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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만듭니다 (대하 10:12-19) /김필곤목사
2005년 국회에서 사학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사학법을 놓고 여야 국회의원들이 몸싸움을 하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았을 것입니다. 이 사학법을 놓고 우리 신앙인들도 현저하게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사학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라고 정권퇴진 운동을 한다고 하고 어떤 신앙인들은 사학의 공익성을 신장한 것이라고 환영을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사람에게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요약해 보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욕구 충돌에 의한 갈등입니다. 서로 욕구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학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욕구와 사학을 통하여 공부를 배우는 사람의 욕구가 다르기 때문에 운영하는 사람들과 학부모 사이에 차이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똑같은 신앙인일지라도 대부분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사학법 통과를 적극적으로 반대할 것입니다.만약 우리 교회가 사학을 운영하고 있다면 우리 교인들은 사학법 통과를 찬성할까요 반대할까요? 사람은 늘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고 편리한 쪽을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가치관의 충돌에 의한 갈등입니다. 사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분일지라도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야당의 편에 설 것이고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여당의 편에 설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셋째는 감정 충돌입니다. 학교 다닐 때 사립학교에 다니며 심각한 감정적 상처를 받은 분들이 있다면 사학의 공익적 측면을 강조하여 편을 들 것입니다. 사학을 운영하지 않을지라도 사학을 하는 분이 일가 친척이 있던지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에게는 아무 이익이 없어도 사학을 하는 사람들의 편을 들게 될 것입니다. 괜히 주는 것 없이 미운 것입니다. 특정지역의 사람은 특정 지역의 편을 들게 되어 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이런 원인으로 하루에도 많은 크고 작은 갈등의 상황을 만나며 삽니다. 아이들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아이들과 부모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텔레비전 선택권을 놓고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이들 옷을 사는데도 어머니와 아이의 욕구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일지라도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할 때 가치관의 차이로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선교사를 보내는데 아프리카에 보낼 것인가 중국에 보낼 것인가를 놓고 심각하게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업무 결정을 하는데도 입장차이에 따라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소한 것같지만 잘못 문제를 처리하면 결과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다가 오고 잘 풀면 공동체가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여 탄력을 받고 창조적인 에너지로 발산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이런 차이를 어떻게 잘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를 이루어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유다의 초대왕 르호보암을 통하여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우리는 갈등의 문제를 만났을 때 극단적 대치를 함으로 서로 실패할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통합능력(협상능력)으로 서로 승리해야 합니다.(1-15)/협상의 방법
1)르호보암은 통합능력(협상능력)이 부족했습니다. 힘으로 해결하려다 실패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힘으로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다수결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힘의 원리입니다. 힘으로 밀어 부치는 것입니다. 힘없는 자는 힘있는 자의 결정에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여호사밧이나 르호보암이나 이 힘의 원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아주 오래 전 이스라엘 역사에도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솔로몬을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1). 성경 상에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는 솔로몬의 아들입니다. 당시 왕 정치였지만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 사회였기 때문에 왕이 되려면 백성의 지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초기에 있어서 왕이 되는 데는 두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절대적인 조건으로서 하나님이 세워 주셔야 한다는 것이며(삼상10:1;삼상16:1), 또 하나는 상대적인 조건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지와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는 사람은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받은 후 온 백성의 일치된 마음에 의하여 추대되었는데 사울, 다윗, 솔로몬의 경우 역시 그러하였습니다(삼상 11:15; 삼하 5:3; 대상 11:3). 르호보암은 백성의 지지를 받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은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당시 북쪽 지파들의 중심지였던 세겜(수24:1; 삿 9:7)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겜에 방문했을 때 왕들은 그를 열렬히 환호하며 지지해 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요구를 하였습니다. 르호보암은 유다 지파 사람으로 왕이 되었는데 왕으로서 지지를 받기 원하면 수적 훨씬 많은 10 지파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요구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솔로몬 왕처럼 고역을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많은 노력을 시켰는데 이제 새로 왕이 되었으니 그것을 감해달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과 자신의 궁궐을 짓는데 20년 동안 백성을 노역에 동원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을 건축하는데 백성을 동원하였습니다. 어쩌면 백성의 요구는 정당하였을 것입니다.
이때 르호보암은 어떻게 했습니까? 삼일 후에 답을 준다고 하고 6절에 보십시오. 아버지와 함께 정치를 하였던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원로들의 조언은 무엇이었습니까? 7절에 보십시오. 그들의 의견을 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르호보암은 자신과 코드가 맡는 앞으로 같이 정치를 해야할 젊은이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정치인들은 어떻게 조언을 했습니까? 더 무거운 멍에를 짐을 지워 주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전문가 집단의 조언을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선택은 역시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잘 판단하여야 합니다. 르호보암은 누구의 의견을 들었습니까? 우리 성도님 같으면 누구의 의견을 듣겠습니까? 원로들의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앞으로 정치를 같이할 사람은 원로들이 아니라 코드가 맞는 젊은 사람들입니다. 왕이 되어 첫 번째 정책 결정을 하는 순간입니다.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들을 무시하고 이미 지나간 원로들의 말을 듣겠습니까? 르호보암은 아마 많은 정치적 계산을 하였을 것입니다. 삼일 후에 이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풉니까? 욕구 충돌에 의한 갈등입니다. 왕은 백성들을 통해 좀더 많은 일을 하기 원하고 백성들은 좀더 편안하길 원합니다. 사측은 좀더 월급을 덜 주길 원하고 노조측은 좀더 월급을 많이 받기 원합니다. 가치관 충동에 의한 갈등입니다. 왕은 지배자로서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백성들은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나라를 보고 있습니다. 감정출동에 의한 갈등입니다. 르호보암은 유다 출신이고 10지파의 파업을 주동하는 우두머리는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입니다. 결국 왕의 결정은 무엇이었습니까? 13, 14절을 보십시오. 젊은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은 솔로몬보다 더 심하게 백성들에게 사역을 시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와 결별을 선언합니다. 요즈음 말하면 파업을 해 버립니다. 정당들이 자기를 지지하는 지역에 가서 장외 투쟁을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둘 다 힘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르호보암은 왕권이라는 힘을 사용합니다. 여로보암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수라는 힘을 사용합니다. 왕을 따르는 지파는 2 지파 밖에 없는데 10지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왕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지지기반을 가지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나라가 두 쪽이 나고 맙니다. 서로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입니다. 승자도 패자도 공동체도 하나님도 손해를 보는 방법입니다.
2)우리는 갈등의 문제를 만났을 때 극단적 대치를 함으로 서로 실패할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통합능력(협상능력)으로 서로 승리해야 합니다.
모두가 이기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무패법입니다. 상생법입니다. 윈윈(win-win) 전략입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승패법은 한쪽이 더 많이 가져가는 만큼 다른 쪽이 그만큼 잃게 됩니다. 그러나 무패법은 합의를 위한 최선의 대안을 만드는 것입니다. ‘합의를 위한 최선의 대안’을 배트나(BATNA,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라고 합니다.
참 우리 민족은 협상 능력이 참 부족한 것같습니다. 사군자를 좋아합니다. 대쪽같아야 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협상하여 양보하여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은 변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요구만 100% 관철시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갈등의 문제는 항상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내 욕구와 가치관, 감정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욕구와 가치관, 감정도 중요한 것입니다. 힘에 근거한 극한 투쟁으로 모든 것을 풀 때 모두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교회들도 보면 얼마나 극한 투쟁을 합니까? 같이 신앙 생활하면서도 갈등의 문제를 힘을 풀려고 하다가 싸우는 교회들이 생깁니다. 왜 우리가 협상을 합니까? “최고의 협상”이라는 책을 보면 첫 번째는 "혼자 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야 할 때", 둘째는 "당사자들 간 문제나 분쟁을 해결해야 할 때"입니다. 더 좋아지기 위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협상하는 것입니다. 당사자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필요 없으면 협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을 상호의존성이라고 합니다. 서로 같이 살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식구이고 같은 교인입니다. 사회 각종 이익 집단들이 극한적 대립을 하고 있는 요즈음, 우리 사회는 이 협상의 미가 무엇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하버드대학의 로저 핏셔 교수는「하버드식 협상법」에서 협상이나 교섭이 성공하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서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문제는 되도록 피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적 감정문제는 떼어놓고 회의를 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서로가 득을 볼 수 있는 문제를 우선해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누가 이겼다 졌다, 누가 더 득을 봤다 못 봤다 하는 것을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Roser Fisher 외 2인이 쓴 [Yes를 이끌어내는 협상법]에서는 협상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과 문제를 분리시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협상의 목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바로 그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해결책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자신의 이해가 상충되는 경우에는 객관적이고 실용적인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성과 양식, 상식과 법에 기초한 보편적 가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객관적이고 실용적인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욕구나 자신의 가치관 자신의 감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목표치는 항상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협상의 목표를 잡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상대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질 때 모든 충돌의 해결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실패하여 나라가 분열되어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비록 내가 손해 보아도 내 자존심이 짓밟혀도 나의 가치관에 맞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이 들면 그 뜻에 머리를 숙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막상 실제 상황에서는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힘의 원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트러불 메이커가 됩니다.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킵니다.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행복을 가져야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진정 성공적인 삶, 행복한 공동체 생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생살이를 하려면 무엇보다 갈등이 생길 때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고 그 뜻을 모두 받아들이고 실행하여 서로 승리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힘을 오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서로 섬기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힘을 사용해야 합니다. (16-19) /협상의 목표
1)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은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오용하고 남용합니다.
르호보암은 힘을 섬김의 도구로 상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를 위해 사용합니다. 힘을 남용하고 오용합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된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큰 행운이겠습니까? 솔로몬에게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밑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겠습니까? 물론 성경에는 르호보암만 나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대하 12:13절을 보십시오. 나아마입니다. 어느 나라 출신입니까? 암몬 여인입니다. 그런데 왕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복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그 힘을 정당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그 힘을 어떻게 상용합니까? 다시 13,14절을 보십시오. “포학하다”는 말은 횡포하고 사납다는 말입니다. “징치한다”는 말은 징계하여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악정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호화생활을 위해 백성들을 억압한 것보다 더 심하게 다루겠다는 것입니다. 부친보다 더 가혹한 억압 정치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국가 지도자가 정책 수립을 할 때 국민의 입장에서 정책을 수립하여야 하는데 백성의 요청을 거부하고 강압 정책을 실시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여로보암은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그와 그 무리들도 수의 힘을 남용하고 오용합니다. 수의 힘으로 르호보암의 정통성을 부인합니다.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맞지 않아 부인한다고 왕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극한적인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단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지 않습니까? 군사 독재 시대에는 개혁적인 세력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보수적인 세력이 정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다윗 자손의 치리를 받지 않고 새 왕조를 이루겠다는 반란을 선포합니다. 힘은 힘으로 대항하겠다는 것입니다. 수적 훨씬 많은 사람입니다. 10지파가 지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맺은 언약을 파기하겠다는 것입니다(삼하7:4-17).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망각합니다. 양심도 도덕도 법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기존 질서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의 악정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까지 파기해 버리는 중차대한 죄악을 범해 버립니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더 큰 악을 저지릅니다.
급하게 르호보암이 어떤 조처를 취합니까? 18절 보십시오. 역군의 감독 하도람을 보내었습니다. 그때 이제 이성도 신앙도 잃어버린 성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짓을 합니까? 하도람을 죽여 버립니다. 르호보암을 도피하고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분열되어 다른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2)우리는 주어진 힘이 어떤 힘일지라도 오용하고 남용할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갈등이 생겨 그 문제를 풀려고 할 때 우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협상을 합니다. 그 때 대부분의 협상은 힘있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힘은 다양합니다. French와 Raven은 그 힘을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강자가 약자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보상의 힘, 둘째 불응할 때 처벌을 가하는 강제의 힘, 셋째 그에게 순응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게 하는 합법성의 힘, 넷째 졸업증과 자격증과 같은 전문가의 힘, 다섯째 상대방의 호감에 근거한 개성의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Lewicki와 Litterer는 여기에 설득력과 영향력을 주는 정보의 힘을 한가지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을 이용하여 협상할 때 결국 힘있는 쪽이 승리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루는데 섬김의 힘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힘이 없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인들보다 무력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지혜가 없어서 미련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힘을 가지려는 다투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6-2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켄 블랜차드․ 필 하지스가 지은 “섬기는 리더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를 리더십의 모델이 되시는데 권위주의 리더십이 아니라 섬기는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신앙에 대한 시각이 바뀌자 리더십을 보는 관점도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나는 예수 안에서 단지 위대한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보는 것뿐 아니라, 모든 조직, 모든 민족, 모든 상황에 유용하고 효과적인 리더십 모델을 발견할 수 있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 제자들에게 들려준 가르침에서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섬기는 행위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외에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시간, 장소 혹은 상황에 따라 예외를 인정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섬김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목적․사명. 더 좋은 미래상. 가치를 가지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갔습니다. 제자들을 발을 씻어 주면서 섬김의 비전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머리, 우리의 마음, 우리의 손, 우리의 발도, 우리의 건강, 우리의 직분도 섬김을 위해 지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직분을 받은 것도 왜 받았습니까?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번트 리더십”의 저자 제임스 C. 헌터는 서로 부딪히는 문제(갈등관계)를 관리로 푸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그 효과 역시 일시적인 통제일 뿐이지 근본적인 해소책은 아니라고 합니다. 『서번트 리더십』은 갈등의 근본적인 해소책이라는 것입니다. 군림하거나 관리하는 대신 봉사하고 헌신하면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서번트 리더의 조건”이라는 책은 쓴 알렉산더 버라디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얻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진정한 욕구를 알아내어 그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으로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할 때 비로소 만족과 성공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좇는 이유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입니다. 힘이 있으면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힘을 기르기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힘을 기르되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합니다.
세상은 계속 우리를 유혹합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섬김받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한 번 사는 세상인데 멋지게 권력과 돈을 쥐고 섬김 받으며 살아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전혀 알아 주지도 않은 일에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도 열심히 일하고 박수갈채도 받으려 하지 않고 은밀하게 일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지배하고 사는 삶이 훨씬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 됨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나라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 자보다 크다고 말씀합니다. 죽고자 하는 자가 산다고 말씀합니다. 섬기는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이고 복된 삶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 정치도 섬김의 정치로 거듭나야 합니다. 정치 뿐 아니라 지금 시급한 것은 모든 분야에서 섬김의 정신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를 품고 섬겨야하겠다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창조질서의 원리입니다. 최초의 인간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 2:20)"입니다. 도와 주라고 즉 섬기라고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교회 직분은 계급이나 서열이 아닙니다. 섬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요즘 보면 교회의 큰 병중의 하나는 "멋진 교회 병"입니다. 신앙인들이 멋진 교회를 만나기 위해 교회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우리 교인들은 멋진 교회를 찾는 분들이 아니라 섬기는 교회를 찾는 분들인 줄 압니다.
Warren Wiersbe 목사님은 오늘날 교회 속의 슬픈 현상은 유명한 사람들은 많지만 종들이 너무 적다는 점이다라고 했습니다.
D. L. Moody 목사는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데리고 있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가에 따라 판가름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멋지게 한 번 섬겨 볼까를 찾다 우리 열린교회에 와서 함께 신앙 생활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주님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주님 때문에 헐벗고 주님 때문에 고난받고 주님 때문에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교인들이 멋진 교인일 것입니다. 섬기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합니다. 그러나 섬김에는 복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섬기는 자가 오히려 크게 되고, 종이 되는 자가 오히려 으뜸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섬김의 도를 알고 행하면 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서비스의 황금률도 "당신이 고객일 때 받고 싶은 대접 그대로 고객들을 대접하라"입니다. 섬김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갈등이 있을 때 힘으로 밀어붙이려 하지말고 섬김으로 이끄셔야 합니다. 주어진 인생 섬기지 않아도 썩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서로 후회 없이 섬기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섬김이 결국 복입니다.
3. 우리는 중심을 일치 말아야 합니다(2, 15, 16)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은 협상의 대상으로 놓고 양보해서는 아니 됩니다. /협상의 핵심
협상하고 타협한다고 정말로 중요한 것을 양보하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타협하고 협상한다할지라도 이것만은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르호보암이나 여로보암은 중심을 잃어 버렸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은 솔로몬 재위 시 밀로의 망대 건축 작업에서 그 탁월함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에브라임 지파의 강제 노역의 책임자로 그를 맡겼습니다.(왕상 11:28) 그런데 그 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자기가 입을 새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에게 열 조각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르호보암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이방 신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솔로몬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자 애굽으로 도망을 갔습니다.(왕상 11:40)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로 그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가 솔로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반역을 꾀합니다. 아무리 그런 말을 들었다해도 분단만을 막기 위해 하나님 앞에 몸부림쳐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협상을 단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싸우는 척 하면서 백성들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 결국 협상을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나중에 반역하여 이스라엘 초대왕이 되어 무엇을 합니까?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제사장들을 임의로 세웁니다. 안식일과 절기들을 자기 편한 대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는 북쪽 이스라엘을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마치 김일성과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입니다. 2차 대전 이후 분단되었다가 통일되지 않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곳은 지구상에서 한반도가 유일합니다. 오스트리아, 베트남, 독일, 예멘 등의 나라들도 우리처럼 남북으로 또는 동서로 분단되었었으나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분단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인 요인은 일제로부터 자주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38도 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얻어진 광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 요인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각각 점령한 남쪽과 북쪽 지역에서 자기 세력의 정권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민족 스스로가 이들의 조종을 뿌리치고 끝까지 독자적인 노선을 고수했다면 분단을 없었을 것입니다. 2차 대전 후 독일, 핀란드, 오스트리아, 체코 등 많은 나라들이 소련과 미국에 의해 동시에 점령당해 있었지만, 패전국가인 독일을 제외하고 다른 나라들은 일찍이 통합되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처럼 외세를 활용해 정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분단 세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도 2차대전의 패전국중의 하나로서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4강에 의해 분할되었으나 우리나라처럼 분열지향주의 자가 없었습니다. 소련은 당시 오스트리아 임시정부 수상인 사회주의자 '레너'를 사주해 오스트리아를 공산화시키려 했으나 그는 나라의 통일위업을 더 소중히 여겨 각계각층의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중립적인 통일국가건설을 이루었습니다. 만약 김일성과 북한노동당이 UN이 권고한 남북한 자유총선거에 응했거나, 김구. 김규식 박사 등이 추진했던 남북협상에서 민족적 양심으로 나왔더라면 우리 나라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남쪽 유다 나라 초대 왕인 르호보함은 어떻습니까? 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이 있더라도 나라가 두 쪽 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의도적으로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징계하기 위해 예고하였는데 르호보암이 계속 아버지의 일을 하자 하나님이 그 징계를 시행한 것입니다. 민족의 분단을 막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41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40년 동안 통치하였으니까 통치 기간 전부를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국 어머니가 밀곰을 섬기는 암몬 여인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섬기는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오. 나라가 강성해지자 율법을 버려 버립니다. 12장 14절을 보십시오. 오로지 악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겼던 남쪽의 이승만 대통령도 민족 분열만은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매달리며 애를 썼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정치적 편리를 위해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하고 미국의 힘을 빌려 장기 집권에 쓸데없는 열정을 낭비해 버렸습니다. 해방되자 당시 세인들의 시선을 받았던 사람은 김구, 여운형, 조만식, 이승만 김일성 다섯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승국의 후원을 받은 자만 살아 남고 이상은 있지만 힘이 없었던 조만식, 여운형, 김구는 민족 앞에서 허망한 얼굴이 되어 살아졌습니다. 만약 김일성과 이승만이 끝까지 민족의 통일을 붙들었다면 오늘 우리 현실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한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던 신앙인 김구 선생님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 헌신한 신앙인 안창호 선생님도 마지막 죽음 앞에서 "나는 죽어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죠. 단지 나라 없는 동포들을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2)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은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순교적 자세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협상하는데는 관계를 중요시할 것인가 성과를 중요시할 것인가에 따라 네가지 전략이 나옵니다. 첫째가 협동전략입니다. 실질적 결과와 상대와의 관계 모두 관심이 있을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둘째는 수용전략입니다. 상대와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셋째는 경쟁전략입니다. 실질적 결과를 획득하는 데 관심이 있을 때(향후 관계나 후속거래에 관심이 없을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넷째는 회피전략입니다. 실질적 결과와 상대와의 관계 모두 원하지 않거나 자신이 없을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핵심 전략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놓지 말아야 합니다. 다 양보해도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은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합니다. 요즈음 목회자들이 무슨 운동을 하면서 특정 세력화하는 모습을 봅니다.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도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도 아닙니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보수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다 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목회적 방법으로 접근을 해야 합니다.
협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강력한 시너지효과, 즉 상승효과가 있어야 합니다. 관심의 차이를 극복하고 새롭게 생성된 공통된 토대를 바탕으로 긍정적인 가치창조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협상이란 갈등을 생산적으로 관리하는 전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협상함으로 망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신앙인에게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구속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늘 감동을 주고 깨닫게 해 주시는 우리 성령님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복이 그 어떤 것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그 어떤 것으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 생활하면서 갈등 때문에 망해 버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갈등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갖가지 갈등을 어떻게 잘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를 이루어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우리는 갈등의 문제를 만났을 때 극한 대치를 함으로 서로 실패할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통합능력(협상능력)으로 서로 승리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힘을 오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서로 섬기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힘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중심을 일치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붙들어야 할 것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은 협상의 대상으로 놓고 양보해서는 아니 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