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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산(華嶽山)의 한 줄기 지맥(支脈)이 서쪽으로 뻗어내려, 허항산(許項山), 형제봉(兄弟峯), 명방현(明坊峴) 등으로 이어지고,다시 동으로 구부러져 동구(洞口) 쪽을 감싸고 있으니 이것이 마을 안산(案山)이다. 이 안산을 일자봉(一字峯), 또는 파초봉(芭蕉峯)이라고 부르고 있다. 화악산(華嶽山) 분수령(分水嶺)에 흘러내리는 물이 또한 마을 서쪽으로 작은 시내를 이루어, 그 형상이 흡사 항아리 같기도 하고 배(주(舟))같이 보이기도 한다고 하여 옛사람들이 옥호동천행주형(玉壺洞天行舟形)이라고 찬미(讚美)했다고 한다.
대항리(大項里)는 평전(平田),봉천(鳳泉), 상항(上項), 중항(中項), 하항(下項), 화남(華南), 정동(井洞) 등 7개의 자연 부락으로 되어 있다.이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확실치 않고, 고려 시대에 백씨(白氏)가 살았다고는 하나 역시 분명치 않다. 다만 지금 세거(世居)하고 있는 하씨(河氏), 황씨(黃氏), 장씨(蔣氏) 등이 1450년경을 전후(前後)하여 전거(奠居)하기 시작한 내력(來歷)만 남아 있다. 마을 이름이 한목, 또는 수동(壽洞)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수동(壽洞)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산수(山水)가 맑고 좋아 수(壽)를 누릴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화악산하(華嶽山下)에 4개의 수동(壽洞)이 있는데 그 중 3개동은 경북 청도군에 있고 1개동만 여기에 있는 셈이다. 옛부터 이름 있는 마을이 되어 경향(京鄕) 여러 곳에서 명사(名士)들이 많이 와서 살았고 또 여기서 태어나기도 하였다.
■ 상항부락(上項部落)
대항리(大項里)의 윗 부분에 해당하므로 윗목, 즉 상항(上項)이라고 한 것이다. 1454년(단종(端宗) 3년 을해년(乙亥年))에 사직(司直) 하비(河備)가 이곳에 복거(卜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자손들이 대대(代代)로 살게 되었다.
■ 영모재(永慕齋)
진양(晉陽) 하씨(河氏)의 재사(齋舍)의 하나이다. 영모(永慕)라는 것은 영원히 부모를 사모(思慕)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특별한 사연(事緣)이 있다.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일이다. 향교(鄕校)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린 소년 하재정(河再淨)이 난리와중(亂離渦中)에 황급(遑急)히 한목 집으로 달려 왔으나, 연로(年老)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피란(避亂)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부모님은 거동(擧動)이 어려운 상태인지라 처남(妻男)인 운정(雲汀)의 진주(晉州) 유씨(柳氏) 유여주(柳汝周)에게 아들의 장래를 맡겼다. 하재정(河再淨)의 외숙(外叔)인 유여주(柳汝周)는 어린 생질(甥姪)을 데리고 경북(慶北) 청송(靑松)으로 피란(避亂)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참화를 면(免)할 수 있었다.그러나 10여 년간의 피란 끝에 귀향(歸鄕)해 보니 촌락(村落)은 황폐(荒廢)해 있었고, 부모님의 생사(生死)조차 알 길이 없었다.그는 외숙(外叔)인 유여주(柳汝周)의 주선(周旋)으로 마을 뒤쪽 한골에 터를 잡아 초당(草堂)을 짓고, 이곳에 기거(起居)하면서 전화(戰禍) 중에 여읜 부모(父母)를 영원(永遠)히 사모(思慕)한다는 뜻을 남겼다. 뒤에 영모재(永慕齋)라는 재액(齋額)이 붙게 되고 후손(後孫)들의 합력(合力)에 의해 재사(齋舍)가 확장(擴張), 이건(移建)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 이 부락에는 동강재(東岡齋), 추모재(追慕齋), 보본재(報本齋), 두곡정(杜谷亭), 만회재(晩悔齋), 오월정(梧月亭) 등이 있으나 일일이 그 명칭의 유래를 설명할 수가 없다.
■ 중항부락(中項部落)(중땀, 중마을)
상항(上項)과 하항(下項)의 중간에 있어서 중마을, 즉 중항으로 불려진 것이다. 장수(長水) 황씨(黃氏) 일족(一族)의 집성촌(集姓村)이다.
처음 입주(入住)한 황학(黃鶴)은 유명한 방촌(村) 황희(黃喜) 정승(政丞)의 증손(曾孫)으로, 이조(李朝) 성종(成宗) 때에 호군(護軍)이라는 관함(官銜)을 가진 분이다. 퇴직(退職)한 뒤 이곳으로 낙향(落鄕)했는데 어떠한 연고(緣故)가 있었는지는 미상이다.
■ 첨모당(瞻慕堂)
황씨(黃氏)의 재사(齋舍)이다. 첨모(瞻慕)는 조선(祖先)의 분묘(墳墓)와 유적(遺蹟)을 첨망(瞻望), 사모(思慕)한다는 뜻이다. 처음 황종구(黃鍾耉)가 그의 고조(高祖)의 묘하(墓下)에 집을 짓고 김곡장(金谷庄)이라고 했는데, 현손(玄孫) 황기원(黃起源)이 현위치(現位置)에 이건(移建)하고 첨모당(瞻慕堂)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몽양재(蒙養齋), 복유재(復攸齋), 귀원정(歸園亭) 등이 있다.
■ 하항부락(下項部落)
대항리(大項里)의 아래 부분에 속하므로 아랫목, 즉 하항(下項)이라고 한 것이다. 이 부락 또한 취락(聚落) 형성의 시원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장춘수(蔣椿壽)가 부북 지동(池洞)(현 부북면(府北面) 제대리(堤大里))에서 이 부락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에 화악산(華嶽山)으로 피란(避亂)하였다가 난정후(亂定後) 돌아와 후손들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도 내독재(來讀齋), 영사정(永思亭), 묵와재(默窩齋), 추감재(追感齋), 사이당(四而堂) 등이 있다.
■ 남곤(南袞)이 딱밭
이조(李朝) 중종(中宗) 때의 문신(文臣) 남곤(南袞)의 태생지(胎生地)이다. 남곤은 원래 의령(宜寧) 사람인데, 그의 부친이 하비(河備)의 사위로 처가(妻家)인 이 곳에 와 살았다. 그의 제이자(第二子)로 태어난 남곤은 외사촌(外四寸)인 하충(河沖)과 더불어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고, 성종(成宗) 25년에 급제(及第), 출사(出仕)하여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까지 받았다. 그런데 중종조(中宗朝)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주도(主導)하여 조광조(趙光祖) 등 유명한 신진(新進) 학자(學者)들을 죽인 사건으로 그의 사후(死後)에 간적(奸賊)으로 몰려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 지금도 상항(上項) 457번지 부근 일대를 '남곤이 딱밭'이라고 불려진다.
■ 삼지당(三池塘)
남곤(南袞)과 같은 인물을 낳았다 하여 남곤 사후(死後), 이곳 지맥(地脈)을 끊기 위해 배(주(舟))의 형국(形局)인 대항에다가 세 곳에 못을 팠다고 한다. 이 곳이 곧 삼지당(三池塘)소라고 부르는 곳이다. 지금은 3개처의 지당(池塘) 중 두 곳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하항(下項) 동구(洞口) 산 밑에 이끼 낀 낡은 못이 하나 남아 있을 뿐이다.
■ 평밭
화악산(華嶽山) 동쪽 봉(峯) 아래 쪽에 자그마한 취락(聚落)이 있는데, 언제부터 사람이 거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산 위에 약간 평평한 곳이라고 해서 평전(平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 벽수동(碧水洞)
상봉(上峯)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오는 물과 평전(平田) 분지(盆地)에서 모여든 물이 합해져 흐르는 계곡(溪谷)에 자그마한 폭포(瀑布)가 있고 그 밑에 파여진 작은 못이 있어 인근 주민들이 하절(夏節)의 피서(避署)를 즐긴다. 이것이 벽수폭포(碧水瀑布)이다. 계곡(溪谷) 주위(周圍)에 푸른 수목(樹木)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항상 있는 곳이라고 해서 벽수동(碧水洞)이라고 한다.
■ 봉천동(鳳泉洞)
화악산(華嶽山) 중복(中腹)에 옛날 봉천사(鳳泉寺)라는 신라(新羅) 고찰(古刹)이 있었고, 절 밑에 5, 6호의 민가(民家)가 살았다. 지금도 탑(塔),부도(浮屠) 등 석조물(石造物)의 단편(斷片)과 민가(民家)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왜 봉천(鳳泉)이란 이름이 붙여졌는지 알 길이 없다. 절은 임진왜란 후까지도 있었는데 인근 산에 묘(墓)를 쓰고부터 폐사(廢寺)가 되었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현재 문헌상으로 남은 것이 없고, 오직 손태좌(孫台佐)의 시(詩) 한 수(首)가 구밀주지(舊密州誌)에 남아 있을 뿐이다.
■ 망바위
평전(平田) 분지(盆地) 가운데 있는 허항산(許項山) 꼭대기에 큼직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이 바위가 큰 평밭과 작은 평밭을 굽어보며 망(도둑을 지키기 위해 척후병 역할을 한다는 뜻이 있음)을 본다고 하여 망바위라고 이름한 것이다.
■ 양수바지
평전(平田)에서 벽수동(碧水洞)을 거쳐 내려오는 물과 봉천(鳳泉)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수(合水)되는 지점의 이름이다. 이 지점에서 동쪽을 보면 산복(山腹)쯤에 옛날 은광(銀鑛)이 있어 채은(採銀)했다는 폐광(廢鑛)된 굴이 있다. 이 곳을 은(銀)구더기라고 한다.
■ 새밭등(嶝)
형제봉(兄弟峯)을 마주 보며,아주 가파른 암벽(岩壁)의 산인데 그 밑으로 두침천(杜沈川)이 흐르며, 철쭉꽃이 장관(壯觀)을 이루는 곳이다. 철쭉등이 아니고 새밭등이란 이름이 붙어 있음이 기이하다. 아마 어느 시절에는 새풀이 무성하였거나 새풀에 얽힌 사연이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 황등걸굴
형제봉 남쪽 팔분산복(八分山腹)에 넓지막한 들겅(산 비탈에 부서진 암석만 있고, 풀이나 나무가 없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십척사방(十尺四方)의 석굴(石窟)이 있다. 추운 겨울에도 언제나 온기(溫氣)가 감돌았다고 한다.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중땀에 살던 황씨(黃氏)가 피란을 하였다고 한다. 황씨(黃氏) 피란굴이라 하여 황등걸굴이라고 이름 지어졌는지도 모른다.
■ 배나무정(이정(梨亭))
새밭등 아래 약간 평평한 평지가 있다. 이곳을 배나무정이라고 한다. 여기 길 가에 옛날 큰 배나무가 서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길 가는 행인이나 마을 나무꾼들이 이 배나무 밑에서 쉬어 갔다고 한다.
■ 맷돌 바위(연마대-硏磨臺)
마을 뒤쪽 약간 높은 곳에 맷돌 모양의 큼직한 바위가 맷돌 바위다. 옛날 마을 서당(書堂)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간혹 이곳에 올라와 휴식을 즐기던 곳이다.
■ 굴머리 부락(部落)
언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이조(李朝) 순조시(純祖時)라고 하는 말도 전해온다.동명(洞名) '굴머리'는 어떤 연유로 생겼는지 알 길이 없다. 마을 뒤쪽의 고개를 굴머리 고개라고 하는데,청도면민(淸道面民)의 교통로이다. 이 마을에 있는 추모재(追慕齋)는 순조조(純祖朝)에 전거(奠居)한 최광적(崔光迪)의 현손(玄孫)인 최상해(崔尙海)가 그 조상(祖上)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 정동(井洞)(사랑곡-仕郞谷), 사랑곡-巳郞谷)
이 곳에 취락이 형성된 年代는 분명하지 않다. 그 옛날은 대항리(大項里) 적항(赤項)이었다고 하는데 동면(同面) 청운리(靑雲里)가 적항리(赤項里)였던 시절에 대항리(大項里) 일부가 적항(赤項)에 속했던 것을 설명하는 듯하다.
동명(洞名)의 연유(緣由)는 알 길이 없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밀성(密城) 박씨(朴氏) 일문(一門)이 전거(奠居)하고 있다. 이 곳에 사정재(思井齋)가 있으니 박세건(朴世健)의 유덕(遺德)을 추모(追慕)하기 위한 건물이다.
■ 기우소(祈雨所)
화악산(華嶽山) 정상(頂上) 서봉하(西峯下)에 있는 용시덤에 용샘이 있는데,한발(旱魃)이 심(甚)할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 운주암(雲住庵)
화악산(華嶽山) 주봉(主峯) 문월대(聞月臺)의 아래 쪽에 있는 암자이다. 신라(新羅) 고찰(古刹)인 봉천사(鳳泉寺)에 속했던 암자(庵子)로 창건(創建)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본사(本寺)가 없어지고 청연암(靑蓮庵),백연암(白蓮庵) 등 부근 암자(庵子)들이 다 폐허(廢墟)가 된 뒤에도 이 운주암(雲住庵)이 그대로 존속되어 있는 것은 화악산에서 차지한 그 절묘(絶妙)한 위치(位置) 때문인 것 같다.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할만한 아름다운 암벽(岩壁)을 배경(背景)으로 하고, 만장(萬丈)의 층애(層崖) 위에 자리잡아 남쪽으로 백리산천(百里山川)의 운물(雲物)이 일망무진(一望無盡)한 안계(眼界)를 열어준다. 한때 불도(佛道)에 정진(精進)하는 학승(學僧)이 있었던 것 같다. 화악산(華嶽山) 운주암(雲住庵) 간행(刊行)이라는 간기(刊記)가 있는 불서(佛書)가 서울의 장서가(臧書家)의 서가(書架)에 꽂혀 있는 것을 보아도 알 만하다.
운주암이란 이름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암자의 위치가 높아 구름이 항상 머물러 있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명산을 돌아다니는 승(僧)들이 구름처럼 와서 머물다가 또 구름처럼 떠나 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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