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새해 남도가족여행
가족여행의 설렘을 잊은 지 오래였다.
아이들의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동차를 달리는 기쁨.
아내가 옷가게를 하였던 지난 3년은 더욱 그랬다.
순간의 호흡조차 버거웠던 시간들 속에서 우리가족은 허덕였다.
올 연말 가족여행을 계획하게 된 것은 순전히 가게를 그만둔 아내의 결단 때문이었다.
밤 10시까지 밀린 원고를 채웠다.
채워도 채워도 넘치지 않던 원고는 계륵처럼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오래된 배낭을 꺼내서 짐을 꾸렸다.
눅눅해진 침낭, 부식기운이 감도는 코펠, 코팅부분이 닳아 없어진 배낭은 게을렀던 지난날을 말해주고 있었다.
늦은 아침 게으르게 하품을 하고 길을 떠났다.
설렘보다 의무감이 앞서는 여행,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며 연신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하룻길의 여행계획조차 없어 어디부터 들를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서천휴게소에서 호두과자를 한 봉지 사서 허리춤에 찼다.
고향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다른 휴게소 것보다 바삭하고 고소하다.
군산 하구둑을 넘어서는데 철새가 보고 싶어졌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철새박물관에 갔다가 익산 미륵사지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6년 전에 개관했다는 철새박물관은 답사객의 눈높이에 맞춰 잘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마당에 전시된 여러 작품들과 조류들을 둘러본 뒤 전망대 수족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새의 내장을 구조화한 건물을 보며 무척 신기해하였다.
특히 동물과 새를 좋아하는 진헌이는 아예 열대의 물고기가 노니는 수족관 앞에 바짝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시간이 늦어 미륵사지 답사를 다음으로 미루고 변산으로 떠났다.
드넓은 호남평야는 전날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온난화 때문인지 요즘에는 쉽게 볼 수 없는 설경에 아이들은 정신을 빼앗겼다.
부안의 줄포에서 곰소염전을 지나다가 차를 세웠다.
지금도 운영되는 곰소염전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더구나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흐릿한 겨울해가 저물 때여서 애잔한 풍광을 자아냈다.
일제강점기에 지었다는 소금 저장창고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뒤 아이들과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우리는 눈사람에 눈과 코, 잎을 만들어 붙인 뒤 휴게소 입구에 세워놓고 길을 떠났다.
곰소시내에 들어서니 골탁한 젓갈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이들도 코를 틀어쥐고 무슨 냄새냐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빠가 좋아하는 젓갈냄새잖아’
나의 너스레에 아내와 아이들은 혼자 내려 걸어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곰소를 벋어나 모항으로 길을 잡았다.
오래 전 한광여고 아이들과 답사여행길에 들렀던 모항 산중턱의 아름다운 호텔이 우리가 정한 첫날 숙소였다. 모항까지 가는 길은 전국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다.
굽이굽이 해변을 끼고 돌아가는 길 좌우로 변산의 영봉들과 고군산열도의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모항을 얼마 남기지 않았는데 바다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
맑고 푸르른 우도주변의 바다는 금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우도가 잘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차를 멈추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해가 넘어 가는 저녁은 풍경은 아름답지만 날씨는 무척 차가웠다.
아내는 사진 몇 장을 찍고는 얼른 차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나는 은채, 진헌이와 신나게 뛰어다니며 눈을 밟고 사진을 찍었다.
모항모텔은 오래된 건물이지만 풍경은 명불허전이었다.
아쉬운 것은 해넘이가 끝나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인에게 해넘이도 끝났으니 숙박비를 깎아달라고 졸라 1만원을 할인받았다.
여관에 짐을 부리고 식당을 찾아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모텔 1층에도 횟집이 있었지만 너무 비싸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산등성이 포장마차에서 해물탕과 소주를 시켰다.
음식은 맛이 없었지만 찬바람 휘휘 나는 바람소리를 벗삼아 마시는 소주는 그럴 듯 했다.
아내와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주인아주머니와 핵폐기장반대운동, 태안기름유출사고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숙소로 내려왔다.
포장마차에서 숙소까지는 1, 2백 미터 남짓이었지만 아내와 은채는 한사코 자동차를 고집하였다.
여행길에서 좀 여유를 갖고 느리게 걷는 것도 즐거움이 아니겠냐고 설득해도 듣지 않는다.
결국 진헌이와 나는 걸어서, 아내와 은채는 자동차를 타고 내려왔다.
우리가족은 이렇게 다르다.
하지만 아내와 은채는 모르리라!
모항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하늘의 별자리를 찾는 수고가 얼마나 낭만적인지를,
얼마나 가슴 벅찬 희열인지를...
둘째 날,
불멸의 이순신 촬영셋트장을 답사하고 내소사에 당도했다.
언제 봐도 정겹고 정갈한 사찰 내소사!
절 입구의 할아버지 당산도 여전하였고,
일주문 앞 가게에서 풍겨오는 전어 굽는 냄새도 기분 좋았다.
일주문을 지나 시작되는 전나무 숲길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얼어버려 하얀 빙판으로 변해 있었다.
아내와 나는 은채와 진헌이에게 손썰매를 태워주며 즐겁게 걸었다.
그러고 보니 흙길도 좋지만 미끄럼 타며 빙판을 걷는 것도 낭만적이다.
내소사를 한 바퀴 돌고 나왔더니 시계가 정오를 가리킨다.
우리는 막걸리 반 되를 반주삼아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비빔밥은 은채도 한 그릇, 진헌이도 한 그릇씩 차지하였다.
산에서 채취한 나물에 진한 전라도 고추장을 비벼 먹는 비빔밥은 고소하고 향긋하다.
배불리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간은 오후 2시.
다음 일정은 전라남도 해남이다.
해남까지는 남도 삼백리다.
이제는 술 익는 마을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기분만은 삼삼했다.
해남 가는 길은 목포를 거쳐 영산강 하구둑을 건너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목포I.C에서 영암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복잡한 목포시가지를 벋어나 영산강 하구둑을 넘으니 대불공단이다.
대불공단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공룡박물관과 전라우수영이 있는 울돌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울돌목 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고 지루했다.
가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시간도 많이 지체하였다.
울돌목은 거친 물살이 인상적이었고, 진도대교도 여전하였지만 피곤에 지친 아내와 아이들은 차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쉽게 오기 어려운 곳이니 내려서 다리 위라도 올라가 보자고 꼬드겨도 요지부동이다.
전라우수영 답사라도 하며 조금 걷자고 하여도 움직이려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공룡박물관만 답사하기로 하고 해남으로 향했다.
울돌목에서 해남 사이에 있는 공룡박물관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의욕적으로 조성한 테마여행지였다.
박물관은 저물녁이어서인지 답사객은 많지 않았다.
박물관까지 오르는 길섶에는 백악기 공룡 조각들이 실제크기로 전시되고 있었고, 박물관 안에는 공룡화석과 다양한 볼거리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체험활동코스도 다양해서 관람객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았던 것도 큰 장점이었다.
단지 흠이라면 너무 구석진 벽지에 위치해서 한 번 찾아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인데 그것은 인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여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날씨는 어둑어둑해졌지만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는 공룡발자국 화석까지 돌아보고서야 답사를 끝냈다.
진도대교에서 해남까지는 40리가 넘는다.
도로확장이 잘 되어서 옛날보다 수월한 여행길이었지만 도시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계획에는 대흥사 입구나 땅끝마을에서 숙박을 하고 싶었지만 짧은 겨울 해는 우리의 계획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저녁이나 푸짐하게 먹자는 마음에 해남 입구 ‘진양식당’에 들어갔다.
해남에는 한정식으로 천일식당이 가장 유명했지만 값이 너무 비싸서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선택한 곳이 진양식당인데 값은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젓갈을 비롯하여 해산물이 풍부하고 충실하여 만족스러웠다.
저녁을 먹으면서 대흥사 입구 유선여관에서 숙박하는 문제로 아내와 상의하였다.
유선여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도 등장하여 주목을 끌었으며, 풍광이 수려하고 전통 한옥을 체험할 수 있어 꼭 한 번 숙박할만한 집이다.
아내도 동의해서 저녁을 물린 뒤 유선여관에 전화를 하여 방을 하나 부탁하였다.
그랬더니 문간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유선여관을 포기하고 땅끝마을로 길을 잡았다.
땅끝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해떨어진 밤길은 칠흙 같았고 길도 4차선에서 갑자기 2차선으로 줄어들어 혼란스러웠다.
더구나 도로에는 지나다니는 차가 한 대도 없는데다 이정표조차 보이지 않아 조바심을 태웠다.
내가 블랙 나이트같은 환청을 보며 당혹해하자 당장 아이들이 반응하였다.
큰 아이 은채는 가만히 있었지만 아직 어린 진헌이는 연신
아빠, 괜찮아요?
혹시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니예요?
우리가 잠잘 집이 안 보여요? 라고 물으며 안절부절하였다.
진헌이의 불안증은 여관방에 들어가서도 이어졌다.
피곤에 지친 나는 잠이 들었지만 진헌이는 밤새 뒤척이며 불안해하더라는 것이었다.
불안하게 하룻밤을 자고 난 셋째 날 아침,
우리는 아침을 간단히 때운 뒤 땅끝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 오르는 길을 가팔랐지만 정상 근처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어서 비교적 수월하게 당도하였다.
주차장에 내려 다도해를 감상하며 땅끝 전망대까지 걸어갔다.
전망대는 10여 년 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땅끝’이라고 쓴 표지석이 우리는 맞이하는 것도 여전하였다.
전망대를 오르니 흐릿한 바다 사이로 다도해의 풍광이 펼쳐졌다.
땅끝마을 앞 김양식장에서 김을 채취하고 있는 풍경도 눈에 익었다.
아내와 나는 결혼 초에 여행하였던 여수 향일암의 저녁을 이야기하였다.
자동차도 없이 후여후여 기차와 버스를 타고 도착했던 여수 돌산,
아마 돌산대교를 걸어서 건넜었지!
향일암 아래에서 돌산 갓김치에 늦은 점심을 먹었고.
아, 그러고 보니 벌써 15년 전 이야기다.
15년의 간극만큼 우리는 많이 변했다.
양손엔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고,
내 귀밑머리는 희끗희끗하고,
아내는....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상념에 젖어 이야기를 나누며 전망대 계단을 내려왔다.
땅끝
단 두 글자뿐이지만
자꾸만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게 하는 표석 앞에서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인생의 끝에 서더라도 당당하자.
쪽팔리지 말자!
가슴속에 소리를 지르면서.
땅끝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해남 대흥사를 버리고 강진 다산초당으로 향하였다.
구불구불한 구룡포 바닷길,
비포장 도로를 한 시간 여를 달려 답사하였던 다산초당.
겨울 구룡포 바닷가에는 갈대도 무성하였지.
신경림 시인이던가,
겨울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소리를 민중들의 숨죽인 울음으로 표현했던 시인.
하지만 이제는 정겨운 비포장도로도, 수백만평 드넓은 갈대밭도 그리운 옛 추억이 되었다.
구룡포 드넓은 갯벌은 간척되었고, 간척된 흙더미 속으로 갈대는 숨어버렸으니.
우리가족은 평소 다니던 귤동마을 코스를 버리고 다산기념관에 주차를 한 뒤 작은 언덕빼기를 걸어 다산초당에 오르는 길을 택하였다.
귤동마을로 넘어가는 언덕빼기에는 야생차와 은사시나무 숲이 정겹다.
아내와 나는 1970년대 영화에서처럼 은사시나무 숲에서 재롱을 떨었고, 아파트 아래층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아이들은 은사시나무 숲 사이를 뛰어다니며 마음껏 놀았다.
다산초당 초입에는 귤동마을 할머니 한 분이 한과보따리를 펼쳐놓고 있었다.
광주 사는 딸네 집에 주려고 만들었는데 너무 많아 팔러 나왔다고 하였다.
추운 겨울에 떨고 앉아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5천원 어치를 달라고 했더니 골고루 한 꾸러미 집어주었다.
한과는 너무 맛이 있었다.
적당히 바삭하고, 적당히 달콤하고, 적당히 향기롭게 만들기가 가장 어렵다는 한과를 어쩌면 이리도 잘 만들었는지!
우리는 대나무 숲길을 오르며 할머니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과를 나눠먹었다.
가족들과 여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시간의 제약없이 마음대로 노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한적한 다산동암 마루에 앉아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여유로움을 즐겼다.
동암 뒤편의 석간수로 목도 축이고, ‘정석’이라고 쓰인 바위에 올라 꼼꼼히 살피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아내를 동암에 앉혀두고 여유롭게 다산초당을 한 바퀴 돌아 구룡포를 감상하고 돌아왔더니 진헌이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분명 좀 전까지 다른 아이들과 뛰어 노는 것을 보았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구석구석을 찾아봐도 없어 아무래도 백련사로 넘어가는 일행과 함께 간 것으로 짐작하고는 정신없이 산 위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 근처까지 갔는데도 진헌이는 보이지 않았다.
가슴에서는 덜컥 하는 소리가 들리며 정신이 아득해오고, 머리 속에서는 벼라 별 생각이 요동친다.
마침 산 너머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있어 진헌이 같은 아이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조금 전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휴우~~ 그 때의 안도감이라니.
주저앉을 것 같은 무릎을 곧추 세우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저 멀리에서 진헌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내려오는 아이를 큰 소리로 나무랐다.
사람 마음은 참 모를 일이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는 제발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해달라고 간절히 기원하던 마음이 어째서 아이를 보는 순간 호통으로 변할까?
나의 복잡한 심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헌이는 아빠가 왜 오버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초당으로 내려왔더니 불안함에 어쩔줄 몰라하던 아내가 은채와 함께 달려왔다.
역시 아내의 반응도 마찬가지.
진헌이는 우리가 내려올 때까지 정약용선생이 차를 다려먹던 바위 앞에서 손들고 벌을 섰다.
다산초당 입구에는 전에 없던 찻집과 식당이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 강진군수 윤동환씨가 운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차를 한 봉지 산 뒤 차 한 잔을 얻어 마셨다.
강진 야생차라고 하는데 향기롭고 부드럽다.
윤군수님께 강진에서 점심을 먹을 건데 요즘 ‘해태식당’ 맛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해태식당도 좋지만 지역 사람들은 명동식당이나 청기와식당도 많이 이용한다고 추천하였다.
결국 윤군수님의 주선으로 청기와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청기와식당은 공설운동장 옆에 있었다.
식당은 큰 종가집같은 기와집에 널다란 마당이 인상적이었다.
점심 때가 조금 지나서인지 방안에서는 수 십 가지의 반찬그릇이 올려진 큰 교자상들이 아주머니 두 분의 손에 들려 실려 나오고 있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방안에 들어가서 길게 누웠다.
참 평온하고 편안하다.
잠시 후 점심상이 들어왔다.
음식은 육해공군이 고루 갖춰 있었고, 특히 해산물이 많았다.
모든 음식이 정갈하고 품격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산해진미가 상 위에 올려졌지만 진헌가 먹을 만한 음식은 많지 않았다.
덕분에 횡재한 것은 먹성 좋은 은채였다.
은채는 이것저것 맛을 보며 품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하게 점심상을 물린 뒤 향후 여행계획을 상의하였다.
아내와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여행경험이 적은 진헌이가 여행에 두려움을 갖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고 하였다.
모처럼의 가족여행인데 돌아서기는 너무 아쉬웠지만 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서천 고향집으로 향하였다.
다시 영산강을 건너 목포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진입하니 아내와 아이들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서천까지 돌아오는 4시간 여를 아내와 아이들은 내내 잠을 잤다.
여행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경험하는 것이라더니,
2박 3일 동안 긴장하고 피곤하였나보다. (2008.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