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조
나는 여전히 몬주익 언덕을 달린다
바르셀로나의 히어로
한국 육상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육상 선진국과의 수준 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17명의 선수를 파견했지만 메달은 커녕 결선에 나선 선수가 한 명도 없는 등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역대 올림픽에서 결선에 오른 선수는 1984년 로스엔젤레스 대회 남자 멀리뛰기의 김종일, 1988년 서울 대회 여자 높이뛰기의 김희선,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남자 높이뛰기의 이진택 등 3명밖에 없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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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 강원도 삼척 출생
- 1987 일본 사이타마현 지시부시 10km 단축마라톤 대회신기록
- 1990 강릉 명륜고등학교 졸업
- 1992 일본 벳부-오이타 마이니찌 마라톤에서 2시간10분 돌파
- 1992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 1994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 1994 미국 보스톤 마라톤 한국최고기록 (2:08:09)
- 1996 고려대 사범대 체육교육과 졸업
- 2004 고려대 대학원 체육학과 박사과정 수료
- 2004 국가대표 마라톤 상비군 감독
- 2005 대한육상경기연맹 마라톤 기술위원
그러나 마라톤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황영조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4년 뒤 애틀랜타 대회에서는 이봉주(삼성전자)가 은메달을 땄다.
황영조가 획득한 바르셀로나 대회 마라톤 금메달은 의미가 매우 컸다. 제 1회 대회인 1896년 아테네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치러진 마라톤에서 월계관을 쓴 아시아 선수는 1936년 베를린 대회의 손기정에 이어 황영조가 두 번째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일제 강점기 일장기를 달고 따 낸 것이기에 황영조의 금메달은 더욱 값졌다. 황영조의 금메달로 40여 년 동안 세계 수준에 뒤져 있던 한국 마라톤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지게 지고 해초 캐던 소년, 육상을 시작하다
황영조는 1970년 3월 22일 강원도 삼척에서 황길수 씨와 이만자 씨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보다 집안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가방을 던져 놓고, 밭에 나가 지게를 지거나 바다에서 해초를 캤다.
황영조는 “특별히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어느 집이든 먹고 사는 게 힘들었다. 어머니께서는 학업보다 집안일에 신경을 쓰라고 말씀하셨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황영조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에 비해 운동 신경도 뛰어나고 힘도 셌다.
삼척 근덕중학교 1학년 때 유도부, 육상부, 수영부 등 여러 운동부에서 가입을 권유 받은 황영조는 사이클부를 선택했다. 도로 사이클 선수로 뛰면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지만 성에 차지는 않았다. 그래서 강릉 명륜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육상으로 종목을 바꿨다.
폐활량이 좋은 황영조는 중장거리 선수에 적합했다. 처음엔 1,500m를 뛰었으나 고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5,000m와 10,000m 등 본격적으로 장거리를 달렸다. 고교 2학년 때인 1988년 제17회 전국종별육상경기대회와 제69회 전국체육대회 겸 제17회 종별선수권대회 10,000m에서 2위에 올랐다. 그리고 1989년 3월 제19회 경호역전경주대회에서 3개의 구간신기록을 세웠고 제70회 전국체육대회에선 5,000m와 10,000m 2관왕에 올랐다.
페이스 메이커로 마라톤에 나섰다가 '일을 내다'
1990년 고교 졸업 후 코오롱에 입단했다. 1년 동안 고교 때처럼 5,000m와 10,000m를 주 종목으로 뛰었다. 제71회 전국체육대회 5,000m와 10,000m에서 각각 13분59초70과 29분45초01의 대회 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따는 등 장거리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그러다 1991년 들어 우연한 기회에 마라톤의 길로 들어섰다.
황영조의 의지와 상관없는 결정이었다. 황영조는 “코칭스태프가 그 해 3월 열린 동아국제마라톤대회에 동료 선수들의 기록을 끌어올리기 위한 페이스 메이커로 출전하라고 했다”고 기억했다. 페이스 메이커였기에 따로 마라톤 훈련을 하지 않았다. 황영조는 그때까지 훈련으로도 마라톤 완주 경험이 한 차례도 없었다. 40km 이상을 뛴 적도 없었다. 황영조 스스로도 출전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황영조는 처음 뛴 마라톤 대회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2시간12분35초로 3위로 골인했다. 당시 한국 최고기록인 2시간11분34초에 불과 1분1초 뒤진 기록이었다. 이어 그 해 7월 영국 셰필드에서 벌어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대회 최고기록인 2시간12분40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황영조는 마라톤이 아닌 5,000m와 10,000m 국가대표 선수였다. 1991년 10월 제9회 아시아육상경기선수권대회 10,000m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까지도 마라톤 선수 전향에 대해 반신반의했다”는 게 황영조의 얘기다.
한국 마라톤의 염원 2시간 10분 벽을 깨다
그러다 그 해 일본 역전경주대회에 출전한 게 마라톤으로 종목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한국 대표로 출전한 황영조는 그 대회에서 내로라하는 일본 선수를 모두 제치고 구간 1위에 올랐다. 구간 기록을 42.195km로 환산하면 2시간 9분대가 가능했다. 황영조는 “그 무렵 일본 마라톤은 한국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일본의 주요 마라톤 선수들을 꺾고 1위를 차지하자 일본 육상계가 깜짝 놀랐다. 그때 마라톤 선수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황영조는 그 해 겨울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을 했다. 체계적인 훈련을 하면서 기록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 2월 제41회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2시간8분47초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당시 한국 최고기록인 2시간11분2초를 단숨에 2분15초 단축하며 한국 마라톤의 염원이었던 2시간10분의 벽을 허물었다.
덴사모 벨라네(에티오피아)가 갖고 있던 당시 세계 최고기록 2시간6분50초에 1분57초 뒤진 1급 수준의 기록이었다. 황영조는 한국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마라토너로 올라섰다.
결전의 그 날 깨어나자,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아파온 발바닥
바르셀로나올림픽은 1992년 7월 25일(이하 현지시간) 개막해 8월 9일 폐막했다. 마라톤은 폐막식 직전에 치러졌다. 한국 선수단은 대회 첫날 사격 여갑순(대구은행)의 금메달을 시작으로 신나는 메달 행진을 벌였다. 마라톤은 대회 마지막 날 열리게 돼 있었다. 황영조는 마드리드에서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치고 8월 6일 바르셀로나에 입성했다.
황영조는 마라톤 우승 후보 가운데 한 명이기는 했지만 한국 선수단에선 혹시나 하는 마음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한국 취재진은 대회 폐막 하루 전날 메달리스트들을 한데 모아 사진 촬영을 했다. 그 안에 황영조는 없었다. 마라톤 메달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8월 9일 아침이 밝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황영조는 다리에 심한 고통을 느꼈다. 고질병인 족저근막염이 도진 것이었다. 발바닥이 아프고 쓰려 걷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그 동안 땀 흘리며 노력한 게 억울해 출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황영조는 마음 속으로 수없이 다짐했다. ‘그토록 꿈꿔 왔던 올림픽 출전이 아닌가. 죽을 병은 아니다. 참고 뛰자.’
황영조, 김재룡, 김완기 등 72개 국 112명의 선수가 출발선에 섰다. 출발 총성이 울리자 황영조는 앞으로 치고 나갔다. 5km 정도 달리다 보니 발바닥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컨디션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황영조는 선두 그룹을 유지하며 신중하게 레이스를 펼쳤다.
황영조는 30km 지점을 통과하면서 스퍼트를 했다. 선두 그룹에 있던 선수들이 하나 둘씩 뒤로 밀려났다. 선두 그룹에는 황영조와 김완기 그리고 모리시타 고이치(일본)만 남았다. 3km를 더 달리자 김완기가 처졌다. 이제 황영조와 모리시타의 싸움이 됐다. 한국과 일본의 대결이기도 했다.
마라톤 레이스에서 한일 전이 벌어지다
황영조는 “이제 와 생각해 봐도 바짝 긴장이 된다. 역사적으로 미묘한 관계인 일본 선수와 선두 경쟁을 했으니 말이다. 이기면 영웅이 되지만 지면 역적이 되는 상황이었다. 마라톤 레이스가 아니고 전쟁이었다. 난 무조건 이겨야 했다. 더욱이 경기 당일은 56년 전 손기정 선생님이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날이었다”고 말했다.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는 악명이 높았다. 30km 지점부터 골인 지점인 몬주익 스타디움까지 가파른 고개가 이어졌다. 날씨도 무더웠다. 황영조는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었다. 모리시타도 끈질기게 황영조의 뒤를 따라붙었다. 황영조와 모리시타의 팽팽한 승부는 40km 지점까지 이어졌다. 이제 결승선까지 3km가 채 남지 않았다.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승부수를 던졌다. 힘겹게 몬주익 언덕에 올라선 황영조는 내리막길에서 스피드를 끌어올리며 힘차게 치고 나갔다. 모리시타와의 간격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황영조는 홀로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8만여 명의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트랙을 한 바퀴 돈 뒤 황영조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잠시 뒤 시상식이 열렸다.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 애국가가 울려 퍼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월계관을 쓴 황영조는 관중석으로 뛰어 올라갔다. 관중석에는 손기정 선생이 있었다. 황영조는 금메달을 손기정 선생의 목에 걸어 드렸다. 손기정 선생은 황영조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황영조는 가슴이 뭉클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달렸다."
황영조의 기세는 대단했다. 1994년 4월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2시간8분9초의 한국 최고기록을 세웠다. 그 해 10월 열린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2시간11분13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96년 한국 육상계는 애틀랜타 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남자 마라톤의 황영조와 남자 높이뛰기의 이진택은 유력한 메달 후보였다.
특히 황영조의 올림픽 2연속 금메달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그 같은 기대는 올림픽 개막을 4개월 앞두고 물거품이 됐다. 황영조는 그 해 3월 동아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25분45초로 29위에 그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를 선언했다. 26살로 한창 뛸 나이였다.
황영조는 “솔직히 더 뛸 수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딸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한국 최고기록 등 모든 걸 이뤘다. 더 뛸 의미가 없었다. 운동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정상에 있을 때 그만두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서서히 미래를 설계해야 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정말 힘든 선택이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황영조는 한국 마라톤 영웅이다. 육상 관계자들은 “황영조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마라토너”라고 평가한다. 폐활량 등 마라톤 선수에 알맞은 신체조건을 타고 나기도 했다. 그러나 황영조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1%의 재능보다 99%의 노력이 현재의 황영조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황영조는 “난 노력형 선수였다. 정상에 서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끊임 없이 달렸다. 마라톤은 정직한 운동이다. 땀 흘린 만큼 결과가 나온다. 내가 잘 뛸 수 있었던 건 폐활량이 아니라 강인한 정신력이었다”고 말했다. 황영조는 “오늘날 나를 있게 한 건 어머니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달릴 수 있었던 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오늘날 황영조와 마라톤은 여전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2000년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부 감독을 맡고 있다. 황영조는 “마라톤은 내 인생의 뿌리다. 17년 전의 마음 그대로다. 몬주익 언덕을 넘을 때 열정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죽는 날까지 마라톤과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철 | 경향닷컴 뉴스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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