바), 최여겸(마티아)는 영광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해설자가 있어 상세히 설명해 주었는데 다 기억하기가 어렵다. 산봉우리가 8개인 것은 여덟 번의 박해를 뜻하며 순교자의 복장이나 자세 그리고 지물 등은 모두 복자들의 신분이나 순교 방법이나 순교자와 관련 있는 특징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발밑에 자라는 민들레는 끈질긴 생명력을 말해준다.
영광 순교자 스테인 글라스 대작
‘핏빛 사랑으로 진복(眞福)을 사신 영광(靈光)의 순교자들’이라는 긴 제목인데 양단철(하상 바오로)의 작품이다. 가로 1m, 세로 2.5m, 12폭(12m)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시기에 순교한 영광 출신 순교자 여섯 분과 유배자 세 분, 당대 신자 두 분의 모습과 삶을 빛과 유리에 담았다. 작품 안의 청기와는 1960년대 영광성당 감실 장식을 본뜬 것이며, 한 폭마다 각 성인의 삶을 집약할 수 있는 상징물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섬세한 유리화에 빛이 투영되는 순간,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영감이 아스라이 잡힐 듯하다
보관 쓴 예수성심상
200년 전 박해시대 어느 사제가 베트남에 가서 양도 받아 가지고 왔다고 하며 이것이 개인적으로 전해지다가 본당에 봉헌됐다고 한다.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정약전의 사위 황사영이 신유박해시 배론의 토굴속에 지내면서 천주교 박해실태를 적어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비단에 쓴 밀서이다. 황사영은 이런 탄압의 전말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켜 청나라 조정의 도움을 이끌어낸다면 박해를 종식시킬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흰색 비단(명주천)에 쓰여졌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가로 62cm, 세로 40cm이며, 아주 가는 붓으로 쓴 깨알 같은 글자의 수는 한 줄에 110자씩 122행에 걸쳐 13,311자로 방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검은 먹이 아닌 백반으로 썼기 때문에 물을 묻혀야 글자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전달자가 체포되는 바람에 편지는 발각이 되어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되고 말았다.
대성당
대성당은 2층이고 1층에는 소상당과 수녀원이 있다.
10시 반 미사를 마치고 이제 순교터를 찾아 나선다.
정문에 나가니 다행히 순교터 안내 표지판이 있어 찾아 가리키는 길을 따라 이곳저곳을 한참 동안을 헤메어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안내 표지판 위치로 돌아오니 문 베드로 형제가 순교 터를 찾았다고 한다. 어딘가 보니 처음에 본 안내 표지판 바로 밑에 순교터 표지석이 있었다. 등하불명이라더니 가까이 두고도 멀리 찾으러 헤멘 결과였다. 사실 이번 순례 중 순교터를 찾는데는 문 베드로가 크게 기여했다. 특히 김제에서 거의 포기했던 한정흠 순교터를 찾은 것 전적으로 문 베드로의 끈질김 덕분이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선 순조 때 세운 석장승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은 확인하지 못했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영광순교자기념성당 정문 앞 영광읍 도동리 석장승 있는 이 일대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한 이화백과 오씨가 처형된 순교터로 추정한다. 그 이유로 이곳은 영광 읍성 밖으로 물이 흐르는 홍교가 있고,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옛 장터이며, 우시장이 있던 곳으로 1832년에 잡귀 · 액 · 살 등 부정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석장승을 이곳에 세운 것도 순교터 추정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 우시장 터가 바로 순교터 표지석이 있는 이곳인 것이다.
12시가 훨씬 지났다. 이젠 점심 해결 수 돌아갈 일만 남았다. 성당에서 교우가 운영한다는 식당을 찾았다. 상당한 거리에 있다. 토우 굴비정식이라는 식당. 1인당 3만원이라는데 그리 잘 차린 상은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음식값이 많이 올랐다는 말도 된다. 좀 늦게 식당 여주인이 우리 자리를 찾아와서 굴비뼈도 발라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준다. 지금 막 영광성당에서 우리와 같이 미사를 드리고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까운 법성포에 가면 먹었다 하면 굴비정식이 5만원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업소의 음식값이 저렴하다는 것을 홍보한다.
식사 후 시간이 넉넉하기에 식당에서 추천해주는 업소가 위치한 법성포에 가니 온통 굴비 간판뿐이다. 백 개도 넘는 것 같다. 단단하게 짚으로 엮은 굴비 20마리 한 가닥에 값은 5만원, 7만원, 10만원 다르다. 크기는 별로 차이는 없는데 잡은 시기에 따라 속살이나 건조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란다.
영광은 천주교 입장에서 볼 때는 교세가 일찍 더 남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반대로 박해 주체인 조정이나 관아로 볼 때는 전북의 천주교세를 영광을 보루로 남하를 저지한 곳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 천주교 순교성지가 광주대교구가 전주교구에 비해 아주 적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로써 전주교구와 광주교의 순례는 마감하게 되었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