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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두부와 비지>의 줄거리:
콩으로 두부를 만들 때 반드시 콩비지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 때 두부를 주산물이라 하고 콩비지를 부산물이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주산물과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산물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 믿음은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믿는다면 반드시 부산물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부산물은 무엇일까요?
두부와 비지
(막11:25~26)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 (없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두부와 비지>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혹시 아시겠습니다만 제가 말씀을 전하는 이곳 강릉은 두부로 유명합니다.
유명한 것만큼 과연 그렇게 두부로 만든 음식이 다양하고 맛이 있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없어요.
제가 원래 두부를 좋아하지만 타지에서 오신 분들 손님들에게 ‘두부 먹으러 갑시다!’ 이렇게 선뜻 말씀을 드리기가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두부를 좋아해서 두부집을 자주 갑니다.
여러 집을 가보는데, 어떤 집은 문 앞에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지를 큰 다라에 담아놓고 비닐을 옆에 두고 마음대로 떠가도록 제공을 합니다.
그러면 그 비지를 갖고 와서 김치와 돼지고기를 넣고 찌개를 끓여먹으면 참 맛있어요.
어떨 때는 그 식당에서 먹는 두부찌개보다 집에 와서 끓여먹는 비지찌개가 더 맛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지를 제공한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비지를 제공하는 식당은 비지를 제공하지 않는 식당에 비해서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면, 두부를 자기 집에서 직접 만든다는 겁니다.
콩으로 두부를 만들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부산물이 바로 비지입니다.
그러므로 비지를 제공하는 집은 반드시 그 집에서 두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22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을 때 두부와 비지처럼 주산물이 있고 부산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주산물이 분명하게 내게서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비지가 나오게 돼있습니다.
부산물이 보이게 돼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저 사람이 제대로 믿는가 안 믿는가 그 자체, 주산물을 확인할 수는 없어요.
모든 식당에서 두부를 직접 만드는지 다른 데서 갖고 오는지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강릉에 초당두부라고 하는 아주 맛있는 두부를 만드는 큰 공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공장에서 가져다 쓰는지 자기네 집에서 만들어내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비지가 보이잖아요? 그러면 반드시 두부를 그 식당에서 직접 만들어내는 증거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바로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믿음의 부산물이 보이면 ‘아, 저 사람은 제대로 믿고 있구나!’ 확증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스스로 내가 지금 믿음의 부산물들이 보이는가, 비지가 보이나, 콩비지가 보이면 두부가 내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고, 믿음의 부산물이 안 보이면 주산물인 두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자체에 문제가 생긴 거라 이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주산물은 뭡니까?
어제 말씀 드렸어요, 오늘 말씀과 이어지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짧게 반복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할 때 믿으라는 것은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 마음이 닿는 게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두부와 같은 주산물이 뭡니까?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마음이 하나님께 닿을 때 이 믿음의 행위에 의해서 생기는 주산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 자신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 우리가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이미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하나님께로 보내지는 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하나님께로 보내진 마음이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아버지를 느끼고 하나님께 닿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기운을 받게 됩니다.
천국의 기운을 받게 되고 그래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천국이 앞선 현실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돈 못 벌고 사업이 안 되는 상황보다도 천국이 먼저 앞선 현실이 되기 때문에 그 천국을 얻는 게 믿음의 주산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얻는 게 주산물이에요.
자, 그러면 마음을 드리는 게 믿음이고 마음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얻게 되는 게 믿음의 주산물이면 부산물은 뭡니까?
여러분,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져서 하나님을 얻게 되면 천국을 우리 마음이 성령님을 통해 느끼게 되면 사실 이 세상에서 살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마음이 천국을 얻어서 죽은 사람은 그 사람과 연관된 이 세상의 삶을 하나님께서 다 잘 이끌어 가실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 아내, 내 자식, 내 가정, 내 사업 남겨두고 간다고 걱정하지 말고 그냥 죽으면 돼요.
그러면 그보다 더 한 복이 없어요, 최고의 복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려두십니다.
하나님을 얻고 천국을 얻은 사람의 삶이 아직도 이 땅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할 때 이 땅의 삶 전체가 다 부산물의 영역이 됩니다.
이 삶 자체가 부산물인 거예요.
살 필요가 없어요, 이건 주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두부요, 천국이 두부입니다.
그것 얻었으면 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려두십니다, 부산물이에요.
이 부산물의 삶, 이 지구 위에서의 삶 자체가 부산물인데 이 부산물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어제 말한, 첫 번째가 희노애락, 두 번째 의기투합, 세 번째가 바로 오늘 읽은 용서라는 겁니다.
희노애락의 문제, 하나님께 마음이 가 닿아있고 천국에 마음이 가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서 나타나는 모든 감정의 다양한 변화가 오직 하나님이 이유여야 된다는 것이에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내 마음에서 나타나는 감정들의 다양한 변화의 이유가 뭐냐 하면 다 하나님이여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부산물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지금 화가 나있는가,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가?
왜 우리가 희노애락이라는 얘기를 합니까?
본문에 보면 그런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와 있는 것 같은데 왜 자꾸 희노애락 얘기를 하느냐?
여러분,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예수님의 감정이 가장 격하게 표현된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과 연관되어 있는 성전정화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감정이 희노애락 중의 노(怒), 분노로서 이토록 과격하게 표현된 사건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예수님의 감정이 격하게 표현됩니까?
하나님의 집, 아버지의 집,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감정의 변화의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애쓰다가 안됐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이 안됐고 예수님의 사업이 안됐기 때문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예수님이 화내시고 걱정하시고 근심하시고 기뻐하시는 모든 이유가 다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의 첫 번째 부산물로 우리가 캐치한 것이지요, 예수님의 성전정화의 모습을 보고.
그리고 두 번째가 의기투합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잡아끄는 좋은 것들, 가치 있는 것들, 사랑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내 마음을 떼 내야 돼요.
그러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겠습니까?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을 떼 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이 있고 하나님과 천국을 내가 얻었습니다.
그 떼 내는 과정을 주님의 십자가사건이 해주는 거예요.
그렇죠?
주님과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동안에 내 마음이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 안에서 이 세상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옵니다.
그 다음날 또 붙어요.
그러니까 날마다 죽는다고 얘기하는 거죠?
그렇게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그러면 사업에 대해서 마음이 떨어져 나오고, 자식에 대해서 떨어져 나오고, 내 건강에 대해서도 내 마음이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러면 건강에 대해서 내 생각이 없어지는 거예요.
사업에 대해서 내 생각이 있을 수가 없어요, 마음이 떨어져 나왔으니까.
자식의 미래에 대해서 내 생각이 있을 수 없죠, 떨어져 나왔으니까.
이때 어떻게 됩니까?
부산물이 나타납니다.
부산물이 뭐냐 하면 내가 마음을 떼었기 때문에 생각도 소원도 계획도 없는 내 사업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소원이 있는데, 그것이 내 마음에 전달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의기투합이 되는 거예요.
의심이 뭐라고 했지요? ‘디아 크리테’, 두 가지의 결정이 의심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따로 있고 내 사업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따로 있는데 나는 나대로 따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내 계획을.
이게 바로 의심의 현장이라는 거예요.
의심의 실체라는 겁니다, 두 가지 생각, 두 가지 결정.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느라고 사업에 대해서 마음을 떼 냈습니다, 내 건강에 대해서 마음을 떼 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 사업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만이 내 마음에 전달되고 오직 하나의 결정만이 남는 거예요.
그 결정이 산을 들어서 바다에 빠지라는 것이라면 그대로 된다 이겁니다.
이게 바로 부산물이에요, 의기투합.
하나님과의 의기투합.
세 번째 부산물이 뭡니까?
‘무조건 용서’예요.
모든 나를 향한 대적들,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 내 원수들, 무조건 용서한다고 하는 이 용서가 세 번째 부산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행복한 이 희노애락의 이유, 이 희노애락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부산물이 나타나지 않아도 믿음이 없는 것이고,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진 게 아니고, 의기투합의 부산물이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 것이 아니고, 용서가 나타나지 않아도, 용서라는 콩비지가 보이지 않아도 두부라는 하나님이라는 주산물을 내 마음이 얻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얻고 하나님을 얻었다면 반드시 용서가 나타나야 된다는 거예요.
아직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천국이 안 나타나요.
쉽게 말하면, 남편을 보면서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면 주산물인 두부, 하나님과 천국이 내 마음에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왜 그럴까요?
스테반이 용서한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하늘이 열려서 보좌에 앉으신 분과 보좌 우편에 계신 승천하신 주님을 스테반집사님이 보시잖아요? 마음이 하늘에 가 닿았다는 얘기에요.
어떻게?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우리가 스테반집사님 돌아가실 때처럼 충만하지는 않아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천국을 느끼고 확증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천국에 가 닿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몸을 돌로 칩니다.
그때 용서하십니다.
참으로 극단적인 상황이에요, 용서가 가능하겠습니까?
아니, 친구가 실수로 내 손가락을 망치로 쳐도 주먹이 나갈 판인데, 돌로 지금 자기 몸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하십니다, 왜 용서합니까?
몸에서 마음이 떨어져 나와 있기 때문에 몸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가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렇게 많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하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했던 이유는 그 몸에서부터 마음이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에요.
초대교회에 유무상통이 이루어집니다.
내 돈에서 마음이 떨어져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 유무상통의 상태에 마음이 있을 때, 마음이 내 돈과 내 재물에서 떨어져 나와서 하나님께 가있을 때, 믿음의 주산물인 하나님을 얻는 상태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을 때 누가 내 돈을 사기 쳤다 그러면 어떨까요?
내 마음이 내 돈에 가있지 않기 때문에 그 돈을 갖고 싶다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겨가면서 사기 치는 그 사람을 보면 불쌍한 거예요.
내 마음이 돈에 가있으면 이건 죽일 놈입니다.
용서가 안 되지요, 어떻게 번 돈인데? 그 돈 있으면 내 자식에게 이것도 해줄 수 있고 저것도 해줄 수 있고… 용서 못하지요, 마음이 돈에 가있으면.
그러면 분노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마음이 거기서 떨어져 나와 하나님께 가있었어요.
하나님께 가있는 동안에 누가 내 돈을 사기 칩니다.
‘사기까지 치면서 살아야 되나!’ 불쌍해지는 거예요.
용서가 나타나는 겁니다.
사람들이 용서를 얘기할 때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두 가지 종류의 용서가 있더라고요.
목사님들께서 설교하시는 중에 자주 들을 수 있는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카네기가 말한 거라고 하는데,
‘사랑은 용서에서 시작한다’
습관적인 탈영병이 하나 있었는데 제독이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러면서 제독이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내가 너를 나무라도 보았고, 채찍으로 때려도 보았고, 상담도 해봤고, 탈영하는 습관을 고치게 하기 위해서 모든 걸 다 했는데 넌 못 고쳤다, 그러므로 넌 사형 당해야 한다’
이때 이 말을 듣고 있던 부관이 ‘각하, 각하께서 한 가지 안 한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용서를 안 해보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제독이 무조건 용서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습관적인 탈영병이 변화되었다.
아, 이 얘기 제가 예화로 들은 게 서너 번은 될 거예요.
그 당사자를 봐서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프라 윈프리가 이런 얘기를 했더라고요.
‘용서란 상대방을 위한 면죄부를 주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맞지요?
‘내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다, 과거에 매달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결코 나를 위한 일이 아니다, 용서하라! 나 자신을 위해!’
달라이라마가 똑같은 뜻의 이야기를 했어요.
‘용서는 단지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베풂이자 사랑이다.’
나를 위해 용서하자는 거예요, 내가 괴로우니까.
누굴 미워하고 있다 보면 위장병이 생기고 간이 나빠지고 스트레스 받고 불행해지니까 나를 위해서 용서하자는 거예요.
거기에 매달려 있으면 창조적으로 앞으로 전진할 수 없으니까, 나를 위해서.
그리고 카네기가 말한 제독의 예화 속에서는 그 당사자를 위해서.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용서는 용서를 위한 용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한 용서도 당사자를 위한 용서도 아닙니다.
단지 내 마음이 하나님께 가있다 보니까 내 마음은 그 사람이 아무리 내 돈을 사기 치고, 나를 해치고, 내 명예를 훼손시켜도 내 마음은 하나님을 얻었기 때문에 내가 잃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지금 죽어도 영광이고, 지금 죽어도 행복이고, 지금 죽어도 복 중의 가장 큰 복인데, 천국을 얻고 아버지를 얻는 건데, 도대체 나를 해친다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 마음이 다 하늘나라에 가있어요.
단지 하늘나라에 가서 하늘을 누리고 두부이신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마음으로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천국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 세상의 것들로 배불리겠다고 저렇게 내 돈을 사기 치고 있고, 저렇게 자기가 올라서겠다고 나를 짓밟고 있구나!’ 하고 불쌍한 마음이 생긴다는 겁니다.
나를 위한 목적으로, 그 사람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 용서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두었더니, 하나님이 좋아서 마음을 온통 내가 이 땅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마음을 떼서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을 갖게 되었고 천국을 갖게 되었고, 그런 마음으로 나의 원수 짓을 하는 사람을 보니 그저 불쌍할 뿐이라는 얘기였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게 잘못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이라는 이 말은 사실은 앞에서 나온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용서가 안 된다고 한다면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지 않는다’는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허물을 사하여 주신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깨끗해져서 하나님께 가 닿아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셨다는 겁니다.
내 허물을 사하여 주신다는 건 나 스스로가 깨끗해지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내가 깨끗해지는 이유는 하나님께 가 닿을 내 마음이 더러우면 안 되니까.
그래서 용서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주산물은 내 마음이 하나님을 갖는 것이고 천국을 갖는 것이고 천국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이 세상의 삶은 다 부산물의 삶이 됩니다.
그 부산물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하나님 때문에 나타나는 희로애락의 부산물, 하나님과 의기투합하는 부산물, 하나님께 마음이 가있기 때문에 나의 모든 이 세상에서의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는 부산물, 이 콩비지 세 가지가 보여야 하나님을 가졌다는 두부를 직접 만드는 가게라는 것을 확증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땅에서의 삶에서 세 가지 모양의 콩비지가 우리 스스로에게도 날마다 확인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사람들이 바라는것이 주님이 아니라는것 왜냐면 스스로 살지 못하고
주인을 모신다는 부담이죠 순두부는 못 먹어도 좋우니 비지도 없어도
상관없으니 내 의로 살곘다는 심사입니다 마귀가 속이는 거짓말을
믿는답니다