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의 기술 -알랑 드 보통- 12월이 되자 새로운 계절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거의 매일 불길한 느낌을 주는 강철 빛 회색 하늘이 도시를 덮었다. 만테냐 나 베로네제의 그림에 나오는 하늘같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의 완벽한 배경이 될 만한 하늘이었다.
여름은 시내와 실외 사이의 일반적인 장벽을 부수어 나는 세상 속에서도 내 방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공원은 다시 낯설어 졌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로 풀밭은 금단의 영역이 되었다. 도시의 가로등에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낮은 하늘 아래로 비에 젖은 검붉은 벽돌 건물들과 마주치자 잠복해 있던 슬픔이 행복을 얻거나 이해를 받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회의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팸플릿을 보고도 강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계획이 아주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감동적이면서도 진부한 예였다. 또 가계에 파탄을 일으킬 정도로 돈이 많이 드는 여행이 연대의 바람에 살짝 기울어진 야자나무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기도 하다 나는 바베이도스 섬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실제로 여행을 하면 얼마나 피곤할까 역까지 달려가야 하고 장꾼을 차지하려 다투어야하고 기차에 올라타야 하고 익숙하지 않는 침대에 누워야하고 줄을 서야 하고 그렇게 그의 꿈들은 더렵혀졌다. 의자에 앉아서도 아주 멋진 여행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움직이며 다닐 필요가 뭐가 있는가. 현재를 긴 영화에 비유한다면 기억과 기대는 거기에서 핵심으로 꼽힐만한 장면들을 선택한다. 내가 이 섬에 오기까지 9시간30분이 걸렸는데 기억은 불과 예닐곱 장의 정적인 이미지만 남겨놓았다. 바다 가장자리에 일광욕 의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옆에서 조그맣게 찰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착한 괴물이 커다란 잔에 든 물을 조심스럽게 홀짝이는 소리 같았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휴게소에 다른 손님들은 몇 명 없었다. 한 여자는 한가하게 컵 안에 든 티백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한 남자와 어린 소녀 둘이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턱수염을 기른 나이든 남자는 십자말풀이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왠지 생각에 잠긴 드싼 분위기 슬픈 분위기였다. 유선방송에서 흐르는 희미하고 경쾌한 음악과 카운터위의 사진 속에서 베이컨 샌드위치를 막 깨물려고 하는 여자의 에나멜 광택이 나는 미소 때문에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더욱 진해졌다. 천장 한가운데는 핫도그를 하나 살 때마다 양파 링을 공짜로 준다고 광고하는 판지상자가 매달려 환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에 초조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일그러진 채 거꾸로 매달린 상자는 본사에서 내려 보낸 지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걸어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로마제국의 외딴지역에 서 있는 이정표들의 생김새가 중앙에서 설계한 것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장치 앞에서 아프고 싶어 하고 또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부끄러움 없이 자기도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했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마지않는다 보들레르는 가끔 리스본에 가는 꿈을 꾸었다. 그곳에 가면 따뜻하겠지 그리고 나는 도마뱀처럼 햇볕 속에 몸을 쭉 뻗고 힘을 얻을 수 있겠지 그곳은 물과 대리석곡ㆍ 빛의 도시였으며 사고와 평온에 도움이 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그는 포르투갈에 대한 환상을 품는 것과 동시에 혹시 네덜란드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생각들이 밀려왔다. ~~~사실 목적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욕망은 떠나는 것이었다.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떠나는 것이었다.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에 늘 어딘가로 어디로라도 이륙하는 비행기가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 기분의 갈라진 틈들을 메우는 것은 즐거운 일 아닌가. 도착하는 장소도 사랑했지만 움직이는 기계들 배들을 사랑했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모든 운송수단 가운데 생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마 기차일 것이다. 배나 비행기에서 보는 풍경은 단조로워 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열차에서 보는 풍경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이 풍경을 통해 우리는 잠깐 사적인 영역들을 보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기차는 어떤 여자가 부엌 찬장에서 컵을 꺼내는 순간을 보여주었다가 이어 테라스에서 어떤 남자가 자고 있는 모습을 구경시켜 주었다가 공원에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인물이 던진 공을 잡으려는 아이의 움직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평야를 가로질러 여행하면서 나는 모처럼 아무런 억제 없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집필중인 스탕달론에 대하여 생각하고 나의 두 친구 사이에 형성된 불신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내 정신이 어려운 관념에 부딪혀 텅 비어버릴 때마다 의식의 흐름은 창밖의 대상에 고정되어 몇 초 동안 그것을 따라간다. 그러다보면 또 새로운 생각의 똬리가 형성되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술술 풀려나가곤 한다. 몇 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 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플러그소켓 욕실의 수도꼭지 잼을 담는 병 공항의 안내판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 ) 눈은 자신이 보는 것을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일치시키려한다. 새로운 언어로 익숙한 책을 판독 하려는 것과 같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차를 몰고 가야할 곳은 외로운 휴게소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여행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지어내야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낙타의 금욕주의나 볼품없는 모습과 자기 동일시를 했기 때문이다. 1880년 죽음을 며칠 안 남긴 시점에서 그는 (플로베르) 조카딸 카롤린에게 지난 2주 동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야자나무를 보고 싶은 욕망 황새가 첨탑 꼭대기를 쪼는 소리를 듣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단다. 우리도 어떤 나라에 느끼는 매력을 심화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안내 책자가 유적지를 찬양한다는 것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위 있는 평가에 부응할만한 태도를 보이라고 압력을 넣는 것과 마찬가지다. 침보라소 6268m 는 페루가 아닌 에콰도르에 있는 산 162p (또 동물은 금욕주의의 전형들이었다. 워즈워스는 한때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도브코티지 위의 과수원에서 빠짐없이 노래를 하는 푸른 박새에게 큰 애착을 가진 일이 있었다. 시인과 그의 누이는 이곳에서 아주 추운 첫 겨울을 보내면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 새로 나타난 백조 한 쌍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 이 백조들은 워즈워스 남매보다 훨씬 강한 인내심으로 추위를 견뎌냈다. 랭데일 골짜기를 따라 한 시간 정도 올라가자 빗줄기가 좀 약해졌다 M과 나는 희미하게 트시입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는 좀 더 강하게 티십 하는 소리와 번갈아가며 되풀이되었다. 거친 풀덤불에서 밭종다리 세 마리가 날아올랐다 침엽수 가지 위에서 늦여름의 햇빛에 옅은 모래 빛깔의 깃털을 말리는 귀가 검은 딱새는 왠지 수심에 잠긴 듯 한 표정이었다. 딱새는 뭔가에 놀라 훌쩍 뛰어 오르더니 골짜기를 맴돌며 높은 소리로 빠르게 슈워 슈이 슈위~우 하는 소리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바위를 가로질러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 양 떼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 양 한 마리가 좁은 길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다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방문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과 양은 서로를 바라보며 경이를 느꼈다. 잠시 후 양은 드러누운 듯 한 자세로 한가하게 풀을 뜯어먹었다 양은 마치 풀이 껌이라도 되듯이 입 한쪽으로 열심히 씹었다. 무엇 때문에 나는 나이고 양은 양일까? 양이 또 한 마리 다가오더니 친구 곁에 털을 맞대고 누웠다. 그들은 잠시 서로 다 이해한다는, 온유하면서도 즐거운 눈길을 교환했다. 몇 미터 앞쪽 냇물까지 이어지는 짙푸른 덤불속에서 점심을 잔뜩 먹어 노곤한 노인네가 헛기침을 하는듯한 소리가 난다. 이어 어울리지 않게 어떤 사람이 귀중품을 잃고 안달이 나서 잎 사이를 뒤지는 듯한 부산스런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생물은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곧 잠잠해진다 어린아이가 숨바꼭질을 하느라 옷장 뒤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때의 긴장된 침묵이다.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을 만났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맛보게 하는 것 사실 우리 앞의 세계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보고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우리는 침대로 갔다 나는 더 읽으려했지만 침대 머리 판에 달라붙은 긴 금발을 발견한 뒤로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머리카락은 내 것도 M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보다 앞서 모털맨에 묵었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신체 일부를 뒤에 남긴 것도 모르고 지금쯤 다른 대륙에 가 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바깥의 올빼미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지만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다.) -워즈워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워즈워스는 자연 속에 이런 작지만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많은 시에 매우 구체적인 부제를 붙이기도 했다. 예컨대 <틴턴사원>의 부제 1798년7월13일 여행 중에 와이 강변을 다시 찾고-는 정확한 날짜를 명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산골에서 골짜기를 굽어보며 보낸 몇 순간을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의미 있고 쓸모 있는 순간으로 꼽을 수 있으며 따라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만큼 정확 하게 기억할 가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무는 다양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녹색은 조금씩 섬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치 색깔차트의 표본을 부채처럼 펼쳐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장면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인 것은 불과 1분뿐이었다 곧 일에 대한 생각이 침입을 했고 M이 전화를 걸러 여인숙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장면이 내 기억 속에 고정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어느 날 오후 중반 런던에서 여러 가지 근심으로 마음이 짓눌린 상태에서 교통체증에 걸려있는데 그 나무들이 나에게 돌아왔다. ~~~이 나무들은 내 생각들을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을 제공했다. 이 나무들은 근심의 소용돌이로부터 나를 보호했고 그날 오후 나에게 거창하지는 않지만 살아야 할 이유를 주었다. 나는 작아진 느낌을 얻기 위해 사막으로 출발했다.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이 적절한 한 단어로 표현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초가을 저녁 날빛이 희미해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 또는 빈터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물웅덩이와 마주쳤을 때 느끼는 감정을 전달하려면 이런저런 말들을 어색하게 잔뜩 쌓게 되기 마련이다. 새벽의 시나이 남부 그렇다면 이 감정은 무엇일까? 이것은 4억년 전에 만들어진 골짜기를 통해 느끼는 감정 2300미터 높이의 화강암 산을 통해 느끼는 감정 일련의 가파른 협곡의 벽에 표시된 수천 년의 침식 흔적을 통해 느끼는 감정이다. 이런 것들 옆에 있으면 인간은 그저 늦게 나타난 먼지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숭고함은 우주의 힘 나이 크기 앞에서 인간의 약함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유쾌할 수도 있고 심지어 사람을 도취시킬 수도 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숭고함은 약하다는 감정과 관계가 있을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많다. 봄의 초원, 완만한 골짜기, 떡갈나무, 꽃무리 특히 데이지 무리 그러나 이런 것들은 숭고하지는 않다 숭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두 관념은 종종 혼동된다. 이 두 말은 서로 매우 다르고 또 정반대되는 본성을 가진 사물들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버크는 그렇게 불평했다. 사람들이 큐-런던교외의 마을이름-에서 템즈강을 보고 입을 떡 벌리며 그것을 숭고하다고 부르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해 젊은 철학자가 느낀 짜증이 느껴진다. 풍경은 힘 즉 인간의 힘보다 크고 인간에게 위협이 될 만한 힘을 보여줄 때만 숭고하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숭고한 장소들은 인간의지에 대한 도전을 보여준다.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장애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과 마주쳤을 때 숭고한 풍경이 그 웅장함과 힘을 통해 우리가 원한을 품거나 탄식하지 않고 그 사건을 받아들이도록 상징적 역할을 한다는데 는 변함이 없다. 구약의 신이 알고 있었듯이 물리적으로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의 요소들 (산 땅의 띠 사막)을 끌어들이는 것은 위축된 인간의 기운을 북돋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는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우리를 부드럽게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한계에 부딪힐 때 불안과 분노를 느끼겠지만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자연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도 똑같이 압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든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나는 N568번 도로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 나는 그 길을 따라 라크로의 밀이 자라는 평원을 가로질러 나륙으로 들어갔다. 너무 일찍 왔기 때문에 묵적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생 마르탱 드크로 마을 외곽에 차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내가 멈춘 곳은 올리브 숲 가장자리였다. 나무들 속에 숨은 매미들이 내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숲 뒤에는 밀밭 그 경계에는 한 줄로 늘어선 사이프러스 그 우듬지들 위로 알피유 산의 들쭉날쭉한 산마루가 보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특별히 찾는 것은 없었다. 맹수도 별장도 기억도 내 동기는 간단하고 쾌락주의적이었다. 나는 아름다움을 찾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어떤 장소 자체에 내재한 특질들에 의해 또는 우리 심리의 내부회로에 의해 결정이 나는 것 같다. 따라서 어떤 아이스크림이 특히 맛있다고 느끼는 것을 어쩔 수 없듯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장소에 대한 느낌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방금 비유적으로 이야기한 거들과는 달리 심미적인 취향은 그렇게 굳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장소를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은 이렇다 할 자극이 없어 그곳이 제대로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어떤 불행하지만 무자위적인 연상에 의해 등을 돌리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와 올리브나무와의 관계도 그 잎의 은빛 광택이나 가지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달라질 수 있다. 밀이 바람결에 낟알이 가득한 머리를 숙일 때 이 연약하지만 순수한 작물의 페이소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밀을 둘러싼 새로운 연상이 형성될 수도 있다. 아주 서툰 표현으로라도 프로방스의 하늘에서 중요한 것이 파란색의 색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 하늘에서 뭔가 눈여겨볼 만한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어쩌면 어떤 장면에서 무엇을 찾아야할지 파악하는 감각을 기르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시각예술을 공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예술 자품들은 사실상 우리에게 프로방스의 하늘을 보라 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라. 올리브나무를 제대로 평가하라 라고 말해주는 아주 섬세한 도구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훌륭한 예술작품이라면 밀밭에 있는 수백만 가지 요소 가운데서도 관객의 미감과 관심을 자극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을 그려낼 것이다. 이런 작품은 보통 대략의 정보 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리는 요소들을 전경에 내세워 그것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일단 그것이 눈에 익으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것에 자극을 받아 우리주위의 세계에서도 그것을 발견하려 들게 된다. 이미 발견했다면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 삶에서 그것들에 무게를 실어주게 된다. 어떤 새로운 단어를 여러 차례 들어도 눈치 채지 못하다가 그 의미를 아는 순간 비로소 그 단어를 듣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가 일단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면 예술작품은 자잘한 방식으로 우리가 여행하고 싶은 곳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가보았지만 제대로 보지 않았던 곳 또는 무관심하게 지나친 곳들 가운데 어떤 곳 들이 가끔 눈에 번쩍 띄면서 우리를 압 도 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런 곳들은 서툴게나마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질을 소유사고 있다. 이런 곳은 예쁘지 도 않고 안내 책에서 아름다운 곳을 설명 할 때 흔히 꼽는 분명한 특징 같은 것도 없다. 우리가 여기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 장소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행 하면서 많은 아름다움을 만났다. 마드리드에서 경험한일이다. 호텔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공터가 하나있었다. 공터의 한쪽 경계는 아파트건물들이었고 다른 쪽 경계는 세차장이 딸린 오렌지 색깔의 커다란 주유소였다. 어느 날 저녁 객실은 거의 텅 빈 길고 늘씬한 열차가 어둠을 뚫고 주유소 지붕 몇 미터 위를 지나갔다. 열차는 아파트건물 중간층정도 높이에서 건물들 사이를 구불구불 헤쳐 나갔다. 고가철도는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열자는 마치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열차의 미래 지향적인 생김새와 차창 밖으로 번지는 흐릿하고 연한 녹색불빛 때문에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열차가 그렇게 공중 에 뜨는 것이 불가능한일은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파트 안에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부엌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열차 안의 많지 않은 승객들은 뿔뿔이 흩어 져 바깥의 도시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서로 만나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궁상맞은 호텔을 피하고 싶어 산책에 나선 관찰자가 망막에서만 짧은 순간 만났을 뿐이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나무 문 뒤편의 마당에서 낡은 벽돌 벽을 하나 발견했다.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은 바람이 운하를 따라 붙었음에도 이 벽은 초봄의 빚ㄴ약한 햇볕으로 자기 몸의 온기를 조금씩 늘려갔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벽돌의 꺼칠꺼칠하고 울퉁불퉁한 표면을 어루만져보았다. 가벼워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벽돌들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부석조각이나 레바논 식품점의 할바사탕을 연상시키는 그 질감을 좀 더 가깝게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베이도스 동해안에어는 아프리카 해안까지 거칠 것 없이 뻗어 있는 짙은 보라색 바다를 내다보았다. 갑자기 섬이 작고 약해보였다 꾸민 듯 한 느낌을 주던 분홍색 야생 꽃들과 텁수룩해보이던 나무들이 바다의 맨송맨송한 단조로움에 대한 감동적인 저항으로 느껴졌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는 모털맨 여인숙 창밖으로 동이 트는 것을 보았다. 실루리아기의 부드러운 바위위에는 가느다란 녹색 풀이 덮여 있었고 바위들을 짊어진 낮은 산 위에는 안개가 깔려있었다. 산은 누워 잠든 거대한 짐승의 등뼈처럼 굽이치고 있었다. 이 짐승은 언제라도 잠을 깨고 몇 킬로미터의 높이로 벌떡 일어나 녹색 펠트 저고리에 뭍은 보풀을 털어내듯이 떡갈나무와 산울타리를 털어낼 것 같았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 그러나 아름다움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서만 자주 나타나거나 계절과 빛과 날씨가 보기 드물 게 조화를 이룬 결과로 나타나곤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 어떻게 공중에 뜬 열차를, 할바 사탕처럼 생긴 벽돌을 잉글랜드의 골짜기를 붙들 것인가? 카메라가 한 방법이다. 사진을 찍으면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을 보고 촉발된 근질근질한 소유욕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다 귀중한 장면을 잃어버릴 것 이라는 불안은 셔터를 누를 때 마다 줄어든다. 아니면 아예 우리 자신을 물리적으로 이름다운 장소에 박아 놓을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그 장소 안에 좀 더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그 장소도 우리 안에 좀 더 확실하게 존재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나는 목수를 화가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목수로서 더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데생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것을 우리 손으로 재창조하는 과정 을 통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슨하게 관찰하는 데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그 구성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좀 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한 강의를 끝내면서 러스킨이 자신을 포함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데생을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두 사람이 클레어 시장에 걸어 들어간다고 해봅시다. 둘 가운데 하나는 반대편으로 나왔을 때도 들어갔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버터 파는 여자의 바구니 가장자리에 파슬리 한 조각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나왔습니다. 그는 일상적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그 이미지들을 자신의 일에 반영시킬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와 같은 것을 보기 바랍니다. 한군데 가만히 앉아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린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튼튼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총알에게는 빨리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빨리 그리고 멀리 여행하고 싶어 하는 소망이 한곳에서 제대로 된 기쁨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즉 바구니 가장자리에 걸린 파슬리의 작은 가지 하나처럼 세밀한데서 기쁨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풍경의 진정한 소유는 그 요소들을 살피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자하는 의식적 노력에 달려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기억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있다. 카메라는 보는 것과 살피는 것 사이의 구별 보는 것과 소유하는 것 사이의 구별을 흐려버린다. 카메라는 진정한 지식을 선택할 기회를 줄 수도 있지만 어느새 그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을 잉여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카메라는 사진을 찍음으로써 우리 할 일을 다 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장소 -예를 들어 숲- 를 제대로 먹으려면 줄기가 뿌리와 어떻게 연결될까? 안개는 어디서 올까? 이 나무는 왜 저 나무보다 색이 짙을까? 등의 문제를 계속 제기하게 된다. 스케치를 하는 과정에서는 은연중에 이런 질문을 하고 또 답을 찾게 된다. 두 사람이 산책을 나간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스케치를 잘하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그런데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녹색 길을 따라 걸어간다. 이 두 사람이 지각하는 경치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길과 나무를 볼 것이다. 그는 나무가 녹색임을 지각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태양이 빛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반면 스케치를 하는 사람은 무엇을 볼까? 그의 눈은 아름다움의 원인을 찾고 예쁜 것의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꿰뚫어 보는데 익숙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햇빛이 소나기처럼 잘게 나뉘어 머리 위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잎들 사이로 흩어지고 마침내 공기가 에메랄드빛으로 가득 차는 모습을 관찰한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가지들이 잎들의 베일을 헤치고 나오는 모습을 볼 것이다.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색 이끼와 하얀색과 파란색 자주색과 빨간색으로 얼룩덜룩한 환상적인 지의류가 부드럽게 하나로 섞여 아름다운 옷 한 벌을 이루는 것을 볼 것이다. 이어 동굴처럼 속이 빈 줄기와 뱀처럼 똬리를 틀고 가파른 둑을 움켜쥐고 있는 뒤틀린 뿌리들이 나타난다. 잔디가 덮인 비탈에는 수많은 색깔의 꽃들이 상감세공처럼 새겨져있다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스케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녹색길을 통과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 할 말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다. 그저 이러저러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왔을 뿐이다. 러스킨은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라고 권했을 뿐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굳히려면 글을 써야한다고 그의 말로 하자면 말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전에 그가 데생으로 아무리 존경을 받았다 하더라도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 그리고 그가 빅토리아 여왕 시대 말기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그의 말 그림 때문이었다. 매력적인 장소는 보통 언어의 영역에서 우리의 능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예를 들어 레이크디스트릭트에서 나는 친구에게 엽서를 쓰다가 약간의 절망과 초조함을 느끼며 경치는 예쁘고 날씨는 흐리고 바람이 많다고 썼다. 러스킨이라면 그런 산문은 무능력이라기보다는 게으름의 결과라고 평했을 것이다. 그는 우리 모두가 적절한 말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충분한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을 분석하는데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호수가 예쁘다는 관념에 안주하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 넓은 호수에서 매력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거기서 연상되는 것은 무엇인가? 크다는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을까?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천재의 증거는 못될지 몰라도 적어도 하나의 경험을 진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동기에서 나온 것임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묘사를 통하여 우리는 왜 어떤 장소가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이해한다는 러스킨적인 목표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때문에 짜증이 난다. 우리가 교통섬이나 좁은 도로에서서 그 사람들에게는 눈여겨 볼 것이 없는 사소한 것들에 감탄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부청사 지붕이나 벽에 새겨진 글에 흥미를 느껴 차에 치일 위험을 무릅쓴다. 우리 눈에는 어떤 슈퍼마켓이나 미장원이 유난히 매혹적으로 보인다. 우리는 차림표의 레이아웃이나 저녁뉴스진행자의 옷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우리는 현재의 밑에 겹겹이 쌓여있는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집에 있을 때는 기대감이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흥미 있는 것을 모두 발견했다고 자신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곳에 오래 살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우리가 10년 이상 산 곳에 뭔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우리는 습관화되어있고 따라서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 드 메스트르는 우리의 이런 수동성을 흔들려 고했다. 방 여행을 기록한 두 번째 책 "나의 침실 야간 탐험"에서 그는 창문으로 가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는 그 아름다움을 보고 좀 더 많은 사라들이 그러 흔하지만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하지 못하는 것에 좌절감을 느낀다. "지금 하늘이 잠들어있는 우리를 위해 펼쳐놓은 이 숭고한 광경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산책을 나가거나 극장에서 몰려나오는 사람들이 잠시 고개를 들어 머리위에서 빛을 발하는 찬란한 별자리를 감상하는데 무슨 돈이 들까?"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않는 이유는 전에 그렇게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우주가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습관에 빠져있다 실제로 그들의 우주는 그들의 기대에 적당히 맞추어져 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지역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나의 관심이 이렇게까지 배타적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나도 지하철까지 빨리 가겠다는 목표에 그렇게 단단히 얽매여 있지는 않았다.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면 우리의 감수성은 수많은 요소를 향하게 되지만 그런 요소들의 숫자는 그 공간에서 우리가 찾는 기능에 맞추어 점차 줄어든다. 거리에서 우리가 보고 생각할 수 있는 4000가지 가운데 우리는 결국 몇 가지만 적극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길 앞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 오가는 사람들의 양 비가 올 가능성 등 버스도 처음에는 미학 또는 기계학의 관점에서 보았겠고 혹은 더 나아가서 심지어는 도시 내의 공동체 들을 생각하기위한 발판으로 삼기도 했겠지만 점차 어떤 지역을 가능한 한 빨리 가로질러 우리의 목적지까지 실어다 줄 네모난 상자로만 보게 된다. 버스가 가로지르는 지역은 우리의 일차적인 목표와는 관련이 없으며 그 밖은 모두 어둠이고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그동안 거리를 나의 관심의 틀에 맞추어놓고 살아왔다. 이 틀에는 금발의 아이들이나 소스 광고, 보도에 깔린 돌이나 가게 진열장의 색깔, 일보러 다니는 사람들 또는 연금 생활자들의 표정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일차적 목표가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공원을 구경하거나 단일한 블록 안에 뒤섞여 있는 조지 시대, 빅토리아 시대, 에드워드 시대의 건축물들에 대해 생각해 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거리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 연상되는 사고, 경이감이나 고마움, 시각적 요소에 의해 촉발되는 철학적 일탈은 잘려나갔다. 그 대신 어떻게든 빨리 지하철까지 가고자 하는 집요한 요구만 남았다. 나는 이제 드 메스트르트를 좇아 습관화의 과정을 역전시켜 내가 그동안 발견했던 용도에서 주위 환경을 분리시키려 했다. 나는 억지로 이상한 종류의 정신적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자 서서히 여행의 보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모든 것에 잠재적인 흥밋거리가 있고, 가치들이 층층이 잠복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 줄로 늘어선 가게들을 보면 서로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크고 불그스름한 덩어리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러던 것이 이제 건축학적인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꽃 가게 주위에는 조지시대 기둥들이 있었다. 정육점 꼭대기에는 빅토리아 시대 말기 고딕스타일의 이무기 돌들이 있었다. 식당은 추상적 형체들이 아니라 식사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유리로 전면이 덮인 사무실 1층 회의실에서는 사람들이 몸짓을 해가며 토론을 하고 있다. 누군가 오버헤드 프로젝트로 파이 도표를 비추고 있다. 그 건물 건너편에서는 한 남자가 보도에 콘크리트를 부으며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다지고 있다. 나는 버스에 올라타, 개인적인 관심으로 바로 빠져드는 대신 상상 속에서 다른 승객들과 관련을 가져보려고 했다. 내 앞줄에서 오가는 대화가 들렸다. 어딘가의 어떤 사무실에 있는 누군가가 -서열이 아주 높은 사람인가 보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나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비능률적이라고 불평을 하지만, 그 자신이 그런 비능률을 얼마나 조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는다. 나는 도시의 여러 층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삶의 다층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여러 가지 불평들의 공통점들- 늘 이기심이 문제고, 늘 맹목성이 문제다-을 생각해 보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우리에게 불평한다는 오래된 심리학적 진리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관심이 새로 깨어나면서 동네 사람들이 생겨나고 건물들이 재규정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관한 생각들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지역에 퍼져나가는 새로운 부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철도 아치가 왜 그렇게 내 마음에 드는지, 스카이라인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왜 그렇게 내 마음에 드는지도 생각해보려 했다. 혼자 여행을 하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특정한 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어떤 측면이 나타나는 것을 교묘하게 막을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이 고가 도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인지 몰랐는데.” 그들은 그렇게 위협적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동행자에게 면밀하게 관찰을 당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 억제될 수도 있다. 또 동행자의 질문과 언급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조정하는 일에 바쁠 수도 있고, 너무 정상으로 보이려고 애를 쓰는 바람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도 있다. 그러나 3월의 어느 오후 중반에 해머스미스에 홀로 있으니 그런 근심이 없었다. 나에게는 약간 괴상하게 행동할 자유가 있었다. 나는 철물점의 창문을 스케치하기도 했고, 고가 횡단 도로에 대한 “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드 메스트르는 방의 여행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훌륭한 여행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와 러시아 여행을 했고, 알프스 산맥에서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던 군대와 겨울을 보내고, 코카서스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하기도 했다. 알렛산더 폰 훔볼트는 1801년 남아메리카에서 쓴 자전적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따분한 일상생활에서 경이로운 세계로 옮겨가고자 하는 불확실한 갈망에 자극을 받았다.” 드메스트르는 바로 이 “따분한 일상생활”과 “경이로운 세계” 사이에 더욱 섬세하게 선을 그어보려고 했다. 그는 훔볼트에게 남아메리카가 따분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훔볼트의 고향 베를린에서도 뭔가 볼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라고 권했을 것이다. 80년 뒤 드 메스트르를 읽고 그에게 감탄했던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니체는 이렇게 밀고 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하찮고 일상적인 경험-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 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 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사막을 건너고, 빙산 위를 떠다니고, 밀림을 가로질렀으면서도, 그들의 영혼 속에서 그들이 본 것의 증거를 찾으려 할 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는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파자마를 입고 자신의 방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우리에게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고 슬며시 우리 옆구리를 찌르고 있다. [Review] 여행은 새로운 장소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그곳에 가면 무언가 새로운 감동[기쁨의 감동]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대감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전 과정에서 나타난다. “여행의 기술” 이라는 책 표지에 마음이 끌린 이유는, 지금까지 많은 시간과 경제적인 지출을 마다않고 다녀온 여행에서 늘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느낀 기쁨을 마음에 가득 담아서 두고두고 꺼내어 볼만한 여행의 추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때마다 나는 또 다른 여행지를 생각하게 된다. “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장치 앞에서 아프고 싶어 하고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부끄러움 없이 자기도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했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 저자인 알랑 드 보통의 글은 묘하게 마음을 끄는데 가 있다.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독자는 그 이야기가 독자 자신의 이야기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매력이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쉬운 내용이지만 가볍지 않고, 의도적으로 독자의 마음을 자신의 생각으로 가두려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잘 읽혀진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삶은 곧 어딘가로 떠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새로움을 찾아가는 본능,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에 그토록 목말라 하고 그것이 곧 삶인 것이다. 사람들은 여행지에 가서 새로운 사물을 보고 자신 속에 들어있는 생각의 파편들을 모으기도 하고 또 응어리를 풀어지게 하기도 한다. 그것은 자연이 주는 경이감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깨달음 때문이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 이 책은 여행에서 본 것을 일회적으로 끝내지 않고 오래 마음속에 담아두고자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가 받은 감흥을 또 다른 이들에게 나눔으로 새로운 감흥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이다.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여행지를 스케치하는 사람들이라면 많은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 화가와 시인 작가가 본 여행지의 모습을 본인(알랑 드 보통)의 생각으로 절묘하게 만들어가는 독특한 글 솜씨는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경의 진정한 소유는 그 요소들을 살피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에 달려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기억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있다. “
“일상의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을 만났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맛보게 하는 것, 사실 우리 앞의 세계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보고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