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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Moses)의 출애굽(The Exodus, “going out”)은 이스라엘의 건국신화이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출애굽기(出埃及記, 탈출기, 脫出記)는 구약성경의 두 번째 부분인데, 야훼가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출애굽이라는 명칭은 ‘이집트에서 나옴’을 뜻한다. 히브리어로는 쉐모트(שמות)라고 한다.
출애굽 이야기의 역사성은 오랫동안 지속된 논쟁의 주제였다. 성경의 내용에 의문을 표하거나 거부하는 학자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내세운다.
(1) 이집트와 시나이에서의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의 부족
(2) 출애굽 이야기는 신화, 전설, 이야기로 간주
(3) 출애굽이 실제로 일어난지 수백 년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역사로 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신학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형태가 변형되었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증거는 성경의 ‘출애굽기’에 서술된 내용을 지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집트의 역사기록에도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 또한 성경의 저자들도 역사적인 배경을 알 수 있는 세부적인 자료들을 남겨두지 않았다. 파라오의 이름조차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버나드 바토 (Bernard Batto)는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에 이르는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고대 근동의 전승에 더 가깝다.”라고 주장하며 동의하는 다수의 학자들을 대변한다.
많은 학자들은 출애굽 이야기가 ‘바빌론 유수기’ 이후에 최종적으로 현재와 같은 내용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고있다. 역사가 캐롤 레드마운트(Carol Redmount)에 따르면 “추측하건대 원래의 출애굽 이야기는 이후의 모든 개정revisions과 변경alterations의 내부 어딘가에 숨겨져있는 듯하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전승은 오랫동안 그 존재와 그 본질과 정확성을 모호하게 만들었고 현재는 그 시기를 결정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모세의 출애굽에 대한 연구를 ‘헛된 노력’으로 간주하며 이를 피하고 있다. 또한 증거 부족으로 인해 출애굽 이야기를 역사의 특정 시점에 연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되었다.
출애굽의 시기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550
출애굽의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16세기까지…. 대체로 많은 학자들이 기원전 13세기 설을 지지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의견일 뿐 꼭 맞는 답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사실 중심이 되는 이집트 연대기 조차도 논란이 많으니…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에서는 이집트의 힉소스 추방과 관련있는 이집트 제18왕조의 초기인 기원전 16세기를 선택했다. 힉소스의 지배 시기를 이집트에서의 성서적 체류나 포로생활에 대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 근거로 그리고 힉소스의 축출을 출애굽의 근거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제일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출애굽 시기에 대한 여러 주장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 기원전 16세기
– 출애굽의 시기가 BC 16세기라는 주장은 BC 3세기의 이집트 헤리오폴리스 제사장이자 역사가였던 마네토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요세푸스와 같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그에 대한 자료가 인용되어 전할 뿐이다. 요세푸스가 인용한 마네토의 주장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은 힉소스와 더불어 이집트에서 축출되었고, 그것은 구약의 출애굽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마네토에 의하면 요셉이 이집트에 도착한 것은 힉소스 왕조 아포피스 제4년이며, 그가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아포피스 제17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네토의 주장에 따르면 출애굽의 시기는 BC 1550년경이 되어야 한다.
– 그리스 역사가 아브데라의 헤카타이오스(Hekataios)는, 이집트인의 힉소스 추방과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탈출, 그리고 다나오스의 아르고스 상륙이라는 전승이 동일한 이야기의 세 가지 변형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 이집트학 학자인 도널드 레드퍼드는 힉소스 족이 이집트를 점령한 사실과 그들이 삼각주에서 무력에 의해서 추방된 대규모 사건들의 반향이 여러 세기 동안 전승되어 가나안 주민들의 공통적인 기억의 핵심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 만약 「출애굽기」,「판관기」, 「사무엘서」, 「열왕기」에서 언급된 연도를 함께 고려하면 출애굽의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554+α년 전, 즉 기원전 16세기로 책정된다.(Rowley, 1950, pp.87-88)
– 팔레스타인에서 행해진 기원전 16세기와 15세기의 파괴는 이집트 원정(우리는 이집트 기록을 통해 이 원정을 알고 있다)의 결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은 13세기 설에 반론을 제기한다.
◎ 기원전 15세기
– 열왕기 기록에 따르면, 솔로몬 성전 건축을 언급하면서 그때를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480년’, 곧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왕상 6:1)이라 하고 있다. 솔로몬의 즉위 제4년은 B.C. 966년경이며, 그때부터 480년 전에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다면 출애굽 연대는 대략 B.C. 1446년경이 된다. (기원전 13세기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애굽 땅에서 나온지 480년’은 유대 관습상 12대를 가리키므로 실제는 1대를 25년으로 보아 25년 × 12대 = 약 300년간으로 본다.)
– 판관기 기록에 따르면, 사사 입다가 암몬 왕에게 길르앗 지역의 법적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이스라엘이 이 모든 성읍에 거한 지 300년’(삿 11:26)이라 하고 있다. 사사 입다는 사울이 왕으로 즉위한 때로부터 약 50년 정도 앞선 B.C. 1100년경 활동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길르앗 점령 곧 가나안 정복은 B.C. 1400년경이 되고, 여기에 광야 40년 간의 방황 기간을 더하면 전기 연대설 입장에 다다른다.
– 존스 홉킨스 대학의 이집트 연구가 한스 게딕은 홍해가 갈라진 기적은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에게 해의 화산섬 산토리니 섬의 대폭발로 인해 그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출애굽은 산토리니 섬의 대폭발 시기와 맞추어 기원전 15세기라는 것이다.
– 투트모세 3세 때에 출애굽이 일어났고, 하트셉수트가 모세를 양육했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설은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모순점도 지니고 있어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 15세기 이집트 탈출설을 가정하는 것은 성경에 묘사된 당시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또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이 1400-1250년대에 가나안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 투트모세 3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인물인 아멘호테프 2세는 출애굽 7∼11장에 나오는 10가지 재앙으로 장자를 잃은 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승인한 파라오로 주장된다. 그가 장자를 잃었다는 것은 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 사원에서 발견된 석판에 기록되어 있다.
– 성경에 나오는 여러 다른 기록과 정황에 관하여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들면 히브리 노예들이 노역에 시달렸다는 비돔(Pitom)과 라암셋(Ramses)(출1:11)은 델타 지역의 아름다운 목초지의 도시로써 당시 이집트의 수도인 테베(Thebe)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이러한 정황은 오히려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1290-1224 B.C.E.)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 Djahy로 알려져 있는 가나안은 당시 이집트 제국의 일부분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인은 이집트에서 이집트로 도주한 것이 된다. 그리고 당시 가나안의 도시는 성벽이 없었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일련의 파괴를 보여주는 흔적이 없다. 예를 들어 여리고(Jericho)는 “규모가 아주 작고 유물도 별로 없어 거의 의미없는 장소이며 무방비의 상태였고 어떤 파괴의 흔적도 없었습니다”(Finkelstein and Silberman, 2002).
◎ 기원전 13세기
–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만약 출애굽이 사실이라면 그 시기는 기원전 13세기였을 것으로 믿고 있다. 다만 홍해가 갈라졌다는 기적은 가공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다.
– 출애굽이 람세스 2세 때라는 설과 그의 아들 메르넵타(Merneptah) 때에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출애굽기」에는 ‘식량창고 도시’인 피톰과 라메세스의 건축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기원전 1308년과 1194년 사이의 제19왕조를 가리킨다. 이 후기의 연대가 모세의 증손자가 기원전 1150년경에 생존했다는 기록과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출애굽기」에 필리스틴인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필리스틴인은 이집트 사료에서는 기원전 12세기가 되어야 언급되고 있다.
– 출애굽의 연대를 메르넵타 치세로 설정하는 것은 메르넵타 석비의 발견으로 인해 배제되는데, 그 석비는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에 이미 정착한 민족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 20 세기 중반의 성서 고고학자 중 한 사람인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는 이른바 이스라엘인의 증거로 주택 유형, 옷깃이 달린 병 등을 제시하며 기원전 1250-1200년을 제안했으나 그것은 가나안 문화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 기원전 13세기에 가나안의 정복 가설을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빔슨과 리빙스턴의 기본적 비판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 이집트 학자 하와스는 출애굽의 파라오에 관한 이슬람 코란의 기술이 람세스 2세가 통치했던 18왕조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 2번의 출애굽 또는 지속적인 이동
일부 학자들은 출애굽이 한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원전 15세기에 시작되어 기원전 13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5세기에 출애굽 사건이 있었고, 기원전 13세기에 다시 또 일어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마네토와 요세푸스
『아피온 반박문』에서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Josephus Flavius)는 성경의 출애굽기(Exodus)와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가 언급한 2개의 Exodus와 비슷한 사건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네토가 실제로 말한 것과 요세푸스나 아피온의 새로운 해석 사이의 차이를 현재로는 알기는 어렵다.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Exodus와 마네토가 언급한 첫번째 대규모 이동인 약 48만명의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내용을 동일시했다. 힉소스에 대한 언급에서 첫번째 대규모 이동과 힉소스의 시대가 동일하다고 본 것이다.
아피온은 마네토가 언급한, 종교적으로 변절한 Osarseph라 불리는 이집트 신관이 8만여명의 이집트에 저항하는 문둥병자들을 이끌고 이주했다는 두번째 대규모 이동을 Exodus와 동일시하였다. 마네토는 기원전 14세기의 아마르나(Amarna) 시대와 19왕조 말(기원전 12세기)의 사건들을 혼합한 것 같은데 아피온은 여기에다 성경의 Exodus를 추가적으로 혼합하였고 또한 이교도 Osarseph가 이름을 모세(Moses)로 바꾸었다고 단언했다. 많은 학자들은 문둥병자라고 언급된 사람들을 이교도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 관련글
◎ 힉소스 (Hyksos) – 이집트 제2중간기 : http://yellow.kr/blog/?p=1352
◎ Leiden의 아이퓨어(이푸베르,이푸워) 파피루스 (Ipuwer Papyrus) : http://yellow.kr/blog/?p=2292
◎ 고대 이집트 연표, 연대표 (Egyptian chronology) : http://yellow.kr/blog/?p=980
모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모세를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전설적인 인물로 보고 있다. 랍비적 유대교는 기원전 1391-1271년에 해당하는 모세의 수명을 계산하였으며, 제롬은 기원전 1592년과 제임스 어셔는 1571년을 출생 년도로 기원한다.
모세(Moses)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는데, 우선 각 민족의 시조始祖 이름과 유사한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리스의 미노스(Minos)와 이집트의 메네스(Menes), 게르만족의 마누스(Mannus), 인도의 마누(Manu) 등 이스라엘 시조로서의 모세(Moses)와 비슷하지 않나?
또한 모세는 이집트어로 풀 때 훨씬 직접적이고도 자연스러운 뜻을 지닌다. ‘아들’을 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투트모세Thutmose는 ‘토트Thoth의 아들’, 람세스Rameses는 ‘라Ra의 아들’을 뜻한다. 토트와 라는 둘 다 이집트의 신이다.
모세의 유년에 얽힌 전설도 그 이름의 뜻만큼이나 근거가 박약해 보인다. 고대의 전설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버려진 아이가 기적적으로 구출되어 뒤에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부지기수로 많다. 그리스 전설에서는 페르세우스, 오이디푸스, 파리스가 그 예이고, 로마 전설에서는 로물루스, 페르시아 전설에서는 키루스가 그에 해당한다. (호루스, 예수, 제우스, 크리슈나도 비슷)
프로이트는 그의 마지막 역작인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다른 모든 전설에서는 양부모 가족이 비천한 태생인데 반해 모세에 관한 성경 이야기에서는 전혀 반대의 경우가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모세의 진짜 부모는 이집트 왕가의 사람들이고, 나중에 이 전설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모세가 유대인이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유추하였다.
※ 관련글
◎ 메네스, 미노스와 마누, 마누스 그리고 함무라비, 모세 등등 : http://yellow.kr/blog/?p=1428
블랙 아테나
– 마틴 버낼 / 오흥식 역 / 소나무 / 2006.01.10
기원전 330년대에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자, 그리스인 사이에서 모든 오리엔트 문명, 특히 이집트 문명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일었다. 정복 직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집트의 사제 마네토Manetho는 그리스어로 이집트 역사를 쓰면서 이집트 왕조를 33개로 구분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편찬하는 기반으로 남아 있다. 바로 이 무렵 아브데라의 헤카타이오스는, 이집트인의 힉소스 추방과 이스라엘인의 이집트 탈출, 그리고 다나오스의 아르고스 상륙이라는 전승이 동일한 이야기의 세 가지 변형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블랙 아테나 2
– 마틴 버낼 / 오흥식 역 / 소나무 / 2012.03.25
성서는 출애굽의 연대에 관해 상충되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열왕기」는 출애굽을 기원전 965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480년 전, 즉 기원전 1445년경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만약 「출애굽기」, 「판관기」, 「사무엘서」, 「열왕기」에서 언급된 연도를 함께 고려하면 출애굽의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554 + α(상당한 햇수가 될 수 있다)년 전, 즉 기원전 16세기로 책정된다. 그런데 「출애굽기」에는 ‘식량창고 도시’인 피톰과 라메세스의 건축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기원전 1308년과 1194년 사이의 제19왕조를 가리킨다. 이 후기의 연대가 모세의 증손자가 기원전 1150년경에 생존했다는 기록과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이처럼 정통론은 출애굽의 시기로 제19왕조의 끝 무렵의 치세를, 아마도 기원전 1224-1214년의 메레네프타(Merneptah, 람세스2세의 아들) 치세를 선호했다. 그렇지만 이것도 「출애굽」의 필리스틴인에 대한 언급을 수용하지는 못했는데, 필리스틴인은 이집트 사료에서는 기원전 12세기가 되어야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7장에서 논의했듯이, 출애굽의 연대를 메레네프타 치세로 설정하는 것은 이 시대에 속하는 석비의 발견으로 인해 배제되는데, 그 석비는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에 이미 정착한 민족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의 혼동은 정복 이야기에서 언급된 가나안 도시의 파괴 연대에 관한 근대 고고학 논쟁에 의해 가중되었는데, 이 논쟁은 1세기 넘게 벌어졌다. 핵심적으로 이 논쟁은 「열왕기」 인용문에 의해 지지되는 15세기 설과, 계보학적으로 잘 들어맞는 것으로 보이는 13세기 설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것에 대한 가장 최근의 논쟁은 영국의 성서고고학자인 존 빔슨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연구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열왕기」의 연대에 맞추기 위해 기원전 1420년으로 끌어내렸다. 이러한 연표의 변경은 다른 모든 증거와 병립할 수 없었고, 특히 관계된 후기청동기 I 시기의 압축은 이 가설을 다른 학자가 수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반면에 13세기 설의 수호자는 기원전 13세기에 가나안의 정복 가설을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빔슨과 리빙스턴의 기본적 비판에 답하지 못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서 행해진 기원전 16세기와 15세기의 파괴는 이집트 원정(우리는 이집트 기록을 통해 이 원정을 알고 있다)의 결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은 13세기 설에 반론을 제기한다.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가며 출애굽의 지리적 흔적을 ‘경우에 맞지 않는 꼼꼼함’으로 추적 했듯이, 그 연대를 정확히 잡아내려는 시도 역시 쓸데없는 일로 보인다. 그 전설 전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명백히 많은 상이한 요소가 사용되었거나 조작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집트에서의 체류와 출애굽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힉소스의 이집트 정복과 이집트로부터의 축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힉소스와 이스라엘인의 관계는 불확실하다. 즉, 이스라엘이 기원전 17·16세기에 하나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니고 존재했는지를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 만약 정체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인이 침입자 가운데서 어떤 역활을 했는지를 발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만약 이스라엘이 발전되어 나중에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면(이것이 더 개연성이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요소의 일부는 힉소스 동맹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스라엘인은 다른 민족의 전설을 차용했던 것일까?
힉소스의 주류가, 후기의 이스라엘인들처럼, 가나안 출신으로 서부 셈어를 말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 둘 사이의 연계를 시사해주고 있다. 그런데 좀 더 직접적인 관계를 가정해볼 수 있는 두 가지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팔레스타인과 하이집트 두 지역 모두에서 기원전 18세기 후반 힉소스 통치자는 야쿱 하르Yaqub-Har 또는 야쿱Yaqub이라는 증거가 있다. 이 이름은 야곱Yaʿakov과 너무나도 닮았다. 야곱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이름 시조이자 조상일 뿐만 아니라, 전승에 따르면 이스라엘인을 이집트로 이끌고 간 족장이기도 했다. 둘째, 지금까지 힉소스 스카랍은 오늘날 요르단 강 서안 지구로 알려진 지역에서 가장 밀도 있게 발견되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데, 서안 지구는 청동기 말엽에 이스라엘의 중심부였다. 또한 「판관기」에 근거한 연대 계산에 따르면, 출애굽의 연대가 기원전 16세기 중반 힉소스의 축출과 양립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힉소스와 이스라엘인을 동일시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원전 4세기 말에 저술활동을 한 압데라의 헤카타이오스는 「출애굽기」라는 유대인 전승과 다나오스 및 카드모스의 이주라는 그리스 전승은 모두 힉소스의 축출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했다. 마네토는 『역사』의 한 구절에서 제18왕조의 첫 파라오를 테트모시스Tethmosis라고 부르면서 그가 ‘양치기들’을 축출한 것으로 보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양치기들’을 그들의 지도자 모세의 지도하에 있었던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유대인과 힉소스를 동일시한 것이 (후기의 발췌자인지) 마네토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것은 매우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반유대주의자인 아피온과 그의 논적 요세푸스가 힉소스와 유대인을 동일인으로 다루었다는 데는 절대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요세푸스는 힉소스를 “양치기들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조상”으로 기술했다. 비잔티움의 수도승 게오르기오스 싱켈로스(역주: 보통 싱켈로스로 표기되는 800년경의 연대기 작가. 그런데 싱켈로스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성직의 명칭이다)에 따르면, 출애굽의 시기를 제18왕조의 초보다는 말에 둔 것은 4세기 교부 유세비오스인데(아마도 성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유세비오스가 이스라엘인을 힉소스와 분리했다. 그 이후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반유대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반종교적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생겼다.
19세기 말 종교적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많은 학자들이 제18왕조의 초로 되돌아왔다. 불가지론적이고 무신론적인 고대사가와 이집트학 학자의 대부분(마이클 애스터, 제임스 브레스티드, 르네 뒤소, 앨런 가디너, H. R. 홀, 잘로모 루리아, 레이몽 베이유를 포함한다)은 힉소스의 지배 시기를 이집트에서의 성서적 체류나 포로생활에 대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 근거로 그리고 힉소스의 축출을 출애굽의 근거로 취급했다. 이러한 견해는 좀 더 넓은 마음을 지닌 종교적인 학자에게도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출애굽 이야기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힉소스의 축출에 관한 민속적 기억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의 출애굽 전승과 역사적 배경
– 김성 / 협성대 / 2013년 12월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유일한 경험이었을까?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나일 강의 풍부한 수량에 의존하는 대규모 농경 국가였던 이집트는 천수답을 기반으로 주변 여러 민족들에게 자연 재해가 닥칠 경우 이주해 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피난처 역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식량과 자원이 풍성했던 이집트는 자연 환경이 열악했던 주변 민족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삼천년 역사를 통해 수많은 외부 인종 집단들이 이집트로 유입해 들어갔다. 이스라엘 민족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미 아브라함 시대부터 이집트는 가뭄과 기근이 닥칠 때마다 찾아가는 피난처 역활을 했고 이 전통은 신약 시대까지 이어졌다. 이집트로 들어간 외부 민족들은 일부는 원주민들과 섞여 동화되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지트를 떠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유사 이래로 수많은 집단들이 필요에 따라 이집트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을 텐데 우리는 전자를 입애굽, 그리고 후자를 출애굽이라 부를 수 있으며 요셉의 입애굽과 모세의 출애굽으로 구체화되었다.
……
이스라엘적인 입-출애굽 유형과 비슷한 민족 집단의 사례는 기원전 16세기의 힉소스의 입-출애굽일 것이다. 특별히 힉소스의 경우 이집트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통해 그들의 입애굽과 이집트 체류, 그리고 여러 차례 전투를 동반한 출애굽 과정 등이 종합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소위 “최초의 역사적 입-출애굽” 사례로 평가된다. 그런데 힉소스 외에도 입-출애굽 과정이 이집트 역사 속에서 기록된 또 다른 집단이 있다. 비록 이집트와는 육로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에게 해 출신의 “바다 민족들”은 기원전 13 -12세기에 걸쳐 바닷길을 통해 이집트로 진출하려 했고 이집트의 저항에 부딪쳐 동 지중해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바다 민족들 중 블레셋의 경우 이집트로 진출하려다 쫓겨나와 가나안의 서쪽, 지중 해안에 정착하게 되어 로마시대에 팔레스티나 속주의 어원이 되었다.
엑소더스(Exodus): 성서적 출애굽의 이야기와 역사, 그리고 고고학
– 김성 / 협성대
본 논제는 만일 출애굽기 1장 11절의 ‘피톰과 람세스’라는 두 국고성에 근거하여 성서적 출애굽의 절대연대를 람세스 2세 시대인 서기전 13세기로 설정한다면, 이 사건에 관한 어떠한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도 찾을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이 문제에 매우 민감한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은 1956년의 제 2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이 시내반도로 진격했을 때 8일간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가데스 바네아를 탐사했다. 특히 1967년 6일전쟁 이후 1983년 이집트에게 넘겨줄때까지 약 15년에 걸쳐서 이스라엘 학자들은 시내반도 전체에 대한 매우 자세한 탐사와 발굴을 진행했다. 하지만 서기전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
성서적 출애굽의 역사적 고고학적 분석 결과 간추려진 결론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힉소스 민족의 역사성을 염두에 둔다면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출세는 고센땅에 세력을 확립한 제 15왕조와 연관시킬 수 있다. 서기전 1550년경 힉소스가 추방된 후 고센 땅은 폐허로 남겨져 있다가 람세스 2세 시대부터 대규모 도시건설이 진행됐다. 따라서 비교적 후대에 형성된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 아바리스(Avaris)라는 서기전 16세기의 도시보다는 람세스라는 서기전 13세기의 도시가 남아있었고 파라오가 야곱의 가족을 람세스의 땅(창 47:11)에 정착시킨 것으로 언급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역사적 출애굽은 서기전 1550년경 발생했던 힉소스 추방사건으로 볼 수 있다. 광야 40년의 기간은 실제적인 기간이라기 보다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출발했던 12지파의 정탐꾼들의 탐사기간이 40일인데 결론적으로는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야훼가 하루를 1년씩으로 모두 40년 동안 고생하리라(민 14:34)는 다분히 신학적 해석의 결과이다. 먼거리를 우회한 출애굽 루트는 신명기 사가의 이상적인 영토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가데스 바네아는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 서기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의 변방 요새로 밝혀졌기 때문에 더 이상 출애굽의 정착지로 보기 어렵다. 시내산을 거쳐가는 광야길은 서기전 3000년 경부터 이 지역의 터키옥(turquoise) 광산과 구리 광산을 개발하고자 했던 이집트의 중요한 탐사길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순례자들이 일출을 감상하기 위해 오르는 시내산은 서기 4세기부터 모세의 산으로 인정받았다. 아론의 금송아지와 유일신교는 각각 이집트의 하토르 여신 숭배와 아케나텐의 유일신교적인 아텐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리고는 서기전 1550년경 힉소스 추방의 여파로 야기된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전쟁 당시 심하게 파괴되어 더 이상 도시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이집트에부터 쫒겨 나올 당시 요단 계곡의 중요한 도시인 여리고가 파괴되었다는 역사적 기억이 후대에 전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지오그래피
– 케네스 C. 데이비스 / 이희재 역 / 푸른숲 / 2003.06.27
일각에서는 엇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기술된 이집트의 대재앙을 몰고 왔으며 이어서 갈대바다 – 우리는 오래 전부터 홍해로 배워왔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 를 가른 모세의 기적을 가능케 한 자연 현상은 바로 산토리니의 화산 폭발이라는 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이론은 논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지만 테라 섬의 화산 폭발로 생긴 화산재와 해일을 가지고 「출애굽기」에 묘사된 자연 현상의 일부를 설명한다는 것은 퍽 재미난 발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대인의 이집트 탈출이 일어난 시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출애굽 사건은 기원전 13세기에 일어났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화산 폭발은 기원전 16세기에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다.
Moses and the Exodus Chronological, Historical and Archaeological Evidence
– Gerard Gertoux / Lulu.com / 2015.08.08
저자가 주장하는 관련된 연표를 정리했다.
-2038 ~ -1963 (75년)
우르의 아브라함의 탄생과 가나안으로의 출발 (Gn 12:4-5)
-1963 ~ -1533 (430년)
가나안에 정착과 이집트로의 도피 (Ex 12:40-41)
-1533 ~ -1493 (40년)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감 (Ex 16:35)
-1493 ~ -1013 (480년)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솔로몬 재위 4년 (1Ki 6:1)
-1533 ~ -1530년의 카모세(Kamose) 원정(?)
이스라엘사
– 최창모 / 대한교과서주식회사 / 1994.03.01
히브리 성서의 본문은 연대기적 골격을 제공해 주는 몇 개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먼저, 솔로몬은 이집트를 탈출한 지 480년 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고 했다(열왕기상 6:1). 역사적으로 성전의 주춧돌을 놓은 시기는 기원전 967∼958년경이 거의 확실하다. 이를 역으로 계산하면, 이집트를 출발한 시기는 기원전 15세기, 즉 1447∼1438년경이 된다. 한편, 출애굽기 12장 40절에서는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 체류한 기간을 총 430년이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창세기 15장 13절에서는 400년), 이에 의하면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간 것은 기원전 19세기, 즉 1877∼1868년경이 될 것이다. 성서의 여러 연대표를 통하여 추정해 보면(창세기 47:9, 25:26, 24:5, 12:4),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시기는 기원전 2092∼2083년경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의 연대기는 성서 밖의 여러 자료와 비교할 때 상치되는 점이 많다. 먼저, 사마리아 5경과 70인 역(LXX)에 제시된 수치가 마소라 텍스트의 수치와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보다 중대한 문제는 기원전 15세기 이집트 탈출설을 가정하는 것은 성서에 묘사된 당시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또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이 기원전 1400∼1250년대 사이에 가나안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주장에 의심을 품게 만든다. 이집트 탈출의 연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이집트 자료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집트 탈출 연대를 기원전 15세기로 보는 입장은, 아시아로부터 침략해 들어온 힉소스족을 몰아 낸 이집트의 제18왕조(투트모스 3세, 기원전 1468∼1436년)는 아시아인을 무척 혐오하여 이집트 영토 내에 살던 히브리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루었을 것이라는 가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히브리 성서가 요셉이 힉소스계의 바로에게 총애를 받은 것과 그 뒤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애굽기 1:8)이 아시아계인 히브리인들을 학대하는 것과 일치한다. 또, 기원전 1425∼1350년 사이에 가나안의 여러 도시 국가들을 무너뜨리며 활동하던 아삐루에 관한 엘 아마르나 문서의 언급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가나안 정복을 위한 이스라엘인들의 활동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집트 제18왕조의 아메노피스 4세(기원전 1364∼1347년), 즉 아크나톤의 종교 개혁이 유일신적 성격을 띤 종교의 출현 시기로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이 출애굽 이후 나타난다는 점에서 유사한 종교적 특성과 상당한 공통점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 가설은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여러 다른 기록과 정황에 관하여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약점이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 노예들이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는 비돔과 람세스(출애굽기 1:11)는 델타 지역의 아름다운 목초지 도시로서, 이집트의 수도인 테베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이러한 정황은 오히려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기원전 1290∼1224년)때와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제19왕조는 델타 평원에 있던 힉소스의 수도인 아바리스에 도시를 재건하고 ‘람세스의 집’이라 불렀다. 그 밖에 몇 개의 도시를 더 건설하여 가나안과 시리아 출정 기지로 삼고자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벌였다. 이러한 건축을 위해 아시아계의 노예들이 징집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것이다.
나아가, 기원전 13세기경에 가나안의 몇몇 도시들이 파괴된 고고학으로부터 얻은 증거와 함께, 기원전 1220년경에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을 패퇴시킨 이집트의 승전 기록을 남기고 있는 메르넵타 비문은,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원전 1225∼1200년까지는 이미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이집트 탈출의 과정에서 등장하고 있는 요르단 동편의 민족인 에돔인, 모압인, 블레셋인 및 가나안 거민들(출애굽기 15:14∼15)은 기원전 12세기에 이르러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과 공존했던 민족들이라는 점도 13세기 출애굽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Archeology of the Hebrew Bible
저명한 성서고고학자 데버(William Dever, 애리조나대학교 명예교수)의 2007년 7월 미국 PBS 방송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 본문 : http://www.pbs.org/wgbh/nova/bible/dever.html
– 참조 : http://dabia.net/xe/breeze/201920
성서에 의하면 신과 처음 언약을 맺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어떤가요?
지난 세기에 성서고고학이 가장 처음 찾고자 했던 것 중에 하나가 족장시대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것이었어요.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아브라함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목민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한 아모리족에 대해서도 알고 있구요. 물론 기원전 1800년경에 아브라함과 같은 인물이 그 안에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어떤 직접적인 연관성도 못 찾았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살았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비신앙인이 되어야 할까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바로 자유와 신앙과 위험에 관한 이야기예요. 아브라함과 그 가족이 어떻게 떠났으며, 언제 가나안에 도착하여 어디에 정착했는 지가 정말 중요할까요? 진짜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이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의해 후에 믿음의 조상으로 보여졌다는 점이겠지요.
아브라함은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믿음 안에서 이동하였습니다. 그 여행이 실제 있었다면 얼마나 위험한 경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경이로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이냐구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고학이 추적해 낼 수 있는 종류의 사실을 아닙니다.
성서엔 그 다음 모세가 나옵니다. 기원전 1450년경으로 보이는데요. 모세와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의 탈출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는 있나요?
우리는 아무런 직접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모세 Moses’는 이집트 기원의 이름입니다. 그 이야기 중 어떤 이름들은 이집트에 기원을 두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직까진 이집트에서 뿐만 아니라 시나이 반도에서도 출애굽에 관한 증거를 찾질 못했습니다. 물론 그 사건이 없었다는 증거가 될 순 없겠지요. 제 생각엔 그러한 사건이 있었다 하더라고 성서 기자들이 많이 과장한 것 같습니다.
고대 이집트 기록 중 이스라엘인을 언급한 기록이 있나요?
딱 한 가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메넵타 비문인데 기원 전 1206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 기록된 이스라엘인들은 이집트가 아니라 가나안에 있어요. 이집트에서의 탈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지요.
메넵타 비석에 대해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왜 그렇게 유명한가요?
그것이 이스라엔인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 때문이랍니다. 람세스 2세의 아들인 파라오 메르넵타의 승전 기록물인데 자기가 처부순 가나안 민족들과 도시국가들의 이름들이 적혀있고 그 중 이스라엘인이 언급되어 있지요. 다른 이름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인들은 단지 ‘사람들’로만 설명되고 부족국가나 도시국가로 지칭되고 있지 않는 점이 특이하지요. 그 때 당시 아직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결론은 이집트인들이 기원전 1200년경에 가나안의 산지 어느 곳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 불리우는 느슨한 부족들의 연합체에 대해 알고 있어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가 말하는 이스라엘인들입니다. 그래서 아주 가치가 높은 비문인거지요.
그러한 초기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지로부터 알아낸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을 침입, 점령한 자취들이 보이나요?
그 정착지들은 파괴된 가나안 마을의 폐허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가장 기반이 되는 암석이나 표층에 처음 세워진 정착지들입니다. 이런 촌락들에서 그 어떤 전쟁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어요. 이스라엘인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고 성서에 기록된 가나안의 도시들 대부분이 아예 파괴되지 않았거나 파괴되었더라도 그것은 “바다 사람들 Sea Peopl-Philistines”에 의한 것이라는게 고고학적 조사 결과입니다. 따라서 점령모델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지요. 많은 학자들이 초기 이스라엘인들이 근본적으로 가나안인들이었고 점차적으로 저지대의 가나안인들과 구분되다가, 지역적으로 구별되었고 그리곤 결국 이데올로기적으로 구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무장 침략이 아닌 내부 집단의 이동입니다. 무장 혁명이 아닌 사회, 경제적 혁명인 것이지요.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 조상들로부터 자신들을 느린 과정을 통해서 차별화 했어요.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 새로운 신, 새로운 종교적 율법과 관습들, 새로운 민족적 표상들과 같이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말이지요.
바이블 키워드
– J. 스티븐 랭 / 남경태 역 / 들녘 / 2007.12.24
모세(Moses) – 신을 직접 대면한 사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23422&cid=50762&categoryId=50770
모세는 역사적 위인의 한 사람이다. 유대인, 그리스도교도, 무슬림들은 모두 모세가 신의 율법을 인간에게 전하고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거룩한 선지자라고 여기며 존경했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가장 사랑하는 다윗 왕보다 모세를 더 존경한다.
……
모세를 다룬 영화들 중에는 성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도 많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이집트 궁정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말하지 않지만, 신약성서를 보면 유대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사도행전 7:22). 헬레니즘 시대에 활동했던 필론과 요세푸스 같은 유대인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집트 시절에 모세는 온갖 공적을 쌓았고, 잘생긴데다 총명했으며, 알파벳을 발명했고, 수학, 철학에도 능했는가 하면 시인의 자질도 뛰어났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작가들은 그가 이집트의 학문의 신 토트라고 말한다.
동방정교회 그리스도교도들은 9월 3일을 성 모세와 선지자의 축일로 삼는다. 무슬림들은 모세를 선지자이자 사도인 무사(Musa)로 존경한다. 모세는 그리스도교권보다 유대인 남자들에게 흔한 이름이다. 모르몬교의 창시자인 조셉 스미스(Joseph Smith는) 모세 자신이 구술했다는 『모세서 Book of Moses』를 번역했다고 한다. 유대교의 신비철학인 카발라(Kabbala)는 책이 아니라 구술로 전승된 모세의 비밀스런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세를 다룬 논쟁적인 책들 중에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1939년에 쓴 『모세와 일신교 Moses and Monotheism』가 있다. 프로이트는 유대인이었으나 무신론자였고, 성서에 나오는 모세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모세가 히브리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다면서 이집트의 파라오 아케나톤의 일신교를 믿었다고 주장했다. 아케나톤이 죽자 이집트에서는 많은 신을 섬기는 다신교가 부활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세는 이집트에 살던 히브리인들에게 일신교를 전했고 히브리인들은 그를 지도자로 삼았다가 나중에 살해했다고 한다. 훗날 그 일에 죄의식을 느낀 그들이 모세를 영웅으로 둔갑시켰다는 주장이다. 역사가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근거가 불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의 역사 1
– 폴 존슨 / 김한성 역 / 살림출판사 / 2005.03.30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이집트를 탈출하게 한 억압의 시기는 기원전 2천 년대 말, 더 정확하게는 그 유명한 람세스 2세의 통치기간(기원전 1304~1237)이었다. 「출애굽기」는 이집트인과 관련한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시작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부리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서,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비돔과 라암 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 나갔다. 신왕국 19왕조의 통치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건축자였던 람세스 2세는 – 그는 구왕국의 피라미드 건축자들 이후 가장 많은 건물을 건설한 인물이었다 – 거대한 건축사업을 피톰에서 일으켰다. 피톰은 오늘날 와디 투밀라트(Wadi Tummilat)에 있는 텔 에르-라타바(Tell er-Rataba) 지역이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라메세스(Rameses) 또는 피 라메수(Pi Ramesu)라고 불렀던 지역에서도 건축사업을 일으켰는데, 이곳이 나일 강의 타나트(Tanatic) 지류 위에 산 엘-하가르(San el-Hagar)이다. 19왕조 파라오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고센 땅과 가까이 있는 이 지역의 출신들로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엄청난 노동력, 즉 노예들이 동원되었다. 람세스 2세 시대에 작성된 파피루스 ‘라이덴(Leiden) 348’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여준다. “람세스의 거대한 탑으로 돌들을 옮기는 병사들과 하비루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라.” 그러나 출애굽사건 자체가 람세스의 통치기간 중에 발생했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아마도 이보다는 그의 후계자인 메르넵타의 치하에서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승전비가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그 연대는 대략 기원전 1220년으로 추정된다. 승전비에는 그가 시나이 반도를 넘어 가나안에서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전쟁에서 패배한 이를 ‘이스라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종종 파라오들이 자신들의 패배나 곤경을 승리로 내세웠던 것처럼 실제로 그는 승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그의 영토 밖에서 이스라엘인들과 교전을 치렀다는 점이며, 이는 그들이 이미 이집트를 떠났음을 말해 준다. 이 승전비는 성경 밖에서 이스라엘을 언급한 최초의 자료이다. 「열왕기」 6장 1절과 「사사기」 11장 26절을 토대로 추정해 보면 출애굽이 기원전 13세기에 발생했으며, 기원전 1225년경에 완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그러나 기원전 1천 년대 후반부터 이방의 저술가들 사이에서 모세를 해로운 인물, 곧 기괴하고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반사회적인 종교를 만들어낸 이로 보려는 경향도 나타났다. 모세가 최초의 조직적인 반유대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이집트 역사'(현재는 소실)를 저술한 아브데라(Abdera)의 헤카타이오스(Hecataeus, 기원전 4세기)는 모세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격리시켜 이방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겼다고 비난하였다. 마네토는 모세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으며, 헬리오폴리스 출신의 배교한 제사장으로 유대인들에게 이집트의 신성한 동물들을 죽이도록 명하고, 이방의 규칙을 도입했다는 기괴하고도 긴 전설을 만들어냈다.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의 제사장이 나환자와 흑인을 포함한 부랑자들을 이끌었다는 개념은 반유대주의의 기본적인 모체가 되었다. 이는 윤색된 최초의 중상모략으로 이상하게도 끊이지 않고 오랜 세월동안 반복해서 회자되었다. 예를 들면 칼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두 차례에 걸쳐 그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음이 확실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또한 그의 마지막 저작인 『모세와 유일신 신앙 Moses and Monotheism』을 기술하면서 모세가 이집트인이었으며 제사장이었다는 마네토의 이야기에 기초한 채로, 모세의 종교사상들이 아케나텐의 일신교적인 태양신 제의와 모세 자신의 허위사실에 입각한 어리석은 생각에서 유래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관련 그림>
출애굽의 지리적 흔적을 찾는 것도 역시 여러 주장이 있다. 보라색이 전통적인 주장
검은색 길도 전통적인 경로에 가깝다.
– 메르넵타 석비(Merneptah Stele, 이집크 카이로 박물관)
메르넵타(기원전 1213-1203 재위)는 람세스 2세의 아들로, 그를 이어 이집트 파라오가 된 인물이었다. 검은 화강암에 상형문자들로 가득한, 높이 2미터가 조금 넘는 이 석비는 주로 파라오 메르넵타가 리비아를 공격할 때 탈취했던 노략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비문의 마지막에 놀랍게도, 메르넵타가 이전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성경을 제외한 문헌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다음과 같이 등장하고 있다. “가나안은 약탈당하고 각종 재난을 맞이하였다. 아스겔론(Ashkelon)은 정복되었다. 게제르(Gezer)는 함락되었다. 야노암(Yanoam)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씨(후예)는 이제 없다. 후르(지금의 시리아)는 애굽을 위하여 과부가 되었다.” 이 비의 연대는 기원전 1208년이다. 메르넵타 시대 가나안 땅에, 이집트 파라오가 맞서 싸우고 그 전쟁 기록을 남길 정도의 정치적 이스라엘 세력이 존재했다는 언급은, 아무래도 람세스 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했다는 주장에 불리한 고고학 자료라고 볼 수 있겠다. 출애굽 당시 홍해에서 수몰당한 이집트 군대가, 곧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까지 추적해 와서 정복했다는 것은 성경 기록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르넵타의 가나안 원정과 이스라엘과의 전투는 출애굽 이후 바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후 사사 시대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 테라(산토리니) 화산의 폭발과 「출애굽기」를 연계시키는 학자들도 있다. 물론 폭발 시기도 논란 중이다.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
http://en.wikipedia.org/wiki/The_Exodus
http://en.wikipedia.org/wiki/Book_of_Exodus
http://en.wikipedia.org/wiki/Moses
http://en.wikipedia.org/wiki/Merneptah_Stele
http://en.wikipedia.org/wiki/Yaqub-Har
네이버 지식백과(라이프성경사전) : 출애굽 연대와 그 여정
네이버 지식백과(이스라엘사) : 이집트 탈출의 시기
네이버 지식백과(이집트역사 다이제스트 100) : 모세가 이끈 유대인의 출애굽
신화의 이미지 (조지프 캠벨)
엑소더스(Exodus): 성서적 출애굽의 이야기와 역사, 그리고 고고학
애굽과 팔레스틴의 조상은 누구인가? -함의 자녀 미스라임
http://cafe.naver.com/booheong/134945
http://cafe.naver.com/jncwk/11848
http://individual.utoronto.ca/mfkolarcik/ancient-israel-in-egypt-and-the-exodus.pdf
2013-04-02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허구인가
2012-12-11 [성지순례 칼럼] 출애굽 연대를 BC 15세기라 하는 이유
2011-12-25 아인슈타인 “정의·진리 추구한 모세, 인류의 참지도자”
2011-06-08 고고학·과학·지질학·역사로 풀어낸 출애굽기 이집트의 10가지 대재앙
2005-01-21 [이집트,그의 미라도 정밀조사한다] 람세스2세가 출애굽때의 파라오?
1994-03-29 스미소니언박물관,출애굽당시 파라오유물 탐사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