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후 산에서 비박을 하며 체력이 바닥난 우리는, 알펜로제 사장님의 배려로 숙소에 들어온 뒤 하루를 뻗어 있다 이튿날 깨어났다. 혼절하듯 자고 일어나니 훨씬 개운했지만, 시차도, 고소도 적응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컨디션이 그새 완벽히 돌아올 리는 없다. 팀 전체가 만신창이가 되어 끙끙대고 있다. 개중에서도 성혁이형은 특히 상태가 심각하다. 심각한 몸살이 와서 고열과 끊임없는 기침에 시달리고 있다. 탈출 당시 가장 힘겨워하던 호석이형도 몸살을 간신히 빗겨난 듯 멀쩡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 비해 주용이형과 나는 비교적 살만한 수준으로 회복이 되었는데, 큰형들이 탈출 때 우리를 대신해 더 많은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사실 그날 밤 선두로 내려간 것도, 형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내려가서 어떤 사고를 당하거나(혹은 사고를 쳐도)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 말이다. 항상 재학생들과 원정을 다니던 나에게, 나보다 등반력이 뛰어나고 시스템에 능숙한 형들의 존재는 아주 특별했다. 필요할 때 조언을 구하는 것을 넘어 우발상황에 뒤를 맡길 수도 있는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내 사고와 행동에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근원이 되었다.
각설하고, 상태가 그나마 나은 둘은 또다시 하루를 날리긴 싫어 숙소 문을 나섰다. 왠지 만년설로 만들었을 것 같은 이름의 ‘샤몬아이스(Chamon’Ice)’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들고, 우리는 장비점, 서점, 프랑스산악연맹 등 종일 이곳저곳을 누벼댔다. 산악연맹에 가서는 직원을 붙잡고 다시 한번 꼬치꼬치 물어댔지만, 역시 고사이 무언가 바뀌었을 리가 없다. 바뀐 것은 보험의 필요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 차이뿐. 또다시 보험도 없이 저 산에 던져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대안을 찾으려 나는 장비점 직원을 하나하나 붙잡아 보험에 관해 캐물었고, 세 명째 되었을 즈음 그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장비점 이름 ‘우 뷔우 컹페어(Au Vieux Campeur)’를 우리에게 내려주었다. 목표 달성으로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호수 옆 암장’ 가이앙(Les Gailands)에 들러 구경을 하고, 숙소에 돌아와 형들이 정성껏 고아놓은 백숙으로 몸보신까지 든든하게 한다. 내일이면 몸이 싹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양을 마친 뒤,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프렌도 스퍼 공부에 열중했다. 영상과 사진을 반복 비교하는 일은 눈을 은근히 피로하게 했지만, 침대에만 누워있던 우리에겐 상당히 흥미로운 액티비티이기도 했다. . . 다음 날이 되어도 차도가 없는 성혁이형을 두고, 나머지 셋은 보험을 들러 쌀렁슈(Sallanches)로 향했다. 날씨는 오늘도 비바람.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산정은 가스에 뒤덮여 숨었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벌써 사흘째 내리는 비가 야속하긴 하다만, 차라리 잠시 미련을 접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것도 이 날씨 덕이긴 하다.
보험 가입은 간단했다. 연회비 25유로를 지불하고‘Au Vieux Campeur Carte Club’에 가입하면 여러 혜택과 함께 글로벌 아웃도어 보험을 제공하는 식이었다. 연간 25유로? 기존의 보험들과 비교했을 때, 이는 귀를 의심할 정도의 충격적인 염가였다. “방금 per year이라 했지?” “통화할 때는 per day라 했었는데?” 웅성웅성. “You heard it right. 25 euros‘per year’.” “대박. Great.”
보험 가입도 했겠다, 눈이 돌아간 우리는 온 장비점을 뒤지며 힐링타임을 보냈고, 호석이형은 돌아가면 야수같이 트레이닝 하겠다며 상당한 가격의‘비스트 메이커 2000’행보드를 질렀다. 오랜만의 열정적인 호석이형이 보기 좋아 나 또한 구매를 부추겼다. (사실 집에 못 박으면 우리 암장에 들고 오겠다는 계산도 했다) 신나게 숙소에 돌아왔으니 이젠 언박싱 타임. 한껏 즐겁게 박스를 뜯던 호석이형 표정이, 잠시 방을 나갔다 온 사이 분노로 돌변해있다. 고급자용 2000이 아닌 초급자용 1000 모델이 들어 있던 것이다. 이쁜 공주님 되려고 ‘프린세스 메이커’ 샀냐고 밤새 놀렸다. 맏형의 희생으로 다시 웃음을 찾아가는 알프스 핫 칠리 클라이머스 팀이었다.
♣ 보험 가입 : Au vieux Campeur 웹사이트에서 가입하거나(우린 온라인으로 가능한지 몰랐었다), 쌀렁슈 지점에 찾아가 2층 중앙에 있는 데스크에서 직원을 통해 가입한다. 2층에서 서류를 받아서 계산대에 가져가 25유로를 지불하면 끝이다. 제대로 등록되었는지 확인하려면, 하루가 지난 후 웹사이트 마이페이지에서 멤버십 번호와 만료일을 확인할 것. ★여권 지참★ ♣
알펜로제 마당에서. 좌 송금진, 우 이주용
뒤늦은 루트 공부와 장비 재정비
가이앙(Les Gailands) 암장
가이앙에서 바라보는 에귀 디 미디 북벽. 모델 이주용.
방에 붙여둔 고추 깃발(꼬기). 우리를 이 따뜻하고 쾌적한 숙소에 머물 수 있게 해준 분들을 잊지 말자.
장비 재정비 중.
잠깐 날이 개었을 때 바라본 에귀 디 미디 북벽.
뒤늦은 루트 공부에 매진 중.
쌀렁슈 행 기차 안에서. 좌 이호석, 우 이주용
Au Vieux Campeur의 Carte Club 안내문. 우측 중앙에 '멀티스포츠 보험'이라 적혀있다.
첫댓글 화이팅!!
멋진 등반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보험 관련 추가사항 : 2022년 6월 약관 기준 헬기 구조 비용, 시신 송환 비용 등 보장. 병원비는 미보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